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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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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63/Watson Robert D.(1886-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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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혁
등록일
2020-07-06 11:32:27
조회수
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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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_3학년3반_63_김은혁.hwp (2122752 Byte)
와트슨(왓슨) 선교사 / Watson, Robert D. (1886-1935)

I. 기본사항
1. 이름: Watson, Robert D. / 와트슨(왓슨) / 한국명: 왕대선(王大善)
2. 생몰연도 : 1886.10.25-1935.
3. 출신 및 소속: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10-1929.
5. 연표

(1) 출생 및 성장
1886.10.25.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금광도시 발라랏(Ballart)에서 출생
1910.11.10. 빅토리아 장로교회 발라랏 노회에서 목사안수

(2)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1910.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경남 부산선교부에 부임.
동래, 울산, 김해, 밀양 등의 지방선교사업에 종사
1910. 통영 방문
1911.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한국어 선생과 함께 지역 회중들을 방문
1911. 마산 선교부 부임
1911. 약혼자를 포함해서 한국으로 오고 있는 일군의 선교사들을 만나기 위해 상해로
여행
1911.10.26. 매클라렌의 주례로 상해에서 결혼
1911.11.11. 부산에 도착
1911-1912 중반. 한국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통영을 두 번 방문.
진해와 고성에 대해서도 목회심방을 함.
선교부는 통영에 새 선교지부를 개척하도록 임무를 부여
1913. 부인(Watson, Baird Amy)과 함께 통영 정착. 통영선교부 초대 주임선교사.
1913. 무어 선교사와 함께 호주장로교 통영선교지부 설립을 맡음
1913. 거제, 칠암, 고성, 진해 등의 지방선교 사업에 헌신
1913-1928. 15년간 통영선교의 기초설립

(3) 귀국 이후
1929. 은퇴 후 귀국
1935. 사망


Ⅱ. 선교사 소개: 와트슨(왓슨)(Watson, Robert D., 1886-1935)

1. 사업가에서 국내(호주) 선교사로, 그리고 신학공부에서 한국선교사를 하기 까지 하나님이 그를 이끄셨음을 알 수 있었다.
로버트 왓슨은 빅토리아의 일레인(Elaine)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발라랏의 에벤에저 교회 주일학교에서 벨레 멘지스의 학생이었다. 그가 선교사가 되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멘지스의 영향력 이었다. 그는 사업을 하다가 국내선교사로 일했고 후에는 오몬드 칼리지(Ormond College)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1910년 11월 10일 발라랏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아미 비어드 양(Miss Amy Beard)와 약혼을 하였고, 그녀는 1년 후 그를 따라 한국으로 갔다.

2. 한국에 와서 통영, 고성, 거재 등 그 지역에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완전히 헌신했다.한 곳에 선교하기도 어려운데, 그는 여러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서 애썼던 것이다.
왓슨은 1910년 12월 21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즉시 마산으로 갔고, 이듬해에는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한국어 선생과 함께 지역 회중들을 방문했다. 그해 왓슨은 자기 약혼자를 포함해서 한국으로 오고 있는 일군의 선교사들을 만나기 위해 상해로 여행을 했고, 그들은 1911년 10월 26일 매클라렌의 주례로 상해해서 결혼했다. 그들은 11월 11일 부산에 도착했다. 왓슨 부부는 마산에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엥겔 목사 가정에서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러나 왓슨 부인은 부산에서 장티푸스성 열병에 걸렸다.

1910년 내한한 왓슨 선교사는 통영지방을 순회하던 중 그 지역에 교육기관이 전혀 없음을 알고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왓슨 부인은 그 지방 여성교육 기관인 진명유치원, 진명야학교, 진명강습소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왓슨은 1912년 중반까지 한국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칠암을 두 번 방문하였고 진해와 고성에 대해서도 목회심방을 하였다. 선교회는 그에게 칠암(통영)에 새 선교지부를 개척하도록 임무를 부여했다. 그해 9월, 새 선교지부는 개척되고 있었으나 왓슨은 여전히 마산에 살고 있었다. 1913년 2월 13일 그의 아들 존이 태어났다.

그들은 1913년 3월 27일 칠암으로 이주했고, 두 번의 호주 휴가를 제외하고는 통영, 고성, 거재 지역에 기독교 공동체들을 건설하는 사역에 완전히 헌신했다.

3. 그는 순회 선교사였다.
왓슨은 보트, 도보, 혹은 무슨 운송수단이든지 가능한 대로 교회들을 순회했다. 그는 각 주요 중심지역에 있는 조사들을 감독했고, 각각의 작은 모임들을 일 년에 두 번 방문하면서 학습문답을 원하거나 세례를 원하는 사람들을 점검했고, 설교하고 성만찬을 집례했다. 그는 민감한 전도자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모든 기회와 모든 수단을 사용했다. 그는 주요 중심지역들에서 주간 학습반들을 운영했고, 주변 마을로부터 사람들은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고,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 찾아왔다.

왓슨은 1920-23년과 1926-28년 선교회의 총무로 탁월하게 일했다. 선교회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모아내고 표현하는 그의 능력은 그의 동료들과 빅토리아 교회의 선교위원회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왓슨은 청년연합회(the Fellowship Union)의 후원을 받았다. 1918년 그는 휴가 기간 중에 많은 청년연합회 지부들을 방문하여 연설하는 일 외에도 군목으로 지원한 해외선교위원회 총무 프랭크 패튼(Rev F H L Paton)을 대신해서 대리 총무직을 수행했다.

4. 왓슨 부인 Baird Amy(Amy Elizabeth Watson, 1886-1935)과 함께 사역하였다.
왓슨 부인 선교사는 1911년 11월에 내한 하였다. 왓슨 부인은 처음부터 보통학교(현 초등학교)의 설립을 의도하고 준비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고의적인 교육통제 방침 때문에 이루지 못하였다. 그녀는 이후 다시 1915년 진명보통학교 설립허가원을 제출했으나 개정 사립학교 규칙이 정하는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여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에는 학령기를 넘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야간학교를 설립하였고, 보통학교에 준하는 과목과 성경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바로 진명야학교이다.

왓슨 선교사 부부로부터 시작된 진명학원 등 여러 학교는 지금까지도 통영시민들의 기억 속에 ‘신교장’으로 남아 있는 스키너(A.M Skinner, 한국이름 신애미) 선교사가 1921년 부임해 오면서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기관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Ⅲ. 사진 및 기타자료
Rev Robert D Watson (b. at Elaine 25 October 1886; d. 4 February, 1942). Masan 1910-1913; Tong Yung 1913-1928)

As a child, Robert Watson was a pupil in Belle Menzies’ Sunday School class at Ebenezer Church in Ballarat. It was her influence that turned his thoughts towards becoming a missionary. He was in business and then worked as a home missionary before commencing theological studies in Ormond College. He was ordained by the Presbytery of Ballarat on 10 November, 1910. Before leaving for Korea he became engaged to Miss Amy Beard. She followed him to Korea a year later.

Watson arrived in Korea on 21 December 1910, went straight to Masan, and spent the next year in language study, visiting some of the local congregations with his language teacher. The next year Watson travelled to Shanghai to meet the incoming group of missionaries which included his fiancée, and they were married in Shanghai by Dr McLaren on 26 October 1911. They arrived in Fusan on 11 November and lived with the Engels until the house in Masan was ready for them. However while staying there Mrs Watson contracted typhoid fever.

Up until mid-1912 Watson, though chiefly engaged in language study, had visited Chillam twice and made pastoral visits to Chinhai and Kosung. The Mission assigned him in January to establish a new station at Chillam (Tongyung). In September he was still living in Masan, while the new station was being developed. Their son, John, was born on 13 February, 1913.

They moved to Chillam about 27 March, 1913, and apart from two furloughs in Australia devoted themselves totally to the work of building Christian communities in the Tong Yung, Kosung, and Kirchay districts.

Watson itinerated around the churches, by boat, on foot or by whatever means of transport were available. He supervised helpers in each major centre, visited each small group twice per year, examining people who wanted to become catechumens or receive baptism, preaching and celebrating the sacraments. He was a keen evangelist, and used every opportunity and means available to proclaim the Gospel. He conducted week-long classes in major centres, and the men from the surrounding villages came in to study the Bible and theology, and to worship together.

Watson also served with excellence as secretary of the Korea Mission 1920-23, and 1926-28. His efficiency and ability to gather up and express the thoughts of the Mission won praise from his colleagues and from the Mission Committee in Victoria.

Watson was supported by the Fellowship Union. During his furlough year in 1918, in addition to speaking to many fellowship groups he also served as Secretary of the Foreign Missions Committee while Rev F H L Paton worked as an army chaplain.

Mrs Amy Elizabeth Watson (née Beard) MA Hons. (b. 1889;(b. 1889; d. April 1935). Masan, 1912-1913; Tong Yung 1913-1928.

Amy Beard was born at Charlton in rural Victoria, and later moved to Dunolly state school where she won a scholarship to Queen’s College, Maryborough. She graduated Melbourne University M.A. Hons. She had decided to volunteer to go as a PWMU missionary to Korea before she met Robert Watson.

Robert proceeded to Korea ahead of Amy, but he travelled to Shanghai to meet the ship on which Amy and other incoming missionaries were travelling and the couple were married there on 26 October 1911 by Dr. Charles McLaren.

In January 1914, a few months after arriving in Tong Yung, Mrs Watson established a primary school for girls, and served as Principal till her furlough in 1917. She also supervised a night school for women and girls unable to attend day school. She conducted a Sunday afternoon class for women preparing to become catechumens or to be baptized. There was also a class for girls one afternoon per week to learn needlework, Bible and singing. Some non-Christian women were attracted to this. Mrs Watson worked to extend the educational opportunities for Korean women.

Mr and Mrs Watson raised three sons – Jock, Donald and David in Korea, and suffered the pain of having twin daughters die at birth in 1923.

One of Mrs Watson’s missionary colleagues wrote: “The Koreans among whom she worked, her fellow-workers and the PWMU owe to Mrs Watson a debt that can never be repaid.” The PWMU recorded its warm appreciation and grateful thanks to Mrs Watson for her self-denying work for the Union.

Mrs Watson was an excellent writer and teller of Korean stories. Many of her stories were published in the PWMU Chronicle.

By 1917, Mrs Watson was suffering serious health problems, which necessitated her going on furlough earlier than planned. Her poor health continued throughout the rest of her life, and in 1928 forced an end to the very fine missionary careers of Robert and Amy Watson.

Her fellow missionaries recorded their appreciation: Mrs Watson since she came to this country has taken a full share in the work among the women and boys and girls of the church. She has been the means of many knowing the love of the Lord Jesus Christ. She has very greatly helped us by the beauty and vividness of her writing, and by her untiring labours often in the midst of distressing weakness.

Mrs Watson died in Australia in April 1935.

아미 엘리자베스 왓슨 부인 (본명: 비어드) (1889-d. 1935. 4), 한국명: 왕대선 목사 부인, 마산 1912-13; 통영 1913-28

아미 비어드는 빅토리아의 농촌 찰톤(Charlton)에서 태어났고 후에 두널리(Dunolly) 주립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그녀는 매리보로의 퀸즈 칼리지(Queen’s College, Maryborough)에서 장학금을 받았고, 멜번 대학에서 우등학위(honors)로 석사(MA)를 마쳤다. 그녀는 로버트 왓슨을 만나기 전에 이미 PWMU의 선교사로 한국을 지원하려는 결심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아미 보다 앞서 한국으로 출발했으나, 아미와 다른 선교사들이 타고 오는 배를 기다리기 위해 상해로 갔다. 로버트와 아미는 그곳에서 1911년 10월 26일에 찰스 매클라렌 의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1914년 1월, 통영에 도착한 지 수개월이 지나 왓슨부인은 여자아이들을 위한 소학교를 세웠고 1917년 휴가 때까지 그 학교의 교장으로 섬겼다. 그녀는 또한 낮에 학교에 올 수 없는 여성과 소녀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운영했다. 그리고 세례준비자들이나 세례 받으려고 하는 여성들을 위해 주일오후에 공부반을 운영했다. 통영에는 주중에 하루 오후에 여자아이들에게 수예, 성경, 노래를 가르치는 학급이 시작되었다. 일부 비기독교 여성들이 이 학급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왓슨 부인은 한국여성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넓히려고 애썼다.

왓슨 부부는 한국에서 세 아들, 조크(Jock), 도날드(Donald), 데이비드(Daivid)를 길렀고, 1923년에 쌍둥이 딸이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픔을 겪었다.

동료들 중에 한 사람은 왓슨 부인에 대해 “한국인들, 동료선교사들, PWMU는 왓슨 부인에게 결코 값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PWMU는 연합회를 위한 왓슨부인의 헌신적인 사역에 대해 따뜻한 평가와 감사를 기록했다.

왓슨부인은 한국의 이야기에 대해 훌륭한 기록자였고 이야기꾼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들 중 많은 것이 PWMU의〈연대기〉(Chronicle)에 출판되었다.

1917년 왓슨부인은 건강이 나빠서 어려움을 겪었고 계획보다 일찍 휴가를 떠나야 했다. 그녀의 건강 악화는 남은 인생 줄 곳 지속되었고, 1928년에 로버트와 아미 왓슨의 훌륭한 선교사 경력을 끝내도록 하였다.

동료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왓슨부인은 이 나라에 온 이후로 교회의 여성들과 남녀 어린이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자기 몫을 다해왔다. 그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도구였다. 그녀는 아름답고 생생한 기록을 통해, 그리고 연약한 고통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는 사역을 통해 우리를 크게 도와주었다.

왓슨 부인은 1935년 호주에서 사망했다.

사진 및 그 외의 자료는 파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성일:2020-07-06 11:32:27 211.255.222.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