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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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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B154/Williams Frank Earl Cranston/3학년 6반/허지영

닉네임
허지영
등록일
2019-12-13 17:26:07
조회수
940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6반_B154_허지영.hwp (6870016 Byte)
한국교회사 한국내한선교사 소논문
우리암(禹利岩) 선교사 / Williams, Frank Earl Cranston (1883-1962)

Ⅰ. 기본사항

1. 이름: Williams, Frank Earl Cranston / 윌리엄즈 / 한국명: 우리암(禹利岩)
2. 생몰연도: 1883. 8. 4. - 1962.9. 미국 콜로라도주 뉴윈저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06. 8. - 1940. 12.
5. 연표
1906. 덴버대학 졸업
1906.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1907-1941. 공주에 파송되어 근속
공주읍교회 담임목사, 영명학교 교장 역임
충남지역 순회 전도, 농촌지도자 교육
1907. 공주읍교회 담임목사부임, 영명학교설립 및 교장취임
1931. 영명학교를 영명실수학교로 개편하여 실업교육 강화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귀환후 인도에 부임
1945. 미군정청 하지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재내한
6.25사변 이후 선교사직에 복귀, 일본에 부임
1954. 은퇴
1962.6.9. 향년 79세로 샌디에고에서 소천
6. 가족사항
부인: Williams, F. E. C.
아들: George Zur. Williams / 한국명: 우광복(1907-1994)
딸 : Olive Williams

II. 선교사 소개: 우리암 (Williams, Frank Earl Cranston, 1883-1962)
1. 윌리엄즈(Williams, Frank Earl Cranston, 1883-1962) 선교사의 생애
윌리엄즈(Williams, Rev. & Mrs. Frank Earl Cranston, 禹利岩, 1883. 8. 4~1962. 6. 9) 선교사는 미감리교회 선교사이자 목사 그리고 교육가이다. 먼저 윌리엄즈 선교사의 기본사항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883년 8월 4일 미국 콜로라도주 뉴윈저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에 덴버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여름에 내한하였다. 그리고 1907년 공주에 파송되어 1940년까지 근속하였다. 1907년 공주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 해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였다. 1931년에 영명학교를 영명실수학교로 개편, 실업(농업)교육에 주력하였다. 천안, 홍성, 서산, 안면도, 광천, 음성 등의 전도사업에도 힘썼다.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하였다. 1945년 미군정청 하지 중장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다시 내한하여 6·25전쟁 후 일본 나가사키에 부임하였다. 1953년 11월에 은퇴한 후 귀국하였으며, 1962년 6월 9일 샌디에고에서 별세하였다. 한국에서는 감리교 선교부 소속으로 37년을 섬겼다.
다음으로 한국에서 37년을 섬긴 윌리엄즈 선교사의 생애 가운데 한국에서 어떠한 생애를 살아갔는지를 중점적으로 그의 생애를 정리해 보았다. 미국 콜로라도 주 뉴윈저에서 출생한 윌리엄즈 선교사는 1906년 덴버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여름에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그는 도착 이듬해(1907) 공주에 파송되어 1940년까지 근속하였는데 이것은 내한 감리교 선교사 중 한 지역에 가장 오래 머문 예가 되었다.
1906년 당시 공주는 이천 광주구역을 포함하여 공주지방으로 승격되었고 감리사는 스웨어러 목사가 담당했으며 1906년에 내한한 윌리엄즈가 공주에 파송되었다. 그는 그 해 10월 명선학교를 영명남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오늘 영명고등학교로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1907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공주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당시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던 부흥운동이 남쪽에서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는데 윌리엄즈 역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907년에는 경기도 여주에서 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강사는 주로 선교사들이었다. 1908년 케이블이 천안·공주지방 사업을 보고하는 글에 의하면 테일러와 윌리엄즈, 버딕 등 세 선교사와 함께 1908년 1월에 여주지역에서 사경회를 열었다. 부흥회 상황을 이렇게 보고한다. “저녁 집회는 부흥회를 열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셔서 회개와 고백이 잇달았다. …… 신도들은 큰 번민 가운데 그들의 죄를 눈물로써 회개하고 예수 안에서 용서와 평안을 얻었다. 성경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깨끗해지는 경험을 했고 사경반이 끝날 때는 1백 명 이상의 신도들이 죄의 용서와 성령의 확신을 가지고 새로 거듭나게 되었다.”
윌리엄즈는 또한 4월 8일부터 공주에서 안창호 목사와 함께 1주일 동안 부흥회를 열었는데 사흘째 되는 날부터 교인들의 자복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였다 하며 간음하였다 하며 속이고 도적질하였다하며 우리 주를 입으로만 믿었다 하며 어떤 이는 그간에 안창호씨를 원수같이 보았다 하며 슬퍼 애통으로 서로 서로 용서함을 받으며 서로 위로하며 날마다 이와 같이 일주일 동안을 지냈다.”
그는 학교 일로 바쁜 중에도 충남지역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는데 공주를 비롯, 천안·홍성지역이 그의 관할 구역이었다. 1908년 당시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의 편지나 표가 있으며 일본군 작전지역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피의자들을 석방시킬 힘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농촌교회를 위한 실제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며 학교에서도 농촌지도자 배출에 역점을 두고 교육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영명학교를 영명실수학교로 개편, 실업(농업)교육을 한층 강화하였다. 1945년 8·15해방 후 미군정청 하지 중장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다시 내한하여 활약하게 된다. 또한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윌리엄즈 목사와 윔스 목사의 아들인 윌리엄즈 소령, 윔스 대위는 1945년 10월 5일에 임명된 11명의 미군정 행정고문 중에 6명이 기독교인이며 그 중 3명이 목사로 임명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45년 12월에는 미군정청의 국장대리 또는 국장에 한국인을 기용하였다. 이때 정일형 목사는 인사행정처장애, 영명학교 출신인 조병옥은 경무부장에 임명되었고, 류형기 목사는 조선인쇄주식회사 관리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청의 자문기관으로 1946년 2월 14일에 발족한 민주의원 의장에는 이승만이 선정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윌리엄즈와 선교사들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다시 선교사직에 복귀, 일본 나가사키에 부임하여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학교 재건에 전력하였다. 이후 1954년 캘리포니아에서 은퇴하였으며, 1962년 샌디에이고에서 별세하였다. 한편 그의 아들도 해방 후 하지의 통역관으로 영명학교 출신 조병옥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좌익 세력에 대해 제동을 거는 일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2. 윌리엄즈 선교사의 사역
2.1. 공주지역을 복음으로!
윌리엄즈 선교사는 내한하여 감리교 선교부 소속의 선교사로 오늘날의 충청남도 공주시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과 당시의 공주의 상황을 보기 위해서는 북감리교회의 지방선교와 조직 그리고 미감리교회의 지방선교 거점지인 공지지역의 선교현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북감리교회의 지방 선교와 조직이다. 1903년에 들어와서는 서지방에서 권신일의 수고로 교동구역과 케이블이 일한 해주구역이 새로 조직되었고, 남지방에서는 공주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 충청도의 천안·공주지방에는 1898년에 처음으로 스웨러 선교사가 파송되었고, 1899년에는 해미와 목천에, 1901년에는 충주와 진천과 청주에 각기 교회가 세워졌다. 또한, 이 충청지방에는 1903년에 맥길이, 1904년에는 샤프가, 1907년에는 케이블과 테일러와 윌리암스와 버스커크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공주 서지방에서는 감리사 스웨러, 청양구역 정덕환, 홍주구역 이상만, 인내 미파, 갈마동 서상윤, 강경포 미파, 공주읍구역 반복기·안창호, 경천 김병제, 견포·늘뫼·경춘구역 윌리엄스, 서산구역 송환소, 태안구역 양차옥, 당진구역 이건숙, 유구구역 최한규, 공주 남 목사 손승용, 교육담당 윌리엄즈, 공주읍 병원 반복기였다.
이렇게 공주지역은 미감리교회의 지방선교 거점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공주지역 선교부 설치하였다. 1904년도 선교회에서는 공주지역의 사역자가 대포 보강되었다. 충청구역 담당자에 샤프 선교사가 파송되었고, 공주교회에는 이요주 전도사가 임명되었다. 충청북도지역에는 박전병이 파송되었고, 청주교회에는 오해두가 재임명되었다. 지방 전도사업에는 샤프 부인이 맡았고, 맥길 의사는 의료사업 전담으로 일하게 되었다. 공주로부터 논산, 대구, 청주, 충주, 보은, 진천지역으로 계속 증가되는 교회사업을 돌보기 위해 샤프 목사가 파송되어 왔지만 공주만은 맥길 의사가 계속 담당키로 했다.
맥길 의사가 본국으로 갈 때 이용주 전도사도 함께 공주를 떠났다. 맥길과 이용주 전도사는 동고동락했다. 맥길 의사가 가는 곳에 이 전도사도 갔으며 이 전도사하는 일에 맥길 의사가 도왔다. 맥길 의사의 파송을 시민적 차원에서 요청할 수 있도록 공주사회에서 호감을 샀다는 것은 그 뒤에 이용주 전도사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전도사의 모친은 아예 전도부인이 되어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부인 전동 공을 남겼다. 초기 공주교회 설립에는 맥길 의사의 공도 컸지만 한국인 전도인들의 노력이 초석으로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때 교육사업이 시작되었다. 인권을 상실한 채 이름도 없이 살아가는 한국 여성을 대할 때 먼저 할 일은 여성해방운동이었다. 남편 샤프 목사가 통역으로 같이 내려온 윤성렬과 지방순회하는 동안 부인 샤애리시는 여학교 설립을 구상했다. 당시 허조셉 전도부인이 두 학생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명선여학교로 발전되었는데, 1906년 3월 15일 샾 목사가 순회 도중 발진티푸스에 전염되어 세상을 떠나고 샤애리시는 미국으로 귀국하여 명선여학교는 난관에 부딪혔다. 그후 스웨어러 감리사의 부인 서사덕이 교장으로 취임했다.
1906년 공주는 경기도 이천 광주구역을 포함하여 공주지방으로 승격되었고 감리사는 스웨어러 목사가 담당했으며, 1906년 여름에 한국선교사로 내한한 윌리엄즈 목사가 공주로 파송되어 공주읍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그 해 10월 명선학교를 영명남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오늘 영명고등학교로 발전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윌리엄즈 선교사가 섬기게 된 공주읍교회가 바로 현재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공주제일교회이다. 그리고 윌리엄즈 선교사가 설립하고 교장으로 섬긴 영명학교는 오늘날의 공주영명고등학교이다.

2.2. 공주지역을 독립운동으로 이끈 영명학교 설립
윌리엄즈 선교사는 내한 후 공주지역을 독립운동으로 주도하고 이끌었던 영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03년 미감리회의 선교사 샤프 목사 부부가 충남 공주에 상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5년에 샤프 부인이 영명여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한편 남학생을 위한 영명학교는 1907년 윌리엄즈에 의해 설립되었다. 영명학교의 특색은 남녀 다 같이 실업교육에 치중한데 있다.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공주 영명학교의 교사가 걸립된 것은 1921년의 일이었다. 1941년에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9년에 재건된 것은 남학교뿐이었다.
현재 영명고등학교에는 영명역사관이 있는데, 이 곳을 통하여 윌리엄즈 선교사의 사역과 그가 설립한 학교를 통하여 독립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영명학교는 일제 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교육을 통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켜줌으로서 유관순, 유우석, 김현경, 유예도, 조병옥, 노마리아, 김관회 등의 애국지사들을 배출한 민족학교이다. 영명역사관에는 당시 교장이셨던 윌리엄 선교사가 쓰시던 타자기와 풍금 등이 전시되어있고, 1921년 신축된 건물에서 목관 타임캡슐이 나오면서 출토된 도서, 신문, 동전 등이 전시되어있다. 오래된 졸업장 등 다수의 학교행정 관련 문서와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그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다.

2.3. 선교,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윌리엄즈 선교사의 한국에서의 사역을 살펴보면 그의 사역을 복음전도와 교육사업과 농업사업이라는 한국사회를 책임지는 사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윌리엄즈 선교사는 공주 땅에 복음의 씨앗만을 뿌린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교육과 농업기술 등을 남겨주었던 것이다.
당시 선교사의 선교와 교육사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선교부에서는 샤프 선교사의 후임으로 미국 콜로라도 주 푸칼린스 출신 윌리엄즈 선교사를 선임하여 파송하게 된다. 그는 1906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개최된 제3회 한국선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인과 함께 공주로 내려가 명신여학당을 영명(永明)남학당으로 고쳐 교장에 취임하여 1940년 일본경찰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많은 애국지사와 종교지도자를 양성했고, 음악을 전공했던 부인 베이턴은 성가대를 조직, 교회음악 보급에 공을 세운다.

3. 선교지의 광복을 기도한 윌리엄즈 선교사,
그리고 그의 아들, “우광복”(George Zur. Williams)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일제강점기 때를 돌아보면, 서양 선교사의 헌신과 기독교 독립운동가의 희생 공존이 공존한다. 윌리엄즈 선교사님이 담임하였던 공주제일교회를 거쳐간 이들은 하나같이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로버트 샤프 선교사 후임으로 파송된 프랭크 윌리엄즈(한국명 우리암) 선교사는 자신의 아들 이름을 ‘우광복’으로 지을 정도로 대한독립을 열망하였다. 그의 아들 우광복(미국명 조지 윌리엄스)은 후에 6.25전쟁에 미국 해군 장교로 참전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미동맹을 체결하는 데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4년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시절 일찍 떠나보낸 여동생, 올리브 윌리엄스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현재 여동생과 함께 공주영명고등학교 뒤편에 묻혀 있다.
윌리엄즈 선교사는 1906년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하고, 유관순 열사와 같이 신앙심이 투철한 애국 청년을 양성하는 데 헌신했다. 또 1916년 공주제일교회에 부임한 신홍식 목사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그는 기독교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3.1운동에 동참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신 목사는 일제에 체포돼 법정에 섰을 때 조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을 설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주제일교회 29대 담임 윤애근 목사는 “교회를 거쳐간 서양 선교사와 목회자들의 교육과 헌신으로 교회에서 예배드리던 젊은이들의 가슴에 신앙이 깊이 자리 잡았고, 이 신앙이 우리 민족 근대사에 큰 일익을 감당하는 모습으로 발현됐다”고 설명했다.
공주제일교회와 영명학교가 충청 지역 선교와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자 1940년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교회와 학교가 강제로 문을 닫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복음을 향한 서양 선교사의 헌신과 기독 독립운동가의 희생이 공존하는 공주제일교회. 자유를 열망하던 이들의 독립정신을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에서 느낄 수 있다.
작성일:2019-12-13 17:26:07 114.207.1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