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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Kilbourne, Ernest Albert(1865-1928, OMS)

닉네임
백형진
등록일
2019-12-13 16:48:36
조회수
125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 3-4_ B032_백형진.hwp (3603456 Byte)
내한선교사_B032_Ernest A Kilbourne_3학년 4반_ 백 형진


1.기본사항

1. 이름: Kilbourne, Ernest Albert(킬보른/한국명:길보륜/캐나다/OMS)
2. 생몰연도: 1865.3.13.-1928.4.15
3. 출신 및 소속: 미국, 동양선교회
4. 한국선교기간: 1921-1928.
5. 연표1865.3.13. 캐나다 온타리오주 돌리도 출생1899 무디성서학원 졸업1902 하나님의 교회 신학교에서 신학 수학. 목사안수.1902.8 카우만의 초청으로 일본 요코하마 도착. 도쿄에서 전도사업, 복음전도관, 성서학원 설립과 운영1905.11 동양선교회 설립. 부총재(카우만은 총재)로 취임1907 도쿄성서학원 졸업한 정빈, 김상준이 종로에 복음전도관 설치하자, 한국선교에 지대한 관심1921 한국선교 책임자로 내한, 성결교회로 정식 교회조직. 조선감독으로 취임, 교회조직 정비. 최고기관 고문회 설치하여 회장에 취임 1924 고문회 이사회로 개칭, 이사장에 취임.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원장으로 취임,교사건축.1922.11 교단 기관지<활천> 창간. 초대 사장으로 취임.1924.9 동지 카우만 소천, 동양선교회 총재로 부임, 귀국.1925 중국선교개척위해 중국에 부임, 중국선교를 아들(동양선교회 부총재)에게 맡기고 서울로 돌아옴. 성서학원 원장겸 활천사 사장으로, 교육, 문서선교. 건강악화로 귀국. 요양.1928.4.15. L.A에서 소천.
6. 가족사항아들: Kilbourne, Edwin L (동양선교회 부총재)손자: Kilbourne, Edwin W (동양선교회 부총재) 손자: Kilbourne, J. Elmer

2. 선교사소개.
1. 초기 생애와 회심.
어니스트 길보른은 1865년 3월 13일에 캐나다 온타리오의 나이아가라 폴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메소디스트를 추구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어니스트는 14세 코네스토가의 전신회사에 취직하여 전신기사가 되었다. 젊었을 때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꿈도 가졌었고 유럽을 일주하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여행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길보른에 대해 어니부부는 “그의 지평은 넓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얼마 후 젊은 가톨릭 신자인 한 소녀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어니스트는 회사동료였던 찰스와 레티 카우만의 영향을 받아 회심하게 된다. 찰스 카우만과 어니스트 길보른은 평생의 우정관계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동반관계가 된다.
길보른은 무디 성서학원 야간반에 등록하여 카우만 부부가 한 것처럼 시간제로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97년에는 길보른을 따라 그들은 회심한 전신기사들 가운데서 주일 오후예배를 드리고 동시에 다른 기사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한 단체를 조직했다. 이 모임은 후에 ‘전신기사선교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전신기사선교단은 나중에 극동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단 중의 하나인 동양선교회(OMS)의 기초가 되었다.

2. 동양선교회.
어네스트 알버트 길보른은 카우만과 함께 동양선교회(OMS)를 조직하여 일본과 한국과 중국의 선교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가 회심하고 선교에 헌신하게 된 것은 동료전신기사였던 카우만의 영향이 컸지만 선교를 가기 전에 그가 받았다는 ‘계시’는 그의 선교가 사람들의 설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환상 중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까지 연결된 아치형 큰 고속도로를 보았다. 그 다리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닿았고, 또 다시 한국으로부터 세 번째로 중국에 닿았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그 고속도로는 직접 천국에 연결되어진 것을 보았다.
1902년 8월 어니스트 길보른 가족은 요코하마 항에 도착했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일본의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에 어니스트 길보른의 지갑에 단돈 5달러만 남았지만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다. 카우만과 길보른은 나까다 쥬지와 함께 ‘동양선교회’를 설립하였는데, 그들의 근본 목적은 ‘성서적 성결’의 선포에 있었다. ‘동양선교회’라는 명칭이 처음 나온 것은 나까다 쥬지가 발행하는 <불의혀> 1905년 4월호이었지만, 동양선교회라는 명칭과 조직이 확정된 것은 1905년 11월이었다.
이 동양선교회는 웨슬리에서 시작한 성결운동이 미국을 통하여 아시아에 뿌리 내리게 된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중국에서도 동양선교회를 번창하게 하셨다. 1949년 죽의 장막이 덮칠 때까지, 세 성서학원을 통해 성령충만한 목사들과 전도사들을 배출하였다.
3. 순복음. 4중복음.
어니스트 길보른은 “한국과 순복음”이란 기고문을 통해서 순복음 전도를 강조하였다. 그는 한국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이미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저희에게 보내고 그들이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했다”는 말씀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길보른은 카우만을 통해 예수를 영접하고 회심했을 때도 이어서 성결의 은혜를 추구했으며, “나는 이 (성령)세례로 유전죄에서 깨끗함을 받았고 나의 마음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는 간증을 하게 되었고, 평생 이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성결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길보른의 입장은 급진적 성결 체험을 강조한다. 장로교의 교리는 이 땅에서의 완전 성화는 불가능함을 이야기 하며, 웨슬리를 따르는 감리교회의 경우에도 다수가 성화에 대한 입장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온건성을 견지한 데 비해, 급진적 성결운동은 인간 내부에 있는 부패성을 성령세례를 통하여 제거한다는 급진적 주장을 했다. 길보른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성결을 주장하는 편에 서 있다.

동양선교회는 알미니안 계통인 웨슬리안 체험주의에 입각한 복음주의 노선을 따르는 단체였다. 그리고 카우만과 길보른은 제레이드 C. 브래너가 쓴 <기독교연합선교회>란 책에서 심슨이 주장한 사중복음, 곧 중생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성결케하시는 그리스도, 치료케 하시는 그리스도,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이 사중복음을 전하게 된다.

4.한국 성결 교회에 끼친 영향.
길보른은 한국의 복음전도관의 설립을 후원했는데 한국에서 복음전도관은 1907년 5월 2일,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빈이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과 함께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어떤 선교사보다 길보른에게 빚을 진 것이 많은데, 1907년부터 한국을 가장 많이 방문하여 한국사역을 직접지휘 했으며, 1921년부터는 전적으로 한국에 거주하며 감독 겸 성서학원장으로 활동했고, 1924년 카우만의 뒤를 이어 동양선교회 총재로 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자 그의 아들 E.L 길보른이 한국사역을 맡았고,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그의 손자들인 에드윈 길보른이 서울신대 학장으로 엘마 길보른은 각종 사회사업으로 한국성결교회를 도왔다
주승민은 “길보른 선교사의 가문은 3대에 걸쳐 한국성결교회를 위해 헌신해온 은인의 가문 이라고 했다.

길보른 목사는 한국인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그것은 카우만이 받았던 사랑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카우만 선교사는 일본이나 미국에 많이 거주하여 한국인들에게는 소문으로만 알려졌으며 길보른은 한국에 있는 성도들과 5-6년간 동거 동락했다.
존 토마스 목사가 1919년 3월 기미년 독립운동의 피해조사차 강경교회에 시찰갔다가 첩자로 오인 받아 일경으로부터 구타당해 병을 얻게 되었고, 1920년 2월 귀국하였다. 이후 길보른 목사가 1921년 조선 감독의 임무를 겸직하여 내한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5년 동안 봉직하여 한국 성결교회의 발전에 충성하게 된다. 그리고 1924년 초대 동양선교회 총재 카우만의 소천으로 길보른 선교사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 제2대 총재에 부임했다.

5.활천의 창간.
길보른이 남긴 큰 발자취는 <활천>의 창간이다. 장로교회의 <신학지남>, 감리교의 <신학세계>와 같은 교단지를 위한 내규를 제정하고 명칭을 활천으로 정하여 1922년 11월 25일 창간호를 발간하게 된다. 어니스트 길보른은 활천사의 사장으로서 <활천>을 통해서 총64편에 해당하는 사설 혹은 논단의 글을 남겼다. 그의 저술의 주요관심은 성결의 복음과 사중복음의 전파에 있었으며(34편), 동시에 교역자의 자질과 목회 혹은 순복음전도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였고(28편) 그리고 성서학원의 설립에 대한 깊은 관심(2편)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 같은 문서선교의 관심과 실천은 자신이 젊은 시절 작가가 되기 위해 애썼던 자질의 발로였으며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즈음에도 문서 선교의 업적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6.나가는 말.
이명직 목사는 길보른의 선교사로서의 장점들을 다섯가지로 열거한다. 첫째로는 그는 야심이 없는 선교사이다. 둘째로는 온유한 스승이었다. 셋째는 구령의 대장이다. 넷째는 물건을 아껴쓰는 검소한 삶을 산 분이시다. 다섯째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교사의 삶을 보여준 분이시다.

감리교의 환경에서 자라서 순복음을 전하는 열정과 성결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찼던 어니스트 알버트 길보른은 성령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개혁주의 보수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최선의 노력을 하고 받은 은혜의 계시에 따르고자 일본과 한국 중국까지 온 인생을 쏟아 부어 헌신한 그의 삶은 배울 점이 참 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된다.

길보른은 소천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동양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는 자신이 은행계좌나 1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선교를 위해 수백만 달러가 자신의 손을 통해 보내졌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이었다. 그의 마지막 편지는 금식과 기도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작성일:2019-12-13 16:48:36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