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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001 / Heyes, Louiss Brewster(미상, NP) / 3-3 서은석

닉네임
서은석
등록일
2020-07-06 20:41:06
조회수
600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3_01_서은석.hwp (4578304 Byte)
한국교회사 내한 선교사 소개: Heyes, Louiss Brewster(미상, NP)

Ⅰ 기본사항

이름: Heyes, Louiss Brewster / 헤이즈 / 한국명: 혜유의(惠留義)

1. 생몰연도:
출생 : 1893.10.24 Shandon, San Luis Obispo County, California, USA
소천 : 1966.10.16 (향년 72세) uarte, Los Angeles County, California, USA
묘지 : San Gabriel Cemetery San Gabriel, Los Angeles County, California, USA.

2. 출신 및 소속: 미국, 북 장로교
3. 한국선교사기간: 1918.? - 1947.?
4. 연표:1918. 개인자격으로 내한하여 선천에서 선교사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일함1922.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선교사로 정식 가입. 평양 외국인학교 교사로 봉직 평양에서 사경회의 발전된 형태인 여자 달(月)성경학원 원장으로 성경을 가르쳤다.1940.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되었으며, 다시 귀환하지 못함1947.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5. 가족사항혼인여부:
그녀의 1920년 미국 여권 신청서에 따르면, 26세의 헤이스는 키가 5cm9 1/2"로, 높은 이마, 회색 눈, 긴 코, 큰 입, 타원형 턱, 중간색 갈색 머리, 하얀 안색과 타원형 얼굴이었다.
루이즈의 부모는 Marshall Crane Hayes 와 Medea A. Brewster.였다.그녀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그 후 농사일을 목적으로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19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버지 헤이스는 1893년 10월 캘리포니아 주 라만다 Pk(파사데나 타운쉽의 일부)의 산타 아니타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Ⅱ 선교사 소개: 헤이즈(Heyes, Louiss Brewster)

Hayes, Louis Brewster
헤이즈 선교사의 이름이 요람과 기백16권에는 “Heyes, Louiss Brewster”로 나와 있지만 이는 잘못된 표기라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2. 한국교회 초기 성경학교를 통해서 내다본, 헤이즈의 사역초기 한국교회의 선교 사업 중에 일환으로 평신도에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학교(聖經學敎)”가 있었다.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침으로 교역자를 배양하고, 교회에 봉사하는 주일학교 교사와 같은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해 운영되었다는 것을 초기 성경학교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미국 감리교 선고사인 스크랜톤(Scranton,M.F.) 부인이 1888년(고종25)에 서울에서 시작된 성경반이 그 효시가 되었는데, 그 교육형태는 아주 초보적인 것이었으나, 한국교회 최초의 평신도 교육기관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성계몽을 위한 특출한 면목을 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장로교 여성을 위한 성경교육은 헤론(Heron)부인이 제일 먼저 시작했으나, 언더우드 부인에 의하여 1984년에 실시된 ‘전도부인 양성반’이 체계화된 성경교육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97년에는 평양에서 6개월 과정의 단기 성경학원이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사역을 헤이즈가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여기서는 주로 사범교육을 시행하여 배운 내용을 그대로 자기 교회로 돌아가서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선교부에서는 이러한 단기 성경학원을 선교부 지회가 있는 곳마다 세우도록 권장하였으며,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사정을 참작하여 농한기를 이용해서 1년에 수개월씩 수업하여 2년 내지 6년 동안 전과목을 이수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방 성경학원은 그 명칭을 ‘고등성경학교’라고 바꾸기 시작하였고, 수업기간도 1년에 7, 8개월씩으로 연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3년 수업과정으로 제도화하였다. 교과내용도 성경 이외에 일반 고등학교의 과목까지 지도하여 교회의 평신도지도자로서 또는 교역자로서 손색이 없는 자질을 구비하도록 배려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육을 받은 학생수가 일제 말기에 3,687명에 달하였으나,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로 신앙진리가 유린당하게 될 위기를 맞자, 성경학교는 모두 문을 닫고 일제에 항거하였다. 1940년 헤이즈(혜유의)는 일제로 송환되게 되는데, 학생들과 함께 일제에 항거를 하다가 일제에 송환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을 가르친 성경학교의 원장이었고, 그의 학생들과 함께 일제에 항거하다가 붙잡혀 한국 땅을 떠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나라에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성경학교는 다시 개교되어 그 수가 대폭 늘어났는데, 그 자리에 헤이즈는 함께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 당시 성경학교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사진들
□ 평양에서 있었던 여성성경학교의 사진
□ 헤이즈가 쓴 글의 일부
□ 회계장부에 기록되어있는 헤이즈의 이름



참고문헌: The Korea Mission Field, 1986
웹사이트: 한국민족대문화 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105336725/louise-brewster-hayes
작성일:2020-07-06 20:41:06 14.4.14.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