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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07/ Wallace Jay Anderson(1890-1960)

닉네임
송요한
등록일
2020-07-06 14:37:33
조회수
734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07_송요한.pdf (332229 Byte)
Wallace Jay Anderson (1890-1960)

I. 기본사항

1. 이름: Wallace Jay Anderson / 한국명: 안대선(安大善)
2. 생몰연도 : 1890―1960. 12. 미국에서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 장로교
4. 학력 : 기록 없음
5. 논저 : 기록 없음
6. 한국 선교 기간: 1917-1942
7. 연표
1917년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
경북 안동선교부로 부임해 순회 전도와 교회학교 운영
1921년 2월 5일, 한국 최초 기독청년면려회를 안동에서 창립
1922년 서울선교부로 전임하여 선교부의 사무 전담
1924년 12월 2일 정동 피어선성경학원의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
총회 총무로 피선
1934∼1941년, 기독교서회 근무
1942년, 일제의 강제추방으로 선교사역 은퇴 후 귀국
196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듀아트에서 별세
8. 가족사항 : Anderson, Lillian Elizabethe Beede (부인)
Anderson, Shirley, Anderson Phylis, Anderson Lola Beth (3녀)

II. 선교사 소개

1. Wallace Jay Anderson(앤더슨 선교사, 1890-1960), 안대선
앤더슨(Anderson, Wallace Jay 한국명: 安大善)선교사는 1890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917년 9월 27일 부인(Lillian Beede)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1917년부터 1922년까지 안동선교부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1922년 서울로 전임되어 서울 연지동 136번지에서 부인과 자녀가 함께 거주하였으며, 1942년 은퇴하였다.

그는 1917년 웰번(A. G. Welbon)선교사 후임으로 안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안동에 주재하는 동안 영주, 의성, 예천, 청송 등지를 순회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교인 100여 명이 확보되자 교회학교를 운영하였으며 그의 부인도 경안성서학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또한 앤더슨은 1921년 2월 5일 한국에서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Christian Endeavor Society)를 안동지방에 설립했는데, 처음에 이 모임은 교회사업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금주, 금연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명퇴치운동, 농촌사업 등 범국민적 운동으로 번져갔다.

예천군 신전(薪田)교회에서 윈(印魯節) 선교사와 상계(相繼) 시무하고, 경안노회 산하의 매정(梅井)교회 등 6교회 동사목사로 시무하였으며, 경안노회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서울로 이주하여 1923년 6월 13일 경기 충청노회는 그를 양주군 봉현(烽峴)교회 위임 동사목사로 시무하게 하였다. 양주군 용진(龍津), 월산(月山) 교회를 상계하여 관리하고 양평군 상심리(上心里) 교회와 고송(高松)리 교회에서 클라크(郭安蓮) 선교사와 상계 시무하고, 봉안(奉安), 맹곡(孟谷) 교회에서 쿤스(君芮彬)선교사 등과 봉직하였다.

그는 1941년 일제의 강제 추방으로 세 자녀와 함께 일본을 거쳐 고향 미국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1942년 은퇴한 뒤에는 재혼한 부인(Hermie Lewis)과 함께 캘리포니아(Pasadena)에 거주하다가 1960년 12월 5일 듀아트(Duate)에서 70세로 별세하였다.


2. Lillian E. B. Anderson (릴리언 앤더슨 선교사, 1892-1934), 안의리
앤더슨 부인 릴리안 베데(Lillian Beede 한국명: 安義理)는 1892년 8월 15일 미국 네브래스카 세든에서 출생했다. 퀘이커교도 가정에서 출생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에 온 일본 청년들과 교우하며 동양선교의 꿈을 갖게 되었다. 옥시덴탈대학(Occidental college) 재학시절 켈로그(H. W. Kellogg) 교수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모임에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만났다. 1915년 오키덴털대학을 졸업하고 1917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17년 9월 27일 남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안동과 서울에서 남편과 함께 1934년 11월까지 전도, 교육, 계몽 사업에 전념하였다.

남편이 안동에 주재하는 동안 여자 성서학원을 시작(1920)하였으며 서울선교부에서 여자성경반을 지도하고 정신여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국인들에게 ‘절대 화내지 않는 부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22년 남편이 서울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자 함께 서울로 올라왔으며, 이후 수년간 여성선교사모임 회장과 정신여학교 성경교사로 일하는 등 한국에서 17년 동안 헌신했다. 1934년 11월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심장마비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묻혔는데 그녀의 묘비에는 “그가 오실 때 까지(Till He Comes)”라고 기록되었다.


3. 앤드슨, 릴리언 앤더슨 선교사의 자녀
앤더슨 선교사 부부는 네 딸이 있었다. 그중에서 1919년 6월 12일 출생한 도로시(Dorothy Eleanor)는 1920년 1월 25일 어린 나이로 안동에서 사망하여 안동시 금곡동 124 번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예수님과 함께(With Jesus)”라고 쓰여 있다.

성장한 세 딸 중에서 큰 딸로 출생한 셔리(Shirley)는 간호사가 되었으며, 필리스(Phyllis)는 성장하여 글렌(Glenn)과 결혼하여 주부가 되었다. 그리고 재혼한 부인(Lewis Hermie, 1931.8.29 내한) 사이에서 출생한 롤라(Lola Beth)가 있다.
작성일:2020-07-06 14:37:33 220.117.1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