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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60_Mills, Ralph Garfield

닉네임
최병은
등록일
2020-07-06 14:33:13
조회수
713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2_60_최병은.hwp (420864 Byte)
Ⅰ. 기본사항

출처: “Allen, Horace Newton,” 김승태, 박혜진 엮음,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355.
Mills, Ralph Garfield (밀즈 / 미국 / NP)

생물연도: 1884-1944
학력: 기록없음
경력: 1908.10.9.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활동
1909 평북 강계선교부로 파송되어 진료활동
1910 강계 동문밖에 계례지 병원(Kennedy Hospital) 설립
1911.9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 세브란스 의대에서 강의
1918.4.1. 선교사직 사임하고 귀국
4. 가족사항: Mills, Ethel Bumgarten(부인)
5. 논저: 기록없음.
6. 참고문헌:
Rhodes, H. A., History of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I, II, 1884-1934, 1935-1959, Seoul Korea Chose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1943 <미국장로교회의 한국선교사>
조선재류구미인조사록, 1907-1942,한국학연구소 1981
연세대학교사,
강계지,

Ⅱ. 선교사 소개
1) 출생 및 성장
자료가 없습니다.

2)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미 북장로교의 선교사 의사 한국명은 밀의사 1908년 10월 9일 부인(Ethel Bumgarten)과 함께 내한 하여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9년에는 평북 강계선교부로 파송되어 그해 5월 2일 강계에서 진료활동을 개시하였다. 동료 선교사 블레어 및 로드 등의 협조를 얻어 1910년 가을 강계 동문 밖에 계례지 병원(Kennedy Hospital)을 설립하여 강계에 최초로 서양 의술을 전하였다. 1911년 9월 다시 세브란스 병원으로 돌아와 진료활동을 펴는 한편 세브란스외과대학에서 강의하였다, 특히 의학교 내에 연구과정을 설치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여 명실상부한 의학교로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14년 11월 4일 세브란스 병원에 연구부가 설립되었다. 연구부는 밀즈(Mills, Ralph Garfield 1884-1944), 반 버스커크(James Dale VanBURSKIRK, 1881-?) 러들로(Alfred Irving Ludlow, 1875-1961)가 주도하여 설립하였는데 가운데서도 밀즈의 역할이 컸다. 밀즈는 선교사로서 이러한 연구활동을 시작하여 선교사 사회의 반응에 많은 신경을 쓴 듯하다. 그것은 이러한 연구활동이 선교와는 무관하게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학자적 취미 활동으로 보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연구 활동이 한가한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조선 사회가 당면한 보건상의 시급한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런 활동을 궁극적으로는 선교활동에도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란 점을 일반 선교사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했다. 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밀즈는 미국에 있는 동안 어떤 의사에게 한국에 돌아가 한국의 실정에 필요한 의학연구기관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쎄요, 그것은 학문적인 관점에서는 좋지만 어떤 선교부가, 특히 우리나라의 선교부가 그러한 것을 선교사업으로 간주할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이는 의학연구활동에 대한 일반 선교사들의 회의적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밀즈도 자신이 선교지에서 연구활동을 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선교부나 일반선교사들의 반응이 어떠할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연구활동이 순수한 과학적 문제를 탐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선교지에서 부딪히게 되는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란 점을 강조해야 했고 연구의 방향도 그렇게 설정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첫 성과가 “식수 소독에 관한 연구”(A simple method of water purification for itineration and household use)였다. 이것은 세브란스 연구부에서 발표한 첫 번째 연구결과로서 밀즈, 반 버스커크, 러들러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4쪽짜리의 간단한 팜플렛으로 출판되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식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콜레라를 비롯한 많은 전염병들이 식수를 통해 전염이 되는 상황에서 제대로 소독되지 않은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집에서는 그나마 물을 끓여먹는 것이 가능하지만 지방으로 많이 다녀야하는 선교사라는 직업상 여행 도중 그렇게 물을 끓여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밀즈는 전도여행 도중 길에서도 간단히 물을 소독해 먹는 방법을 연구해낸 것이었다. 밀즈는 이 방법을 담은 팜플렛을 조선에 온 선교사들에게 배포하여 활용하도록 했으며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는 요즘 수돗물 소독에 사용하는 염소소독을 한 것으로 이를 세브란스 의약용품 상회에서 50캡슐을 함 병에 넣어 판매하기도 하였다.
초창기의 연구실은 소래 해변에 있는 밀즈의 여름 별장에서 작은 규모로 시작되었다. 밀즈는 주로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연구를 했는데, 그것은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 있는 동안은 병원의 일이 바빠 따로 연구할 시간을 얻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밀즈가 따로 연구부를 창설한 것은 그가 앞서 표방한 목적 이외에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1904년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되고 1908년에는 최초의 정식 의학교 졸업생이 배출되는 등 세브란스 병원과 학교로서의 틀을 잡아나가고 있었으나 밀즈가 연구부를 창설하던 1914년 당시는 아직 각 과 나 교실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연구부를 중심으로 전체의 연구역량을 한군데로 집중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좀 거 효율적인 연구 활동을 기대할 수 있었다. 밀즈는 아마 그러한 효과를 기대하고 연구부를 만들었을 것이다. 연구부의 창설과 함께 밀즈는 연구부의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였다. 그는 일반적인 목적과 구체적인 목표를 구별하여 설정하였다. 이를 통해 그의 선교에 있어 중점을 하였던 연구소의 목적과 그의 선교사상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이상에서 열거한 여러 목적은 크게 세 방향의 연구로 요약된다. 한국의 풍토별 연구. 한국인의식이나 생리적 기준에 대한, 전토의학 연구 등이 그것이다.

이후 3년의 시간이 지나 1917년 당시의 이러한 목표에 부합하는 여러 주제들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1917년에 발간된 세브란스 『Catalogue』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수의 식물학적 표본, 특히 과거 한국의 치료자들이 약재로 사용하던 식물들과 많은 수의 약재들이 수집되어 분류되었다.
한국에서도 사용되던 중국의 약물학 서적과 침구서 등이 번역을 진행하였다.
한국인 사이에서 보이는 높은 영아사망률의 원인을 탐구하기 위해 통계자료를 수집하였다.
대변, 소변, 혈액, 객담에 대한 통상적 검사를 표로 만들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항은 구충 감염이 많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에게서 매독감염률은 조사, 모든 계층의 1,000명 이상의 환자들에 대해 바서만 검사를 시행하였다.
몇몇 학교 기숙사에 기거하는 학생들의 음식 섭취를 조사하였다. 분석적이고 생리학적 측면에서 한국 음식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영어권의 의학계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일본 의학문헌의 초록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일.

3) 귀국 이후
1918년 4월 1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Ⅲ. 사진 및 기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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