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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16 / Barret. W. M. (1871~1956, NP) / Carson, Elizabeth

닉네임
김대경
등록일
2020-07-06 16:13:58
조회수
65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 1반_16_ 김대경.hwp (3164160 Byte)
Rev. W. M. Barrett / Elizabeth (Carson) Barrett


Ⅰ. 기본사항

1. 이름: William. Marshall. Barrett / 바렛 / 한국명: 박위렴(朴緯廉)
2. 생몰연도: 1871.7.26 – 1956.3.6.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01.9.10. - 1906.가을
5. 연표 
1871 7. 26. 펜실베니아 주 마운틴 톱 출생
1898 캔자스 주 엠포리아 컬리지에서 공부
1898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여
1901. 5 엠포리아 지역에서 안수받음
1901~1906 남한의 대구에서 선교사 사역
1901. 9. 10.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영남지구에서 활동
1902 PCUSA 한국 선교 연례회의 참석
1903 안동을 비롯하여 50 일의 선교여행
1903. 9. 10. PCUSA 한국 선교 19 차 연례회의(평양에서 개최)
1908 까지 1 천명의 결신자를 얻음
1904 대구에서 남자초등학교 교장직 겸임
1906. 가을. 건강문제로 귀국
1906~1910. 캘리포니아 주 보몬트에서 목회
1910~ ? 사우스 다코다 주 레이크 안데스에서 목회
1956. 3. 6.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바렛 선교사 소천

6. 가족사항
부인: Barrett, W. M.(부인) - Miss Elizabeth Carson
1877. 1. 3. 일리노이주 출생,
1904. 선교를 위해 조선으로 오다
1905. 대구에서의 사역 및 바렛과 결혼
1949. 8. 26.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소천

Ⅱ. 선교사 소개

1. 1,100km 나 걸으며 전도하다.

그는 1901 년 9 월 10 일에 내한하여 영남지구 선교사로 봉직하였다. 당시 북장로교 대구선교지부는 순회전도를 하며, 교회를 직접 설립하거나 현지인을 중심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사역에 도움을 주면서 선교의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들은 선교지를 분할하여 네비우스 정책 즉 스스로 전도하며, 스스로 재정을 확립하며, 스스로 다스리는 선교정책에 영향을 받아 그대로 사역하였다. 그는 경상북도 북쪽을 담당하게 되었다. 1903 년 그는 첫 선교여행을 브루엔과 함께 했다. 안동시장에 방문한 후, 그의 친구가 아담스로부터 산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홍채삼을 만나기 위해 북쪽으로 계속해서 갔다. 그해 홍채삼은 기독교를 배우기 위해서 80 마일 떨어진 대구까지 갔었던 것이다. 바렛은 선교여행 중에 홍채삼의 집에 머물렀으며, 그 지 역의 첫 번째 세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첫 번째로 믿은 사람은 아니었고, 그 사람은 그 해 죽었다. 그는 안동을 비롯하여 50 일에 걸친 이 선교여행에서 그는 1,100km 나 걸었으며 약 1000 여매에 달하는 전도지를 돌렸다. 이를 통하여 12 명의 결신자를 얻었고, 1904 년에 12 부락에서 33 명, 1905 년는 20 부락에서 79 명 그리고 1906 년에는 2 백명, 1907 년에는 6 백명, 1908 년에는 1 천명에 달했다.

2. 주일학교 및 청소년 사역

아직 미혼이었던 바렛은 대구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담스 목사 부부와 그들의 세 자녀와 함께 배를 통해 부산을 경유하고, 약 100마일을 육로를 이용해서 대구로 오게 되었다. 1902~3년 무렵 바렛이 주로 맡은 사역은 주일학교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였다. 주일학교 사역은 다양한 단계에서 성공적인 면모를 보였다. 소년들이 성경 구절을 외우고, 주기도문과 십계명까지 암송하게 되었다.
바렛은 연회(1903년 9월 평양에서 열린 PCUSA 회의로 추정) 이후 북쪽으로는 압록강 가까이의 선천과 평양을 방문했고 송도와 서울, 공주를 거쳐 대구까지 오게 되었다. 그는 지역 교회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사역했으며, 브루엔 선교사가 부재중인 경우 대리 목사로서 지역교회를 섬겼다.

3. 교육을 통해 선교 일선의 자리를 지켰다.

한편 1900 년 대구에서 시작한 남자국민학교는 처음에 4 명으로 개교하여 1904 년 28 명, 1905 년 47 명이었으며, 1907 년 3 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는 이 학교의 교장을 겸직(1904)하면서 선교일선에 최선을 다했는데, 1906년 퇴임하였다.

4. 여선교사 엘리자베스 카슨과의 결혼

1904년 10월 14일, 브루엔 선교사는 사역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인해 미혼 여성 선교사 한 명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1905년에 미혼 여성 두 명이 파송되는데, 그 중 한 명은 브루엔의 요청에 따라 대구로 보내지게 된다. 이 여인이 바로 엘리자베스 카슨이다. 엘리자베스 카슨은 대구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그녀는 방문객을 대접하는 일과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여성들을 돌보는 일을 잘 수행했다. 카슨은 브루엔 선교사의 부인이 아파서 사역하지 못할 때는 주간에 소녀반을 대신 맡아서 잘 가르쳤다.

카슨의 헌신적인 사역은 동료 선교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있기 전 대구 현지에서의 여성 사역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선교사 부인들의 고충이 많이 존재하였으며, 여성을 위한 사역에 온전히 헌신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카슨이 파송된 이후에 그녀는 선교사 부인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그녀의 존재는 브루엔 등 다른 선교사들이 마음 놓고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대구에서 선교사로서 활동하고 있던 바렛 선교사님과 교제를 했고, 결국 1905년 가을 결혼을 하게 된다. 바렛과 카슨은 1905년 9월 14일 목요일 서울에서 결혼을 하였다.

5. 건강 문제로 인해 귀국하다.

Rhodes 는 말하기를, 바렛 부부는 건강 문제로 1906년 가을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바렛 선교사님이 1901년부터 대구에서 사역하는 동안 거주시설 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주일학교, 선교, 병원 건축 등 다양한 사역에 헌신적으로 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6. 귀국 후 목회활동에 전념하다.

건강 문제로 인해 대구에서의 선교사역을 마친 뒤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 바렛 선교사님은 목회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 보몬트, 사우스 다코다 주 레이크 안데스 등의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그는 비록 건강의 문제로 선교사역을 더 이상 감당할 수는 없었지만, 미국으로 귀국하여 하나님 앞에서 받은 목회자의 직분을 위해 힘썼다.

그의 부인은 1949 년 8 월 26 일 먼저 소천하였고, 바렛은 1956 년 3 월 6 일 캘리포니아에서 소천하였다.
작성일:2020-07-06 16:13:58 222.237.95.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