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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Shaw, William E.(1890-1967, M) / Shaw, Adeline(1875-1971, M)

닉네임
경온정
등록일
2019-12-13 16:15:19
조회수
956
첨부파일
 내한선교사 3-6 B113 경온정.hwp (2420736 Byte)
내한선교사/ B113/ Shaw.William.E/ 3-6/ 2017210338/경온정


I. 기본사항

1. 이름: Shaw, William E / 쇼 / 한국명: 서위렴(徐偉廉)
2. 생일연도: 1890.8.22.-1967.10.05.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감리회
4. 관련기관/교회: 광성고등학교, 목원대학교, 육군 군종실
5. 한국선교기간: 1921.10.-1941,1947-1961
5. 학력:
1916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 졸업1921 콜럼비아대학교 대학원을 졸업(M.A.), 한국선교사로 내한1927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1950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 명예신학박사 학위취득
6. 연표1890. 8.22. 미국 시카고에서 출생1918. 제 1차 세계대전중 미육군 군목으로 위임, 유럽전선에 종군함1921. 3. 콜럼비아대학교 대학원을 졸업(M.A.),한국선교사로 내한1921-1926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에서 활동1927-1937년 평북 영변, 만주, 황해도 해주지방등지에서 교육 및 전도사업에 몰두함1938. 무어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 설립,인재배출,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단장으로 활동1941. 일제에 의해 강제출국
1942-1945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 교수 신학부장 역임
1945-1947 필리핀 주재 선교사로 활동 1947. 다시 내한, 충남 대전에서 목자관 창설
1950. 6.26.미국 교역자 구호에 힘씀, 특히 한국군 군종창설에 크게 기여함.
1950. 9. 아들(W. H. shaw:1923-1950) 미해병으로 서울에서 전사
1954-1960 감리교대전신학원 신약교수
1961 선교사은퇴, 귀국
1967.10.5. 별세

7. 가족사항부인: Mrs. William E. Adeline (1875-1971)아들: William. H. Shaw(1922-1950)
II. 선교사 소개: 쇼(Shaw, William E, 1890-1967)

1.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오다
아버지 윌리엄 얼 쇼 선교사는 1890년 8월 22일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원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유럽 전선에서 군목으로 종군했는데 의무병으로 입대하여 군목으로 제대한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1년 아내 아델린(1919년 결혼)과 함께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를 자원하여 우리나라에 온다.
전권위원들은1930년 11월 18일 서울에 모여 조선감리교합동과 조직에대한 성명서를 작성하고 결의를 선언했다.
“조선에 있는 남북 감리교회가 통합하려는 운동은 미국에 있는 선교부나 조선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배척코저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조선교회가 40세나 되었은즉 장성자의 책임과 의무와 직분을 감당코저 하는 것 뿐이며, 따라서 조선을 본위로한 교회를 조직하지 아니하고는 남북교회가 통합하여 1개의 단체가 될 수 없음이다. 조선에 기독교가 영구히 조직되어 조선문화에 공헌이 되고 인민의 영적 생활을 지배하려면 먼저 조선적 기독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요. 또 조선인들이 책임을 담당하여야 될 것이다.”
이 청원서는 1928년 미감리회 총회와 1930년 남감리회 총회에서 각각 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미국의 두 감리교회와 한국의 두 감리교회에서 합동을 위한전권위원을 각각 5명씩 선출하였고 또한 특선위원 11명을 합친 31명에게 합동사업을 추진케 했다. 미감리교회 미국총회대표는 웰취감독, 니콜슨 감독 쇼우목사, 서더랜드 목사, 아반 여사이다.
그래서 쇼선교사가 감리교회 대표로 한국에 활동을 하게된다. 쇼선교사는 1921년 한국선교사로 평양에 부임하였다. 그의 첫 사역은 북감리교 평양스테이션에서 운영했던 광성고등보통학교(현 광성고교)에서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는 여기서 1926년까지 활동하였다. 그의 아내 아델린은 숭덕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자료에 따르면 다음과같다.
“아침 9시에 W. E. Shaw에 의해 235 ‘신뢰와 수도원’ 노래와 함께 헌신적인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 뒤에 성소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안경녹이 기도로 이끌었다. ”
“강문호와 W. E. 쇼는 장로의 명령에 따라 선출된, 정식으로 인가된, 학위과정을 졸업하다.
그가 없는 동안 쇼는 한국에서 교육적 방법뿐 아니라 한국인과 일본인 선생님들과 함께
더 가까워지는 아주 좋은 기회를 즐기면서 교장으로 일했다.“
광성고등학교는 평양에 있는 남자고등학교로 자부심을 갖고있다. 콜롬비아에서 M.A.학위를 마친 김득수가 거의 학교의 생을 같이하여 10년동안 교장이었다. 한국에 고등학교가 없었는데 이는 과히 손꼽히는 기록이었다. 1918년 사립 광성고등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21년 10월 5일 평양 경창리에 교사 및 기숙사 준공을 하였는데 당시 평양부내 건물로는 가장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한국에서 6번째로 오래된 학교이다.

윌리엄이 쓴 글에 의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 거룩하심, 그의 열정과 이끄심이 가득한 사역이었다고 고백한다. 위와같은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윌리엄쇼는 한국에서의 사역들을 헌신적으로 기쁨으로 감당했음을 알 수 가 있다.
미감리회 제 17회 연호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1924년9월에 모일 때 9월 19일 누가복음 9장 57절을 본문으로 “천국에 합당한 일꾼이 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여 연회원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9월 24일 주일에는 장로목사안수를 위렌감독에게 받았다. 광성 고등 보통학교에서 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선교부 회계서무도 맡아 수고하였다. 1926년 6월 연회가 끝난뒤 7월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1927년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다시 방한하여 1927년부터 1937년까지 10년 동안 활동하였다. 1927년 다시 연회에서 평북 영변지방 감리사로 임명받아 영변, 만주, 해주지방 등지에서 지방전도사업을 위해 수고하였으며 부인은 숭덕여학교에서 교육에 헌신하였다. 1929년 6월 연회의 영변지방 감리사의 보고에 의하면 1928년 10월부터 1929년 5월까지 순행일자 1백 54일동안 영변, 만주, 해주지방까지 사경회, 전도집회등 지방순행 2회, 전도는 70회, 사경회 시간이 50시간에 달하였다고 한다. 1932년 3월부터 해주지방 감리사로 지방교회 행정을 맡아 수고하면서 신창지방 지방목사의 전도사업도 아울러 감당하다 1934년 5월에 귀국했다가 1935년 4월에 다시 와서 해주지방 교육 및 전도사업에 힘을 썼다.1938년 봄부터는 평양에서 동료인 제임스 무어(James Z. Moore) 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창설하여 관서지역의 교역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평양 보이스카우트 연맹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2. 일본으로부터 강제추방 당하다

그러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후 일본으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았다. 일본은 각 선교부 대표들을 소집해놓고 강연을 한다.
“대체로 기독교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이 사업을 계속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행정적인 면에서 교회나 학교 및 기독교 기관에 관련해 일해서는 안되고 일본 지도자들과 협력해서 해야한다는 전제가 있어야한다. 그렇지만 선교사들 중에 일본 교회들을 위해 공헌할 것이 더 없다고 여기거나 남아있는 것이 일본 형제들에게 방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되는 자들은 얼마든지 돌아가도 좋다. 그런 선교사들에게 남아 있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친절이 아닐 것이다. ”
이것은 권면이상의 협박이었다. 그 무렵 미국 총영사의 선교사들에 대한 귀국 권유와 미국 선교부로부터 귀국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그리하여 한국에 있던 각 선교부 선교사들은 재산관리를 위한 소수의 인원만 남기로 하고 1940년 11월 16일 미국에서 보내온 송환선으로 한국을 떠났다. 인천항을 떠난 미국 선교사 수는 219명이었다. 감리교회 선교사로는 사워, 쇼, 앤더슨, 드마리, 스나이더, 모어 등 6명만 남고 나머지 108명이 귀국했다.
그래서 쇼는 선교회 재정처리등 잔무를 수행하고 동료선교사 중 맨 나중에 한국을 떠났다.
1942-45년까지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 교수로 신학부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부터 필리핀에 파송되어 1947년까지 선교사 활동을 하다가 그해 내한하였다. 1950년에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취득하였다.

3. 한국군의 군종제도를 창설하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한국인들에 대해 잘 알았던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교역자들의 피난을 도왔으며 주한미군 군목으로 자원입대하여 군목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연합군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일반인들로부터 용공 분자들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윌리엄 얼 쇼 목사는 피난민들이 용공 분자로 몰려 학살되는 일이 없도록 힘썼다고 한다. 미군 극동 사령부 군종부장 베넷 군목과 각 사단 군종 참모들과 협의 끝에 한국군의 군종제도창설을 건의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미국인 선교사, 감리교 윌리엄쇼와 로마 카톨릭 조지 M.캐롤은 보조사제로서 여덟 번째 군단에 부착됐다. 록사제군단을 창설하기에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

“미국 여덟번째 두 사제, 로마 카톨릭 조지 M 캐롤과 감리교도 선교사 윌림엄쇼는 로카에서 사제군단을 창설하여 연합하여 일했다. 로카 사제는 1951년 4월 11일에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쇼목사와 베넷 군목 등 수명의 미군 군목들이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 국무총리 등을 예방하였고 1950년 9월 5일에는 쇼 목사와 가톨릭 메리놀선교회의 캐롤 신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고 군종창설 계획의 실현을 보았다. 그해 12월 21일 대한민국 국방신 제 29호와 1951년 2월 7일 육본 일반명령 제 31호로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를 설치하고 대위 김득삼 목사가 과장으로 취임함으로 육군 군종제도를 창설하였다.
작성일:2019-12-13 16:15:19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