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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26 / Birdman, Ferdinand Henry

닉네임
김철중
등록일
2020-07-04 17:57:11
조회수
605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26_김철중.hwp (261632 Byte)
I. 기본사항

이름: Birdman, Ferdinand Henry / 버드만

생몰연도: 1872-?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기간: 1907.-1909.09.

연표
1872 출생
1907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매칼리 선교사 부부와 의료선교에 헌신
목포, 광주에서 녹수(R. Knox) 부인과 의료선교
1908.11. 전주예수병원에서 잉골드 후임으로 진료소 운영 시작
어학, 오후진료, 전도사역 보조(전주예수병원)
1909.09. 건강 악화로 전주예수병원에서 치료하다가 귀국

가족사항없음


II. 선교사 소개: 버드만 (Birdman, Ferdinand Henry, 1872-?)

1. 목포 부흥의 씨앗
버드만은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의사이다. 1907년 내한하여 매칼리 선교사 부부와 함께 의료선교에 헌신하였으며, 녹스(R.K nox) 부인과 함께 목포 선교부에 머물면서 목포 · 광주 등지의 의료선교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무렵 목포에 전도의 열기가 일기 시작했는데 버드만의 의료선교활동도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전주예수병원에서 치료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2. 전주 예수 병원 사역에 합류 그리고 헌신적인 진료
1905년 3월 어느날, 예수병원 2대 원장 포사이드는 전주에서 군산 방면으로 60리 떨어진 완주군 봉동읍 만동에 사는 부자 전주 이씨가 밤에 강도의 습격을 받아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말을 타고 달려가 응급 치료를 하고 밤이 되어 그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 밤에 어제의 강도가 다시 습격했고, 양복을 입은 포사이드 의사를 순검(경찰)으로 오인하고 칼을 들고 달려들어 격투하던 중 의사의 한 쪽 귀가 잘리고 여러 곳에 부상을 입었다. 예수병원 2대 병원장 포사이드가 강도의 습격으로 입은 상처로 인해 1906년 미국으로 후송되자, 다시 설립자 마티 잉골드에게 예수병원의 존폐가 주어졌다. 잉골드의 후임 의사가 바로 버드만 (Ferdinand H. Birdman) 이었다. 전주의 세 번째 의료선교사였던 그는 1908년 11월 진료소 운영을 시작했다. 버드만은 1907년 전주에 온 간호선교사 코델 (Emily Cordell) 과 함께 1909년 6월말까지 매일 평균 50여 명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매월 1,200명 정도였다. 환자들은 전주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많았지만 50-100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다. 버드만은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병원이 세워지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주 최초의 간호선교사였던 코델은 1909년 목포로 전임해 갈 때까지 2년 동안 근무하였다. 코델은 당시 한국인들의 미신과 가난 그리고 무지를 지적한다. 즉 병원을 찾은 어떤 여성은 4년 전에 자기 딸이 닭을 먹었는데, 그것이 지금 간질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여성은 세 달 전에 먹은 들고양이 때문에 인후통 (咽喉痛) 에 시달리고 있다고 확신하는 식이다. 그런데 버드만과 코델의 병원사역은 그리 길지 못했다. 버드만은 1909년 9월 고국으로 돌아갔고, 코델은 목포로 전임해 갔기 때문이다.

3.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었다."

비록 버드만은 한국에서의 선교 생활이 길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참으로 어떤 일보다 값진 일이었다. 당시 미신과 가난과 무지에 쪄들어 있던 피폐한 한국 땅에 누가 찾아 오겠는가? 당시 그곳에 있었던 다른 선교사와 비교 할 것이 아니라 이런 불모지 같은 땅에 선교로 찾아온 것이 그 어떤 일보다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버드만은 거의 폭발적으로 오는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다. 매일 평균 50명이었고 버드만은 그들을 모두 수용할 병원이 지워지길 기대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구한 생명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정부가 전혀 손쓸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그가 한 일은 병원진료 뿐만이 아니었다. 어학 공부뿐만 아니라, 전도도 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복음도 전할뿐더러 병을 고치는 사역을 했던 작은 예수였던 것이다.
더욱이 버드만은 병이 호전되지 않아 고국으로 갔었을 뿐, 만약 그의 병이 호전되었다면 한국 땅에 더 남아 사역을 지속하였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가 병이 들고 호전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선한 뜻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사역 기간으로 그를 평가할 수 없다.
한국은 버드만 선교사를 포함하여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해야만 한다. 미국이라는 훨씬 선진국에서, 선진 교육을 받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던 그들이었다. 이들은 이런 불모지 같은 땅에 복음과 의술을 가지고 이 땅을 일구어 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을 수 있었다. 이들을 기억하고 복음 전파와, 사회 사역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작성일:2020-07-04 17:57:11 39.7.47.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