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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23 / Genso. John Frederick. (NP) / Genso. Mabel Rittgers.

닉네임
김광
등록일
2020-06-21 00:40:07
조회수
941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2_23_김광.hwp (877568 Byte)
Ⅰ. 기본 사항
1) 젠소
(1) 이름: Genso. John F/ 젠소 / 한국명: 김소
(2) 생몰연도: 1884~1950.7.15.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연표
1884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독일 이민 가정에서 출생
1908.11.19.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경기도 양주군 봉화현교회에서 선교활동 시작
1908 선교부 회계로 재산관리 등 재정적인 문제 총지휘(선교의 중심 자산 기관인) Mission incorporation committee의 총괄 책임자, 인터미션 어카운트의 회계 담당
1910 부인 마블 젠소와 결혼, 노회 임원으로 활동
1911.12.4. 경기충청노회가 조직될 때, 회계로 피선
1913.12.2. 경기충청노회에게 회계로 선임
1914.12.1. 경기충청노회에서 회계로 선임
1915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호계로 선임
1917 사립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회계 선임
선교잡지 <신생명, The new life>의 발생인으로 활동
안동교회 부지 안의 62평 땅 교회(사택)시설을 확충하든데 사용하도록 공여
1923 안동교회 안국유치원 설림될 때 도움
1938 젠소와 김홍량 재단의 대행자인 최태영 사이 경신학교 재산에 대한 매매개약이 맺어짐
1941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
1946 재내한하여 복구활동, 회계전문가 선교
6.25 사변으로 일본에 피신
1951.7.15. 일본 니소노미야에서 소천
양회진 제1묘역(다-19)에 안장
1957 부인 소천
맏딸(Abigail)은 외국인학교 교사로 봉직, 키니(Robert Kinney)와 결혼, 둘째 딸 (Barbara)도 외국인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후에 의사가 되었다.
(5) 가족사항: Rittgers, mabel(부인)과 1남 2녀

2) 마블 젠소
(1) 이름: Genso. Mabel Rittgers / 마블
(2) 생몰연도: 1883~1957.06.28.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연표
1883 미국 아이오아주 디모인에서 출생
고향에서 사범학교 졸업, 중등학교 교사, 주일학교 교사
1907-1908 무디성경학교 수료
1908.11.27. 미국 북장로회 독신 여선교사로 내한
1910 젠소와 결혼, 정신여학교 7대 교장으로 부임
1916 영어교사, 아동교육 및 심리학교사로 봉직
1920 정신여학교 교장서리로 부임
1923 안동교회 유치원 설립, 초대 원장, 영어성경반 인도,
YMCA에서 성경과 연어 가르침, 여성단체에서 활동
1941 일제의 강압으로 강제출국
1946 재내한하여 여성선교와 아동복지분야, 성서 교육 봉사
1947 계명협회 협동 총무
1951.7.15. 일본 니소노미야에서 남편 젠소 소천
1954 세 번째 내한, 문맹퇴치운동에 헌신
1956 정신여학교 고별 강연, 미국 귀국
1958 미국에서 소천
양화진 남편과 아들의 무덤 곁에 안장


Ⅱ. 젠소 선교사 가정 소개
1. 젠소 선교사 가정 전체 이름에 관해
(1) 본인: 존 프레드릭 젠소(Genso, John Frederick, 1884~1951)
(2) 부인: 마블 R. 젠소(Genso,Mabel Rittgers, 1883~1957)
(3) 아들: 존 R. 젠소(Genso, John Rittgers, 1911~1914)
(4) 첫째 딸: 애비게일 젠소(Genso, Abigail)
(5) 둘째 딸: 바바라 젠소(Genso, Barbara)

2. 젠소 선교사 부부에 관해
양화진 제1묘역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선교부 회계를 비롯하여 세브란스 재단과 경.충노회 회계 등 재정분야 총괄 책임자로 활동한 존 F. 젠소 묘지가 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이며 정신여학교 교장과 사회복지 분야에 헌신한 마벨 R. 젠소의 묘지와 더불어 세 살의 어린 나이로 죽은 젠소 선교사의 아들 묘지도 함께 있다.

1) 출생부터 재한 입국까지
-존 프레드릭 젠소(Genso, John Frederick, 1884~1951)
먼저 젠소에 관해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입국했을 때까지만 살펴보면, 양화진 선교사들에 대한 전문가 신호철은 15년 전에 젠소가 1884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908년 11월 19일 미국 북장로회 독신 선교사로 내한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회계.재정 책임자이다고 간단히 정리한다. 하지만 5년 전에 정리된 다른 저서에서 젠소는 1884년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독일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1908년 미국 북장로교의 평신도 선교사로 내한하여 북장로교 선교부의 회계 담당자로서 재정을 담당했다고 정애주가 조금 보완했으며, 한국컴퓨터선교회 인명사전에는 젠소가 내한하여, 경기도 양주군 봉화현(烽火峴)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마블 R. 젠소(Genso,Mabel Rittgers, 1883~1957)
다음 젠소 부인에 관해 한국에 입국했을 때까지만 살펴보면, 선교사들의 기초사항에 근거하여 정립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젠소 부인이 미국 북장로회 여선교사이고, 존 프레드릭 젠소의 부인이며, 1883년에 출생했고, 1908년 11월 27일 미국 북장로회 독신 선교사로 내한했다고 했다. 그리고 정애주는 젠소 부인 마블이 1883년 미국 아이오아주 디모인에서 태어났고, 고향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한편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무디성경학교에 다닐 정도로 선교 열정이 넘쳤으며, 마침내 그녀는 마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908년 내한했다고 보충했으며, 이어서 한국컴퓨터선교회 인명사전에서 보면, 무디 성경학교에서 수료한 기간은 1907~1908년이라고 밝혔고, 초중등학교 교사로 봉직한 곳은 아이오아주 폴크라고 했다.

2) 입국해서 강제 출국까지
-존 프레드릭 젠소(Genso, John Frederick, 1884~1951)
신호철이 정리한 기본 자료는 서울에서 한국 선교부의 회계와 재정부 책임자로 봉사했고, 선교잡지 <신생명(The new life)>의 발행인으로 활동했으며, 세브란스 의전에서 회계(1917~1918)로 활동했고, 1941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되었다는 것과, 에비슨 선교사에 의하면, 처음에는 그가 세브란스병원 약제사로 일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내한한 마벨 선교사와 1910년 결혼하여 부부 선교사가 되었고, 젠소는 평신도 선교사였지만, 내한 직후부터 경기도 지역 교회를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1910년에는 노회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재단 임원을 지냈고, YMCA가 발행한 선교 잡지 <신생명>의 발행인도 역임했다고 정애주는 조금 더 보완했으며, 한국컴퓨터선교회 인명사전에서는 이 교회는 당초 감리회 선교사가 설립하였으나 장로회와 감리회 간에 <宣敎地域 分界 協定>으로 장로회 경충대리회(京忠代理會)의 클라크(Clark, 郭安連)선교사 구역으로 편입되어 존 F. 젠소 선교사가 인수하여 교역자로 활동했고, 그 후에는 미국 선교부 재정분야 회계업무를 총괄했으며, 1911년 12월 4일, 독노회(獨老會) 경충대리회가 경기.충청노회로 조직될 때 임원(회계)으로 피선되어, 1913년 12월 제5회 경충노회와, 1914년 1월 제7회 경충노회에서 계속 회계로 선임되었다가, 한편 1915년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가 재단법인으로 조직될 때 임원(회계)으로 피선되었으며, 1917년 “사립(私立)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될 때에도 임원(회계)으로 선임되어 재정분야를 총괄했고, 선교잡지 <신생명, The new life>의 발행인으로도 활동했으며, 안동교회 부지 안의 62평의 땅을 교회(사택)시설을 확충하는데 사용하도록 공여한 일도 있다. 이 땅은 후일 그의 딸 바바라(Barbara)의 증언을 통하여 안동교회 명의로 등기를 이전했다고 했으며, 이후에 1941년 일제의 압력으로 강제출국 했다고 삶이 구체적으로 조명됐다. 또한 구진원 전도사는 자신의 기초조사에서 젠소는 회계에 능력을 보인 선교사이다. 당시 서울과 서울역은 선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서울은 선교의 재정과 자산관례의 중심이었다. 그 중, 선교의 재정과 자산관리에 가장 오랫동안 봉사한 사람이 젠소이다. 그는 또한 교회 법인부(Mission incorporation committee, 선교회 자산관례 담당부서)의 최고 책임자로 있으면서 여러 선교 기지들과 선교회들의 회계 및 선교회 간 거래 담당 회계를 맡아왔다. 또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가 재단법인이 될 때도, 1917년 사립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될 때에도 임원(회계)으로 선임되어 재정분야를 총괄했다. 그가 한 모든 일들을 보면, 회계 업무, 즉 재정과 관련된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1934년부터 1941년까지 기독교 문학에 선교 협력이 사회 성장에 커다란 요소였는데, 이때 힘썼던 선교사 중 젠소가 포함되는데, 북감리교 목사의 레퍼트와 함께 찬송가 발행 분과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조사한 내용을 보여준다.

-마블 R. 젠소(Genso,Mabel Rittgers, 1883~1957)
처음 한국에 입국후 강제 출국까지 마블 선교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는데, 정애주는 마블이 정신여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고, 자신보다 약 열흘 전에 한국에 온 젠소 선교사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정신여학교에서 1910년과 1920년에 총 두 번에 걸쳐 교장직(1920년에는 교장서리)에 봉직했고, 피어슨 기념성경학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여성들과 함께 아동복지를 위해 헌신했으며, 1923년에는 안동교회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초대 원장을 지냈다고 기초적인 자료를 정리한다. 한국컴퓨터선교회 인명사전에서는 한국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뒤 1910년 정신여학교 제7대 교장으로 부임했고, 1910년 프레드릭 젠소와 한국에서 결혼하여 1남 2녀의 자녀를 낳았으며, 1916년까지 영어교사와 아동교육 및 심리학교사로 봉직하고, 1920년 정신 교장 서리로 다시 취임했다. 이 후 전도사업과 사회봉사 사업에 진력했고, 1923년 서울 안동교회 부설 초대 유치원장으로 있으면서 영어 성경반을 인도했으며, YWCA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으며, 기독교 여성단체 등에서 끊임없이 활동했고, 1941년 일제의 강압으로 출국되었다고 조금 보완했으며, 이어서 구진원 전도사는 한국의 여자 청년들은 외국인 총무의 도움 없이 YMCA를 조직하고 운영했는데, 수년간 젠소 부인께서 조언을 해주었으며, 또 경성 YMCA가 창설될 때, 크게 힘이 되어 주었는데, 젠소 부인의 집이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이사회 역시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3) 재입국에서 죽음까지
-존 프레드릭 젠소(Genso, John Frederick, 1884~1951)
다음은 강제출국후 다시 한국으로 재입국부터 죽음까지 내용을 정리한다. 신호철이 정리한 기초자료는 1946년 다시 내한 하였다가, 6.25 전쟁으로 철수하여 일본에 머물던 중 1951년 7월 16일 코베에서 별세했다고, 정애주는 젠소가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가 1946년 해방 후 다시 내한하여, 한국 교회 재건과 복구를 위해 헌신했다. 또한 정년에 이를 때까지 행정 및 회계 전문가로서 선교 사역에 헌신하여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고, 한국전쟁 중에 잠시 피신해 있던 일본에서 1951년 별세했으며, 아들이 먼저 묻힌 양화진에 안장되었다고 조금 보완한다. 이어서 한국컴퓨터선교회 인명사전에서는 6.25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26일 서울을 떠나, 일본에 체류하다가 7월 15일 코베(Kobe)대학이 위치한 니시노미아(Nishinomiya)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다-19)에 안장되었는데, 한국 선교역사의 저자 해리 로드(Harry A. Rhodes)는 ‘한국 전쟁기간 중 가장 큰 두 가지 손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존 F. 젠소의 별세이다’라 기록할 정도였다고 정리하고, 현대교회 나눔 게시판에서는 그는 한국선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그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다.

-마블 R. 젠소(Genso,Mabel Rittgers, 1883~1957)
먼저 신호철이 정리한 기초자료에서는 마블 선교사는 1910년 정신여학교 제7대 교장으로 활동했으며, 젠소와 결혼하고 서울에서 1957년까지 여성선교와 아동복지분야, 성서 교육을 하면서 봉사했다. 1957년 7월 28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남편과 함께 안장되었다고 짧게 정리하며, 정애주는 그녀가 남편이 벨세한 후 귀국했다가 1954년 세 번째로 내한하여 프랭크 라우박 박사가 주창한 문맹퇴치운동에 헌신한 후 1956년말 귀국했고, 또한 그녀는 귀국 이듬해인 1957년 미국에서 별세하여 그녀의 유언대로 양화진에 안장된 남편과 아들 곁에 묻혔다고 보완하며, 한국컴퓨터선교회 인명사전에서는 1947년 다시 내한하고 계명협회(啓明協會) 협동 총무로 활동하다가, 1956년에는 보육원에서 아동 부녀 복지사업에 참여했다. 같은 해 정신여학교 강당에서 학생들에게 고별 강연을 했으며, 학교측에서는 그에게 “강화 화문석”을 선물했다(정신백년사 저자 김광현 증언). 한국에서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출국하여, 1957년 6월 28일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Arlington)에서 별세했다. 유해는 양화진 제1묘역(다-19A)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혔으며, 또한 구진원 전도사는 마블은 문맹퇴치운동을 담당하는 위원회를 이끌었고, 이 운동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그들은 더럽고 우울하고, 절망적이었지만, 기독교 찬송가와 성경구절을 가르치고, 니시베시 올리버라는 베이비클리닉을 설립하고 독서 수업을 실시함으로, 그 결과는 한국여성들은 미소 짓는 얼굴로, 태도는 희망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서울 안동교회에서 여전도회에서 봉사했다고 추가하며, 현대교회의 나눔게시판에서는 1947년 다시 내한하여 계명협회 협동총무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6년에 보육원에서 아동 및 부녀복지사업을 끝으로 한국에서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출국했다고 전하며, 마지막으로 필그림 선교교회 나눔게시판에서는 젠소 부부는 비록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기간을 제외한 평생을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했다고 그를 높이 평가한다.

세 살 때 숨겨 가장 먼저 양화진에 묻힌 아들 존(1911~1914)과 부부가 함께 묻힌 묘비에는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 4:14이 쓰여 있다.

3. 선교사 자녀들에 관해
1) 아들: 존 R. 젠소(Genso, John Rittgers, 1911~1914)
존 R. 젠소는 1911년에 프레드릭 젠소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1914년 8월 30일 서울에서 세 살이란 나이로 사망하여 양화진 제1묘(다-18)에 묻혔다.

2) 첫째 딸: 애비게일 젠소(Genso, Abigail)
큰 딸 애비게일 젠소(Genso, Abigail)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외국인학교 교사로 봉직한 바 있으며, 로버트 키니(Robert Kinny)와 결혼하여 주부로 있다가 미국 하와이로 돌아갔다.

3) 둘째 딸: 바바라 젠소(Genso, Barbara)
둘째 딸 바바라 젠소(Genso, Barbara)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외국인학교 교사와 내과 의사로 활동했다. 그의 남편은 기스라(B. G. Gisla)이며 미국 캘리포니아(San Mateo)로 돌아갔다.

4. 선교사 부부와 관련된 일화
1) 박용규 교수님의 소논문에서 발취
아래의 내용은 젠소 본인의 회계 업무와 관련된 일화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이 한반도 전역에 일어난 후 피득이 맡고 있는 지역도 부흥운동의 영햐을 받아 급성장을 이룩했고, 1907년 7월 5일 피득은 “자신의 선교구역의 순회 여행에서 얼마 전 돌아왔다”며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 브라운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순회 선교에 대한 보고와 더불어 여러 교회들이 교회당을 마련한 사실을 인상 깊게 전했다. 하지만 정작 그해 피득은 선교회 회계업무로 순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다 젠소가 회계부를 맡으면서 자신이 맞고 있는 서울의 남부지역을 순회하며 감독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수적으로도 많은 증거가 있어 190명이 새로 입교했고, 220명이 새로 학습을 받았으며, 2개의 새 교회 건물이 지어졌다. 위의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싶이 우리는 그의 회계 업무가 다른 사람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는 선교적 사역이지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용한 직업이고, 또한 그의 빛과 소금의 선교사역으로 인해 동료들과 함께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은 선한 영향을 주었는지 다만 감사할 따름이다.

2) 홍창희 연구 노트에서 발취
다음은 젠소가 3.1운동과 세브란스병원의 실제 사정을 알리는 내용이다. 당시 일반병동과 격리 병동을 모두 합치면 최대 90병상이었는데 3월 31일 입원환자는 98명이다. 4월 초 세브란스병원의 사정을 정한 편지에서 병원의 복도와 통로에도 만세운동 부상자로 가득했고 케이틀린 에스텁 간호사는 더 많은 진료공간을 확복하기 위해 현관에서 진료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헌신한 평신도 선교사로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영혼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전체적인 부분에 모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영혼만 구원하는 극단적인 선교사역을 감행한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선교를 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 동성왕 글에서 발취
젠소는 평신도 선교사로서 선교지 대한민국의 3.1운동의 실제도 알렸다. <재한선교사보고자료> 중 젠소가 브라운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한 경찰관이 선언문 한 부를 우리 조수 중 한 명에게 주었다. 조수가 그 경찰에게 이것을 당신의 대장에게 갖다 주고 상을 타지 그러냐고 하자, 그 경찰관은 자기도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내용을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에 서신을 보낸 것은 위의 내용과 동시에 총체적 선교에 관심이 있었으며, 한국인을 정말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4) 박용옥의 글에서 발취
이어서 소개하는 일화는 젠소가 아니라 젠소의 부인에 관한 내용이다. 한국YWCA 창립에서 김필례, 김활란 ,유각경은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그 중YWCA 설립을 위하여 제일 먼저 활약한 이는 아마도 김필례라 하겠다. 그는 한국개신교 발상지인 황해도 소래에서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태어나 소래학교와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거쳐 일본 여자학원에서 유학하였다. 방학이면 귀국하지 않고 일본YWCA 기숙사에서 모자란 공부를 하였는데 그 때 처음으로 YWCA의 사업과 정신을 접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도 YWCA를 설립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바로 우리사회에 YWCA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별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2월에 미국YWCA 세계부에서 조선에 YWCA설립을 돕고자 위원단을 파견하여 정신 여학교 안겐소(Mrs.John F Genso) 선교사 집에 머물며 재경 여성지도자들을 초청하여 YWCA의 이념과 조직활동 등을 소개하였으나, 그들이 일본YWCA의 지회로서 조직되어야한다는 조건을 내놓아 우리 측에서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젠소 부인에 관한 일화를 읽다보면, 남성 위주의 시대적인 선교적 분위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한 젠소 부인의 선교적 헌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또한 그를 통해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많이 도전을 받으며 선교적 도움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이 원한다면, 그 누구도, 어떠한 시대적 배경도 절대 막지 못함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작성일:2020-06-21 00:40:07 182.231.2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