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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 선교사 / 09 / Irwin, Ada J

닉네임
김형만
등록일
2020-07-04 01:39:53
조회수
657
Ⅰ. 기본정보
1. 이름: Irwin, Ada J. / 어윈 / 禹儀仁(우의인) / 캐나다 / SA
2. 생물 년도: 1896.5.28.~1965.7.3.
3. 출생지: 캐나다
4. 학력: 빅토리아군영 출신
5. 경력: 1922.6. 사관으로 임명되어 여자 스카우트 교관으로 활동
1926.2.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 본영에서 사령관 비서실의 비서 및 서기관으로 봉직,
부인사업 및 청년사업에도 봉사
1935.3. 군국가정단 서기관으로 부인사업 행정책임관
1938.7. 군군소년서기관 및 참령계급으로 청소년 사업 지휘
1940.11.16.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1947.9.1. 로드 사령관 재임시 재내한, 재무서기관
1950 6.25 사변 직전까지 봉직한 후, 도일했다가 귀국
1965.7.3. 캐나다에서 소천
6. 가족사항: 아버지
7. 참고문헌: 기백 11권; 장형일, 한국구세군사, 1975; 구세신문, 1928.2(나의 반장시절의
간증); 구세공보; 캐나다 본영 통신, 1982.8.5.; 구세군역군


Ⅱ. 선교사 소개

1. 서론 : 구세군 여선교사관 어윈, 조선으로 오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에서 시작된 국제적 규모의 교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신앙공체 형성, 빈곤과 악을 타파하고 사회개혁을 수행해 나가는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구세군의 모든 활동의 밑바닥에 흐르는 목적은 단순한 복음전도만이 아닌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사회봉사에 있다. 구세군 여선교사관이었던 우의인선교사는 빅토리아군영 출신으로 1922년 6월 사관으로 임명되었고 여자 스카우트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은 뒤 1926년 2월 내한하였다. 주로 서울 본영에서 사령관 비서실의 비서 및 서기관으로 봉직하는 한편 부인사업 및 청년사업에도 봉사하였다. 1935년 3월 군국가정단 서기관으로 전임되어 부인사업의 행정 책임관이 되었으며 매월 구세군신문 「가정단」의 필자로서, 가정단 공과의 발행인으로서 활약하였다. 1938년 7월 군국소년서기관 및 참령계급으로 승진, 청소년 사업을 지휘하였으나 1940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당하였다. 이후 1941년 일본에 의해 [구세단]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해외 사관들은 모두 귀국조치 시키는 등 일본 구세군에 의해 운영되었다. 해방 후 1947년 9월 로드 사령관 재임시 재내한하였으며 재무서기관 및 공급부 책임자로 부임하여 6.25사변 직전까지 봉직하였고 사변 중 로드 사령관의 피랍으로 인해, 일본으로 긴급 대피하였다가 귀국하였다. 캐나다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65년 7월 3일 별세하였다. 이후 그녀의 공적을 기리는 유지들이 코레아드(KOREAD) 클럽을 조직하여 한국의 사회사업을 후원하였다. 그는 교육받은 훌륭한 성악가로서 선교의 선봉에 유능한 주의 종이었다.

2. 본론
(1) 약력
어윈은 캐나다에서 사역하던 중 1926년 2월에 조선으로 임명되었다(구세신문 1926년 1월호 p2)
서기관 우의인은 1928년 2월호 구세신문에 “나의 반장시절의 간증”이라는 글을 썼다.
서기관 우의인은 1928년 4월호 구세신문에 “아이들을 어떻게 구해내야 하나”라는 글을 썼다
(구세신문 1928년 4월호 p5)
1935년 4월호부터 구세신문 ‘가정부인단란’을 부관 우의인이 연재하였다.(1935년 4월호 p6)
1936년 10월 군국사령관 비서 및 군국가정단 서기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한국선교보고회, 캐나다 본영 ,p4)
1937년 6월, 함경(소좌) 우의인은 부친상을 당했다. (구세신문, 1937년 6월호 p2)
1939년 4월 중교(부관) 우의인은 소좌(참령)으로 승직되었다. (구세신문 1939 4월호 p2)
1965년 3월 7일 어윈 부령은 캐나다 방쿠버에서 승천하였다.
그녀는 일찍이 캐나다 사관으로 한국에 와서 사령관 내외와 가정단 서기관으로 크게 사역하다가 1941년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으로 귀국하셨다. 1947년에 다시 내한하여 1949년까지 로드사령관과 함께 재무서기관으로 봉직했다.
은퇴후 숙환으로 고생하다가 1965년 3월 7일 방쿠버에서 승천하여 10월 방쿠버 중앙회관에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는 교육받은 훌륭한 성악가로서 선봉에 유능한 주의 종이었다(구세공보 1965. 4월 p2)

저서(글)
가정부인단(구세신문 1935년 5월호)
하나님이 가지신 우리 친아버지와 같은 마음(구세신문 1937년 2월호 p4)


(2) 한국 구세군의 설립과 “구세군 분규사건 (1926)”
Irwin 선교사가 부임한 1926년은 한국교회사의 대표적인 반선교사, 반기독교 운동이었던 “구세군 분규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극단으로 나눠지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단, 역사적 사실을 기록함으로 당시 Irwin 선교사가 극심한 분쟁과 혼란 속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했는지, 그리고 해방 이후 재입국한 것이 인간의 의지나 결정으로만 볼 수 없는 결단이었음을 살펴보자 한다.
해당 내용에 관해 조사할 때, 거의 모든 자료들이 민족신학 계열의 연구자료만 있어 인용함에 아쉬움이 있다. 그 중, 중립적으로 조사하려고 노력한 자료를 택해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참고문헌]
이상정, “1926년 구세군 분규사건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논문 (2007)

1) 구세군의 태동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한 현실과 산업혁명으로 극심한 빈부 격차로 인하여 도탄에 빠진 민중들이 술, 마약, 매음 등 타락의 나락에 빠져 하루하루 희망 없는 삶을 살 때, 개인의 영혼과 사회의 구원을 위해 감리교목사였던 윌리암 부스(Wi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CatherineBooth)는 1865년 기독교선교회를 조직하였고, 이 후 기독교선교회를 준(準)군대식 조직으로 개편하여 1878년 구세군을 창립하게 된다.

2) 구세군의 한국선교 시작
한국의 구세군은 1908년 10월 1일 대장 윌리암 부스의 명령을 받아 내한하여 선교를 시작한 정령 호가드(Robert Hoggard, 1861.11.16.-1935.8.13, 한국명:허가두)에 의해 시작되었다. 초기 선교 당시 한국의 정치적 현실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을사늑약, 군대 강제해산, 국권상실 등 역사적으로 가장 비운의 시기였으며, 이로 인해 한국인들은 약소국 국민으로서의 서러움과 강대국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현실로 희망 없이 살아야만 하는 때였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은 한국 민중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구세군의 선교 방법은 전투적 방법을 지향했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에 적극적인 모습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희망의 군대가 되었다. 또한 구세군은 한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와 맞설 강대국의 군대로 인식되기도 하였고, 구세군에 입교하는 것이 곧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인식하여 구세군에 들어와 총검술을 배우고 제식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3) 구세군 분규사건의 원인과 과정
이러한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지 18년 되던 1926년, 그 동안 쌓였던 서양 사관에 대한 한국 사관과 병사들의 불만이 터져 “구세군 분규사건”이 일어난다. 구세군 분규사건은 1920년대 반기독교 운동, 반선교사 운동 및 자치교회 운동 등 민족교회적 주체의식의 자각이 한창이던 때에 일어난 대표적인 반선교사, 반 교권적 운동이라 평가할 만하다. 당시 구세군 교권의 반응은 일부 구세군 정신이 덜 성숙한 사관들이 월급 올려 받기 위한 탐욕에서 시작한 분규요 불순한 자들이 불온당한 행동을 한 것이라고 폄하하고, 한국교회사적 의의를 축소하지만 분명 이 사건은 한국교회사의 대표적 반선교사 운동이요 민족교회 운동이었다. 이 분규사건이 당시 사회에서 크게 주목 받았던 것은 상명하복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준(準)군대식 조직에서 있었던 항명사건이었다는 것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적극적 선교로 공신력 있는 단체 안에서 불거진 사건이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 대장 브람웰 부스(BramwelBooth)가 내한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평소 서양 사관들의 문화우월주의에 의한 한국인에 대한 무시, 민족 및 인종차별, 피선교지의 문화와 환경을 무시하는 일방적 선교방법 등에 불만을 품은 한국 사관과 병사들이 만국본영의 세계 대장 브람웰 부스(BramwelBooth)의 내한을 계기로, 평소 겪었던 차별의 부당함을 알리고, 한국 구세군을 한국인이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염원을 대장에게 전한 후 그에 따른 시정을 바라는 진정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윤수만, 최봉희, 권용준을 중심으로 한 사관과 병사들이 􏰀을 모아 ‘조선 구세군도 18년의 역사를 가졌으니 조선인 사관에게도 참모권을 줄 것’, ‘본영에서 매년수입 지출금 세목을 연말 회보로 발표하며 일선에 알릴 것’, ‘일체 문부를 영문으로만 두지 말고 조선문으로 번역하여 영문을 모르는 사관도 알게 할 것’, ‘사관의 생활이 곤란하고 구차하니 봉급의 5활을 인상해 줄 것’,‘무의무탁한 부모에 대하여 동거 및 봉양을 허락해 줄 것’등 총 20개조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당시 일본에 있던 브람웰 부스 대장에게 보냈으나 반송되었고,1926년 11월 4일 대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시 대장 면담과 진정서 제출을 시도했으나 서양 사관들의 방해로 성사되지 않자 집단적인 반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 사관의 반발에 서양 사관들이 구타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계속해서 11월 8일 아현영문과 구세군 후생학원에서 한국인 사관들은 서양 사관의 사과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그러나 대장 브람웰 부스는 문제 해결을 뒤로 하고 “조선인 사관들의 요구안은 보았으나 서양인과 한국인의 생활 정도가 다르므로 들어 주지 못하겠다”라는 애매한 말만을 남긴 채 급히 한국을 떠나고 만다.

4) 사건의 결과
이후에도 한국 사관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결국 분규를 주동한 사관들이 무더기 면직 처분 당하고, 사관학생들 조차도 28명이 퇴학을 당한다. 그러나 면직 처분을 당한 사관들이 ‘구세군 조선 개선연결대’를 조직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여 서양 사관들을 성토하고, 한국 사관들의 입장을 전하고, 면직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막강한 교권과 일제의 공권력을 이용한 방해 앞에 개선연결대는 오래지 않아 와해되고 교권의 승리로 끝난다.
구세군 분규사건으로 인하여 18년 간 쌓아왔던 구세군의 공신력은 실추되고 한국인들에 의한 신뢰는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단적인 예로 구세군 교세는 1926년 구세군 분규사건을 계기로 크게 감소한다. 결국 한참 자라왔던 어린 나무가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5) 평 가
구세군 분규사건에 대해서 당시 만국본영의 입장과 조선본영의 입장은 거의 동일하다. 서양 사관과 한국 사관은 생활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차별을 두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결론 내렸고, 분규 주동자들을 불순분자, 불온당한 자로 정죄하였다. 그리고 분규를 일으킨 한국 사관들의 진정서 내용 중 많은 부분이 타당하고 정당한 요구였음에도 신중한 검토와 시정조치 없이 덮어버리고 만다. 또한 일제당국의 태도가 주목되는데, 구세군 분규사건과 비슷한 행동을 보인 다른 반선교사운동 및 자치교회 운동의 경우 일제는 크게 지지하며, 반 선교사측의 손을 들어주는 경향이었다. 그 이유는 반선교사 운동이 일제의 종교정책과 부합되고 한국에서 선교사들과 그들의 배경이 되는 나라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선교사는 곧 친일의 도식이 그려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구세군 분규사건에서만은 일본은 서양 사관의 편에 선다. 그것은 그동안 쌓아 왔던 구세군과 일제당국의 협력 관계와 긴밀한 영일동맹이라는 정치적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일제의 방해 책동과 분규 주동자에 대한 경찰의 감시로 분규세력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힘을 잃고 와해되고 만다.

6) 의 의
비록 구세군 분규사건이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상처와 불신만을 남긴 채 끝난 사건이지만, 민족교회사의 관점으로 볼 때, 구세군 분규사건은 한국교회사의 대표적 반선교사 운동이요, 민족교회 운동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 사건은 18년이나 된 한국의 구세군이 여전히 서양 선교사관 중심으로 운영된 채 철저히 한국인을 배제하는 상황에서 한국인이 주체로 나서 한국인의 구세군으로, 곧 구세군을 민족교회로 만들기 위한 반선교사운동이요, 민족교회운동이었던 것이다. 또한 서양사관들의 인종우월주의, 문화우월주의, 민족우월주의 등에서 나온 차별의 문제를 시정하려 한 사건이었으며, 한국 구세군의 운영에 소외된 한국인들이 민족 주체적 자각에서 차별의 문제를 시정하고 참정권을 획득하여 한국 구세군을 한국인이 지도하고 운영하는 한국 토착적 구세군으로 만들고자 한 민족교회 운동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논문에서는 선교사관의 입장과 목소리를 균형 있게 담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자료 부족과 필자의 역사적 혜안 부족 때문이다.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선교사관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들의 목소리도 담아낼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주제에 접근함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자료와 국내외 구세군 자료, 또한 당시 일반 보도 자료에 폭넓게 접근하여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역사적 평가와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작성일:2020-07-04 01:39:53 175.118.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