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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b96_Reid, Wightman T_양기철

닉네임
양기쳘
등록일
2019-12-13 17:22:52
조회수
833
첨부파일
 한국교회사 13,23장 3학년 5반 2017210301 양기철.hwp (31744 Byte)
( Reid, Wightman T. 리드, 이위만, 李慰萬)
Ⅰ.기본사항
1. 이름: Reid, Wightman T
2. 출생:
3. 학력:
4. 경력:
-1907년 남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경기도 개성에서 의료선교사업 시작
-1907년 부친의 모금으로 버지니아주 아이비(W.C. Ivey)로부터 의연금 5천달라를 받아 개성에 아이비기념병원 설립
-1909년 100만인 구령운동 주도
-1950년 6.25사변 직전까지 한국에서 활동
5. 가족사항: Reid, Clarence Frederick(부), Reid, C. F(모), Reid, W. T.(부인)
6. 참고문헌 및 자료 : 기백 5권, 남감리교사, 감리교회사Ⅰ, EWM, 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내한선교사 총람,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아버지의 못단한 선교를 위해-개성남성병원”-기독교타임즈, ‘근대질병의료연표 개성남성병원’-한국사데이터베이스시스템, 성서와 설교 2018년 1월호 “황해북도: ‘여는 도(道)가 되기를!, 『신석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지다』, 신선구 연보1907년


Ⅱ.선교사소개( W.T.Reid,M.D. 이위만, 李慰萬)

1.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이위만(W.T.Reid,M.D.李慰萬) 의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07년부터 경기도 개성에서 의료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아버지 리드목사가 미국에서 벌인 모금운동으로 버지니아 주의 아이비(W.C.Ivey)에게 의연금 5천 달러를 기증받아 1907년 개성에 아이비기념병원을 설립하였고 이 병원을 중심으로 의료 활동을 하였다. 1909년에는 100만구령운동을 주도하는 등 의료사업과 복음사업에 전력하다가 192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6.25사변 직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선교사 약력중 한국에서의 활동기간이 불일치 하는 것을 발견
-> 감리교 인물사전에서는 리드선교사가 192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내한선교사 총람에서는 6.25사변까지 한국에서 활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료를 더 찾아보았으나 추가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두 기록에 의하면 약 22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사역 철수가 언제였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2.의료선교
1) 무스와 함께 동역함
무스는 한인 조사들과 함께 일하며 1908년 4월에 추천에서 새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9월에 완공, 병원을 열었는데, 거기에 리드 의사 부부(Dr. and Mrs Reed)가 와서 일했다.

2) 개성 남성병원(南星病院)
1899년 잠시 개성으로 파송받아 왔던 하디가 시작한 의료사업이 발전하여 남성병원이 되었다. 1902년부터 병원 건립을 추진해 오던 중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독지가 아이비(W.C.Ivey)의 회사금을 얻어 1907년에 아이비 기념병원을 지었고, 이를 남성병원이라 했다. 그리고 병원을 맡아 진료사업을 편 이는 리드(W. Reid)의사와 메이스(W.C. Mayes)의사였다.
1910년에 해리스(G.Harris)양이 와서 리드 부인과 함께 남성병원에서 간호원 양성 교육을 시작했다. 1926년에는 의사 3명, 간호원 13명이 일했으며, 그해에 치료받은 화자가 무려 2만3천여명이었다.

이 병원에는 유독 아편환자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이 병원이 아편중독자를 돈도 받지 않고 잘 고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한 치료를 통해 완치된 아편환자 중에는 세례를 받고 충실한 교인들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소문이 나자 인근지역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아편중독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무렵 한국에는 아편중독자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으며 개성에만 4천명이 될 정도였다. 아편을 흡입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생아편을 물에 녹여 증발, 농축하여 만든 아편 엑기스를 곰방대에 넣어 피우는 것이었다. 아편은 마약이므로 병원에서는 말짱하게 치료되더라도 밖에 나가면 다시 아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리드 의사는 치료 후 환자들이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 아편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리드선교사는 집과 직업이 없는 이들을 따로 모아 ‘아편치료의 집’이라는 보호소를 만들고자 했다. 아이베이씨는 그 후에도 병원을 위해 거액을 다시 기부하여 입원실을 따로 지어 병원을 확충하였다. 한편 리드의 부인 헤리스(R.Harris)도 내한하여 남성병원에서 간호사 양성사업에 헌신하였다. -김진형 목사 (예산지방 죽림교회)

병원 조수와 교회 지도자들은 아편퇴치운동을 위해 아편중독에서 완치된 사람들로 하여금 반아편연맹을 조직케 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부터 1910년 8월까지 남성병원에서는 총 6,176명을 진료하였으며, 입원 환자는 312명, 왕진은 712차례, 큰 수술은 42번 시행하였다.

남성병원은 지금은 개성아동병원으로 되었고, 200병상 규모이며, 연평균 3만 5,000여 명의 18세 미만 아동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백만인 구령운동 주도
백만구령운동의 도화선을 만든 일 역시 1909년 개성에서 열린 남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이었다. 스톡스, 갬블, 리드 등 세 선교사는 한인 교인들과 함께 한 주일 동안 입산기도회를 가졌다. 그 후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 스톡스는 자기 교인들에게 내년 중에 5만 명의 새 신자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 입산기도회에 참석했던 세 선교사는 1909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남감리교 선교연회에 참석하여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채택하게 했다.
이 선교연회 직후에 개최된 “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에서 리드(한국 남감리교회 첫 선교사 리더 목사의 아들)는 범개신교회의 전도표어를 채택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그 분과위원장이 된 그는 드디어 “백만 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공의회에서 채택하게 했다. 이것이 백만구령운동의 발단이 된 것이다.

4. 신석구에게 어학연수를 받음
신석구는 기독교를 받아 들인지 달포 만에 개성으로 옮겨 리드(Wightman T. 리드, 이위만)선교사의 어학 선생이 되었다.
작성일:2019-12-13 17:22:52 112.171.63.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