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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57/Turner, Arthur Beresford

닉네임
김철호
등록일
2020-07-01 21:05:16
조회수
620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3반_57_김철호.docx (571072 Byte)
터너 선교사 / Turner, Arthur Beresford (1862-1910)
I. 기본사항
1. 이름 : Turner, Arthur Beresford / 터너 / 한국명: 단아덕(端雅德)
2. 생물연도 : 1862. 8. 24. – 1910. 10. 28.
3. 출신 및 소속: 영국, 영국 성공회 선교사
4. 한국선교기간: 1896 12. 2. – 1910. 10. 28.
5. 연표
1884. 옥스퍼드대학 [Marlborough College and Keble College] 졸업
1887. 옥스퍼드 교구에서 성공회 부제로 서품
1888. 사제 서품
1896. 12. 2 영국성공회 선교사로 내한 서울대성당, 공덕동성당, 인천성당에서 사목
1901. 건강 문제로 본국 귀환
1902. 다시 한국으로 돌아옴
1903. 2. 선교지원자들을 얻기 위해 본국에 다녀옴
1903. 3.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립 및 초대 이사로 선출
사사부 회장 겸 체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
1904. 7. 초대 주교 코르프 사임후 제2대 한국주교로 임명
1905. 1. 25.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주교로 서품
1907. 6.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장 취임 및 새 회관 건립 지휘
1908. 김희준・송세준 등 한국인 8명을 전도사로 임명
1910. 2. 성직자와 교회대표자회의를 소집
1910. 중국・한국 및 홍콩 YMCA 전체위원회 참석
1910. 10. 28. 인천 성베드로병원에서 사망
1910. 11. 1.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
II. 선교사 소개: 터너(Turner, Arthur Beresford, 1862-1910)

졸업 후, 그는 옥스퍼드셔의 와틀링턴과 윌트셔의 다운턴에서 큐레이션에 앞서 Ripon College Cuddesdon에서 서품을 위해 공부했다. 4년 더 뉴캐슬 대성당에서 수석 큐레이터로 근무한 후, 그는 USPG 선교팀의 일원으로 한국에 갔다. 이후 14년 동안 그는 급부상하는 한국교회의 헌신적인 신자였다. 저명한 크리켓 선수인 그는 "힘이 한창일 때" 혈액 중독으로 사망했다.

1. 시대적 상황
터너가 활동했던 시기는 한말・일제 침략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 개신교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는 미국, 영국, 캐나다와 호주 등이었으며, 일제와 선교사들은 서로 의구심을 갖고 견제했다. 일제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며 한국인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최대한의 선교의 자유와 기독교 교육의 자유를 확보하며, 유아기의 교회를 보호 및 육성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한 마디로, 일제와 선교사들은 상호 협력하고 이용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사회정의의 실현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외쳤으며, 악에 대한 저항보다 인내와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복종을, 사회 구조적인 폭악에 대한 관심보다 개인적인 죄악에 관한 회개를 주제로 하는 설교를 했다.

이 시기의 선교사들은 약자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고는 할 수도 있겠지만, 강자의 입장에서 강자의 논리를 약자에게 순응하도록 설득 및 강요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터너가 활동했다.

2. 성공회 제 2대 주교 터너
터너는 1896년 12월 2일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여서 서울대성당, 공덕동성당 및 인천성당에서 사목하였다. 그리고 1904년 7월 초대 한국 주교인 코르프가 주교직을 사임하자 그 후임 주교로 임명되어 1905년 1월 25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노일전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회 발전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서울・인천・강화에 제한되었던 선교 범위가 수원 및 충북 진천지방에 까지 확장되어 1910년에는 전국 31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는 특히 교회의 자립을 강조하였는데 당시 설립된 30여 교회가 모두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고 있었으며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고아원・학교 등의 사회사업기관까지 자립의 기틀 위에 세워놓았다.
터너는 그가 활동했던 일제치하 당시의 조선을 바라보며 “지금 단계로는 한국인에게 기독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가지지 못한 확고한 입장과, 목적의식을 확보할 수 있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진솔한 신앙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회만이 한국인의 희망이 될 수 있고 이 때가 선교활동에 있어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여겼다.
그는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의 신앙 원리를 가르치고 직접 실천하였다. 첫째, 현실 문제를 도외시한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둘째, 성공회 신자들은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절대로 동참해서는 안 되고 불의와 싸우는 항일운동에 참여하여야 한다. 셋째, 기복적인 신앙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순수한 동기로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는 외국인 선교사가 교회를 직접 경영하면서 모든 경비를 전담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므로 한국교인들에 의한 자치와 자립을 추구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의 자치적 제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아끼지 않아 1908년 김희준 ・ 송세준 등 한국인 8명을 전도사로 임명하여 이들로 전국 각 지방 전도를 담당케 하였고 1908년에는 신자총회를 소집, 최홍심을 회장으로 뽑아 평신도 중심의 의회기구를 만들었다. 1910년 2월에는 성직자와 교회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적 교회정치제도를 확립시켰다. 다시 말해서 그의 대에 와서 한국의 성공회는 교회조직을 갖추게 되었고 토착적인 교회 형성을 지향하는 성공회의 전통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 스포츠 선구자 터너
터너는 또한 YMCA 운동가로 한국 YMCA 설립과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YMCA국제위원회에서 파송한 질레트(P. L. Gillett) 및 주한 선교사 게일・존스・알렌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YMCA 창설에 착수하여 1903년 3월 황성기독교청년회로 그 창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초대 이사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을 뿐 아니라 사사부 회장 겸 체육위원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0년 김필순・윤치호・여병현 등을 인솔하여 중국에서 개최된 『중국・한국 및 홍콩 YMCA 전체위원회』에 참석하여 한국 YMCA의 지위를 일본 YMCA하에 두려는 일제의 정책에 정면 대항하기도 하였다.

4. 터너의 사회적 역할
터너는 여성 교육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1908년 5월 28일 강화 온수리에 성모마리아여학교(The Holy Mother Mary’s Girls School)가 그 효시이다. 그는 “현숙한 여성”이 되도록 교육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서울고아원 소관으로 여학교가 있고, 수원에서 여학교를 개교할 터이니 그 재정은 영국에서 한 부인이 담당하였다. 지금 한국 사정을 살피건 데 교육이 가장 급하고 또한 여자도 남자와 같이 교육하지 아니하면 전국에 문명이 온전치 못하다”고 강조했다. 각 교회마다 부설 학교를 설립하여 1910년 이전에 이미 전국에 8개 학교가 설립되어 여성의 기본상식 및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을 비롯하여 고아원과 학교기관도 자립시켰다. 1907년 진천・병천・여주 지방에 병원을 설립하였고 천안 부대 북일 학교, 수원・진천・강화・ 병천의 진명 학교, 인천 영어 학교를 설립했다.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설립하여 실업 교육을 실시하고 교회를 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5. 터너의 정치적 입장
터너 주교의 한국 선교 활동 시기는 한 민족의 수난기였다. 1904년 을사 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실제적으로 한국을 점령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철저한 지배와 효과적인 통치를 위하여 경비 절감이라는 명목으로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때 한국인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서울을 비롯한 각처에서 항쟁이 계속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터너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일본이 취한 정치적 조치가 옳던 그르던 간에 한국 백성들을 평화적이고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로는 한국인에게 기독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가지지 못한 확고한 입장과, 목적의식을 확보할 수 있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진솔한 신앙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언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터너는 YMCA의 회장으로 독립운동에 분명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이 터너의 정치적 입장을 정확하게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다. 『대한성공회 백년사: 1890-1990』에서 이재정은 터너의 정치적 성향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을사늑약에 대한 그의 평가는 ‘잘한 일’이었다. 사후처리가 매끄럽지 않아 다만 한국인의 반발을 일으켜 시끄럽게 된 것이 탈일뿐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상당한 이유에서 (일본 정부가)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옳던 그르던 간에 한국 백성들을 평화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데에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1907)

6. 터너의 죽음
터너는 성공회의 주교로, YMCA의 지도자로 과중한 업무에 종사하다가 결국 과로로 건강을 해쳐 인천 성 베드로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받던 중 1910년 10월 28일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성 미가엘 성당으로 옮겨져 10월 31일 기차편으로 서울에 운구되어 수 많은 내외 귀빈의 영접을 받고 11월 1일 양화진 성공회 묘역에 안장되었다.
터너의 죽음에 대하여 게일(Gale, J. S.) 선교사는 추도사를 통해 "터너 주교의 죽음으로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14년간 그는 우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똑같은 아주 친절한 주인이며, 기쁨을 주는 손님이었고, 확고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모든 친구들을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작성일:2020-07-01 21:05:16 49.163.18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