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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Young, Lither Lisger(?-1950, CP)

닉네임
이솔빈
등록일
2019-12-13 17:40:57
조회수
140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B158_이솔빈.hwp (279040 Byte)
내한선교사 / B158 / Young, Lither Lisger


I. 기본사항


1. 이름: Young, Lither Lisger / 영 / 한국명: 영재형(榮在馨)
2. 생몰연도: ?-1950.2
3. 출신 및 소속: 캐나다, 캐나다 장로회 소속
4. 한국선교기간: 1906-1927.
5. 연표1906 내한하여 함흥, 성진, 원산 등지에서 활동
1925 캐나다 장로교회가 타교파와 캐나다연합교회 형성하자 독자적 활동
1927 선교구역 이관으로 도일하여 코베에 근거를 두고 재일본 한국인 선교에 헌신
1934 제일조선기독교회(대회) 창립
1942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 종전 후 다시 일본에 나옴
1950.2 일본에서 소천
6. 가족사항: Mair, Catherine F.(부인 1919 소천), Fox, Miriam(부인), Young,
John M. L.(아들)
5. 논저: [논문] 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 and the Koreans in japan, KMF,
Vol. 32, No. 4, 1936. 4.
6. 참고문헌: 기백 11권; KMYB; CMYB; W. Scott, Canadians in Korea, 1975;
해방 10년사; 사기하; 東京敎會 72년사, 1980; 東京敎會 50년사, 1978.

II. 선교사 소개: 영(Young, Lither Lisger, ?-1950)

1. 한국에 온 영재형(Young, Lither Lisger) 선교사

1906년에 내한하여 함홍·성진·원산 등지에 선교부에 배속되어 주로 교회 일을 돌보았다. 그러나 1925년 본국에서 장로교회가 감리교회 등 타 교파와 연합하여 「캐나다 연합교회」를 형성하고 해외 선교사업도 연합교회란 명칭아래 추진하게 되자 본래 보수주의적 신학교육을 받은 데다 장로교회의 전통을 사랑했던 그는 연합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 국내에서 선교하던 맥도널드(D.W. McDonald)·베시(F.G. Vesey)도 역시 연합교회에 소속되지 않았다.

영재형(榮在馨, Luther Lisger Young)선교사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로 1906년에 내한하였다. 캐나다 선교부가 담당한 선교구역인 함경도 지역에 가서 함흥, 성진, 원산 등지에 이미 활동 중인 그리어선(B,G Crlerson), 맥러(D,M Mcras), 푸드(W,R Foot) 선교사들과 합류하여 관북지방교회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1925년에 캐나다에서 에큐메니칼(교회 일치주의, 현재는 종교혼합주의로 변질) 운동이 크게 전개되면서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기타 몇몇 교파가 합동하여 ‘캐나다 연합교회가 형성되었고 외국 선교 사업도 연합교회 이름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은 대부분 보수주의 신앙을 고집했는데 젊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부임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게 되자 함경도 지방 교인들의 신앙이 변질되기 시작했고 영재형 선교사는 연합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철저한 보수주의 신앙인이었고 자신이 하나님 앞과 캐나다 장로교 총회에서 한국인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여 한국인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겠다고 결의한 영재형 선교사였기에 연합교회와의 결별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 결과 영재형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선교를 금지 당하고 추방되게 된다.



2. 영재형 선교사의 한국선교의 열매: 김치선 목사


① 영재형 선교사를 만나 신학 학위를 수여하기까지
1899년 10월 6일, 김치선은 함경남도 함흥읍 서호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본래 고기잡이 배 40척을 거느린 부호였으나 1913년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모든 배를 잃자 그의 할아버지는 다시 가문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3년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아버지 김영준은 장진에서 화전민 생활을 결정했지만, 김치선의 서당선생 김응보 옹은 “김치선만은 화전민으로 만들 수 없다”며 자신이 치선을 키우겠다며 서호리에 남게 하였다. 가족과 홀로 남게된 김치선은 그곳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선교사인 영재형(Lither Lisger Young)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서당선생이자 기독교인이었던 김응보 옹은 영재형 선교사에게 김치선의 영특함과 사정을 알렸고, 이 말을 들은 영재형 선교사는 ‘그렇게 유망한 학생이라면 자신이 키우면서 공부시키겠다’며 김치선을 함흥 발룡산에있는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서 사환일을 시키며 공부하게 했다. 1919년은 김치선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닌 해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들은 영재형 선교사의 도움으로 함흥 신상리에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지만,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옥고를 치루는 과정중에 김치선은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1년후 출옥하여 함흥으로 돌아와 영생 중ㆍ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영재형 선교사의 부름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중앙신학교에 편입하였고, 1930년 2월 23일,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1년 후 영재형 선교사의 주선으로 김치선은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 Th. M, 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며 오직 학업에만 전념한 끝에 1933년 무사히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 후 텍사스 주 달라스 주에 있는 달라스신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여기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1935년 한국인 처음으로 정식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게 된다.

②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치선은 고베중앙교회를 설립하고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다.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목회였다. 일본에서 소외 받고 무시 받으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동포들이 고베중앙교회로 몰려들었으며 당시 성도들이 모두 주일마다 한복을 입고 교회에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성도들이 고베중앙교회로 온다는 것은 그 당시 쉽지 않은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노예나 미개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무시하던 시대였고, 일부 조선인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일본인으로 행세하기까지 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이 주일이 되면 우리 고유의 한복을 입고 당당히 교회에 출석하는 특이한 풍경이 일어났다.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속속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김치선 박사의 설교에서 힘을 얻은 성도들이 압제 속에서도 신앙생활에 활력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고베중앙교회에서의 목회를 통해 정식 신학박사이자 명설교가로 이름을 얻게 된 김치선은 1938년 일본의 수도 동경에있는 신숙중앙교회의 청빙을 받아 그곳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 그가 동경에서 목회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경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일본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로 성장했고, 선교사업도 성공적으로 이루게 된다.
그러나 김치선은 커다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먼저는 일본인들이 내선일체라 하여 교회에서 일본어로 설교할 것을 강요하였고, 교회 안에서 그의 인기를 질투하여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국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난데없이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에 의해 사상범으로 구속되었고, 수개월이 지나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이 일을 겪은 후 김치선은 동경신숙중앙교회에서의 사역에 대한 커다란 회의와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김치선은 자신의 자리를 탐내는 자들에게 교회를 양보하고 동경에서 목회할 당시에 개척했던 메구로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언제나 눈물로 기도와 설교를 했다고 한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의 전세가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1944년, 김치선은 귀국을 결정한다.


③ “한국의 예레미야”
김치선은 1944년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 구내에 있던 남대문 교회로부터 정식 청빙을 받게 된다. 당시 한국에는 미국에서 정식으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사람이 없었고, 또 김치선 목사는 이미 일본에서의 목회와 선교 활동으로 크게 명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남대문 교회에서는 그가 귀국하였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그를 자기들 교회의 담임 목사로 청빙하였던 것이다.
남대문교회 제 6대 담임 목사로 취임하게 된 김치선 목사는 이곳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조국에서의 목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김치선 목사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지만, 김치선 목사는 새벽기도회를 위험을 무릅쓰고 시작했다. 이것이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
김치선 목사는 그 암담하고 어수선한 시기에 매일 새벽제단을 쌓으며 강단에서 엎드려 민족을 위하여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이처럼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 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는 해방 후 혼란한 정국과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기도, 회개 그리고 전도뿐이라고 여겼다. 이를 위해 그는 구체적으로 300만 구령운동을 조직화하였다. 해방 당시 기독교 인구가 30만 정도에 불과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펼친 300만 구령운동은 이 땅의 복음화에 쏟은 그의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다. 300만 구령운동을 지속하면서 그는 신학도 들에게 “2만 8,000여 우물을 파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오늘 여러분이나 내가 할 일은 이 우물 파는 사업이다”라고 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여겼다. 신학도들이 다른 것을 그만두고 일생 우물만 파는 자들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300만 구령운동, 2만 8,000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그의 열정은 이 땅과 민족을 위해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표출이었으리라.


3. 영재형 선교사의 일본 선교


한국 선교구역이 연합교회 선교지로 이관됨에 따라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선교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재일본 선교연합공의회 및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협의하여 재일본 한국인 선교사로 1927년 일본에 부임하였다. 그는 코베에 근거지를 두고 큐우슈우로부터 사할린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산재해 있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여 해방 전까지 그가 설립한 교회만도 61개 교회에 달했다. 1931년 코베에서 그의 선교 25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 1934년에 이르러 한국인 교회만으로 이루어진 재일조선기독교회(대회)를 창립하였다.

일제 말기 어려운 시기에도 계속 일본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결국 2차 세계대전 발발로 1942년 강제 귀환당할 수밖에 없었다. 종전 후 다시 일본에 나와 전후 교회 재선을 돕던 중 1950년 2월 일본에서 별세하였으며 그의 장례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장으로 엄수되었다.

① 1920년대 이후의 한인교회와 영재형 선교사
이 시기 특히 주한 캐나다 선교사였던 영재형 선교사의 도일과 재일 한국인들을 위한 사역을 간과할 수 없다. 영재형 선교사는 한국에서 20년 가까이 사역한 바 있으므로 한국어에 능통하여 재일 한국인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적절한 분이었다. 그는 한인교회를 후원하고,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했다. 또 그곳의 고베중앙신학교에도 관여했는데, 당시 유학생이던 김치선, 노진형 등에게도 유익한 도움을 주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선교사역의 결과로 1930년 이후 동경, 오사카, 고베, 나고야, 교토 등 대도시와 구주지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래서 1927년 이후 한국인 교회가 급증했다. 1928년 말에는 30여 개처에 교회와 기도처가 있었으나, 1933년 말에는 그 수는 63개 처로 증가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토예가 있다. 나오도 야스다의 논문에 의하면 1929년 당시 전국에 24개처에 교회가 있었고, 신자수는 1254몀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3년에는 전국에 45개처의 한인교회, 18개처의 기도소가 있었거, 그 신자수는 2752명의 신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1928년에는 영재형 선교사 가족과 4사람의 한국인 목사를 포함하여 13명의 사역자들이 있었으나, 1933년에는 그 수는 27명으로 증가되었다. 이 중 6명은 신학생들이었다.

② 재일조선기독교 대회의 조직
이런 교회 증가에 따라 1932년부터 일본 각지에 설립된 한인교회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교회조직을 갖추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즉 한인교회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는 등 준비를 갖추고 1934년 2월에는 오사카 동부 교회당에서 조선기독교회 대회(총회)를 창립했다. 재일본 조선 기독교회 제1회 대회 회록에는 ‘준비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주호 1934년 2월 21일(수) 오후 7시 반 재일본 조선기독교회 제1회 대회를 대판 동부예배당에서 회집할대 오택관 목사의 사회로 오근목 목사 인도로 찬송가 32장을 합창하고 김응태 목사로 기도한 후 최경학 목사의 성경 고린도전서 3장 9-15절까지 낭독하고 한태유 목사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라”는 문제로 설교하고 오택관 목사의 기도로 예배를 마치고, 영재형 목사의 주례로 성찬식을 거행할새 찬송가 137장을 인도 합창하고 고려위 목사로 성경 고린도전서 11장 23-33절을 낭독케 하고 축사한 후 박상동, 최경학 두 목사로 떡을 나누고, 문종수 오근목 두 목사로 잔을 나눈 후 찬송가 262장을 합창하고 영재형 목사의 축도로 성찬식을 마치다.

이날 총회 회원은 목사가 영재형(선교사), 한태유, 김응태, 박상동, 문종수, 최경학, 오택관, 김수철, 고려위, 오근목 등 10명, 각지 교회 대표가 이원도, 류성석, 군태경, 김익환, 한연수, 고재만, 김근석, 배영준, 이승완 등 9명이었다.
총회에서 회장에 영재형 목사를, 부회장에 오택관 목사를, 서기에 오근목 목사를, 부서기에 문종수 목사를, 회계에 최경학 목사를, 부회계에 박상동 목사를 선출했다. 이제 일본 전역의 한국인 교회를 묶어 하나의 총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총회 휘하에는 43개처 교회가 있었고, 목사 8명, 남전도사 5명, 여전도사 9명, 선교사 6명이 있었다.
또 총회 산하에는, 관서노회, 관동노회, 중북노회, 서남노회 등 4개으 노회와 1개의 지방회, 곧 동북 지방회를 두었다.
이러한 조직의 정비 속에 교회성장이 이루어져, 1939년도 통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59처에 교회가 있었고, 총 신자수는 3,825명에 달했다. 이를 노회별로 보면, 관서노회 관할하에는 34개 교회와 2,349명의 신도들이 있었고, 관동노회에는 7개교회, 596명의 신도가, 중북노회에는 8개 교회와 452명의 신자들이, 서남노회에는 7개 교회와 362명의 교인이 있었다. 또 동북지방회에는 3교회, 66명의 신자가 있었다. 그리고 총회 산하에는 총 23명의 목사와 31명의 전도사, 성경연구 지도원 28명이 있었다.
작성일:2019-12-13 17:40:57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