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60_Harold Cooper

닉네임
3-1정진오
등록일
2020-07-06 16:10:46
조회수
62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 : 3-1 : 60 : 정진오.pdf (951355 Byte)
I. 기본사항

이름: Cooper, Harold / 쿠퍼 / 한국명 : 구우보(具佑補)
생몰연도: 1889.6.15.-1981
출신 및 소속: 영국 세인트 알번스, 구세군 소속
한국선교기간: 1922.1.29-1935.9.10
5. 연표
1889.6.15 영국 세인트 알번스에서 출생
1910.8.8 구세군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에서 활동
1919.8.11 엘리스 사관과 결혼
1922.1.29 선교사관으로 부인과 함께 내한, 서울 제2영 담임
1922.11 원산의 러시아 난민구제소 사업
1923 개성지방관 역임
1925 해주 지방관 역임
1929 대구 지방관 역임
1933 영동지방관 역임
1935 전라 지방관 역임
1935.9.10 본국으로 전근되어 구세군 경영의 숙박소일
1981 사망
6. 가족사항: Cooper, Alice (부인)
7. 논저 : (-)
8. 참고문헌: 기백 14권; 한국구세군사, 1975; 사관카드; 구세여록; 구세신문.










II. 선교사 소개: 쿠퍼(Harold Cooper, 1889-1981)

한국에 온 구우보(Harold, Cooper / Ailce, Cooper) 선교사

기본적으로 선교사 비율은 교파별로 장로교 45.4% 감리교 28.3% 이후 구세군이 8.3%의 비율을 차지했으며 내한선교사로 127명의 구세군 선교사가 있었다. 그 중 구우보 선교사는 1920년대부터 3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던 선교사이며 한국 구세군 100년사에서는 그 기간을 ‘개척과 도전의 시대’ 그리고 ‘안정과 정진의 시대’에 걸쳐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사관들에 있어서 조선의 풍토는 낯선 환경일 수밖에 없었으며, 다른 풍토와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많은 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의료적 상황은 열악하여 병이 나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고, 적절한 치료가 어려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선교사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구세군 선교사관들 중에서도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가난과 질명이 만연했던 조선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관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계속해서 구세군 사관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1922년 연초에 본영에는 허일 참모 정위(Mrs. Staff Captain Hill)의 부인이 사망한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 때 그녀는 조선인들에게 희망한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다. 이 때 신태빈 사령관은 장례식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을 데려가시지만 사역은 계속 이루고 계신다”라는 언급을 한다. 이와 동시에 1월 29일 영국에서 새로운 선교사관이 도착하게 되었다. 선교사관들의 죽음에 따른 충원이 일어난 것이다. 치즈만 부관 동부인(Adjutant and Mrs. Cheeseman)이 쿠퍼 기관 동부인(Ensign and Mrs. Cooper)과 함께 영국으로부터 출발해 조선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독신사관 숙소에서 열린 사관집회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주말 아침에는 경성 제 1영문에서, 밤에는 일본인 영문에서 열린 집회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2. 구우보 선교사 부부의 사역

(1) 약력을 통한 사역 나열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보니 자세한 약력을 통해서 그들이 했던 일들을 소개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간략하게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구우보 선교사관은 1889년 6월 15일 영국 세인트 알번스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8월 8일 구세군사관으로 임명되었고 영국 내 7개의 활동지에서 봉직했다. 1919년 8월 11일 엘리스 사관과 결혼하였고, 1922년 1월 29일 부인과 함께 한국선교사관으로 내한하였다. 서울 제2영(아현영)을 담임하였고, 그 해 11월부터는 원산의 러시아 난민구제소 사업을 맡아보았다. 1923년 12월 28일 개성지방관, 1925년 3월 12일 해주지방관에 각각 임명되었다. 본국 휴가 이후인 1929년 2월 6일 대구지방관, 1933년 영동지방관, 1935년 전라지방관을 각각 역임하고 1935년 9월 10일 본국으로 전근되었다. 은퇴 이후에는 구세군경영의 숙박소 일 등을 돕다가 1981년 별세하였다.

쿠퍼에 대해서 구할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적다. 그의 부인 엘리스에 대한 정보는 더욱 그러하다. 약력 이상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 출처로는 김준철의 “한국 구세군 100년사: 1908-2008”가 전부이다. 1922년 1월 말에 한국으로 건너온 쿠퍼는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여 서울 제2영(아현영)을 담임한다. 그런데 그 해 11월에 그는 원산의 러시아 난민구제소에서 일한다. 이 사업은 쿠퍼가 맡아서 지속적으로 했던 일이 아니라, 짧은 기간 동안 담당했던 일이었다. 이는 김준철의 책에서 드러난다.

(2) 아현영문에 대한 정보

허가두 정령은 1908년 12월 4일 금요일 두 번째 영문을 위해 도시 중심 “광통교 근처”에 자산을 임대하기로 결정하였고 동년 12월 9일 수요일 서울 2영문이 개영되었다. 이날 35명이 참석하였고 5명의 개심자가 있었다. 회관은 매우 편안하고 보기 좋은 모습을 갖추었다. 담임사관은 여독신사관인 기관 워드였다. 그를 도와 본영사무실에서 속기사로 일하면서 라일리 부위가 1909년 1월 10일에 와서 보조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9년 7월 30일 금요일 서울 2영문이 드러있던 동대문 그넟의 회관은 약 8개월 만에 닫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남자들은 서울 1영문으로 예배를 보러 갔고 여성들은 다양한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짐으로 최초로 영문이 폐쇄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이 아현영문은 1916년 7월 17일에 개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구우보 선교사가 후에 이 아현영문을 담임하게 된다.

(3) Herold Cooper의 사역을 대신하기도 했었던 Alice Cooper

1922년 12월 8일에 서울에서는 리처드 기념관(Richards’ Memorial Hall)이 개관하였다. 리처드의 한국명은 이도식이었다. 조선 땅에서 순직한 이도식 부령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캐나다 구세군의 자금 지원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 기념관의 개관식 중의 한 장면에 쿠퍼 부부가 언급된다: “피어스 부장이 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강연을 한 후 회관의 개관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으며 기념관 열쇠를 구우보 부관 부인에게 건네주었다. 구우보 부관은 원산을 방문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을 대신하여 구우보 부관 부인이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다.”
1922년 12월에 쿠퍼는 러시아 난민구제소 일로 원산에 가 있었다. 이 때 그 부인은 서울에 남아있었으면서 리처드 기념관 개관식 때 남편의 역할을 대신하였다.ㅏ 본래 쿠퍼가 서울 제2영의 담임으로서 기념관의 열쇠를 받았어야 했었던 것이다. 그의 원산 “방문”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난민 구제소 일로 장시간 출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한국에 입국한 해에 쿠퍼가 서울과 원산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것이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4) 구셰신문과 금주운동

이듬해 1923년 3월 구세군의 금주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사관학교 학기가 운영되지 않았음에도 거의 2만부에 이르는 ‘구셰신문’인 주문되어 3월에 인쇄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본인 군우들도 일본어로 된 “구셰신문” 금주호를 경성에서 4천부 이상을 판매했으며 부산, 전주, 광주에서 판매된 것까지 합치면 총 판매는 3만부에 이르렀다. “구셰신문”을 보고 변화된 한 남자의 편지가 본영에 도착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며칠 전 경성에 갔을 때 저는 ”구셰신문“을 한 부 사서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의 고결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내가 정말 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히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우리 회사에 있는 다른 동료들에게도 알려주어 그들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성경과 찬송가를 사려하는데 가격을 알려주시면 기쁘겠습니다. 김도한 드림”

이 뿐 아니었다. 소년악대가 허일 참모정위와 최수만 부관을 비롯한 몇몇 외국인사관, 조선인사관들과 함께 구셰신문을 들고 특별 전도를 나갔다. 3시간 동안 1,337부를 판매하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감사의 말도 들었고, 소서별 부관은 한 상점을 지날 때 남자 한 사람이 나와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보고했다.
“우리는 우리 자국의 사람들이 ”구셰신문“을 팔면서 술의 악함에 대해 전파하는 데에 감사하였다. 그런데 당신은 외국인인데도 이 먼 조선까지 와서 금주호 신문을 팔면서 술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등에 대해 전파하는 것에 대해 참으로 고맙다고 말하면서 그 남자는 신문 6부를 사서 우리를 보고있던 이들에게 건네주었다. 부관에게서 신문을 산 4명의 남자들이 토요일 저녁 집회에 왔는데 그 중 3명이 회개하였다.”

쿠퍼 부관도 개성에서 그를 돕는 자들과 함께 나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550부를 판매하였다. 그리 오래지 않아 본영은 군국에서 이 특별한 신문을 5만부까지는 팔 수 있을 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기쁜 일은 많은 사람들이 이 금주호 신문을 읽고 회개하게 되었고 술을 끊게 되었다는 간증이 계속 본영에 들려오는 것이었다. “서울신문” 기사에는 “혼마치 경찰구역에 있는 모든 이발사들이 술을 끊고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결정 하였으며 또 돈을 모아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기로 결심하였다.”는 보도가 소개되었다.

(5) 토프트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애도
구세군 사령관으로 활동했던 토프트 영국선교사가 1928년 별세하였을 때 그의 죽음에 대하여 쿠퍼 참모 정위가 “그가 우리 지방(해주)에 여러 영문을 방문하여 주신 것을 심히 기뻐하며 전하신바 복음과, 끼치신바 모범과, 감동과 감화는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지방 영문을 순회할 때에 태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피곤한 내색도 보이지 아니하고, 구주를 위하여 기쁨으로 하셨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편벽됨이 없이 곧고 바르게 하셨다.”라고 언급했던 기록 또한 찾아볼 수 있다.

(6) 1935년 내한 사역 마침

쿠퍼 선교사관 내외가 한국에서 사역을 마치고 돌아가는 데에 할애된 내용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작성일:2020-07-06 16:10:46 121.133.147.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