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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22/Bethell, Ernest Thomas

닉네임
김윤기
등록일
2020-07-02 22:53:10
조회수
65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22_김윤기.pdf (794396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Bethell, Ernest Thomas/토마스 E. 베델 /한국명: 배설(裴設)

2. 생물연도: 1872. 11. 03(영국) ~ 1909. 05.01(한국, 서대문)

3. 출신 및 소속: 영국, (잉글랜드 성공회교도)

4. 한국체류기간: 1904.03.10 ~ 1909.05.01
5. 연표
1872년 11월 3일 영국 남동부 항구도시 브리스틀 출생 3남 1녀중 장남
1885년~1886년 지역 유일 학교인 머천트벤처러스(Merchant Venturers School) 스쿨 졸업
1888년 (16세) ~ 1904년 (32세) 까지 16년간 일본에서 아버지가 세운 니콜사(Nicoll&Co)
무역상 활동
1896년 아버지가 무역업자들과 세운 무역회사 프리스트, 마리안, 베델, 모스앤코리미티드의 고베 지점 운영
1899년 동생 허버트(Herbert)와 베델 브라더스 부역상 설립
1900년 마리 모드 게일과 (Mary Maude Gale, 1873. 11. 08 ~ 1965. 07. 02)년 고베에 서 결혼, 외아들 허버트 오웬
1904년 러일전쟁 발발 때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내한.(3월 10일)
1904년 고종황제 베델에게 성명 “배설(裴設)”부여, 편의제공
1904년 7월 18일 양기탁, 토마스 코웬과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 창간
1905년 코리아 데일리 뉴스 국한문판 발행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일본제국비판 전개
1907년 영국 『트리뷴』지에 을사늑약을 부인하는 고종황제의 칙서 게재
1908년 일본인 배척 선동혐의로 영국 상하이 고등법원에서 유죄판결 상하이에서 3주 구 금
1909년 5월 1일 심장비대증으로 인한 사망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1995년 영국대사관 한국프레스센터와 공동 “베델언론인장학금” 제정

6. 가족사항
부모: 토마스 핸콕 베델(Thomas Hancock Bethell), 마서 제인 홀름(Martha Jane Hollom)
부인, 자녀: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


Ⅱ. 선교사(?) 소개: 토마스 E. 베델(Bethell, Ernest Thomas, 1872 ~ 1909)

1. 무역상에서 언론인까지

베델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베델의 할아버지 토마스 베델은 브리스톨 근처 클리브던에서 바지선을 운행하던 사람이었다. 바지선을 소유할 정도라면 중류 정도의 생활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베델의 아버지 토마스 핸콕(Thomas Hancock Bethell)은 20살이었던 1870년 마서 제인 홀름(Martha Jane Hollom)과 결혼하였다. 제인 홀름의 아버지, 곧 베델의 외할아버지인 존 홀름은 영국 성공회의 전도사였다. 베델은 토마스 핸콕의 네 자녀 중 장남이었다. 베델의 아버지 토마스 핸콕은 188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니콜이라는 사람과 함께 고베시 42번지에 니콜 앤드 컴퍼니라는 소규모 무역상을 차렸다. 베델은 브리스톨의 명문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을 졸업한 후 1888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나이는 17살이었다. 베델 형제 세 명은 새로운 무역상을 설립해서 아버지 토마스 핸콕의 영업을 이어받았다. 베델의 무역상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영국 물품을 일본으로 들여오고 일본의 골동품 등을 영국에 수출하는 업종이었다. 1899년 베델은 두 동생들과 베델 브라더스를 설립하였다. 이 무역상 설립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던지 이 해 영국에 한 번 다녀왔는데, 그때 26살이던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 1873. 11. 8. ~ 1965. 7. 2.)을 만나 이듬해 고베의 기독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베델은 1888년부터 1904년 2월까지, 15년간 고베에서 살았다. 베델은 천성이 외향적이고 활발하였다. 운동을 좋아했고, 체스도 잘 두었다. 술과 담배를 즐겼고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청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만한 실력이 있을 정도로. 음악에도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베델은 일본에서 한때 돈을 벌었지만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일본 사업 흥망사
1886년(14세) 아버지 토머스 핸콕, 이모부 P.A, 니콜과 일본 고베에 ‘니콜 앤드 컴퍼니’ 설립
1888년(16세) 토머스 핸콕, 영국 런던에 ‘베델 앤드 니콜’설립, 베델, 아버지 사업 돕고자 일본으로 건너감
1891년(19세) 토머스 핸콕·니콜, 동업 끝내고 각자 사업 나서
1896년(24세) 토머스 핸콕, 새동업자들과 ‘프리스트·마리안스·베델·모스 앤드 컴퍼니’ 설립
1889년(27세) 토머스 핸콕, 동업 회사와도 사업 포기 / 베델, 아버지 사업 물려받고자 동 생과 런던에 ‘베델 브러더스’ 설립 / 한때 제조업 공장을 추가 설립하는 등 승승장구
1904년(32세) 베델, 일본 업체와의 잇따른 소송과 형제간 불화로 사업포기, 한국행

베델이 한국에 첫발을 디딘 날은 1904년 3월 10일이었다. 러일전쟁이 터진 지 한 달 뒤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통신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1904년 4월 16일자 신문에 경운궁 화재를 일제의 방화로 다룬 “Korean Emperor’s Palace in Ruins” 제호의 기사를 처음이며 마지막 특종 기사를 싣고 해임되었다. 해임 사유에 대하여 베델은 “크로니클지의 지시는 그 신문의 편집 방향이 일본에 우호적이이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기사도 친일적인 것이어야 한다 당시 한반도의 사정을 직접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크로니클은 나를 해고했다. 그 후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하였다.”라고 밝힌다.

2.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은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을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신문을 발행하였다. 창간에 앞서 1904년 6월 29일에는 견본판 신문을 먼저 만들었고, 정식 창간한 날은 20일 뒤인 7월 18일이었다. 창간 당시에는 하루에 6면 발행으로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4페이지와 한글판 <대한매일신보> 2페이지로 영문판 위주의 2개 국어 신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8월에는 두 언어 신문을 분리하여 국한문판 신문과 영문판 두 개의 신문을 발행하였고, 1907년 5월에는 한글 전용 신문을 새로 창간하여 3개의 신문으로 확대하면서 장차 한ㆍ영ㆍ일 세 나라의 외교관계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 신문이 한일 양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에 큰 장애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베델은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신문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까지 달아 저항하였다.

3.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영국언론인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반일 민족운동으로 확대되던 무렵인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되었다. 창간 4일 만인 7월 22일자에는 외부협판 윤치호가 쓴 「황무지 개간 계획」이라는 글을 독자투고란에 게재하여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하였다.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곧 일본 통감부가 발행하는 영자지 와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논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강도를 더해갔다. 1905년 11월 27일에는 순한문과 영문 호외를 발행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 호외는 한쪽 면에 「한일신조약 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다른 한 면은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전말을 실었다.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했던 ‘재팬 크로니클’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개재된 영문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했고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은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 사람들과 서방 나라에 전파됐다.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한국민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1907년 9월경에 이르러서는 세 가지 신문의 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어설 정도였다. 이는 당시 발행된 다른 신문 전체 발행 부스를 상회하는 수치다.

또한 일본인 다나카가 개성에 있는 경천사에 있는 석탑을 일본으로 빼돌리려 했는데, 베델은 다나카의 만행을 기사로 실어 국내외의 수많은 독자들이 다나카의 만행을 알게 되었다. 베델을 통해 알려진 경천사지십층석탑은 전세계인과 심지어 일본 사람들의 반발마저 이끌어내어 1918년 일본은 석탑을 경복궁으로 보내게 된다. 이것은 현재 국보 86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안에 있다.

4. 일본의 방해와 공격

일본은 베델과 그의 신문을 근본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안을 더욱 적극적으로 강구하였다.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에 더욱 강력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으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를 무력화하고 마침내는 폐간시키려는 작전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당시 서울에서 영국인 하지(J.W.Hodge)가 발행하고 있던 영문 주간지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대한매일신보>에 대항하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본측 요청을 대놓고 무시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1월 16일에 영국 <트리뷴>지에 을사늑약을 부인하는 고종황제의 칙서가 게재되면서 베델에 대한 추방 공작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베델에 대한 추방공작이 본격화 된 것은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강제퇴위되고 한일신협약이 체결된 이후부터이다. 통감부는 영국 측에 여러 차례 끈질기고 강력한 태도로 베델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베델과 그의 신문은 한국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베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의 반일 감정은 더욱 고조될 것이었다. 의병들의 무장투쟁도 이 신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일제는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내부 고시를 통해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발매 금지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영국은 일본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지 한동안 망설이면서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베델을 재판에 회부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베델은 두 차례나 재판에 회부되었다.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열렸다. 주한 영국 공사가 재판을 담당한 영사재판이었다. 일종의 약식재판이었다. 두 번째는 상하이주재 영국 검사와 판사(F.S.A. Bourne)가 서울에 와서 1908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4일 동안 서울 덕수궁 옆 현재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던 영국 총영사관에서 벌인 정식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베델은 3주간 금고에 만기 후 6개월간 선행 보증금으로 피고인 1,000달러, 보증인 1,000달러를 즉시 납부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베델은 상하이로 호송되어 3주간 금고생활을 마치고 1908년 7월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사 사장직을 자신의 비서였던 앨프리드. W.마넘에게 맡겼다. 한편 일본제국은 세 번째 탄압 수단으로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탹을 국채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탄압하려 하였으나 양기탁의 무죄가 선언되어 실패하나 무자비하고 강압하는 압력을 가하여 두 사람을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5. 한국의 독립운동가 베델과 그의 죽음

스웨덴 출신의 종군 기자였던 아손 크렙스트는 당시 만났던 베델에 대해 “이 사람은 일본인을 패스트 대하듯 증오하였고, 한국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정치 음모를 만천하에 폭로하는 데 전 생애를 건 사람이었다.” 라며 그와의 만남을 회고했다.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라고 한 베델은 1909년 5월 1일 37살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의학적인 사인은 심장확장이었으나, 그 전 해에 있었던 자신에 대한 재판과 상하이에서의 금고형, 양기탁 재판 때의 국채보상의연금 문제로 조사받은 일 등의 긴장이 겹쳐 건강을 크게 해친 것이 복합적인 원인이었다. 베델의 죽음에 대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애도하였다. 베델은 한국인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영국 목사 터너가 장례식을 인도하고 한국 목사 전덕기가 기도한 뒤 성분하였다. 장지까지 따라온 인원은 내외국인 합쳐서 1,000여명이었다.

고종황제는 그의 죽음에 대해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양기탁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국의 남자가 한국에 와서, 한 신문으로 깜깜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도 급히 빼앗아 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다 하노라” 라는 한시를 썼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전국 각지에서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베델이 죽은 지 5개월이 지난 1909년 9월에도 평안북도 희천의 대명학교에서 신보사에 조의금을 보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많았다. 짧지만 정의로웠던 베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베델이 죽은 지 1년 뒤인 1910년 6월, 비석이 완성되었다. 앞면에는 한자로 ‘대한매일신보 사장 대영국인 베델의 묘’라 쓰고 뒷면은 당대의 논객 장지연이 지은 비문을 새긴 한국식 비석이었다, 베델은 죽은 후에도 일제의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일제는 이미 새겨진 비문을 깎아 없애는 옹졸한 짓을 저질렀다. 편집인협회가 전국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작은 비석 하나를 더 세운 때는 1964년 4월 4일 ‘신문의 날’이었다. 서예가 김응현의 글씨를 받아 깎인 비문을 복원하였다.

그의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대한독립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도 대한독립의 염원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1968년 3월 1일에 우리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해외 독립유공자로는 처음으로 국가유공자 명패를 손녀인 수잔 선생의 자택에 달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한 그의 희생에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할 것이다.

1995년 주한 영국 대사관에서는 베델의 헌신과 공로를 기리고자 ‘베델 언론인 장학금’을 제정하였다.

베델의 부인 마리 모드는 신문사가 자금 난에 허덕일 때 사재를 헌납하고 남편이 별세한 뒤에는 모든 재산을 그대로 두고 오직 관을 덮었던 태극기와 영국기, 그토록 사랑하던 한국인들이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와 조문, 남들은 휴지라고 하는 빛 바랜 남편 발행 신문만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외아들과 손자에게 항일 투쟁사를 가르치며 평생을 ‘한국 사랑’으로 살다가 1965년 7월 2일 90세로 별세했다.


6.베델에 관한 기타 사항

베델이 ‘프리메이슨’ 활동을 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리메이슨은 중세 교회 건축가 집단에서 출발했다가 기독교 보수성에 반발해 조직된 비밀결사체로 알려져있는데, 정성화 명지대 사학과 교수와 한국학 자료 수집가 로버트 네프가 함께 쓴 ‘서양인의 조선살이’(1882~1910)에는 베델이 조선에서 프리메이슨 설립 멤버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프리메이슨 서울지부인 ‘한양롯지’ 홈페이지에도 베델을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영국 출신 역사 연구가인 에이드리언 코웰은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1908년 영국 법원 판결에 따라 중국 상하이에서 3주간 복역하고 돌아온 뒤에 서울에서 가입했다고 전한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에서 프리메이슨이 막 생겨나던 때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요직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안신 배재대 복지신학과 교수는 그의 논문 ‘한국 프리메이슨의 역사와 특징’에서 ”프리메이슨은 신종교 성격을 띤 엘리트주의 모임“이라면서 ”다만 베델이 조선에 왔던 시기 프리메이슨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친목과 자선을 위한 형제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Ⅲ. 사진 및 기타자료(사진자료는 첨부화일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1.대한매일신보 창간호

2.어니스트 베델 토마스의 사진

3.베델의 가족 사진

4,베델과 그의 동역자 양기탁

5.배설 만사집

6. 배설 흉상

7.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베델의 묘비

8.베델이 숨을 거둔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

9.베델의 장례식 행렬

10.베델의 생가( 54 Egerton Road, Bishopston, Bristol)

11. 베델이 공부한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


Ⅳ.수정 및 보완부분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에 대한 자료를 수정 보완하면서 먼저 기본 사항의 연표를 보완했다. 기존 조사에서는 그의 형제가 3남 2녀로 되어있었으나 조사 결과 여자 형제는 1명이라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델의 학교 연도도 수정했고, 주요 연표를 추가했다. 특히 그의 결혼년도가 잘못기술되어 있어서 수정했다.

2부 실제적인 그의 소개파트에서도 보완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의 결혼식은 고베의 한 교회에서 치루어졌으며 그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추가했다. 또한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의 사업에 대한 흥망사를 첨부했다. 또한 그가 크로니클지에서 해임된 이유를 설멍했다. 이후 대한매일신보를 세우고 그가 어떻게 일본에 맞서 한국의 상황을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려 했는지에 대한 일화들을 첨가했다.

대체로 전방위적으로 베델에 대한 자료 정리를 실시했다. 심지어 그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했었다는 것도 정보 차원에서 기술했다. 그리고 많은 사진 자료들을 첨부했는데 대한매일신보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서울신문의 베델 특집 기사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베델을 언급한 단행본을 통해서도 폭넓은 시각에서 그를 조명할 수 있었다. 시중에는 베델 전문가로 알려진 정진석 교수가 쓴 책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영국 언론인 배설』이란 책도 있었는데, 코로나의 상황 가운데 미리 구입하지 못한 것이 뭇내 아쉬울 뿐이다. 비록 그는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짧았던 기간에 타민족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외국인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작성일:2020-07-02 22:53:10 221.140.15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