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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Appenzeller, Henry Gerhart(1858-1902, M) / Appenzeller, Ella Dodge

닉네임
신경철
등록일
2019-12-13 16:20:47
조회수
799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A003_김진호 신경철.hwp (1491456 Byte)
내한선교사 / A003 / Appenzeller, Henry Gerhart(1858-1902, M) / Appenzeller, Ella Dodge


Ⅰ. 기본사항

1. 이름 : Appenzeller, Henry Gerhart / 아펜젤러 / 한국명 : 아편설라(亞扁薛羅)
2. 생물연도 : 1858.2.6. - 1902.6.11.
3. 출신 및 소속 : 미국, 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 1885.4.5. ~ 1902.6.11.
5. 연표
1858.2.6. 미국 펜실베니아주 서더튼 출생
1876. 웨스트체스터 사범학교에 진학
1876.10.6. 풀턴의 설교를 듣던 가운데 영적 회심
1878. 프랭클린앤드마샬대학에 진학
1879. 감리교로 이적
1882. 드루신학교에 진학
1883.10.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됨
1884. 한국 선교사로 임명
1884.12.17. 닷지(Ella Dodge)와 결혼
1885.2.27. 일본에 도착, 한달동안 박영호에게 한국어 공부
1885.4.5. 미감리회 선교사로 제물포항에 도착,
1885.7.19. 서울에 들어와 전도, 교리서 번역 활동
1885.8.3. 배재학당 설립
1887.10.9. 벧엘예배당 설립, 첫 공중예배(->정동제일교회)
1887. 한국성서위원회 서기로 성서사업의 업무 관장
1888. 각 지방 순회전도, 삼문출판사 설립
1888. 배재학당 완공, 교장으로 근무
1890. 『한국성교서회』 창설(->대한기독교서회)
1893-1902. 한국성교서회 제2대 회장, 한국외국인연합교회 목사, 한국선교 관리자, 종로
서적공사 지배인, 외인묘지 설치 재무담당 등 역임
1895. 제물포지방 상주 책임자로 임명
1896. 독립협회 1주년 기념식에서 연설
1897. 엡윗청년회 조직, YMCA 운동 주도해 청년운동에 공헌
1897. 순한글 종교신문 <죠션크리스토인회보> 창간
1898. 투욱된 이승만 지원, 서재필 퇴거로 윤치호와 독립신문 편집
1900. 안식년으로 잠시 귀국, 미감리회 남부지방회 감리사로 임명받음
1902.6.11.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인천에서 목포로 항해중 침몰사고로 소천
6. 가족사항
부인 : Appenzeller, Ella Dodge
자녀 : 1남 3녀 1885년 장녀 Appenzeller, Alice Rebecca
1889년 장남 Appenzeller, Henry Dodge
1891년 차녀 Appenzeller, Ida Hannah
1893년 막내 딸 Appenzeller, Mary Ella

Ⅱ. 선교사소개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주 수더튼에서 기드온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와 마리아 게르하르트(Maria Gerhart)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독일개혁교회 교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메노나이트(Mennonite)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영어가 아닌 독일어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헨리 아펜젤러는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과 독일어 언어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랐다. 그는 또한 개혁교회의 기본신조인「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을 통해 훈련을 받았고, 14세에 스스로 신앙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1.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 기독교 선교의 토대를 마련

1877년 헨리 아펜젤러는 웨스터 체츠터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세 때인 1878년 독일계 미국 개혁교회 교육기관인 랭커스터의 프랭클린 앤 마셜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얼마 후 헨리 아펜젤러의 인생을 전환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무려 3년 동안이나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옮기는 문제를 고민하다가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1879년 감리교로 이적한 것이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882년부터 1885년 1월까지 약 3년 동안 뉴저지 주 매디슨에 소재한 감리교 드류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어려서 습득했던 개혁교회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웨슬리적인 신학을 습득하면서 점차 선교사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갔다. 그리고 신학교 재학시 1883년 10월 커네디컷 주의 하트포드에서 개최된 ‘전국신학교연맹' 주최 선교집회에 참석하여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결심을 약혼자 엘라 다지(Ella Dodge)에게 알려 동의를 얻었고 미감리교 해외선교부에 알렸다. 1884년 12월 17일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 해 말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 내한했다. 이후 17년 동안 한국에서 활발히 선교활동을 하다가,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항해하던 중 선박 침몰사고로 소천했다.

2. 교육선교사 아펜젤러

헨리 아펜젤러는 1885년 교육선교사로 내한했다. 이것은 조선종부가 학교와 병원시설을 갖고 싶어 하는 의도와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헨리 아펜젤러의 선교활동 중 두드러지는 것은 전도활동과 교육활동이다.
헨리 아펜젤러는 학생들이 자신의 정신적 전통을 충실하게 이해하는 기반 위에서 서구 근대지식을 수용하도록 하는 교양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전통의 기반이 무시된, 서구 문화의 일방적인 주입 교육이 가져올 한계와 모순을 예견하였던 것 같다. 또한, 1887년 새교사를 지으면서 실업부를 두어 학생들에게 노동의 숭고함을 고취시키고 가난한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다.
헨리 아펜젤러는 문서선교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문서를 통한 선교는 시공간 제약 없이 한 번에 복음을 전파하는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188년 1월 배재학당 교사로 내한한 올링거(F. Ohlinger)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문서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삼문출판사를 설립했다. 또한 성서번역사업에도 활발히 참여했고, 보급을 위해 대동서시라는 서점을 개설했다.

3. 배재학당의 설립

헨리 아펜젤러의 학교에는 1885년 8월부터 4명의 학생이 다녔지만, 본격적으로 학교 사업이 시작된 것은 1886년 4월경부터였다. 아펜젤러가 당시 미국 공사관의 무관이자 대리공사를 맡고 있던 폴크(George Foulk)를 통하여 고종(高宗)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자 고종이 이를 허락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887년 2월 고종이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는 집”이란 의미를 가진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다. 헨리 아펜젤러는 이 교명을 받아들고 일기에 “이것으로 우리는 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한국인 앞에 떳떳이 설자리를 마련한 셈”이라고 기록했다.
헨리 아펜젤러는 ‘전인교육’이라는 배재학당의 교육목적을 수립했다. 그는 배재학당을 대학으로 발전시킬 꿈도 갖고 있었지만, 감리교 지도자들의 교육사업에 대한 무관심과 동료선교사들의 견제로 좌절하게 된다. 그가 생각한 전인교육의 내용은 ‘지식’, ‘도덕’, ‘종교’ 교육이었다.
헨리 아펜젤러는 1887년에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벽돌로 르네상스식 1층 건물을 건축하였다. 배재학당은 그 해 6월 24일 방학 때까지 재적 43명, 실제 출석 학생 수는 38명, 잠깐 동안만 출석하고 명예롭게 떠난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1년간 63명이 등록하였다. 이 중 두 사람, 박중상과 한용경은 회개하고 세례받은 기독교인으로써 선교교육의 진정한 목표가 실천되고 있는 것이었다,
복음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강조했던 ‘유용한 인재는 구원받은 인간’이어야 함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4. 벧엘 예배당 설립

헨리 아펜젤러의 전도활동은 교회설립으로 연결된다. 그는 1887년 9월 내한한 워렌(Warren)감독의 격려에 힘입어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벧엘예배당’이라고 명명하고, 한국인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다. 그리고 10월 9일에 ‘벧엘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창립되었던 것이다.
‘벧엘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린 후 기념비적인 사건이 이어지게 된다. 1887년 10월 16일 한국 감리교 역사상 최초로 여성 세례자가 탄생되었는데, 주인공은 헨리 아펜젤러의 첫 권서인 최성균의 아내였다. 또 한 주 후에는 최초의 성찬식을 베풀었다. 이리하여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 감리교회는 1887년에 이르러 세례, 공중예배, 성찬식이 갖추어진 교회로 발전했다.

5. 자녀들 또한 한국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

그의 2세들은 일제시기 총독부의 통제와 지배 속에서 교육선교 활동을 전개해야 했다. 총독부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교육기관이 폐쇄되는 상황이었다. 또 재정적으로 많은 자원을 확충해야 했으며 총독부 법령에 따라 교과목을 구성해야 했다. 이러한 암울한 시기에 내한한 앨리스 아펜젤러와 다지 아펜젤러는 각각 이화와 배재라는 토대 위에서 한국 여성과 한국 남성을 위한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5.1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와 이화학당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1885년 11월 8일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 아이였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정동에 살면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조선 아이들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녀는 조선말뿐만 아니라 조선 관습과 음식에도 익숙하며, 자신의 고향을 ‘조선’이라고 생각했다.
유년시절을 부모와 함께 보낸 앨리스 아펜젤러는 교육을 받기 위해 11살이 되던 1899년, 중국 지푸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 들어갔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학업을 계속했다. 16세가 된 앨리스 아펜젤러는 1902년 9월 미국 랭커스터의 미스 스타스 스쿨에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졸업한 후 미국의 명문 사립대학인 웨슬리 대학(Wellesley College)에 입학하여 1909년 졸업했다. 1915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십펀 스쿨에서 6년간 독일어, 영어, 성경을 가르치며 교사로서의 경력을 쌓고 한국 땅을 밟았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교수로 봉사하다가, 1922년 10월 제6대 당장이 되었다. 1925년에는 이화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 후, 1940년 한국을 떠나 1945년 8월 한국이 해방되자 다시 이화로 돌아와 1946년 12월 이화의 명예총장이 되었다. 1950년 2월 20일 대학 채플에서 설교를 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갑자기 별세했다. 그녀의 나이 66세였으며 그녀의 바람대로 시신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묻혔다.

5.2 헨리 다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와 배재학당

다지 아펜젤러는 1889년 11월 6일 서대문구 정동 23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안식년을 맞아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아버지만 한국으로 들어오고 가족들은 본국에 체류했다. 1902년 아버지의 사망소식이 전해졌고 그의 나의 14세였다. 아펜젤러는 랭카스터 공립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1907년 프랭크린 앤 마셜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1911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1915년 드류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이어 1917년 뉴욕대학에서 M. A. 학위를 받았다. 학업을 마친 다지 아펜젤러는 1917년 9월 4일 미감리교 소속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아버지가 선교활동을 하던 한국으로 돌아왔다. 1918년 9월 4일 다지 아펜젤러는 아버지와 함께 사역한 1세대 선교사 노블의 딸, 루스 노블과 서울의 정동감리교회에서 결혼했다. 결혼 후 인천에서 선교활동을 이어가던 중, 1920년 그의 선친이 설립한 배재학당 제5대 교장으로 피선되었다. 이후 그는 배재학당 발전의 기틀을 다지며 1940년까지 근속했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어 강제출국을 당하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다지 아펜젤러는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였고, 194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감리교회로 옮겨 담임목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세계 많은 국가들에게 한국의 안타까운 실정을 알리며, 전쟁고아와 피난민, 과부 등을 위한 구제사업과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 또한 1952년 그가 섬기던 배재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NCC(National Council of Churches)의 협동총무로도 활동하면서 한국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53년 가을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본국으로 돌아가 감리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그 해 12월 1일 6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는 운명하기 전 “나는 한국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나의 뼈를 나의 고국이요, 사랑하는 한국 땅에 묻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6. 선교사 조사 후 느낀점

지금까지 헨리 아펜젤러의 일생과 그가 한국 선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한국 땅에서의 선교와 교육활동을 살펴보았다. 이 세 명의 아펜젤러는 공통적으로 전인교육, 민족의식 함양, 자치활동을 통한 사회봉사 정신의 함양을 목표로 한 교육활동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아펜젤러 가족의 교육선교 활동은 구한말과 일제시기의 관립학교들은 실행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일제시대 관립학교의 교육목적은 일본의 식민정책에 순응할 우민교육으로 단순한 기술인·기능인의 양성이었다. 이에 반해 이들은 자기와 세상을 사유할 수 있는 교양인으로서 학생들을 육성했으며, 그러한 책임적 주체로서 세상을 섬기는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고난 받는 민족의 현실을 타개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인재를 길러 내고자 했던 것이다. 아펜젤러 가족이 교육활동을 전개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의 한국 사립학교의 모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미션스쿨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학교들이 기독교 정신의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의 빛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 이념으로 설립된 많은 미션스쿨들이 아펜젤러 가족에 의해 전개된 기독교적 사학의 이념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있는지 되짚어봐야 할 시점인 것 같다. 경쟁위주의 입시교육을 목표로 하는 한국 교육의 현 시점에서 미션스쿨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미션스쿨에서도 교양인의 육성이라는 전인교육이나 이웃사랑이라는 기독교적인 종교교육과 그것이 환원된 사회봉사의 정신이 실종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 앞에, 아펜젤러 가족이 전개한 교육선교 사업은 우리에게 적지 않는 통찰을 제공한다 하겠다. 또한, 그들의 삶을 이 한국 땅에 바치면서까지 선교했던 정신과 사랑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작성일:2019-12-13 16:20:47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