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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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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 다시 올립니다.] 내한선교사/3학년2반25번/Hankins, Ida(1882-1964, MS)

닉네임
노경현
등록일
2020-07-03 23:04:19
조회수
59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2반_25번_노경현.hwp (1408512 Byte)
★ 3학년 2반에게는 선교사님들에 대한 기존의 연구 자료들이 늦게 전달이 된 관계로,
기존에 업로드했던 작성글은 삭제했고, 파일을 수정해서 다시 올려드리는 바입니다.


Ⅰ. 기본 사항

1. 이 름: 핸킨스 / Hankins, Ida / 한국명: 행길아다 혹은 신길아다
2. 생몰연도: 1882.08.21 ~ 1964.03.03.
3. 출신 및 소속: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 올리브 마운트 출생, 남 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11~1940

5. 연표
1882.08.21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 올리브 마운트 출생
1900~1903 State Normal and Industrial College(현재의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피바디 대학에서 석사 학위
1910 스카릿 성경학교에서 공부
1911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서울에서 한국어 공부
1912 배화여학교 교사로 취임, 자교교회에서 사역함
1914 제3대 배화여학교 당장으로 임명되어 2년간 봉직
1917~1920 송도(松都: 현재의 북한의 ‘개성’) 미리흠 여학교 교장으로 봉직
1920 호수돈 여학교 부교장으로 취임, 7년간 봉직
1931 미리흠 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 발전에 공헌
1931 콜롬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
1932 중부연회에서 목사안수 후 개성북부교회 부목사 시무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 귀국 후 선교본무에서 근무
1947. 9 선교사직에서 은퇴

6. 가족사항: 아버지(Stephen Decatur Hankins),
어머니(Ida Elizabeth Davis Hankins),
언니(Elizabeth Hankins Clarke)
남편은 없었고, 평생 독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됨


Ⅱ. 선교사 소개

1. 핸킨스의 생애

핸킨스 여선교사는 미국 남 감리회 목사이자 선교사이자 교육가이다. 그녀는 1882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 올리브 마운트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10년 스카릿 성경학교에 진학하여 1년간 신학공부를 하였다. 1911년 남 감리회 선교사가 되었고, 그녀는 한국의 서울에 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웠으며 이후 배화여학교의 교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1914년 제3대 배화여학교 당장(교장)으로 임명되어 2년간 봉직하였으며, 1917년 개성의 미리흠 여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1920년까지 봉직하였다. 1920년 역시 개성에 있는 호수돈 여학교의 부교장으로 취임하였고, 7년간 봉직하였다.

핸킨스 선교사는 내한선교사역 기간 동안 1917년, 1923년, 1930년 등의 기간 동안 안식년을 가지면서 이 때마다 미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 그녀는 피바디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마쳤고, 1931년 컬럼비아 대학에서는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1931년 그녀는 다시 미리흠 여학교의 교장으로 돌아왔고, 1932년 중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녀는 개성북부교회 부목사로도 시무했으며, 미리흠 여학교의 교장으로서 학교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그녀가 시무한 개성북부교회는 ‘삼포막’이라고 부르는 한 인삼창고에서 시작된 교회로서 1902년 부임한 크램(W. G. Cram) 선교사에 의해 발전하며 개성북부교회로 따로 분리했으며, 여성 선교사들이 사역함에 따라 자연히 여성교인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핸킨스는 1932년 미리흠 여학교의 교장으로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개성북부교회의 부목사로 목회에도 힘써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1940년, 한국에 들어 온지 29년 만에 일제에 의해서 강제 송환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그녀는 선교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47년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정확한 업적에 대해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배화여학교, 미리흠 여학교, 호수돈 여학교 등의 여자 학교에서 근무한 것을 보아서는 여성 교육에 대한 공헌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바이다. 당시 시대는 여성이 무시 받고 천대받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핸킨스와 같은 여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우면서 여학교를 함께 세웠는데, 여성학교는 남성학교에 비해 그 수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한 여성들은 한국의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개성의 경우 남 감리교회가 세운 호수돈, 미리흠 여학교는 각 분야의 우수한 인재를 배출한 명문학교이다. 이러한 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한 그녀는 기독교적 평등 세계관을 가지고 들어와서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고 한국 여성들의 지성을 일깨운 것으로 추정되는 바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한국의 여성 교육계에서 종사하였으며, 그럼에도 자신의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스카릿 성경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한 이후, 내한 선교 기간 중에도 안식년 기간마다 공부를 하며, 학위를 추가하게 되었다. 피바디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학업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새롭게 배운 학문들을 가지고 다시금 한국으로 돌아와서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다.


2. ‘선교사’로서의 소명

핸킨스 선교사는 어릴 적부터 “Bright Jewels”라는 단체를 비롯하여, 교회의 “초/중/고등부” 선교회에서 신앙 훈련을 받았으며, State Normal and Industrial College(현재의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재학 당시에도 성경과 선교에 대한 스터디 과정을 이수하였고, 또한 Y.W.C.A 에서도 추가적인 기독교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공립학교에서 일하면서 주일학교와 “Epworth League”에서도 전심을 다해 사역하고 봉사함을 통해, ‘일’과 ‘사역’과 ‘봉사’의 모든 측면에서 충분히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담임목사였던 N. M. Watson으로부터 선교와 관련된 내용의 시리즈 설교들을 듣고 나서, “훈련 된 교사들이 해외에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녀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느끼게 되어, 결국 스카릿 성경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뒤에, 한국으로 파송되어 1911년 9월 14일 부산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한국 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3. 핸킨스가 학사 학위를 이수한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핸킨스가 재학 중일 당시에는 State Normal and Industrial College라는 이름이었으며, 현재에는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North Carolina)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편, 미국의 주립 대학교들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동시에, 미국의 최상위권 공립대학교 “Top 5 퍼블릭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학교이기도 하였다.


4. 핸킨스가 선교학 과정을 이수한 스카릿 성경학교

미국 감리회 여선교부가 설립한 “스카릿 성경학교”는 당시에 보수적인 기독교 가치관을 수호하면서, 경건주의, 복음주의 신앙 사상을 기초로 예비 선교사들에게 현지에서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훈련시키는 학교였으며, 학교의 비전은 인도 선교사 윌리엄 캐리의 선교목표(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성취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를 채택하고 있었다.

또한 교육의 목적과 목표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마 28:19-20)을 성취하기 위해 세계 선교를 위한 실제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선교지에 설립된 교회와 선교사업을 하는 것이었으며, 선교지 사람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스카릿 성경학교”의 교육 과정은 감리교단의 보수적인 신앙전통, 선교 신학, 선교사로서의 영성훈련과정과 한국을 포함한 파송대상 선교국의 역사, 정치, 문화 등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소개함으로써 선교 사역에 대한 장・단기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스카릿 성경학교”는 아래쪽 5번 항목의 “피바디 대학”과 함께 1924년에, 현재의 “Vanderbilt University”에 합병되었다.


5. 핸킨스가 석사 학위를 이수한 피바디 대학교

“피바디 대학교”는 사회 복지 및 종교 교육의 분야에서 전문화 된 교육을 제공하였으며, 이러한 “피바디 대학교” 역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당시에,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고 기독교적 가치와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복음주의적 성향이 강한 곳이었는데, 피바디 대학교가 소재하고 있었던 미국 테네시주는 1925년에 소위, “원숭이(스콥스) 재판”을 통해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교육하는 것을 금지하는 버틀러 법안을 통과시킨 전례가 있을 정도로 보수적인 분위기의 기독교 지역이기도 하였다.


6. 핸킨스가 박사 학위를 이수한 컬럼비아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는 1754년에 설립되어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In lumine Tuo videbimus lumen)”를 표어로 삼고 있는 기독교 대학이며, 한편으로는 1920년대 진보주의 교육사상을 주도했던 듀이(Dewey, John), 숀다이크(Edward Lee Thorndike), 페리스 힐(H. S. Hill) 등의 교수진을 포함하고 있었던 학교이기도 하였다.


7. 핸킨스가 소속되어 있었던 미국 남 감리회 여선교회

당시,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신학 노선을 따르고 있었던 “미국 남 감리회 선교회”는 1874년 4월에 이방지역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업을 하기 위해 “내슈빌 여성 성경 선교회(The Woman's Bible Mission of Nashville)”를 설립했다. 이 시기는 미국 여성들의 권위가 향상되던 시기로서 여성들의 정치참여와 사회활동의 폭을 넓혀가는 여권운동이 전개되었고 동시에 국내외 여성 선교사 파견을 위한 선교 지원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또한 남 감리회 여성 선교회에 재정적인 원조를 보내는 사업을 펼치는 한편, 국내 사업부에서는 여성을 고용하여 빈곤층을 위한 조직적인 심방과 성경 교육사업을 진행하였다. 1882년에 이르러 “여성 성경 선교회(Woman's Bible Mission: 1870년 설립)”와 통합하여, “1894년에 해외 여성 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로 명칭을 변경하고 선교의 대상을 여성과 어린이로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까지 남 감리회 해외 여성선교회는 30개의 도시에 선교부를 세웠고, 20개의 도시에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89명의 여성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남 감리회의 한국선교는 윤치호가 미국 선교부에 한국선교를 요청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남 감리회 선교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남성 사역과 여성 사역을 구분하여 빈민층과 소외계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한국 선교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를 위해 파송되는 여선교사들은 미국 남 감리회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선교사상을 기초로, 전문영역의 전문가로서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충분하게 갖출 수 있도록 훈련받은 자들이었으며, 그 결과 미국 남 감리회는 매우 많은 수의 여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여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8. 핸킨스의 신학사상

핸킨스 선교사가 저술한 신학적인 문건들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구체적인 신학 사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바이지만, 그녀가 공부했던 학교들의 당시 신학적인 분위기를 비롯해, 핸킨스 선교사가 소속되어 있었던 미국 남 감리교 선교회의 당시신학적인 분위기를 함께 미루어 보아, 핸킨스 선교사는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신학 사상과 더불어,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신학 사상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바이다.

한편, 안형주는 스카릿 성경학교에 대하여, 1910년 당시에도 “개인의 구원보다는 사회제도를 개량하려는 사회복음주의자들의 학교였다.”고 평가했던 바 있지만, 당시에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며 보수적인 기독교 분위기를 견지하고 있었던 미국 테네시주에 위치하고 있었던 스카릿 성경학교는 1910년 당시의 이러한 보수적인 지역적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안형주의 평가는 다소 지나친 평가라고 판단되어지는 바이다. 다만, 안형주가 언급한 것처럼 자유주의 진영의 해방신학적 사회복음주의의 관점까지는 아닐지라도, 여성의 기본적인 인권 성장을 비롯한 여성들의 정체성 회복에 대한 성경적인 총체적 복음사상을 핸킨스 선교사가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핸킨스 선교사가 근무했던 미리흠 여학교

미리흠 여학교(Mary Helm School)는 1906년 4월 개성에 설립된 여학교이다. 미국 남 감리회 선교사 크램(W. G. Cram)의 부인이 개성에 있는 선교사 주택 내에서 과부들을 모아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초기에는 크램 부인, 윤치호, 김광기 등이 교사로 있었다. 크램 선교사가 귀국 이후에는 갬블 부인이 학교를 관장하였다.

해외 선교부에서는 메리 햄의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거액의 회사금을 지급하여 학교 운영이 원활할 수 있도록 하였고, 메리 헴 학교가 발음이 어려워 한자로 미리흠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미리흠 여학교의 교육 방침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령을 초과한 여자들이나,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여성들에게 초등 교육 등을 가르치고 실제 생활에 필요한 유용한 기능을 전수하였다.

핸킨스 선교사는 1917년 미리흠 여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927년까지 근무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이어 니클스(Miss Nichils)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휴가를 가거나 학교를 비우게 되는 일이 생길 때에는 핸킨스가 교장의 자리를 대신 서주기도 하였다.

이것을 보아서, 핸킨스 선교사 역시 미리흠 여학교에서 가정형편이 어렵고 학령을 초과한 여성들, 특히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여성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치면서 여성들에게 초등교육을 가르치고 덕을 함양시키며 그녀들이 실제 생활에서 여성으로 살 수 있는 유용한 기술들을 전수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핸킨스는 대학을 나온 여성이었고, 그 당시의 한국은 여성이 초등학교 과정도 쉽게 수학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런 한국의 여성들에게 교육을 시키고자 핸킨스 선교사가 많은 노력을 하였음을 예상할 수 있는 바이다.


10. 핸킨스 선교사가 근무했던 배화여학교

미국 남 감리회 여선교사였던 캠벨 부인은 한국에서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교육 사업이 필요함을 느끼고 여선교회 안에 교육부를 두어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캠벨 부인은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 내자동 75번지에 몇 채의 가옥을 매입하여 정식으로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배화여학교는 초창기에는 고아원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3년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중학과를 고등과로, 초등과를 보통과로 개편하였으며, 1925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개칭하였고 배화여자보통학교를 분립시켰다. 이러한 배화여학교의 학생 연령은 10세부터 18세까지였으며, 성경을 가르치며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세례를 받았고 가정에서까지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졸업생 중에는 전도자도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성경 공부에 힘썼으며, 매주일 마다 예배를 드렸다. 배화여학교 출신의 많은 학생들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배화여학교 학생들을 통해 교회로 인도되었다. 이러한 배화여학교에서 핸킨스는 캠벨, 스미드에 이어 3번째 교장으로 근무했으며, 이처럼 핸킨스 선교사는 배화여학교의 초기 교장 중 한명으로서 여학생들에게 성경교육을 비롯한 일반교육에도 힘쓴 것으로 보인다.


11. 핸킨스 선교사가 근무했던 호수돈 여학교

1916년 개성에 처음으로 유치원이 병설되었으며, 이후 호수돈여자보통학교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분리되어 운영하게 되었다. 1918년에는 실업부인 기예과를 신설하였고, 1922년에는 재학생 수가 6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핸킨스 선교사는 1920년 부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7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호수돈 여학교에서 부교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치하의 교육정책으로 독립사상 억제와 우민화 정책, 기독교 사립학교의 동제정책, 교육과정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며,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근무하고 있었던 1922년 당시에는 재학생 수가 무려 6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12. 핸킨스가 부목사로 시무했던 개성북부교회

“개성북부교회”는 한국에서의 미국 남 감리회 전도사역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초기 한국 감리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지도인사들을 배출했던 요람이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민족문제를 염려하던 민족적 지도자들이 모여 교류를 맺고 인맥을 형성해 가던 역사적 의의가 큰 곳이기도 하였다(단편적인 예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3명이 “개성북부교회” 출신이기도 하였다).


13. 여학교에서 여성교육에 힘쓴 핸킨스 선교사

기독교가 근대화의 기초를 놓은 것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발자취 중 하나가 바로 여성교육이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우면서 학교를 같이 세웠는데, 여성학교는 남성학교에 비해서 그 수가 뒤처지지 않았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한 여성들은 한국의 근대화에 지대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 남 감리회가 세운 호수돈, 미리흠 여학교는 각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한 명문학교였다. 옛날 집 안에서 바느질만 배우던 소녀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서 키 큰 외국인 선교사에게 성경을 배우는 모습은 교인들에게 자부심으로 다가왔다. 학교에 보낸 딸이 얼마 되지 않아 한글을 깨우치고 십계명을 암송하고 심지어 바느질도 잘하니 부모가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었겠는가?

미국 남 감리회가 세운 호수돈 여학교와 미리흠 여학교는 이처럼 여성 교육에 앞장서서 근대화 여성을 세우는데 힘썼으며, 이 두 여학교에서 교장과 부교장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핸킨스 선교사인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핸킨스 선교사는 자신의 생애를 여성교육에 힘쓰며, 근대화에서 여성을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가르치며, 깨어있는 여성 기독교인을 배출하기 위해 힘썼음을 알 수 있다.


14. 핸킨스 선교사의 헌신과 공헌 및 평가

핸킨스 선교사가 수학했던 학교들은 모두 다, 당대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미국의 명문대들로 남아있는 바이며, 이러한 점을 통해 핸킨스 선교사와 같은 여선교사들이, “당시대의 지성을 겸비한 여성들이 자국에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기득권과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 여성으로서는 특히나 더욱 더 힘들 수 있었던, 각박하고 생소했던 환경의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내한 선교사로서의 삶을 선택하며 한국 땅의 복음화를 위해 젊음을 바쳤다는 점에서도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바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남성 선교사나 지식인 남성들이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교육을 지지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교육의 질과 지속성을 높이기 위한 공헌에는 여성 선교사들과 조선의 기독교 여성들의 몫이 매우 컸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성 선교사들의 교육방침과 학생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는 당시 한국 여학생들의 정체성 형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핸킨스는 그녀가 가르치는 소녀들이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용기를 얻은 동시에 하나님이 그녀를 부르신 곳에서 그녀와 함께 계시는 것에 대한 행복을 발견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녀가 사역했던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핸킨스는 미리흠 여학교와 호수돈 여학교가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또한 한국 정부의 감독관도 한국에 이와 같은 학교들이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함께 언급한 바 있다.


15. 핸킨스 선교사의 한국 선교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

미국 남 감리교 노스 캐롤라이나주 소속의 여선교회에서는 핸킨스 선교사를 통해 미국에 알려진 한국인 기독교 여성들에 대한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가 몇 차례씩이나 계속해서 컨퍼런스 때마다 전해져 내려왔던 바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한국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결혼반지들을 모아서 핸킨스 선교사에게 전해주면서, 안식년을 위해 미국에 갈 때에, 미국 현지에서 자신들의 반지들을 팔아서 미국 남 감리회 선교회에서 진행 중인 “시베리아 선교 사역”을 위한 돈으로 사용해달라고 했던 이야기이다.

따라서 핸킨스 선교사는 안식년을 위해 미국에 갔을 때 여선교회에 이 일을 보고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미국 현지에서도 반지 구입을 비롯한 추가적인 모금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모인 돈을 시베리아 선교를 위해 사용하게 될 수 있었다는 “사랑과 희생”이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작성일:2020-07-03 23:04:19 112.149.232.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