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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34 / Brockman, Fletcher Slims

닉네임
지훈박
등록일
2020-07-06 12:55:30
조회수
614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34_박지훈.pdf (219642 Byte)
Ⅰ. 기본 사항
1. 이름: Brockman, Fletcher Slims / 브록크만 / 한국명: 브록만
2. 출생연도 및 지역 : 1867-1944 미국 버지니아주 애머스트 카운티 출생
3. 가족관계 : 아버지(Willis Allen Brockman), 어머니(Rosa Emory (Wood) Brockman)
배우자(Mary Buford Clark), 동생(Frank Marion)
자녀(Washington Clark Brockman), 자녀(Emory Wood Brockman),
자녀(Allen Clark Brockman-사망), 자녀(Julia Brockman-사망)
4, 학력사항 : 1891년 반데르빌트 대학교 미술학 학사.
1929년 콜게이트 대학 법학 박사
1930년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 국제청년기독교대학 인문학의 석사.
5. 국제경력들 : 중국 국가기독교총연합회, 미국-일본 국가위원회, 외교정책협회,
인종간 협회에 관한 협정, 미국과 캐나다의 청년기독교협회 대외위원회.
China Famine Relief of America의 회원 이사들 링난 유 회원 국가 자문 위원회.
6. 소속단체들 : 중국 기독교 콜레지 연합, 전미 유대교와 기독교인협회(가명위원회),
국제위원회 청년기독교협회, S.C.협의회, 미국동양사회, 태평양관계연구소,
피 베타 카파, 피 델타 세타. 회원 감리교 교회
7. 출신 및 소속: 미국 남감리교 성공회 교회 회원, YMCA
8. 한국선교기간: 주로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였으며, 한국에서의 인연은 1901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임.
9. Brockman의 저작들
1) 『I discover the Orient(나는 동양을 발견한다)』,
New York, London, Harper & Brothers, 1935.
2) 『China in 1923』, [Place of publication not identified] [1923]
3) 『"If God permit" : a word to detained volunteers』,
[New York] : [publisher not identified], [18--?]
4) 『The programme for reform(개혁의 프로그램)』,
Shanghai :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04.
5) 『The spirit of unity : the closing address of the National Christian Conference May 11, 1922, Shanghai, China』, [publisher not identified], [1922]
6) 『China travels forward』, Nashville, Tenn. :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a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32]
7) 『How to retain to the Church the services of English-speaking Chinese Christians(영어를 사용하는 중국인을 교회에서 붙잡는 법)』, [publisher not identified]
10. 연표
1888 윤치호의 밴더빌트대학 유학시 한국YMCA와 인연
1891 Vanderbilt University 졸업
1898 중국YMCA에 파송, 1900 총무가 되어 15년 활동
1901 한국에 있던 Horace Underwood선교사에게 초청받아 한국 방문
1903 한국YMCA 창설에 앞서 자문위원회 특별강사로 내한
1905 Philip L. Gillett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다시 방문, YMCA론칭을 도움,
한국Y의 농촌 운동시 재정원조 주선, 동생 브록크만의 한국파송 주선
1915 YMCA 국제위원회 총무로 취임
1924까지 미국, 캐나다, 아시아 등지 순방하며 Y운동 격려
1927 은퇴까지 전 세계 YMCA 협력사업을 위해 공선
1944 사망

Ⅱ. 선교사 소개
1. 신실한 가정교육
브록크만은 1867년 미국 버지니아 주 애머스트 카운티의 윌리스 앨런 브록크만과 로사 에모리 우드에게서 태어났으며 여섯 형제 중 장남이었다. 그의 부모는 빈곤한 자를 사랑으로 보살피고 아껴주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당시 버지니아의 교육환경이 좋지 않아 부모를 통해 교육을 받고 자랐다. 브록크만과 그의 형제들은 부모의 교육과 삶을 통해 제대로 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브록크만은 그런 것들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였다. 그는 9살 때 감리교회에 다니게 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었다.

14세의 어린나이에 주일학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남다른 열정과 신앙이 어려서부터 있었던 것이다. 1891년 브록크만은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했다. 밴더빌트 대학에서 수학하던 이 시절 브록크만은 미국으로 유학 온 윤치호와 친구가 되었다. 밴더빌트 대학교는 미국 남부 테네시주 내쉬빌시에 위치한 명문 사립대학교이며, 해운업계의 재벌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에 의해 1873년에 설립되었다. 밴더빌트 신학대학은 1875년에 시작되었다. 1914년 감리교 감독교회의 후원 하에 밴더빌트 대학의 성경학과가 설립되었다. 그날 이후 트러스트의 밴더빌트 대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에큐메니칼 신학 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밴더빌트 신학교로서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계기가 생기게 되는데 오벌린 신학 대학원과 오하이오 신학교의 합병이 그것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두 학교 모든 교수와 서적같은 자원들이 증가하게 되어 밴더빌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해가 1966년 9월이었다. 합병으로 인한 재정자원의 증가는 학교의 교육 프로그램과 서비스의 대한 품질과 기회가 매우 넓어지며 그 기능 또한 강화되게 되었다.

졸업 후 브록크만은 6년 동안 남부의 13 개 주(1891-1897)를 위한 YMCA 국제위원회의 학생 비서관과 1897-1898년의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 봉사 운동의 여행 비서관으로 봉사했다. 그러던 가운데 브록크만은 중국대륙의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아직 성경을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과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브록크만의 선교 출발점
브록만은 죠지아의 목화농장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1891년 밴더벌트대학교(Vanderbilt Universìty)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YMCA의 국내 사역자가 되어 남부에서 대학생들 가운데 일하며 해외선교를 추진하였다. 그는 감리교인으로서 처음에는 자기 교단의 선교부에 소속하여 일했으나 교단의 감독이 중국의 학생들 사이에서 일하고 싶으면 초교파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는 YMCA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에게 충고하였다. YMCA는 중국선교사를 모집하고 있는 중 이어서 그의 지원은 쉽게 허락을 받았다.

3. 브록크만의 경력들
브록크만은 13개 주 최초의 학생 비서인 1891-1897로 YMCA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897년과 1898년에 그는 학생 자원 봉사 운동의 여행 비서였다. 남부의 감리교 성공회 소속으로 1898년부터 1915년까지 중국에서 YMCA를 역임했으며, 처음에는 난징(난징)에서 외무장관, 1901년에는 상하이에 본부를 둔 중국 YMCA의 초대 총서기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중국의 국가기독교총연합회를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1901년 한국 YMCA 창립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에 온 질레트(Philip Gillette) 선교사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 자문을 담당하였다. 1903년 3월 그는 한국Y 창설준비회의 강사로 초청돼 각국 공사와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Y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 노력으로 한국Y의 창설준비와 함께 Y회관 건축비 모금운동까지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 YMCA가 창립된 이후에도 브록크만은 한국 YMCA를 자문하는 등 지도자를 육성하는 일에 협력했다.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 YMCA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동생 프랭크 브록크만을 설득하여 한국으로 가도록 했다.

1915년 그는 중국 YMCA에 대한 책임을 C. T. Wang에게 넘겼다. John R의 요청에 따라, Mott는 YMCA National War Work Council과 International Committee의 부사무총장을 역임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1924년 미국의 YMCA 전국위원회가 결성된 후, 극동의 행정 서기가 되었다. 1929년 37년만에 YMCA에서 은퇴한 후 밴더빌트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미국과 극동의 우호증진에 관한 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그는 1929년 콜게이트 대학에서 명예 LL.D.를 받았다.

4. YMCA 신문기사(동생과 함께 나온 기사)
뿌락만 형제란 Fletcher Sims Brockman과 Frank M. Brockman 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형 F. S. Brockman은 1901년부터 중국 YMCA 제2대 총무로 15년 간 시무하다가 미국에 돌아가서 YMCA 국제위원회 부총무를 지낸 세계적인 Y지도자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 F. M. Brockman은 1905년 내한하여 1929년까지 일했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한국YMCA 창설의 공로자이다.

우선 형 F. S. Brockman의 경우를 이야기하면, 1903년 3월 18일에 있었던 한국YMCA 창설준비회의의 강사로 초청되어 왔었다. 이 준비회의는 주한미국 대리공사 알렌(H. N. Allen)을 비롯하여 영, 독, 일, 중, 소 등 각국 공사 또는 그 대표자들과 각파 선교사들과 은행가, 실업가, 세관장, 이민관, 특히 민영환씨 등 한국정부의 고관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는 YMCA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한국YMCA의 창설준비가 완료되는 동시에 Y 회관 건축비 모금운동까지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그때 3주일간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Y창립간사로 파송되어 왔던 질레트(P. L. Gillett)씨의 자문역이 되어주었다. 그는 동양통의 YMCA 지도자이기도 하다. 역사가 홉킨스(C. H. Hopkins)씨는 “뿌락만씨만큼 전세계 YMCA 협력 사업계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는 공자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잘 융합시키며 살았다”라고 평했으며, 그는 또한 윤치호 씨가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시절의 동창생이었던 친구로서 그때부터 한국에 대하여 호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동생 F. M. Brockman씨는 1905년부터 황성기독교청년회 협동간사로 일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 형이 일하고 있는 중국YMCA의 간사가 되고자 했으나 그 당시 YMCA 국제위원회 총무이던 맛트(J. R. Mott)씨의 권유로 한국에 와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총무는 질레트(P. L. Gillett)씨였는데, 이 두 사람의 손발이 잘 맞아 YMCA 창설 사업을 성공적으로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F. M. Brockman씨의 업적은 실로 크다. 그는 우선 프로그램 간사로서 초창기 사업을 주도했다. 우선 그는 교육사업을 일으키는데 성공했고 학생Y 조직에 큰 공로를 세웠다. 즉 그는 서울시내 각 미션스쿨 안에 학생 Y를 조직하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1910년 6월 진관사에서 제 1회 학생Y 하령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때에도 그의 활약은 컸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이 학생하령회를 계기로 하여 각 학교에 학생Y가 조직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곧 한국학생Y운동의 최초의 출발이었다. 이 학생Y 하령회가 있은 다음해에 그는 새로 부임한 학생부 간사 이승만씨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Y를 조직했다.

그 결과 1911년 6월 개성에서 제 2회 학생Y 하령회가 열렸을 때에는 광주 숭일중학, 군산 영명중학, 전주 신흥중학 등 지방학교를 포함한 21개 학교에서 대표가 전국에서 파송되어 왔으며, 그 참가규모나 초빙되어 온 외국인 강사나 국내강사는 제 1회에 비하여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이때의 학생Y 하령회 회장은 윤치호씨(그당시 Y부회장)였는데, 이 하령회 직후에 105인 사건이 터져 윤치호, 양전백 등 그 하령회 때의 지도자들과 거기 참석했던 선천 신성중학교 평양 숭실중학, 서울 경신중학교 등의 학생들이 전부 체포되었던 것이다.

동생 F. M. Brockman씨의 제일 큰 공헌은 역시 한국YMCA 연합회 조직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는 언제나 협동간사 또는 협동총무의 입장이었으나 그의 치밀하고 충성스런 봉사정신은 드디어 학생Y운동으로 하여금 한국YMCA 연합회로 발전하는데 기여하게 했던 것이다. 즉 일제가 주민 105인 사건과 유신회 사건 때문에 쑥밭이 된 한국YMCA의 재건을 위하여 그는 이상재 총무의 훌륭한 손발 역할을 했다. 질레트(P. L. Gillett) 총무가 국외로 추방되고 윤치호 부회장은 6년형을 받고 이승만, 김규식, 제다인 등 Y 간부지도자들이 국외로 밀려나가게 되자 이상재씨가 총무자리에 들어앉게 되었는데, 그 때 가장 이상재씨의 든든한 동역자는 F. M. Brockman씨였다. 그들은 합심하여 전국연합회 조직에 착수했다. 아무리 일제의 탄압이 심하더라도 전국 각지에 조직되어 있는 학생 Y만은 해산시킬 수 없었다.

드디어 1914년 4월 2일부터 5일까지 개성에서 전국연합회 조직 총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때 참가한 YMCA는 조선중앙Y(현 서울Y)를 비롯하여 전부 10개 Y였다. 그때 참가한 YMCA는 조선중앙Y와 배재학교, 경신학교, 세브란스의전, 한영서원(현 송도고교), 전주 신흥학교, 군산 영명학교, 광주 숭일학교 등 8개 학생Y였다.

그 뒤 F. M. Brockman씨는 연합회 총무가 되고, 1916년 윤치호씨에게 총무직을 넘겨주고는 1929년 그가 병으로 귀국할 때까지 무려 23년 간 한국Y를 위해 봉사했다. 그는 1916년 서울Y학관 창립 10주년 기념식 때는 그 창설자의 한사람으로서 10년 근속 표창을 받기도 했다. - 1978.9.13 YMCA 신문 기사

5. 생각지 못한 고난의 시간들
브록크만은 1898년 중국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아내와 두 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중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중국어공부와 그들의 관습과 정서에 익숙해지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도 더욱 그들을 불행하게 한 것은 그들이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 2년 뒤 중국각지에서 외세를 몰아내는 의화단 운동이 기세등등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 브록크만은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이 큰 재난 중에, 많은 서양선교사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큰 재난을 겪고 나서도 브록크만의 사명은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도전이 있었다.
왜 이런일을 당해야 하는거지?
왜 나의 아내와 두 명의 어린자녀를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 데려와야 하는거지?
내 자신을 위험해 빠뜨리는 것은 좋지만 이 일이 옳은것인가?
그때 대답은 이것이었다.
성경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속에 다시 이런 도전이 있었다.. 성경은 책일뿐이야.
그것은 사실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어. 성경에 있는 것은 실수일 수도 있어.
그러나 아내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의심에 여지가 없어.
너는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어. 왜 그랬니? 그때 대답은 이것이었다.
아니, 책이 아니야. 내가 너를 보냈어! 두려워하지마.

6. 중국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준 선교사
브록크만은 선교를 하면서 단순히 복음만을 전한 것이 아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 이외에도 백성들에게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의화단 운동이 벌어지고 나서부터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에서 돌아간 이후, 미국선교사들과 또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중국젊은이들과 함께 수 많은 학당을 세우고 글과 서양의 과학을 가르치고, 주거환경과 개인위생습관을 위한 개선방안, 전염병 확산 방지대책등을 가르쳤다. 중국인들은 교육을 통하여 삶이 개선되는 것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그의 굳은 믿음과 겸손하고 넓은 사랑은 수 많은 중국인을 감동시켰다. 그는 사역을 통해 기독교의 확산이 경제학적으로나 정치학적으로나 가장 실용적인 관점으로 볼 때 시간의 가장 근본적이며 필수적인 의무라고 보았다.

7.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선교사
그는 중국에서 17년 동안 헌신적으로 사역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넘어 일본, 한국 등 동남아 각국에서 복음을 위해 일하였다. 그가 언더우드선교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한국교회의 고민을 알 수 있다.

기독교를 알고 싶어 했던 한 양반이 몰래 평민으로 가장하고 교회 뒷문으로 들
어와 앉았는데, 바로 옆줄에 자기 하인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질겁하고
나갔다.

아시아 선교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밴더빌트대학 신학대학원에서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동시에 이사회의 이사를 맡았다. 그는 자신의 아시아선교경험과 마음을 담은 4부의 책을 발행하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I discover the Orient』이고, 『How to retain to the Church the services of English-speaking Chinese Christians(영어를 사용하는 중국인을 교회에서 붙잡는 법)』 등의 책이 있다. 그의 책을 보면 그의 전 생애의 삶을 세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브록크만은 1944년 자동차 사고로 인한 질병과 합병증으로 죽기 전에 그가 아시아 선교시기 수장했던 소장품을 반더빌트대학원에 기부했다. 이 소장품 가운데에는 중국고전화폐, 칠기, 청동거울, 자수, 일본의 다기(茶器), 판화, 아울러 한국의 도자기 등이 있다.

8. 브록크만의 중국 선교 내용들
1) 브록크만의 중국 선교활동
1898년 브록만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때마침 의화단사건으로 인해 시국이 어수선할 때 도착했다. 다행이도 그는 테러와 폭력이 난무했던 그 기간을 무사히 넘겼지만 다른 학생자원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호레시트 피트킨(Horace Pitkin)은 예일대학교 학생자원자들의 지도자였는데 중국에 온 지 4년만인 1900년 여름 파오팅에서 폭도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의화단사건이 끝나자 브록만은 선교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자신의 선교 개념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가 중국에 와서 언어공부를 위해 유학자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면서 ‘세상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브록만은 그의 저서인 [동양의 발견]에서 그가 발견한 중국의 철학과 종교에 대해 썼다. 중국에서 브록만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는 중국 전역에 YMCA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서는 재정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국인들, 특히 보다 관용적인 유학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됐다. 그래서 YMCA의 운영권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중국인에게 넘어가 오늘날의 불교 청년 연합회의 일원이 되었다.

2) 브록크만의 중국 선교활동중 아쉬운 내용들
브록만은 중국의 ‘지식인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 이유는 그가 유교, 불교와 기타 동양 종교들에 대해 관용하였고 때로는 동감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대담하게 후퇴한 것이었다. 비록 그는 기독교 선교사이고 복음주의자였지만 타 종교와 그 지도자들에 대한 그의 이런 개방적인 태도는 동료 선교사들과 본국의 후원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브록만은 [동양의 발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위대한 유산을 갖게 됐다. 나는 부유하다. 나의 부는 수천 년 동안 축적된 것이다.
공자, 맹자, 석가,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바울, 예수
이들이 모두 나에게 유산을 남겨 주었다.
나는 시대의 산물이다. 그리고 땅을 파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수를 위해 보냄을 받았다.
작성일:2020-07-06 12:55:30 112.158.11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