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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28_John Macintyre

닉네임
박영규
등록일
2020-07-06 16:06:10
조회수
639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3반_28_박영규.hwp (2355200 Byte)
Ⅰ. 기본사항
이름: John Macintyre (馬勤泰)

1. 생몰연도: 1837년 7월 18일- 1905년
2. 출신 및 소속: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United Presbyterian Church)
3. 한국선교기간:
4. 연표
1837. 7. 18 스코틀랜드, 록 로먼드(Lock Romand) 지방 러스(Luss) 태생(胎生)
1865 에딘버러 연합 장로교 신학대학원 졸업 후 목사 안수
1871 중국선교사로 파송
1872. 8. 23 중국 지푸에 도착 (존로스와 함께)
1873. 중국 1차 선교여행 시작, 이양자 마을에서 한국인을 만남
1874. 중국 2차 선교 여행, 중국인 서기의 소개로 이응찬을 만남
1875 성서의 한국말 번역 시작
1876.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에게 세례를 줌
1879. 서상륜 에게 세례룰 줌
1879-1878. 로스의 안식년을 맞이하여 성서번역 작업 책임자가 되어 수정 보완함
1879. 한국언어론(Notes on the Corean Language) 작성함.
1881. 스코트랜드, 영국 성서공회선 지원으로 인쇄기를 상해에서 구입하여 봉천에
설치함.
1880. (한국의 역사, 상태, 관습), (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
영국에서 출간함.
1882.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예수셩교요안내복음전셔> 간행(한국말로 번역된 최초의
성서, 식자공-김청송)하여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에 공헌 1883. 마태복음과 마가복
음과 사도행전 인쇄 1887. 신약 전체를 번역 인쇄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3,000
부 출판
1905. 중국 지푸에서 별세

5. 가족사항

아내 : CATHERINE SUTHERLAND ROSS 캐더린 (존로스의 누이 동생)
(1852 – 1926)

Ⅱ. 선교사 소개

1. 활동배경
매킨타이어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출신으로 존 로스와는 처남의 관계이다. 그는1872년에 봉천에서 존 로스와 함께 전도활동을 시작하였고, 그가 했던 주된 일은 한글성경의 번역이다.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중국에서 한국선교를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준비하였다.

2. 동역자 존 로스
동역자이자 처남매지간인 존로스는 1872년 선교사로 부름받고 아내 스튜어트와 함께 그 해 8월 중국 지푸를 거쳐 그 다음달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부가 있는 영구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만주어를 배우는 한편 만주 우장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873년 사랑하는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큰 위기를 만났지만, 로스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고, 갓 태어난 아기를 영국에 있는 누이동생 캐더린 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녀는 오빠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 선교지에 와 사역하던 총각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가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고 청혼하여 둘이 결혼했다. 이렇게 존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저본으로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문리, 헬라어 성경, KJV, ERV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문 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로스와 매킨타이어 역은 독창적인 번역이라기 보다는 중국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라고 할 만큼 중국어 성경을 모체로 번역한 성경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러나 존 로스가 1882년에 본국에 보낸 보고서와 1881년 매킨타이어의 보고서를 종합할 때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영어 성경을 저본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번역 과정에서 헬라어 성경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인 조력자들이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하여 수정하고 헬라어 성경사전 및 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수정된 원고를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한문 성경을 초본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성경과 대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번역과정은 1882년 7월 로스가 보낸 보고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한 데는 불편이 많았지만,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또한 당시 이응찬이나 백홍준이 모두 의주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몰락 양반 가문이어서 한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한학이 훨씬 더 쉽고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성경 번역을 하는 데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지도 않고 아예 순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4. 번역의 원리
로스와 매킨타이어 번역팀의 주된 목표는 성경 텍스트릐 메시지를 한국의 일반 독자들에게 정확하고 간단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성경을 쉽고 회화적인 언어로 번역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한자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글을 쉽게 읽었기에 그들을 위해 한글 성경을 만들고 싶어했다. 특히 ‘유월절’, ‘세례’ 와 같은 일부 단어의 번역은 중국어나 헬라어를 모르는 한국 독자들에게 그러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번역팀에게는 난제였다. 한국 독자들은 안식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데 매우 혼란스러웠다. 안식일은 다른 날과 같은 날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어떤 사람들은 왜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했다. 또 유월절은 독자들이 6월에 행해진 의식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도 있다. 그래서 로스 번역팀은 당시 한국 문화 상황에 맞게 적절히 적응시키는 일을 하였다. 아브라함은 중국어로 쓰여진 것을 한글로 읽을 때 “아백라한”으로 읽어야 하지만 이 이름을 로스 버전에서는 아브라함으로 번역되었다.


5. 한인교회 설립의 기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1884-5년 입국하기 이전에 1873년에 로스와 매키나이어가 간도의 고려문까지 전도여행을 했으며, 이듬해부터 한국의 청년들과 함께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1882년에 누가복음을, 1883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인쇄하고 1883년에는 신약 선체를 번역하여 <예슈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3000부를 출판하였다. 그후 서상륜을 비롯하여 이성하, 백홍준 등은 성경을 파는 매서인으로 활동하였다. 1883년 서상륜은 몰래 성경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들어왔으며, 1884년 봄에 서상륜은 인천에 보내 온 6000부의 복음서를 인수하여 지방으로 다니면서 배포하였다.

강화도조약과 조미조약 등 개항이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조지 낙스와 길버트 리드 등 주변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선교 움직임이 일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는 아직 한국의 교회사학계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다우스웨이트와 존 로스, 그리고 매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접한 의주 사람들에 의해 조용히 선교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피스에 따르면 “188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를 대신해 디우스웨이트 목사가 조약에 의해 개방된 항구들을 방문해 몇몇 한국 관리들과 외국 공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어로 인쇄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기독교 출판물을 반포했다.” 그가 방문한 항구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 또 얼마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피스가 언급한 항구들은 당시 개항이었던 제물포, 부산, 원산 세 항구 중 아마도 중국쪽에서 접근하기 쉬운 제물포와 부산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서 세례를 받고 성경 번역에 참여하여 로스 역 성경 번역에 크게 기여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김청송, 서상륜 등 의주 출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복음서를 들고 자기 고향과 서울에 잠입하여 성서를 반포하면서 선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으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한국인에 의해 놀랍게 복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자생적으로 전도가 이루어진 한국천주교와 마찬가지로 한국개신교 역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에 의해 복음을 접한 이들에 의해 한국인 공동체 가운데 복음이 놀랍게 확산되어 갔다. 이후 언더우드가 1889년 여행 중 의주에서 세례 받기를 지원하는 자들 “백여 명”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그곳에서 100여 명 가운데 33명을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 세례를 거행했다. 이는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뿌린 복음의 씨가 얼마나 놀랍게 성장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6. 전도 여행
1873년 제1차 전도여행길에 오른 맥킨타이어와 로스는 한만국경 압록강 상류 임강(臨江) 유역 이양자(裡陽子) 마을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여러 모로 한국 입국 계획을 세우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겁먹고 응하는 사람이 없어서 국법이 엄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념하지 않고 다음해(1874년) 봄에 중국인 서기를 데리고 제2차 전도여행길에 올라 고려문에 이르렀다. 한국인들이 서양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중국인 서기를 시켜 한국인을 자기 숙소로 데려오게 했다. 중국인 서기는 며칠 거리를 헤맨 끝에 한국 청년 이응찬을 만나 맥킨타이어와 로스의 어학선생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이응찬은 친구들의 눈이 무서워 귓속말로 응락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는 친구들이 여관에서 코를 골며 깊이 잠든 사이에 서편을 향해 떠난다는 짧은 글을 남겨놓고 여관을 빠져나와 맥킨타이어가 묵고 있던 여관을 찾아갔으며,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우장으로 갔다.이응찬은 맥킨타이어의 어학선생이 된 뒤 1876년에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과 함께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7. 서상륜과의 만남
서상륜의 친구들, 의주의 네 청년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가 만주로 건너간 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소식이 끊어져서 가족과 친척들은 모두 깊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
서상륜은 친구들의 행방을 찾을 겸 늘 마음에 그리던 바깥 세상의 새 문화를 접하기 위해, 청운의 뜻을 품고 동네어른의 기대와 환송을 받으며 한약 행상의 봇짐을 등에 지고 광막한 만주 벌판을 향해 떠났다. 여러 날 후에 그는 영구(營口)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서상륜은 친구들이 나라에서 금지하는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보고 겁에 질렸다.
그는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왔다는 듯이 꽁무니를 빼면서 하루라도 빨리 그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그날로 심한 열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병세가 날로 악화되어 나중에는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이때 친구들의 주선으로 영국 선교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는데, 맥킨타이어 목사가 날마다 병원에 찾아와 지극한 정성으로 서상륜을 간호했다. 밤이고 낮이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돌보고 위로해 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서상륜은 병이 나으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했으며, 의사의 정성어린 치료끝에 그의 병은 완쾌되었다. 그는 약속대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1879년 봄 어느날,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8. 한국어 성경 번역
이때 누가 먼저 한글 성경번역을 제창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맥킨타이어는 세례 받은 한국인 초신자들과 함께 한글 성경번역과 출판사업을 밀고 나갔다.
기독교에 몸 바치기로 결심한 서상륜은 네 친구들과 같이 성경을 번역하는 일, 특히 성경 출판을 위해 목활자(木活字)를 파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는 목활자를 파는 각인(刻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인쇄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재정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1881년 인쇄기를 상해에서 구입하여 봉천에다 설치하였고, 한국인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무활자는 일본에 보내어 4만여 자의 연활자(鉛活字)로 바꾸어 그해 우장을 거쳐 봉천으로 이송되었으며, 중국인 인쇄공과 한국인 식자공 김청송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최초의 한글 성경이 출판되었다.

“1879년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보고에 따르면 누가복음은 1878년까지 로스 목사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등의 공역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해에 로스 목사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게 되어, 맥킨타이어 목사가 그 업무를 맡아 한국인 번역자들과 같이 다시 구구절절 재수정을 하였다. 맥킨타이어 목사는 한글성서번역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한글성서번역은 성경반에서 진행되었는데, 먼저 한국인 번역자들이 나와 함께 한문성경을 읽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나는 다시 헬라어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하였다.’... 1879년 영국으로부터 돌아온 로스 목사는 맥킨타이어 목사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일일이 재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작성했다.”
존 로스 역 한국어성경[Ross Version]의 원본은 중국어성경을 비롯하여 헬라어성경과 두 가지의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 English Revised]의 네 가지였으며, 엄밀히 말해 이 성경은 두 선교사와 여섯 명의 한국인 초신자들의 공동번역이지만, 성경 반포의 공헌으로 말한다면 서상륜 역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1882년 누가복음의 뒤를 이어 요안내(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 이르러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의 신약전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맥킨타이어는 1879년에 <한국언어론(Notes on the Corean Language)>을 썼고, 1880년에는 <한국의 역사, 상태, 관습(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이란 책을 런던에서 간행했다. 맥킨타이어 목사는 1905년 지푸에서 별세했다.
작성일:2020-07-06 16:06:10 112.146.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