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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9_A. E. Arm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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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1반 이성민
등록일
2020-07-06 21:23:24
조회수
625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_9_이성민.pdf (257596 Byte)
암스트롱 선교사 / Armstrong A.E 1880(추정) – 1959(추정)

I. 기본사항
이름 : Armstrong A.E/ 암스트롱

생몰연도 : 1880(추정) - 1959(추정)
출신 및 소속 : 캐나다, 캐나다 장로회, 캐나다 해외 선교부 총무(추가)
한국선교기간 : 1918 – 1952.1
경력 및 연표
-1919.3.16. 캐나다 장로회 해외 선교부 간사로 3일간 내한(본국에서 총무)
-3.1 운동의 상황을 목격하고 미국에 최초로 소개하여 미국 NCC 동양 문제위원회 결성의 기가 됨
-1936 한국교회 방문, 자립 현황을 세계에 알림
-1952.1 내한하여 전쟁 중의 한국교회 지원대책 협의

5. 가족 사항
부인 : Armstrong leona

II. 선교사 소개
*전 조사 자료
1.캐나다 장로회 목사
캐나다 장로회 목사, 캐나다 장로회 해외 선교부 간사로 1918년 극동 지역에 파견되어 한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 만주 등지의 캐나다 장로회 선교상황을 시찰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찰로 인해 동양의 선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그의 시찰의 시작으로 미국의 선교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2.한국의 3.1운동을 미국으로 전파한 선교사

이듬해 3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본국으로부터 재차 한국을 방문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3월 16일 서울에 들어온 그는 3일간 머물면서 3.1운동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기독교 기관과 접촉을 가진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객관적이고 자세한 한국의 3.1운동 상황을 미국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미국에서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 간사 브라운(A. Brown) 미 감리회 해외 선교부 간사 노드(F. M. North)등을 만나 한국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미국 NCC 내에 동양 문제위원회가 결성되어 한국문제를 중점토의하며 일본의 잔악성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모임을 이루게 하였다.

3.한국의 상황을 끝까지 관찰하였던 선교사

그는 1936년경에도 한국 교회를 방문하고 한국 교회의 자립 현황을 세계에 알렸으며 1952년 1월 6.25 사변 중 부인과 함께 다시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드로가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지며 전쟁 중의 한국 교회 지원대책을 협의하고 돌아갔다. 또한, 부인과 함께 홍콩에서 캐나다 정부의 상업적인 부관이었던 아들을 방문한 암스트롱 부부는 한국에서 2주를 보내었고, 암스트롱 부부는 한국 선교사들과 함께하며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었다.

한국에 다시 방문하였다는 것은 그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이러한 사랑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부흥의 발판을 이룰 수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헌신으로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났을 때 이 대통령은 1919년 3.1운동 상황을 누구보다도 먼저 구미세계에 정확하게 알려준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하였고 1919년 미국과 캐나다에 독립운동의 첫 번째 보고서를 들고 다니는 데 있어 감사를 표했다.

4.함께 동행한 암스트롱 부인

암스토롱 부인은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으로의 여행에서 남편과 동행할 수 없었지만, 암스트롱 박사를 데리고 나온 것을 매우 기뻐했다. 그는 광범위하게 방문하여 모든 마을에 관심을 보였으며 텐트 교회에서 예배하고 난민 학교를 보고 임시변통 가정에서 난민 가족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암스트롱 부인은 피난 중인 이화여자대학교 지원문제를 김활란 학장과 협의하기도 했다. 암스트롱 부인은 WMS를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화 대학에서 협력하기 위해 암스트롱 박사는 망명지에 있는 이화를 방문하기를 열망했다 그녀는 이화 대학을 방문하여 한국 교회를 돕고 다시 살리기 운동을 하여 한국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으며 그녀의 도움과 헌신으로 인해 지금까지의 한국교회가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녀는 선교사로서 세워지지 않았지만 남편을, 다라 한국을 도우길 소망했다. 또한, 대학을 다시 살려 학업으로도 쓰러지지 않도록 하였다.



*추가 조사 자료
1) 출생 및 성장

암스트롱 선교사의 출생과 배경에 대하여는 소개하고 있는 한국어 자료는 없는 것 같다. 캐나다 장로교 해외선교부를 통하여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에 대한 박람회에 가서 정보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박람회에 관한 짧은 인터넷 뉴스와 기사들을 첨부한다. 직접 전시회장에 방문하여 확인 작업을 추가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암스트롱 선교사의 선교사역에 관하여서는 조사가 아주 잘 되어있다. 단순히 선교사역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3.1운동에 관하여 소개되는 자료들도 굉장히 많다. 스코필드 선교사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스코필드 선교사에 대한 조사자료 및 논문에도 암스트롱 선교사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암스트롱이 소속되고 총무로 역임했던,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가 어떻게 사역을 해왔는지 알 필요가 있다. 캐나다 해외선교부에 대한 자료들은 “한말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의 한국선교에 관한연구(1898, 31, 김승태)”에 상세하게 나온다. 그 중에 일부의 내용을 보면, 암스트롱 선교사가 선교지를 돌아볼 때에 어느 지역을 돌아보았을지 추측해볼 수 있다.


먼저 진행되었던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에서 조사한 내용에 대한 재검증도 했다. 앞선 조사에서 이 조사자료에 대한 오류는 없었고, 중요한 사실들을 추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위와 같은 내용은 대부분의 자료에서 공통된 내용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 4월 중순에는 캐나다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이 직접 목격한 3·1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 만행의 소식을 가지고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하는 즉시,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인 브라운(Arthur J. Brown)과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 노드 (Frank Mason North), 미국성서공회 총무 해븐(William I. Haven) 등에게 한국상황을 알리고 이들과 대책을 협의했다. 이들은 이 문제를 각 교파의 해외선교부에서 다루는 것보다는 기독교연합기관인 미국기독교연합 회(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동양관계위원회(The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에서 다루는 것이 낫겠다 고 판단하고, 4월 16일 이 연합회의 동양관계위원회(위원장 William I. Haven, 총무 Sydney L. Gulick)를 소집하여 한국 상황에 관한 보고를 하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였다.(The Korean Situation, 1919, p.5: 위원회 조직과 위원 명단은 The Korean Situation, Number 2, 1920 참조.)

암스트롱의 편지를 받은 미국의 반응은 이러했다. 미국 기독교 선교 단체 지도자들은 그 신빙성을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선의 기독교와 일본의 기독교가 서로 밀접하게 협력하도록 함으로써 “일본과 조선에서의 선교 사업을 보호한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 중국, 만주 조선, 일본의 지부를 순방하고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출발하려 했던 캐나다 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 목사에게 조선을 다시 방문해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할 것을 의뢰했다. 이 요구에 따라 암스트롱 목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조선인이 경찰과 헌병에게 받은 고문은 저 유명한 음모사건 재판(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때에 사용된 거소가 같다. 미국과 영국에 발송하는 공술서를 읽고, 피고인을 강제로 자백시키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 너무나 지독해서 나는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피고인의 대부분은 데모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경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 보고를 접한 미국 기둑교 선교본부 지도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미국의 모든 기독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연합협의회 동양문제위원회에 그 대책을 위임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 문제에 관한 미국 기독교의 대책은 동양문제위원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언론과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보내온 편지 보고서들을 통해서 한국 상황을 알게 된 미국 선교본부들은 4월 중순경 직접 한국소식을 가지고 온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의 보고를 받고, 미국기독교연합 회 동양관계위원회에서 한국문제를 맡아 처리하기로 하고, 당분간 언론 에는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로 하였다. 동양관계위원회는 여러 차례 회합 을 갖고 입수된 자료들을 검토하여 주요 자료들을 편집하는 한편, 일본 대사와 일본정부에도 알려 만행의 중단과 한국 시정 개혁의 약속을 요구 하였다. 그리하여 7월 10일 일본 하라 수상의 개혁을 약속한 전보를 받아 내고 이를 서문에 실어 The Korean Situation을 발행 보급하였다. 미북장로회 총회에서도 5월 22일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여 한국인들 에게 공감을 표시하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만행의 중단을 촉구하였다.

3) 귀국 이후

암스트롱은 내한과 귀국의 구분 없이 전천후로 활동하던 사람이다. 그는 본국에서 스코필드와 매우 긴밀하게 협력하며 스코필드와 동역했다. 일제와 3.1운동을 세계 언론에 알린 선교사로 스코필드만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역을 전력으로 도운 암스트롱이 없었다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스코필드는 한국의 정황들을 암스트롱에게 보냈었다.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들을 조사하여 영국의 성서공회 총무 리슨(Ritson)을 거쳐 토론토의 캐나다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 목사에게 보냈다. 이것은 다시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 보내져 거기서 1919년 7월에 발행한 『한국의 상황』에 증거자료로 실리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암스트롱은 해외에 한국의 상황을 위해서 꾸준하게 스코필드와 소통하며 동역했다.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스코필드가 적극적으로 3.1운동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근무하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에비슨 교장의 지지와 에비슨의 전보 요청으로 한국에 다시 와서 초기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가 미국의 선교본부들에 전한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성일:2020-07-06 21:23:24 39.7.25.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