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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Kinsler Helen C_18_3-3_정경철

닉네임
kurios
등록일
2020-07-04 19:56:21
조회수
690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Kinsler Helen C_18_3-3_정경철.hwp (3879936 Byte)
헬렌 킨슬러 선교사 / Kinsler, Helen C


I. 기본사항
1. 이름 : Kinsler, Helen C / 킨슬러 / 한국명 : 권수량

2. 생물연도

3. 출신 및 소속 : 미국, 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 1923년 8월 22일 – 1929년

5. 연표

1923년 8월 22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대구에서 지방 여선교사업 주관
1929년 안식년으로 귀국, 1932년 선교사직 은퇴

6. 가족사항

아버지: Kinsler, Francis
어머니: Kinsler, Dorosy
오 빠: Kinsler, Arthur
동 생: Kinsler, Rose

II. 선교사 소개: 헬렌 킨슬러 ( Kinsler, Helen C )
1. 그녀를 선교사로 이끈 사람. 그녀의 영적 아버지 프란시스 킨슬러
프랜시스 킨슬러는 190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태어났으며, 메리빌대학(Maryville College)과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28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으며, 1929년부터 평양 숭실학교 교사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킨슬러 선교사는 신학교 시절 만난 아내 도로시와 1930년 평양에서 결혼했다.
킨슬러 선교사는 숭실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1929년부터 평양 광명서관 2층에서 가난한 청소년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는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한편 복음까지 전하기 위한 사회선교운동이었는데, 훗날 이 모임이 대한청소년성경구락부로 발전했다. 성경구락부 운동은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져 1954년 말에는 전국에 17개 지부와 7만여 명의 청소년이 참여하는 대형 모임으로 발전했다.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평양 숭실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성경구락부 등을 통한 무료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청소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948년 해방된 한국에 다시 온 킨슬러 선교사는 대구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치는 한편 성경구락부 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1951년부터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와 장로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신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헌신했다.
킨슬러 선교사는 1970년 선교사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한인 이민교회를 도우며 지내다가 1992년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01년 9월 아내의 유해와 함께 양화진으로 옮겨졌다.
킨슬러 선교사의 한국 사랑은 후대로 이어져 장남 아서 킨슬러(권오덕) 부부와 딸 헬렌 킨슬러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아서 킨슬러 부부는 1960년대부터 42년 동안 선교사로 헌신한 후 2011년 은퇴했으며, 그 후에도 북한 장애인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http://www.100thcouncil.com/bbs/board.php?bo_table=missionary&wr_id=28



2. 킨슬러와 함께 선교사가 된, 그녀의 영적 형제 아더 킨슬러
평양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아더 킨슬러 역시 미국장로교 선교사로 평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동두천 유흥가 여성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한 이래 경제발전으로 세워진 공단마다 아더목사는 끊임없이 사역을 이어갔다. 아더목사는 한국 여인과 결혼했는데 신영순 사모와 함게 광양, 여천, 순천 공단 등을 돌며 근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농어촌 교회를 지원했다. 산업선교를 용공으로 몰아붙이던 시절에도 그의 순수한 헌신을 정부조차 인정했을 정도이다. 그의 이러한 선교사역은 여동생인 헬렌 킨슬러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선교사로의 사역의 불꽃같은 열정을 타오르게 하였다.



3. 그 당시 여성 선교사들의 여성 선교 사역
그 당시 많은 선교사들은 선교기지를 세우고 그곳을 베이스 기점으로 여러 사역들을 진행하였다. 여성들을 위한 교육사역을 위해 ‘여자성경학원’을 만들고 그곳에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수요일 오후에는 기도모임을 만들고,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해 토요일 교육 또한 담당해서 사역을 감당했다. 해리 로즈, 최재건 역,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9), 158.
이는 시대적 배경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데, 그 당시 남녀 사이의 분리는 엄격했기 때문에 함께 교육을 받거나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에 있어서 굉장히 큰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여성들이 가르치고 사역하고 섬기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해외 선교사들은 이러한 우리의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맞춰 사역을 감당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끊임없는 훈련과 교육, 그리고 심방 등 다양한 여성들을 위한 사역들은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4. 헬렌 킨슬러 선교사를 부른 곳, 대구
대구에서 중심적으로 사역하던 선교사들은 ‘베어드 선교사, 아담스 선교사, 바렛트 선교사, 브루엔 선교사’ 등이 있었다. 각자 지역을 세분화하여 구역을 담당해서 사역을 감당했다. 특히 그곳에서 여성을 위한 최초의 사역은 아담스 부인과 존슨 부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아담스 부인은 그 당시 해외에서 넘어온 많은 여성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했는데, 그 중에 한명이 바로 ‘헬렌 킨슬러’ 선교사이다. 이들은 전도지를 만들어 전도를 하였고, 한국 가정을 방문해 주중 사경회를 열고 여자들에게는 성경과 언문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Ibid., p.184.

여성 사역자들은 기혼여성 사역자와 미혼여성 사역자로 나눠지는데, 헬렌 킨슬러 선교사는 미혼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사경회에서 가르쳤고, 일부는 여자성경학원에서 가르쳤으며, 일부는 시골지역의 여성사역에 종사하였으며, 다른 이들은 병원일이나 여학교나 기타 다른 일들을 도왔다. Ibid., p.185.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각자의 환경과 상황에 맞게 자신들의 사역들을 찾아서 열심히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헬렌킨슬러 선교사는 대구에서 다양한 사역들을 다른 여성선교사들과 함께 감당하다가 7년간의 사역을 감당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안식년을 가진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1932년 선교사를 사임한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 헬렌 킨슬러의 아버지 프란시스 킨슬러 목사님의 젊은 시절4)푸른나무,, 2018년 11월 11일 접속.


▲ 3대째 선교활동 및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는 아서 킨슬러 목사와 신영수 사모부산일보,, 2018년 11월 11일 접속.



▲ 대구에서 함께 사역했던 여성 선교사들 Harry A.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Ⅱ”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4), 33.


▲ 아버지 프란시스 킨슬러와 어머니 D.W. 킨슬러의 묘비 http://www.njpmc.org/main/sub.html?Mode=view&boardID=www41&num=8491&page=&keyfield=&key=&bCate=


▲ 1948 년 9 월 20 일 (l to r) 헬렌, 로스, 아서, 도로시, 킨슬러
프랜시스 킨슬러 목사님과 그의 가족들이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 오는 동안 집회소에서 접대를 받았습니다. 여성 협회가 주최하는 리셉션에는 200 명이 참석했습니다. https://www.fpceh.org/rev-kinsler



IV. 참고문헌

[단행본]
1. Harry A.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Ⅱ”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4.
2. 김홍수, 『내한 선교사 총람』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3. 해리로즈, 최재건 역, 『미국북장로교선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웹사이트]
1. 푸른나무, , 2018년 11월 11일 접속.
2. 부산일보, , 2018년 11월 11일 접속.
3.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2020년 05월 27일 접속
4. 필그림선교교회
, 2020년 05월 27일 접속
5.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East Hampton, 2020년 05월 27일 접속
작성일:2020-07-04 19:56:21 124.80.5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