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02/Harry J. Hill

닉네임
pulwon
등록일
2020-07-06 18:57:35
조회수
705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3_02_이풀원.hwp (536064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Harry J. Hill (힐) / 한국이름: 허일(許一)
2. 생몰연도: 1891.6.9.-1976.1.30. (내한-이한연도: 1917-1961) 『미국장로교 내한 선교사 총람: 1884-2020 미국장로교 한국선교회편』 (미국장로교 한국선교회): 82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학력
1881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 신학부 졸업
1883 마이매미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 취득 후, 결혼
5. 한국선교기간: 1917.9.27.-1961
6. 연표
1917.9.27. 부인과 함께 내한. 서울에서 선교활동 시작
1920 정식으로 북장로회 선교부에 편입
1919-1941 22년간 평양, 평남지역 선교에 헌신
평양 남자성경학원 원장, 평양장로회신학교 강사로 활동
1941 신사참배 반대교인들 지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송환
이후 유카탄주의 한국인 대상으로 목회
1947.7 재내한, 경북 안동에서 4개월간 활동
청주선교부에 배속되어 선교사업 재개
1950.8 대구, 부산에서 공산군 포로 대산으로 전도활동
평양 수복때 방문하여 많은 목회자, 교인 피난 추진, 전재민 구호위해 활약
청주성경학원 원장으로 봉직, 청주맹아학교 지원, 맹인선교
부인은 서울, 평양, 청주에서 여성중심의 선교사업 추진, 평양여자성경학원,
청주여자 성경 학원 교수로 활동
1961 정년으로 인퇴하고 귀국 “Hill, Harry James,” 김승태, 박혜진 엮음,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267.


7. 가족사항 (부인) 『미국장로교 내한 선교사 총람: 1884-2020 미국장로교 한국선교회편』 (미국장로교 한국선교회): 82

(1) 이름: Hill, Mary Rose
(2) 생몰연도: 1892.2.26.-미상
(3) 내한-이한연도: 1917-1961
(4) 학력: 옥시덴탈대학, 몬먼스대학, 웨스턴여자대학
(5) 활동지역: 서울, 평양, 선천, 청주
(6) 활동내역: 여성선교사업, 평양여자성경학원, 청주여자성경학원 교수
(7) 활동영역: 교육, 복음
Ⅱ. 선교사소개

1. 출생 및 성장
Hill, Harry James 선교사는 1891년 6월 9일 출생하였다. 그는 1881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후 Hill, Mary Rose와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1917년 내한하였으며 1961년 정년으로 은퇴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2.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1) 한국선교에 대한 헌신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이자 목사인 허일선교사는 1917년 9월 27일에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서울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고, 정식 북장로회 선교부에 편입된 것은 1920년 이었다. 1919년부터 평양에 배속되어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까지 22년간을 평양과 평남지역 선교에 선교하였다.
평양 남자성경학원 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평양장로회신학교 강사로도 활약하였다. 1938년 한국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이것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할 선교사들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결국 1914년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고 말았다.

2) 포로선교
이 후 해방되기까지 해방 후 1947년 7월 다시 내한하여 경북 안동에서 4개월 동안 활약한 후 청주선교부에 배속되어 선교사업을 재개하였다. 1950년 6.25 사변이 나자 잠시 일본으로 피했다가 다시 전쟁중인 한국으로 나와 1950년 8월경부터 대구 및 부산엣 공산군 포로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공산군 포로들 사이에는 기독교인들이 있어 포로수용소 안에 자치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는데, 디캠프(O. DeCamp)⦁보켈(F. Voelkel) 등과 함께 포로수용소 안의 교인 등을 방문하고 그들이 세운 수용소 안의 교회를 지원하면서 포로선교를 전개해 나간 것이다.
그는 또 북진하는 유엔군을 따라 그해 10월 아담스(E. Adams)⦁캠벨(A. Campbell)⦁킨슬러(F. Kinsler) 등과 함께 수복된 평양을 방문하고 피난 길에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을 피난시키는 일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3) 다방면의 선교활동
전재민 구호를 위해서도 크게 활약하였고 휴전후 청주에 머물면서 청주성경학원 원장으로 봉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맹인선교에도 관심과 협력을 아끼지 않아 청주 맹아학교를 적극 지원했으며 양정신을 개인적으로 도와 그가 후에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한편 부인은 남편을 도와 서울⦁평양⦁청주에서 여성 중심의 선교사업을 추진했으며 평양 여자성경학원, 청주 여자성경학원 교수로 활약하였다. 이들 부부는 1961년 정년 은퇴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편집자, “힐3 Hill harry James,”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6권 (서울: 기독교문사, 1983): 1339-1340.

Hill, Harry James (허일) 선교사 부부는 세상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얼마든지 성공하고 자신의 안락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결코 쉬운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의 기록들을 보면 일제의 여러 가지 선교의 방해로 인해 다시 본국에 돌아가야만 했다.

그와 동시 얼마든지 한국을 향한 선교를 포기할 수 있고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 돌아갈 수 있었지만 한국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교사명을 그는 결코 포기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그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으며 마침내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열정을 보였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텐데 말이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해 다방면에서 뛰어난 역할을 잘 감당한다.
작성일:2020-07-06 18:57:35 211.196.143.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