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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52 / Swicord, Donald Augustus(미상, SP) / Swicord, Virginia

닉네임
최주영
등록일
2020-07-06 21:14:35
조회수
705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3_52_최주영.hwp (8019456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Swicord, Donald Augustus / 스위코드 / 한국명: 셔국태(徐國泰)
2. 생몰연도: 1894.8.21.-1969.2.20.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21-1963
5. 연표
1894.8.21. 미국 조지아주 출생
1921 남캐롤라이나 대학교 졸업, (추가)선인동 교회 돌봄
1922 어학, 서부구역 순회전도보조, 남학교 기술업무
1923 어학, 서부구역 전도사역 협력, 전주신흥고등학교 기술교사
1924 어학, 서부구역 전도사역
1925 서부구역, 남서구역(임실 제외) 전도사역, (추가)신덕리 교회 당회장
1926 서부구역, 남서구역(임실 제외) 전도사역, (추가)금산 교회 당회장
1927 서부, 남서구역 전도사역, 책방책임, 안식년
1928 안식년, 서부구역, 남서구역 전도사역
1928 콜롬비아신학교 졸업
1929 서부구역, 남서구역 전도사역
1930 서부구역, 남서구역 전도사역, 남문교회 협력
1931 서부, 남서구역 전도사역, 남문교회 사역
1932 서부, 남서구역 전도사역, 남문교회 사역
1933 서부, 남서구역 전도사역, 남문교회 사역, (추가)제주노회 지원 사역
1934 서부구역 전도사역, 남문교회 사역, (추가)신광학교 2대 원장,
(추가)『청직(廳直)이와 재정(廳直)』 출간, (추가)덕진교회 설립
1935 서부구역 전도사역, 남문교회 사역
1936 서부구역 전도사역, 남문교회 사역, 안식년
1938 서부구역, 동부구역(Boyer) 전도사역, 남문교회 사역
1939 서부구역, 동부구역(Boyer) 전도사역, 남문교회 사역
1940 전도사역, 귀국
1948 순천 전도사역, 청년사역, 성경교육, 순천노회
1949 순천 전도사역, 청년사역, 성경교육, 순천노회
1963 귀국
6. 가족사항
부인: Swicord, Virginia Mays
자녀: Mary Virginia / Donald Augustus, Jr / Grace Lexkde / Mary hittleton

1. 이름 : Swicord, Virginia Mays / 스위코드 / 한국명:
2. 생몰연도: 1902-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24.-1963.
5. 연표
1902 미국 조지아주 출생
1918-1922 베시 티프트대학 피아노 학사 졸업
1919-1923 W.M.U 훈련학교
1924 전주 어학
1925 전주 어학
1926 전주 어학
1927 어학, 안식년
1928 안식년, 어학, 선교부전도사역
1929 어학, 선교부전도사역
1930 어학, 성경학교 음악담당, 완산교회 주일학교사역
1930-1936 전주한일신학대학 음악담당
1931 성경학교 음악담당, 완산교회 주일학교사역
1932 성경학교 음악담당, 완산교회 주일학교사역
1933 성경학교 음악담당, 완산교회 전도사역
1934 성경학교 음악담당, 완산교회 전도사역
1935 성경학교 음악담당, 완산교회 전도사역
1936 성경학교 음악담당, 완산교회 전도사역, 안식년
1938 남문교회 전도사역
1939 남문교회 전도사역
1940 남문교회 전도사역
1948 순천 전도사역
1949 순천 전도사역

Ⅱ.선교사 소개: 스위코드(Swicord, Donald Augustus, 1894-1969)
미국에서 선교사 교육을 마친 뒤 1921년 내한, 전주선교부에 소속되어 선교일선에서 활동하는 한편 신흥학교에서 1949년까지 봉직하였다. 1931년에 D.A Swicord는 Preaching the Word.(말씀을 강론하는 하는 것에 대한 칼럼을 쓰기도 하였고, 1932년에는 The Layman’s Part in Securing and Training New Believers (새신자를 훈련하고 확보하는 평신도의 역할)라는 칼럼을 통해 전도사역에 있어 평신도의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하였다.

<추가자료>
1. 선인동 교회 돌봄(김제지역)
1905년 3월 15일 안백선은 박순경과 함께 초가 3칸을 매입하여 선인동 교회를 설립하였다. 안백선은 전주 선교부에서 진행하는 평신도 지도자 양성 과정인 달 성경학교에 입학하였고 1908년 레이놀즈 선교사의 위임을 받아 선인동 교회 영수가 되었다. 박순경은 집사로 충성하기 시작하여 날로 교회가 부흥하였고, 1919년 박순경 집사는 장로로 임직하게 된다. 김제 감옥에서 옥리 일을 보는 김여일이라는 사람이 선인동 교회 소식을 듣고 찾아와 신앙생활을 하니 교회는 더욱 활기를 띠었고, 1921년부터는 스위코드(서국태)선교사가 교회를 돌보게 되었다. 농촌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는 믿음을 가진 선인동 교회 교인들은 보이어(Boyer Elmer Timothy 1893-1976, 1921-1966활동)선교사가 당회장으로 있을 당시 1925년 선인동 학원을 설립하여 야학교육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위 자료로 보아 스위코드 선교사는 1921년에 내한한 후, 전주 선교부에 소속되어 선인동 교회로 파송받아 교회를 돌본 것으로 보인다. 1925년에는 보이어 선교사가 선인동 교회의 당회장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전까지 선인동 교회 돌봄 사역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2. 신덕리 교회(정읍지역)
정읍군 용북면 신덕리에는 테이트 선교사와 최중진 조사에 의해 전도 받은 김덕수, 이복국, 신준삼이 중심이 되어 신덕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1925년 11월 17일에 첫 당회가 열렸는데 당회장은 스위코드(서국태)선교사였고 장로는 김덕수였다. 1927에는 윈(위인사) 선교사가 당회장을 맡았다.

3. 금산 교회(김제지역)
머슴을 섬긴 주인 조덕삼 장로는 머슴이었던 이자익을 지원해 신학을 공부하게하고 금산 교회 담임목사가 되게 한다. 이후 이자익 목사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으로 경남 거창 선교부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러자 전북노회 전주 남서 지방을 담당하던 스위코드(서국태) 선교사가 당회를 관리하게 된다. 공동의회를 소집해 장로 1인을 선출하게 되는데 이때 조덕삼 장로의 큰 아들 조영호 집사가 장로로 피택된다. 조영호 집사는 1926년 6월 10일 서국태 당회장의 집례로 장로 장립을 받는다.

4. 덕진교회(완주 이서, 전주지역)
전주 덕진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첫 발을 뗀 것은 1934년 5월 15일 스위코드(서국태)선교사가 노회의 허락을 받아 완주군 이서면 상가리 110번지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덕진교회를 설립한 것이 그 태동이었다.(행정구역 명칭 변경 후에 조촌면으로 변했다가 전주시로 편입되면서 덕진동으로 개명됨.)

5. 제주노회 지원사역
제주노회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는 형편에 놓였다. 제주노회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와 소속 선교사들의 인정에 호소할 뿐이었다. 이러한 판단 아래 제주노회는 선교사 1명을 파송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회도 재정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스위코드(서국태), 탈마지(타마자), 크레인(구례인) 선교사를 제주노회 방조위원으로 임명하여 제주도 교회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6. 중생학원으로의 인도
1924년 한상용은 자신의 재산 일부를 팔아 임상교회 내 중생학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이 학원의 원장에는 한상용, 교사로는 전주 기전여학교를 졸업한 이영주 교사를 비롯해서 김용식, 염종세, 오기준, 이준묵, 고영로 등이 거쳐 갔으며, 이 중에서 오기준은 16년간이나 이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기준을 중생학원으로 인도한 사람이 바로 스위코드(서국태)선교사였다. 오기준은 전주 태생으로 전주 신흥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하는 일 없이 놀고 있었다. 일제의 통치하에서 사상이 불온하다 하여 관공서에 취직할 수가 없었다. 오기준은 기회가 오면 신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가정의 경제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그냥 있던 차 서국태 선교사의 요청으로 중생학원으로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기준이 중생학원이 시골에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는데 서국태 선교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그 곳에서 열심히 학생을 가르치면 장차 신학교에 보내주겠습니다.” 서국태 선교사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오기준은 중생학원이 있는 임상리로 오게 되었다. 그는 부임해서 어린아이들로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한 교실에 모아 놓고 열심히 가르쳤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서국태 선교사는 미국으로 철수하였다.

7. 돈의 문제를 다룬 선교사
스위코드(서국태) 선교사는 1933년 장로교 재정지출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역자봉급(29.9%), 관리비[등유, 사환, 건축, 수리](40.2%), 교육비(10.3%), 전도비(7.0%), 상회비(2.9%), 사회봉사비(1.7%), 특별비(3.8%)
스위코드(서국태) 선교사는 돈의 문제를 다룬 책 『청직(廳直)이와 재정(廳直)』(74p)을 1934년에 조선야소교서회에서 출간하였다. 본 책은 기독교인들의 연보(헌금)의 교리적 원칙과 교회 재정 관리에 관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도 밝히듯이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수년간 총회와 노회의 총계표를 조사연구하였고, 교인들의 1년 평균 연보 통계를 내면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십일조 5원씩만 연보하여도 현재 연보의 배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그렇게만 연보를 한다면 교역자 봉급과 교회경비와 자선사업을 담당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하였다. 당시 노회들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재정적 압박을 받는 상황에 있었고,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회도 재정적으로 어려웠기때문에 이를 해결해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돈의 문제를 다룬 책을 저술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8. 화재 현장에서의 스위코드 일기
내가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가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을 때 나는 기진해 쓰러졌으며 내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화재 현장 가까이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현장에 도착하자 캐슬러가 내 음성을 듣고 모두가 안전하다고 내게 소리쳤다. 36명 입원환자가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안전했던 것이다. 내 아내와 아이도 그 36명 중에 있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았다니...
(1935년 예수병원 화재로 전소, 그 현장에 있었던 도날드 스위코드 선교사 기록)
9. 한국권투의 시작
김영구는 전주 신흥학교 선생으로 있었는데, 스위코드(서국태) 선교사가 장갑을 주면서 권투를 하자고 해서 배우게되었고, 이것이 한국권투의 시작이다. 이후 김영구는 1923년에 Y체육간사로 들어가서 열심히 권투를 보급하였다.

10. 신사참배 반대
부위렴(W. F. Bull)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미나미는 1938년 8월 조선 총독을 부임한 후 신사참배, 궁성요배, 일본기 게양, 일본어 보급등을 강조하였다. 황국신민서사를 1937년 10월 2일 제정, 공포하였고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교회와 노회는 엄중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미나미는 강압적으로 신사참배를 실시하였는데 지역적으로 교세가 막강한 평북노회를 집중 공략하였고, 그 결과 1938년 2월 9일 전국 노회중 평북노회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 의식임을 인정한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고 노회원들도 신사에 참배하였다. 그리하여 9월에 총회 이전에 이미 23개 노회중 17개의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전북노희의 정기노회는 원래 5월 7일인데 경찰의 지시로 한 달을 연기하여 6월 7일에 개회하였다. 한 달 동안 공작을 하여 개 교회별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하였다. 일본경찰의 지시대로 6월 7일 정기노회 하루 전에 노회의 부의되는 제반 안건을 사전에 조정하기 위한 임원회와 헌의부 연석회의를 전라북도청 경찰부에서 모였고 회의 안건과 개선에 대해 경찰부장의 검열과 사전 승인을 받았다. 다음날 회의 처리시 각본대로 노회는 변론을 생략한 채 그대로 결의코자 하였다. 이에 마로덕(L. O. McCutchen) 선교사가 “회장! 아무에게도 이의를 제기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하고 물으니 회장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스위코드(서국태), 위인사, 부위렴 선교사가 마로덕 목사와 비슷한 질의를 하였으나 회장은 일방적인 발언만을 할 뿐 부는 묻지 않고 가결을 선포하였다.
이후 스위코드 선교사는 1938년 9월 9일에 열린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였고 수백명의 경찰과 사복경관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총대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모두 206명 중의 한명으로 참석을 하였따. 일방적인 가결에 두 선교사가 반대하고 일어섰고 경관의 폭력적인 제제를 받자 스위코드를 비롯한 30명의 선교사 모두 퇴장하였고 항의문을 제출하였다. 스위코드는 전북노회 총대 19명 중 한 명으로 총회에 참석하였다.

11. 선교사묘역 고난의 길
광주광역시 양림동 호남신학대학교 내에 있는 선교동산에는 불편하게 놓은 65개의 디딤돌이 있다. 이 디딤돌에는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곳에 묻힌 45명의 선교사들과 850여명의 호남지방 순교자들의 눈물, 아픔, 고통과 피흘림이 담겨있다. 스위코드(서국태) 선교사의 이름이 이 디딤돌 중 하나에 담겨 있다.
작성일:2020-07-06 21:14:35 116.41.235.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