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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59/Conrow Marion Lane(1894-1986, M)

닉네임
정지훈
등록일
2020-06-22 19:07:36
조회수
77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_59_정지훈.hwp (8320512 Byte)
Ⅰ. 기본 사항

1. 이름: 마리온 레인 컨로우 (Marion Lane Conrow) / 한국명: 간의로
2. 생몰연도: 1894.12.03. Freehold, Monmouth Co, NJ - 1986 .03. 05 oulder, Boulder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감리교 선교회
4. 한국선교기간: 1922 - 1962 (중간에 발생한 경력단절은 연표에서 소개할 예정)
5. 연표

1894: 12월 3일에 Freehold, Monmouth에서 출생
1904: 위치타로 이사,
1907: 이곳에서 College Hill 감리교 교회의 교인이 된다.
1909 - 1913: 위치타 고등학교에서 수학
1914 - 1918: Fairmount College에서 수학
1918: Fairmount College (현재는 Wichita University)에서 B.A 학위를 수여
1918 - 1920: Mulvane, Kansas의 고등학교에서 선생으로 재직
1921 - 1922: Bleoit, Kansas에서 교사로 재직
1922: 한국에 입국하여 본격적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함
1922 - 1940: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작함
1920: 보스턴 대학에서 M.A학위를 수여함
1937: 시카고 대학에서 고급과정을 수료함
1940 - 1948: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잠시 귀국
1941 - 1948: Dean of Woman 과 Mcdendree 대학에서 영어교수로 재직
(Mcdendree 대학에서는 여성학장으로도 재직)
1941 - 1943: (같은 시기) Wichita city, Kansas에서 Y.W.C.A를 1년간 담당해서 지도함
1944 - 1947: Methodist Board of Missions 뉴욕 지부에서 부 사무총장으로 역할을 함
1948 - 1950: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화여대 영어 교수로 재직
1950 - 1952: 공산주의자라는 오해 때문에 일본에 2년간 채류, 이 기간에 Tokyo Woman's
Christian College에서 교수로 재직함
1952 - 1953: 6.25 전쟁 도중, 학교가 미군 방어선인 부산 아래로 이전해 그곳에 머물며
교수직을 계속함
1956: 이화여대 명예 박사가 됨
1960: 칸로 장학재단이 설립되게 됨
1962: 선교사 사역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함
1963: 위치타 주립대학에서 annual Almuni Award를 수여함
1986: Wing of Frasier Meadows Manor의 병원에서 오후 5시 25분경 사망

6. 가족관계
아버지: Henry Smock Conrow (1861-1945)
어머니: Mary Lavinia Perrine (1865-1915)

Ⅱ. 선교사 소개

1. 미국에서 촉망받던 재원이 미지의 땅, 조선의 선교사로 오다

그녀는 위치타 고등학교에서 수학한 후에 위치타 주립대학에 진학하여 그곳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그녀는 1년간 안식기간을 보내면서 보스턴에 있는 학교에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선교사로써 사역을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계속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후에 2차 휴식을 가지는 시간에는 시카고에 대학에서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했다.
그녀는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에 보내고 싶지 않은 재원이었다. 그녀는 실제로 캔자스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활동했다. 학력으로나 누리고 있는 삶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4년간 지속하던 교사직분을 내려놓고, 미국 감리교회로부터 파송받아 미지의 땅인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1920년대는 초반은 미국경제가 극도로 호황이었던 시기이다. 미국은 1929년 대공황이 오기 전까지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칸로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정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산업발전에 따른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녀는 영어교사였다. 매우 필요한 직업이었고, 어떤 의미에서 매우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한 그녀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치하에 있던 나라에 외국인 선교사가 오는 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2. 이화여대 교수로 사역하게 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때부터 40년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선교사가 되었다. 당시에 그녀는 위치타 대학에서 이화여자대학교를 후원하기 위해 파견한 것이었다. 1925년에 이화학당은 대학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문과 및 음악과가 설치되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영어 및 영작문을 가르치게 된다.
그녀는 이화여대의 5대 총장인 A.진네트 월터가 총장으로 있을 당시 한국에 와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월터는 체육을 담당하면서도 학업지도나 행정적인 면에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그랬던 월터를 도운 것이 또한 칸로이다. 칸로 선교사님은 월터와 모리스와 함께 ‘한국 클럽’을 조직하고 한국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했다. 이 부분은 후에 좀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3. 원치 않게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선교사님의 사역을 더 자세히 보기 이전에 칸로 선교사님께서 국 내외적인 상황과 내부적 선교상황의 어려움 때문에 잠시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선교사님은 감리교 소속 선교사님이었는데, 감리교 선교 상황이 1940년대에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감리교 선교회는 직전까지 한국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교육사업 뿐 아니라, 다양한 민간 사업을 병행하면서 한국사회에 필요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
그러나 1940년대부터 선교부 재산에 대한 갈등이 상당하게 발생하게 된다. 정춘수와 양주삼의 갈등관계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주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미일관계의 악화로 한국에서 철수할 때, 선교부 3개 재산(미감리교회 조선선교부 재산, 남감리교회 조선선교부 재산, 미 감리교회 전선여선교부 재산)의 관리를 양주삼에게 주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 의하면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각 기관 등 일체의 재산을 현직 감독과 이사에게 주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본과 달린 각 선교부에 속한 재산을 양주삼 막사에게 위임했다는 것은 양주삼 박사 외에는 정황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두고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양주삼의 노년계획과 관련되어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또한 여선교회가 교회법 99조 규정에 따라 부인회로 넘어가게 된다.
이런 와중에 1940년 10월 9일에 전쟁이 가까워 올 조짐이 보이자 미국 정부는 갑작스럽게 귀국을 통고하였다. 이 때 칸로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 선생들이 생이별을 해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미일 관계의 악화와 더불어 이런 국내외 적인 문제 때문에 선교사님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이화대학교를 두고 잠시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광복후 1946년도, 전임교장 아펜셀라를 비롯한 교수들이 복귀하는 과정에 칸로 선교사님도 함께 복귀하여 다시 학생들과 학문을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Conrow는 1950년 이화 대학교 (Ewha University unitl)에서 공산주의 위협 때문에 일본으로 대피했을 때 영어를 계속 가르쳤다. 그녀는 1952년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 여성 기독교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 왔을 때, 대학은 유엔 노선 뒤에서 부산으로 옮겨졌으며 1953년까지 그곳에 남아있었다. 이화 콘로우(Ewha Conrow)는 캠퍼스에 잉글리쉬 하우스를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이화의 스승이 되다

선교사님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선교사역을 지속적으로 해 나갔다. 그녀는 이화대학교에서 한국의 미래들을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선교사님은 6.25 전쟁이 한창인 당시에도 부산 이남에서 해야 할 사역들을 충실하게 감당하셨다. 그런 그녀의 사역을 이화대학교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화대학은 그녀를 조선인의 친구가 되어준 3명의 스승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선교사님의 한국을 향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기독교 정신은 그녀의 책에 잘 들어나 있다. 이화여대는 현재도 이 책을 매우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화여대는 칸로 선교사님에게 1956년에 이화대학 명예 박사를 수여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가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 영학관 2층에는 얼마전까지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칸로기념실>이 204호로 배정되어 있었다. 조사해 본 결과 현재는 그렇게 사용되고 있지 않음에도 이화여대는 그녀를 이화의 정신을 세운 스승으로 기억하고 있다.
1960년 이화에 그녀의 이름으로 장학금이 설립되었다. 위치타 대학은 1963년 연례 알무니 상을 수상했다. Conrow는 National Mortar Board Honor Society의 회원이었다. 명예 법의학 협회인 Pi Kappa Delta; 명예 극적사회인 Alpha Psi Omega; 그리고 Delta Gamma Sorority. 그녀는 1962년에 선교사업에서 은퇴했다.
한국에서 40년동안 봉사하는 동안 컨로우 선교사님은 기독교와 인도주의로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교육의 기초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작성일:2020-06-22 19:07:36 121.128.25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