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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3_Adamson, Andrew

닉네임
이유진
등록일
2020-07-06 21:38:10
조회수
636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_3_이유진.pdf (2193614 Byte)
I. 기본사항 “Adamson, Andrew,” 김승태, 박혜진 엮음,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95.

Adamson, Andrew
1. 이름 및 소속: Adamson, Andrew (아담슨/ 손안로 /호주 / 호주장로교회) 원문에는 AP라고 되어 있으나, 이를 약어표에서 확인하여 ‘호주장로회’로 수정했습니다.

2. 생몰연도: ?-1915 호주 출생
3. 학력
1889-93년 사이 런던장로교신학교(Presbyterian College in London)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93년에 런던노회로부터 설교자 자격을 부여받음 정병준, 「호주장로회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49.

4. 경력
6년간 영국성서공회 파송으로 중국에서 선교활동
1894 호주 빅토리아주 청년신우협회의 파송으로 내한하여 부산 초량에서 호주선교부 감독 으로 활동, 초량교회 시무
1895 부인 사별, 1896 Payne과 재혼
1908 마산 창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
1911.7월 마산 상남동으로 옮겨 마산선교부 개설
1912 마산(포)교회(→문창교회)의 초대 당회장
1914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귀환
1915 런던에서 사망
5. 가족사항
Adamson, Eliza Annie.(부인; ?-1895) “복병산에 묻힌 네 번째 인물이 아담슨 선교사의 부인인 엘라이자 에니 아담슨이었다…이런 와중에서 그의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어 심장병으로 고통을 당했다. 11월 24일 주한 의료선교사의 수술을 받았으나 1895년 11월 27일 아침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는 그녀가 임지인 부산에 온지 꼭 1년 6개월 만이었다…아담슨 여사의 시신은 데이비스 목사와 멕카이 목사 부인과 더불어 부산항이 굽어보이는 복병산에 안장되었다.” 이상규, 「부·경 교회사 연구 제25호(2010. 3)」, (부산: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2010), 55-56.

Adamson, Payne(부인; ?-1925)
6. 참고문헌 참고문헌에 수록된 자료 중 ‘약어’로 표시된 것은 <내한선교사총람 약어표>에서 확인하여 원제목을 기록합니다. 약어를 수정하기 전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백>>10권; APMK; 사기상; 사기하; 전휘집,18; 동래학원 80년지; 창신 60년사, 1968; 개신교사; 구미인조사록; 경상노회록, 1911-14.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1980, 10권.
APMK <내한선교사총람 약어표>에 없어서 약어 그대로 기록합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 1928.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 1968.
곽안련 전, 장로교회사전휘집, 1918
동래학원 80년지
창신 60년사, 1968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연세대학출판부, 1973.
조선재류구미인조사록, 1907-1942, 한국학연구소, 1981.
경상노회록, 1911-14

Adamson, Payne (아담슨 / 호주 / 호주장로교회) 원문에는 AP라고 되어 있으나, 이를 약어표에서 확인하여 ‘호주장로회’로 수정했습니다.

1896년 11월 Andrew Adamson과 결혼 이상규, 「부·경 교회사 연구 제25호(2010. 3)」, (부산: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2010), 56.

부산⦁마산 등지에서 여성사업을 전개하다가 1915년 선교사직을 사임하였고 1925년 별세하였다.


Ⅱ. 선교사 소개

1.아담슨 선교사
아담슨 선교사는 6년간의 중국 선교 후 호주 빅토리아 주 청년신우회의 파송으로 1894년 5월 20일 부산에 도착 맥카이 선교사가 활동했던 초량지역에서 선교를 지했다. 그는 맥 목사가 건축한 사택에 거주하면서 그 옆에 1895년 7월 맥 목사가 계획했던 사택 (1911년 이 건물은 부산진으로 옮겨져 매견시 목사 사택을 짓는 데 사용되었음)을 건축하고, 1898년 초부터 교인들이 낸 주일헌금과 아담슨 목사가 호주에서 모금한 돈으로 1900년 6월 맥 목사 사택 옆에 목조 예배당(수용인원 200명)을 건축하여 맥 목사의 선교활동을 이어받았다. 출석 교인은 아동 30명을 포함하여 약 100명 정도였다. (당시 초량지역 인구는 약 2000명) 아담슨 선교사 부인은 몇 개 월 간의 병고 끝에 1895년 12월 27일 사망하여 초량 구봉산 기슭에 묻혔다. 그 후 아담슨 선교사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전도에 힘썼다. 그의 선교구역은 부산에 국한되지 않고 동래, 기장, 울산, 마산, 거창, 둥지까지 확장되었으며 실제로 그의 손에 의해 의령군 상정리 교회 및 신반 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부산에 머무는 동안 멘지스의 동래 일신여학교 설립을 실현시켰으며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 교육 사업에도 크게 공헌을 했다. 편집자, “아담슨 Adamson, Andrew”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0권(식스투스-야후) (서울: 기독교문사, 1983): 795.
[참고문헌] APMK;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 곽안련 전, 장로교회사전휘집, 1918; 동래학원 80년지; 창신 60년사, 1968;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연세대학출판부, 1973.; 구미인조사록; 경상노회록, 1911-14 <편집자>
1910년 3월 13일 선교구역 분할정책으로 초량에 있던 교회는 미북장로회 선교부 관활로 이관되었다. 아담슨 선교사는 마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고, 초량에 개척한 교회는 1911년 7월 폐쇄되어 교인들은 영서현 교회에 병합되었다. 1913년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경상남도에서 철수한 후 초량의 교회부지는 호주선교부 관할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후에 영서현 교회는 영주동으로 이전하면서 교회 이름을 영주동교회로 바꾸었다. 맥 목사가 1893년에 구입했던 초량의 대지를 27년이 지난 1920년 6월 영주동 교회(정덕생 목사 시무)에 구입 당시 가격 그대로 넘겨주었다. 이 대지 위에 1932년 새 예배당이 건축되어 영주동교회가 옮겨 오게 되었는데 이때 영주동교회는 옮겨온 지명을 따라 교명을 ‘초량교회’라 했다. 마산으로 옮겨간 아담슨은 경남 일대를 대상으로 전도하였으며, 창신학교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914년 영국으로 귀국, 1915년 8월 4일 소천하였다. 김대훈, “초량교회 120년 약사” (육일문화사 2013.12.7), 26-27


2. 마산지부
1909년 8월 아담슨 목사는 마산포에 지부를 개설하기 위해 필요한 부지를 모두 확보하였다고 보고했다. 아담슨은 초량의 집을 팔고 650파운드의 비용으로 마산에 집을 짓도록 허락받았다. 그 외에 80파운드의 비용으로 여분의 땅이 구입되어 아담슨은 1911년 7월 마산으로 이사하였다. 그 후 12월 왓슨 목사가 한국에 도착하여 마산지부의 두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1개월 후 자기 부인과 합류하였다. 2년후 1913년 5월 왓슨 부부에게는 통영에 새 지부를 개설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19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담슨은 마산포의 한 한국인이 그 도시에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요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해외선교 위원회의 허가 하에 창신남자학교의 설립을 위한 기초가 마련되었다. 얼마동안은 소녀들도 소년들과 함께 가르쳤다. 그 후 1911년 그 해 4월 17일 의신여학교가 문을 열었다. 나피에양은 1912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여성들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전도와 간호활동을 하기 위해 마산으로 임명되었다. 1916년 봄 호킹양이 마산에 도착하여 1년간 근무하였다. 당시 멕피양은 휴가를 갔으며, 스키너양이 교육활동을 담당하기 위하여 전근해 왔다. 1914년 아담슨이 영국으로 떠났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 6년간 중국에 있었으며, 한국어 중국어 구사에 대한 그의 탁월한 어학능력은 학계에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이원호,김성례,“호주장로선교회의 부산⦁경남지역 종교 및 교육활동” (광명출판사1995.12.15),151-152

선교사로서 그의 최대의 업적은 마산 선교의 개척이었다. 1902년경 마산을 순회하던 중 김주은(金主) 여인과 그의 아들 이승규(李承奎)를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켜 마산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마산에서 자치적인 교회가 설립되었고 1906년에는 이승규의 노력으로 창신(昌信)학교까지 설립되게 되었다. 마산 선교부의 개설을 상조하던 그는 초량에 있던 자신의 집을 팔아 1911년 7월 마산 상남동으로 옮김으로 마산 선교부가 정식 개설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이보다 3년전(1908) 이미 정식학교로 발전한 창신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남녀공학을 실시하고 서구 교육제도를 도입하여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1년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교사(校舍)신축⦁교육과정 확립 등에 끼친 그의 공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미 설립된 마산(포)교회(후의 문창교회)를 1912년 조직 교회로 발전시키고 그 초대 당회장이 되었으며 마산 외에 거제⦁용남⦁함안⦁의령 등지의 교회까지 관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4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귀환하였으며 이듬해 런던에서 별세하였다.

아담슨은 한국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한국말을 비교적 잘 했으나 그래도 그는 늘 그의 보조자로 백도명 조사(백운학 목사의 부친)를 대동하여 지방전도에 임했다고 한다. 1901년 마산에 김마리아, 김인모 등 여자 7명이 신자가 되었고 1903년에는 김주은(이승규의 모친)이 믿게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이승규 또한 교인이 되었다. 이러한 형편이 되가 아담슨이 성호리의 한옥 한 채를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문창교회의 전신인 마산포교회이다. 뿐만 아니라 마산지방을 왕래하던 아담슨은 이 지역 출신 선각자인 이승규와 함께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창신학교의 시작이었다. 아담슨의 전도로 신자가 된 이승규는 1906년 5월17일 마산포교회 내에서 독서숙이란 이름의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아담슨은 이 기관을 후원하였고 후일 이 학원은 창신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는 1908년 8월 12일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였는데 이 법령은 반일사상의 온상으로 여겨 온 사립학교(특히 기독교계)를 통제, 간섭하기 위한 법령이었다. 이 법이 공포되자 마산포교회 이상소, 손덕우, 이승규 영수(후에 장로 취임)는 기왕의 독서숙을 정규학교로 개편하기로 하고 학교 설립허가원을 제출하였다. 그 결과로 1909년 8월 19일자로 학부개신의 ‘사립 창신학교’의 설립 인가를 받게 되었고 초대교장은 아담슨 선교사였다. 이것이 마산지방에서의 기독교 교육의 시작이었다. 1911년 당시 창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여학생 수는 28명이었다고 한다. 호주 선교부는 현지의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마산지역에 여자학교 설립을 허가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세워진 여자학교가 1913년 4월 5일 개교한 의신여학교였다. 의신여학교 초대교장은 맥피(한국명 미희) 선교사였고, 부산의 일신여학교와 더불어 경남지방의 중요한 여성 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이렇게 마산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자 호주선교부는 마산지방에 지부를 설치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호주 선교부는 1910년 3월 특별회의를 소집하여 아담슨의 마산지방으로의 이주와 마산지부 설치를 경정하였다크리스챤리뷰 권순형, “호주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 (크이스찬리뷰2010.10.5.), 173-174


3. 논란과 그에 대한 평가
한편 아담슨 선교사의 생전에 논란이 있었다. 정병준에 따르면 그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남녀선교사들 사이에는 1895년부터 시작해서 1898년까지 불신과 적대감이 있었다. 정병준, 「호주장로회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80-81.
“여선교사들은 아담슨 목사를 거짓말, 사기, 명예훼손, 술취함, 잔고 없는 수표 발행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로 비난했다. 아담슨은 이러한 비난이 그들의 오해에서 생긴 것이라고 응수했다. 양자는 서로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 각각의 사건들을 보고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1897년 3월 모든 여선교사들은 아담슨과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한국의 선교회가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될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1897년 9월 20일 양 연합회는 북장로교선교회에 조사를 의뢰했다…북장로회는 언더우드와 애비슨을 조사위원으로 파송했다…해외선교위원회는 이 보고서와 길레스피의 보고서를 기초로 해서 아담슨의 정당성을 확증했다. 비난 애용의 일부는 증거가 없고, 일부는 사소한 것들이었다…선교사들 사이의 이러한 갈등은 외면적으로는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실제로 갈등은 종식되지 않고 1900년까지도 지속되고 있었다…(여선교연합회) 실행위원회는 새로운 목사선교사를 여선교사들의 감독자로 파송할 것과 그의 봉급을 위해 연 200파운드를 보장하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 이후에 여선교사들은 사직을 철회했다. 그 결과, 젤슨 엥겔 목사가 1900년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정병준, 「호주장로회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81-82.
정병준은 이런 분쟁의 원인에 대하여 “교회의 공식문서들은 이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고 축소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에 대하여 아담슨 선교사의 개인적인 기질과 더불어 그 당시 성차별적 요소, 교권의 부당한 자세를 꼽는다. “여선교사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선교사역을 수행할 권한이 없었고, 3마일이나 떨어져 사는 아담슨으로부터 충고와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아담슨은 호주문화를 이해할 기회가 없이 영국에서 한국으로 직접 파송되었기 때문에 그는 호주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여선교사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서툴렀다. 여선교사들은 아담슨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강한 모욕감을 느끼곤 했다…아담슨은 여선교사들의 사택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견해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건축을 진행할 정도로 권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또한 아담슨은 모든 선교회 재정을 관리했는데, 이것은 여성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여선교사들은 ‘부당한 간섭’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적 권위, 재정집행권, 의사결정 이 모든 것링 아담슨의 손 안에 있었다. 남녀선교사들 사이에는 분명히 성차별에 근거한 불평등한 힘의 관계가 존재하고 있었다…여선교사들의 대한 아담슨의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지만 교권은 오직 여성들의 ‘관용’ 부족만을 꾸짖었다…교권은 여선교사들의 문제를 확대하고 아담슨의 문제를 축소하거나 숨김을 통해 남성 지도력을 정당화했다.” 정병준, 「호주장로회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83-84.
작성일:2020-07-06 21:38:10 220.93.12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