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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21 / Best Margaret(1867-1942, NP)

닉네임
김영무
등록일
2020-07-06 06:08:44
조회수
661
첨부파일
 Best margaret_3-1_21_김영무.hwp (866304 Byte)
베스트 마가렛 선교사/Best Margaret(1867-1942)

Ⅰ. 기본사항
이름: Best Margaret(베스트 마가렛트, 한국명: 배귀례/ 裵貴禮)

1. 생몰연도: 1867-1942. 9. 30
2. 학력: 미국 미주리주 파크대학 법학과 졸업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1897년-1937년
5. 연표
1867-태어남
1897.7-부녀자를 위한 전도, 계몽 및 행정가, 여성 지도자로 활약
평양의 모든 지역 순회 전도
1898 숭실학교 교사, 문서선교사업 참여
1901 황해도 선천 전도
1901. 5-선천지역 첫 부인 사경회를 지도
1903.10 숭의여학교 개교 시 초대교장으로 취임
2년 후 스눅크에게 인수하고 전도 사업에 몰두
달성경반, 단기여자성경반 육성
1906 황해도 곡산지방 전도여행
1907-30 평양여자성경학원의 초대교장으로 재직
1922 여자고등 성경학교 교장 겸직
1922. 7 25주년 기념식이 평양부 신양리 여자성경학교에서 열림
1937 은퇴하고 귀국
1942.9.30 미극 플로리다주 오를란도에서 소천

6. 논저
[논문]
History of the Women's work , Quarto-Centennial papers, Read befor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Annual Meeting, 10909
Some Pyengyang Paragraphs (with Mrs. Whiting,Hunt), Women's Work for Women 32.2(1917): 예수교, 와의 관계, 신학지남 4.4(1922).




Ⅱ. 선교사소개

1. 출생 및 성장

선교사 베스트 양은 1867년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미국 미주리에 있는 파크대학에서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30세까지의 행적은 자료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선교를 위한 준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2.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베스트양은 1897년에 7월 내한하고 평양선교부에 부임하면서 부녀자를 위한 전도와 개몽의 분야에 힘을 썼고 행정가이며 여성 지도자로 맹활약하였다. 1900년도까지 평양선교부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898년에 숭실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고 문서 선교 사업을 참여하게 된다. 그가 보낸 보고서인 “베어드부인을 기리며”와 여러 편지들을 보았을 때에 그녀가 행정적인 일을 담당하였고 교육에 힘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03년에 숭의여학교의 초대교장을 맡아서 2년 동안 여성교육의 기틀을 닦는다. 베스트양은 전도 사업에 몰두하였고 평남 각지를 순회하였다. 1901년에 황해도 신천을 전도하였다. 그리고 1901년 5월에 선천지방 부인사경회를 시작하였다. 1906년 4월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아직 가지 않았던 황해도 곡산지방을 전도하였다. 1907년에 평양여자성경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재직하였고 1930년까지 근속한다. 1922년에는 여자고등성경학교 교장직을 겸직하였다. 1922년에는 그녀가 선교사로 온지 25주년을 기념하면서 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1937년까지 사역하였다.
베스트양의 사역은 여성교육과 행정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숭의여학교와 평양여자성경학교와 여자고등학교의 교장 직을 맡는 등 여성교육에 힘을 쓴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교육의 목적은 조선을 서구화시키는 것이 아닌 기독교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녀는 “곧 우리들은 조선여인들을 만나거나 교육할 때에 환경과 주변을 ‘조선적’인 것으로 보존하느라 애썼습니다. 혼란을 일으키고 마음을 산란케하는 외국 요소들을 소개할 생각은 없습니다. 일관된 우리 선교교육의 목적인 미국화가 아니고 기독교화, 그것이었음을 여기 재삼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자신의 사역을 회고한다. 그녀는 조선의 문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보존해야 되는 것으로 여겼고 그들에게 미국이 아닌 기독교를 소개하려고 노력하였다.
베스트 양의 행정가의 모습은 그녀의 편지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녀는 “베인스 여사를 기리며”라는 보고서를 마펫과 엘비슨과 함께 보냈다. 여기서 베인스 여사의 행적을 보고한다. 선교회와 선교사들의 소통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편지를 통해서 한국의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뒤에 평양에 대한 묘사들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다. 그녀는 편지에서 “길 장로가 양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은 흥미로웠습니다. 연못골 교회에서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양반은 방의 한편에 앉고 ‘상놈’은 다른 편에 앉았는데, 집회가 끝나기 전에 양반과 상놈이 형제애 안에서 함께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울의 일부 여자들도 길씨의 전도와 기도를 통해 큰 복을 받았는데, 어떻게든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들 다수는 돈을 모아서 그가 떠나오기 전에 그에게 옷 한 벌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기쁘게 장대현교회에 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그런 멋진 옷을 얻었느냐고 교인들이 묻자, 그는 웃으면서 ‘이전에 만일 내가 이런 좋은 옷을 입고 왔으면 여기 있는 여러분은 내가 그 옷을 사기 위해 돈이라도 훔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매우 지쳐서 돌아왔고, 리 목사는 그를 도시 밖으로 며칠 간 쉬게 할 것입니다. 그는 지난 두 달 이상 밤낮으로 계속 자신을 혹사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런 강력하고 아름다운 영의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른 지도자들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기적적인 시기에 놀랍게 발전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녀의 편지로 당시의 한국교회의 풍습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풍습 뿐 아니라 대부흥의 역사로 평양이 변화되는 모습도 알 수 있다. 그녀는 편지에서 “평양은 점점 더 거의 기독교 도시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도시에서 무당의 북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는데, 제가 선교지부 근처 마을에서 그런 소리를 들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한국 설날 아침에 저의 방 옆방에서 잠을 잔 저의 전도부인이 아침에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치고 창문에 ‘새 세상이오’라는 말을 써 붙였습니다. 저는 밖에 있는 그녀를 불러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이웃 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요. 몇 년 전 사람들은 밤을 새며 제사를 지내고 이어서 희생에 바친 음식으로 잔치를 했지요. 그런 낭비를 한 후 깊이 잠 들었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밥을 하려고 불을 피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여자에게 설날 새벽에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는 과거에는 이교 가정이었으나 이제는 기독교 가정이 된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었고, 흥미롭게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새 세상이오‘였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녀의 편지로 평양이 대부흥으로 변화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 편지들로 인해서 우리는 당시의 평양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베스트 양의 문서 선교는 선교사와 본국의 연결고리일 뿐 아니라 현재의 우리와 초기 한국교회의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귀국 이후와 소천

1937년에 선교사를 은퇴하였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1942년 9월 30일에 미국 플로리다주 오를란드에서 소천하였다.
작성일:2020-07-06 06:08:44 1.233.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