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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33 / Arthur. T. Pierson

닉네임
배진현
등록일
2020-07-02 23:18:37
조회수
620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3반_33_배진현.pdf (814698 Byte)
기본사항



선교사소개
개요
평택대학교는 ‘아더 태펀 피어선 : 이하 피어선’의 유지에 따라 1912년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에 설립한 초교파의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을 전신으로 하여 1913년 9월 1일, ‘재단법인 피어선 기념성경학원 유지재단’으로 설립되어 현재에 이른 곳이다.

미국 등의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학교법인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다. 가령 서울 신촌의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방에 이러한 선교사의 흔적 혹은 유지를 이어받은 학교법인 있는 것은 과히 흔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 바이다.

그렇다면 피어선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한국과는 어떤 관계가 있고, 그의 어떠한 업적에 의하여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보스턴 대학은 피어선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피어선, 선교이론가

19c 후반 미국 복음 주의 선교운동을 촉진시켰음,
성경학자이자 연설가/설교가로서 명성이 높았고, 포트스트리트 교회 목사, 베다니 교회 목사, 선교사 훈련학교 , 선교사업가 등으로 명망이 높음
선교의 위기등을 비롯한 저술가임
YMCA의 발기인이자, SVM의 발기인
드와이트 무디, 스펄젼, 등과 교류를 하였음
1896년 침례를 받은 후 교파에서 파문을 당했지만, 계속 장로교인으로서 예배를 지켰음
동아시아 선교에 힘썼지만 병을 얻어 브루클린으로 돌아가 죽음


출생 및 성장
피어선은 1837년 3월 6일 뉴욕에서 10남매의 9번째 그리고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같은 해 무디와 존 워너 메이커 그리고 런던의 스펄젼이 태어났다. 같은 해 태어난 이들 네 사람이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 역사는 물론, 세계 선교사적 차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일이다.

피어선의 출생은 그의 조상이 1639년 영국 국왕의 명령을 받아 매사추세츠에 도착하여 미국에 정착한지 약 200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피어선의 조상 중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한 사람은 뉴왁(New ark)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의 초대목사였던 아브라함 피어선이었다.

주민들이 그들의 마을을 뉴왁(New ark)이라고 고쳐 부른 것은 그의 출생지인 영국의 Newark-on-the-Trent의 지명을 따왔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 피어선의 후예들은 현 예일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의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피어선의 선교적 열정이나 복음적 설교의 능력이나 학문적 깊이가 한결같이 그의 조상들의 신앙적 유산 때문이었다고 후대 평가자들은 밝히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코네티컷 주 브랜포드(Branford)에서 피어선 목사를 따라 이사 온 사람들은 엄격한 생활의 규범을 강조한 청교도들이었는데 이들은 신정주의 원칙에 입각한 첫 교회를 설립하였다. 즉 교인이 아닌 사람은 투표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 피어선 목사의 아들 아브라함 피어선 2세 역시 목사였다. 그는 예일대 설립자 중의 한 명이며 초대총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의 부친인 스티븐 피어선은 장로교의 장로로 열 명의 자녀들을 장로 교인으로 길렀는데 피어선은 주일이면 스프링가 장로교회의 교회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이런 신앙적 배경은 그가 탁월한 기독교인으로서 뿐 아니라 학자적 수양을 쌓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피어선의 부모인 스티븐 피어선과 그의 아내 셀리는 자녀들에게 철저한 복음주의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기독교 사립학교로 보냈다. 나이 11세 되던 1848년 워싱턴 스퀘어에 위치한 마운트 워싱턴 교구학교에 등록하여 그곳에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12세 때 헬라어 신약성경을 읽었으며 뉴욕시 테리타운 언덕 허드슨에 위치한 고등학원에 입학하여 그의 뛰어난 학문의 능력과 시, 음악, 어학, 그리고 화술 등의 재능이 나타나 부모들로 하여금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대학과 학교에 다니도록 결정을 내렸다.



신학적 배경
피어선은 13세에 감리교회 특별 부흥회에서 중생을 경험했다.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 1852년 5월 28일 머서가(街)에 있는 장로교회 강의실에서 복음주의 청년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백인 계 무역업에 종사하는 청년들의 정신적 도덕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고안한 당시 영국인 조직인 YMCA에 관한 강의를 듣고 뉴욕 청년대표들을 포함한 백 명의 창립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853년, 피어선은 뉴욕 주 클린턴에 있는 해밀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시학, 수사학, 그리고 어학에 몰두하였고 동료 젊은 토머스 베일리 알드리히는 피어선의 시를 높이 평가해 줌으로 피어선의 문학적 포부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피어선의 고전적 시 형태는 그의 종교교육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도덕적 경건으로 넘쳤다. 이런 시적 감각은 그의 저작들에 반영 되었을 뿐 아니라 변증가로서의 삶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1857년 피어선은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시(詩) 기고란 외에도 헨리 비쳐(Henry Ward Beecher)가 창간한 「표준과 독립」(The Standard and the Independent)신문에 여러 편의 시와 평론을 기고하였다.

1860년에는 뉴욕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였는데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후에 성경이 역사와 과학 등에 대해 잘못된 진술을 포함한다는 고등비평이 힘을 얻었고 유니온신학교의 찰스 브릭스 교수는 1880년 이후 이 새로운 신학사조를 장로교에 들여왔다. 1892년과 1893년 장로교총회는 성경원전의 “무오성”을 선언하고 브릭스 교수를 장로교에서 정직시키기도 하였다.

이 후 유니온신학교는 성경원전의 “무오성”에 도전하는 대표적인 진보주의 신학교로 바뀌었다. 현재는 자유주의 신학의 총본산이며 종교다원주의와 범신론에 입각한 신학교로 완전 변질되었지만 그 당시 유니온 신학교는 선교의 열정에 불타던 피어선으로 하여금 성경을 변호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그렇기에 1860년대 초반, 피어선은 기독교에 대한 증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독교에 대한 증거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돌을 수집하고 놀던 어린 시절부터 자연 과학에 흥미가 많던 피어선은 과학과 신앙 사이에는 아무 모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의 자연학자이자 탐험가인 훔볼트(B. Von Humboldt)와 프랑스의 파스칼(B. Pascal)에 대한 대중적인 글쓰기를 좋아하기도 하였다.




국내적 업적
디트로이트 YMCA에 적극 참여하면서 피어선은 YMCA가 초교파적인 병기로서 청년들을 양성하는데 공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디트로이트 기독청년 연합회를 위한 건물과 체육관 구입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한동안 임시건물에서 성경연구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피어선은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한 외에 장로교단 일에도 적극 참여한다. 1872년에는 장로교 디트로이트 연맹을 조직하는 일에 앞장을 섰으며 1875년 피어선의 나이 서른여덟 되던 해에 미시건 대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교운동에 있어 가능한 한 중립적 위치에 서려고 애썼다. 하지만 1890년 이후 신학적 다양성에 대한 자신의 온건하면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서서히 바꾸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893년 세계박람회에서 노출된 신학적 다원주의가 피어선을 놀라게 하였으며 복음주의적 신학과 에큐메니칼적 관용 간에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생애 마지막 15년간, 그는 평신도 성경연구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고등비평이 주장하는 지성주의와 불경건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 전(前)천년주의 성경강해자의 주역이 되어 영국과 미국에서 성경에 굶주린 수많은 학생들을 양육하였다. 그는 진실한 근본주의자였으나 훗날 근본주의 운동을 특정 짓게 된 분파주의와 편협은 몹시 싫어하였다.

피어선은 성경강해에 관한 저술 및 「스코필드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편집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영적 생활을 강화하고 국제적 성경강해자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확고히 하였다. 그의 초기 저술들은 대개가 선교에 관한 것들인데 반해, 1895년 이후 저술의 대다수는「세계선교 논평」을 제외하고는 영적생활과 성경연구에 관한 것들이었다. 초점이 선교에서 케스윅 영성운동 및 성경강해로 옮겨간 것은 선교단체들 간의 신학적 논쟁을 피하려는 방법 뿐 아니라 성경적 근본주의로의 전환이기도 하였다.

이런 그를 훗날 많은 학자들이 진정한 근본주의자라 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피어선이 조지 뮬러를 따라 후천년주의자에서 전천년주의자로 전환한 것은 주림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그의 근본주의적 관심을 심화시켰을 것이라 본다.

선교 및 피어선기념성경학원
국내의 사역에 집중하던 피어선은 1910년 목회 50주년이 되던 해 허드슨 테일러의 초청으로 일본, 한국, 중국, 인도, 이집트 등의 극동지역 선교여행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질병으로 고통스러워 하였다고 전해진다.

한국에 와서(1910. 12. ~ 1911. 1.) 선교사들을 위한 성경강해를 하였으며,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도 성경을 공부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 받아서 성경학교 설립을 약속하였는데 질병이 심해져 고국에 돌아간 뒤에 곧 소천하게 되었다.

유족과 친구들, 후원자들이 피어선 박사의 유언을 따라 조선에 초교파적 성경학교를 설립한 것이 1912년 서울 서대문구 협성신학교 내에서 시작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다. 이 성경학원을 전신으로 하여 1980년 조기흥 선생에 의해 대학설립인가를 받았고 1981년 평택으로 학교를 옮겨 피어선성서신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90년 12월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여 피어선대학으로 개명하였으며 1996년에 근거지명을 따라 평택대학교로 재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저서 및 주요 번역서
지난 반 세기의 전진운동, 번역 안명준
아더 피어선의 생애와 신앙
아더 피어선의 생애와 설교
하나님의 능력, 번역 안명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선교의 기적
조지 뮬러전
케직 운동
신사도 행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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