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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64 / Mary Culler White

닉네임
3반 전찬양
등록일
2020-07-06 23:04:51
조회수
706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3_64_전찬양.hwp (484864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Mary Culler White / M.C. 화이트 선교사 MS
2. 생몰연도: 1875.5.12. 미국 조지아주 Perry에서 출생 1973.05.18. 98세로 미국에서 소천
3. 학력: 1893 웨슬리안대학 졸업. 1901 스캐릿신학교 졸업.
4. 출신 및 소속: 미국, 남감리교
5. 경력: 남감리교 중국선교사로 파송, 중국 교회 및 성도의 영적 부흥운동에 기여 1903년 한국에 초청되어 함남 원산에서 일주일간 감리교 선교사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기도와 성경공부 인도. 하디(R.A Hardie) 선교사의 성령임재의 체험을 필두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확산되기 시작,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다.
6. 한국선교기간: 1903년 08월 (약 한달간) - 선교사 2년차였던 화이트 선교사는 1903년 여름 자신의 선교지인 소주를 떠나 여름휴가로 서울에서 사역하던 하운셀 선교사와 함께 원산으로 가 남감리교 여 선교사들과 함께 보냈다.
7. 연표

1875.5.12. 미국 조지아주 페리(Perry)에서 출생. 어머니, 엠마 캐롤라이나 컬러(Emma Carolina Culler)와 아버지, 조지 화이트(George H. White)사이에서 태어나 조지아주 혹킨스빌(Hawkinsville,GA)에서 자라남.

1899. 화이트는 자신이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하던 자신의 모교회 혹킨스빌 제일감리교회(Hawkinsville First Methodist Church)의 후원을 받아 1899년에 스캐릿성서 및 훈련학교(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입학한다. 또한 혹킨스빌 교회에서 터커(Miss Emma Tucker를 만나게 되었을 때,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고 이후로 선교에 대한 소명감으르 느꼈다.

1901. 선교사 준비를 마친 화이트는 1901년에 남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nary Society, 이하 WFMS)의 파송을 받아 중국 소주(蘇州, Suzhou-당시는 “Soochow“였음)로 배치되었다.

1903.2. 화이트는 부임후 얼마되지 않아 기술학교 (Industrial school)를 맡고 있던 미스 윌리암스(Miss Susie Williams)선교사가 결혼하면서 지역을 옮기게 되자 기술학교를 맡아 아이들에게 재봉, 자수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1942.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일본군이 소주지역을 점령하면서 화이트는 7개월간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43. 43년간의 중국 선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1951. 화이트를 파송한 혹킨스빌제일감리교회는 새 교회 건물을 봉헌하면서 소 예배당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화이트는 그 강단에서 처음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1973.05.18. 혹킨스빌제일감리교회에서 약 20여년간 더 일하다가 소천함.
8. 가족사항아버지: 조지 화이트 (George H. White) 어머니: 엠마 캐롤라이나 컬러 (Emma Carolina Culler)

9. 저술한 책
『I Was There...When It Happened In China』 (1947)
『The Days of June: The Life Story of June Nicholson (Classic Reprint)』
『The Days of June; The Life Story of June Nicholson』
『The Portal of Wonderland: The Life-story of Alice Culler Cobb (Women in American Protestant Religion 1800-1930)』 (1925)


II. 선교사 소개: M.C 화이트 (Mary Culler White) 선교사 1875-1973

1. 미남감리회 여선교사, 미국 출신, 일찍기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 중국 교회 및 성도의 영적부흥운동에 큰 기여를 한바 있다.

그녀는 1903년 한국에 초청되어 함남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들을 위한 사경회를 인도한바 있다. 이 집회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함께 기도하며 열심히 성경공부에 임한 유익한 집회가 되었다. 이 집회에서 캐나다 출신 의사로 남감리회선교회에 가담, 활동중이던 하디(R.A. Hardie) 선교사가 크게 감화를 입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거듭나는 성령임재의 체험을 했다. 이를 필두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곧 1907년의 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이를 통해 보면 화이트 선교사의 원산집회 인도가 곧 한국 기독교 초기 부흥운동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2.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실제적인 원동력

1907년 평양부흥운동의 실제적인 원동력으로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 한국교회사 학자들 간에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은 두 명의 여자 선교사가 시작한 기도회가 도화선이 되었고 의료 선교사인 하디(Robert Hardie, 河鯉永 1865-1949)가 초청되었는데 그는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그것을 공개화한데서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에도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3. 화이트선교사와 1903년 원산에 대한 기록 비교

a. 박용규는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대부흥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903년 8월 원산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발흥했습니다. 원산부흥운동의 모체는 무명의 여선교사들이었습니다.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 하디(Robert A. Hardie)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이 부흥운동의 모체인 기도의 불씨를 놓은 사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남감리교 여선교사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카나다 장로교 여선교사 매컬리(Louise H.McCully) 두 명의 여자 선교사였습니다. 화이트 선교사는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 때문에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온 사람이었고 매컬리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장로교 선교사로 원산에 거점을 삼고 있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모여서 한국 교회 가운데 그리고 선교사들 가운데 영적인 각성 운동이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기도모임이 1934년 한국선교 50년주년을 맞았을 때 하디가 “1903년 조선교회 부흥의 불길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두 여선교사가 연합하여 기도하는 중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 그 기도모임이었습니다. 스톡스가 증언하는 것처럼 “만약 하디의 리더쉽 능력을 인정하고 그가 요구하는 성령의 권능을 수납한 두 명의 헌신적인 여자 선교사들의 진지한 기도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대부흥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두여인의 기도의 “십자군”은 하디에게 알려지지 않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하디가 얼마후 알게 되었습니다. 북장로교 선교사 해리 로즈(Harry Rhodes)역시 한국북장로교선교사에서 두 명의 여자 선교사들의 기도에서 한국부흥운동이 시
작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b. 박용규의 두 번째 책을 제외하고 화이트선교사를 언급하고 있는 한국교회사 주요 서적들은 화이트 선교사가 단순 내한한 것으로 보는 듯 하다. 그러나 단순 방문자 화이트가 내한한 시점이나 그 내한과 의화단 사건과의 관련성, 또 그가 한 일에 대한 기록에 보면 분명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출판한 <한국기독교의 역사Ⅰ>에 의하면,

1903년...원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화이트(M.C.White) 여 선교사의 내한을 계기로 기도회를 가졌다. 이 모임은 곧 장로교 선교사 및 일부 한국 교인 그리고 동아기독교(침례교)의 인사들까지 참석한 연합기도회 모임으로 발전하여 원산 창전교회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캐나다 출신...하디 선교사가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하였다.(중략) 이러한 회개고백이 터져 나올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마침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내한한 선교사와의 기도 모임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은 초기부터 용이하지 않았지만 1900년 의화단(義話團)사건 이후 외국인에 의한 선교활동이 더욱 위축되었다. 따라서 여간한 인내와 아픔을 감내하지 않고는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터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화이트 선교사로부터 들었을 때 한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선교활동에 대하여 회개 어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c. 그 외에도 다른 어떤 책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한 가지 인상적인 사실이 기록되었는데 바로 화이트 선교사가 중국 의화단 사건과 중국 선교사의 어려움에 대한 실상을 보고한 것과 이것을 들은 하디가 그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양대인(洋大人)자세에 대해 회개하였을 가능성을 연결한 점이다. 이러한 지적에서 박용규는 화이트가 중국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한국으로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다고 보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화이트의 내한과 관련하여 또 다른 기록들을 보자. 민경배는 그의 책에서,

그 해 1903년 겨울 한국을 잠시 다녀가던 스웨덴의 프란스 목사와, 중국 체재의 남감리교 선교사 화이트(Miss M.C.White)여사와 함께 원산(元山)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와 성서연구를 위해서 한 주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 후 이들은 장로교와 침례교 선교사들과 교인들과 연합하여 창전교회서 한 주일간 매일 밤 집회하면서 보냈다. 이 때 카나인으로서 남감리교 선교사로 일하던 의사 하디(Dr.R.A.Hardie: 하리영(河鯉永)은...

민경배의 서술에는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원산부흥운도이 시작되는 시기인데 실제로 선교사들의 기도회는 위의 인용문에서 말한 “그 해1903년 겨울”이 아니라 그 해 여름, 즉 8월 24일부터 30일에 열렸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위의 인용문과는 달리 프란스 목사와 화이트 선교사는 함께 기도회와 성서연구를 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프란슨(Franson)은 중국 스칸디나비아선교회 연맹 소속 선교사로 그가 원산을 방문한 것은 1903년 10월이었다. 그는 한 주간 하디 선교사 집에 머무르면서 원산지역 선교사들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부흥집회를 인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디 선교사의 기록처럼 여름, 즉 8월에 방문한 화이트 선교사와 함께 기도회를 인도할 수는 없었다.

d. 한편 김영재의 <한국교회사>에서 화이트 선교사와 원산 기도회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2-3명의 감리교선교사들이 모여서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때마침 한국을 방문한 미스 화이트(Miss M.C.White)를 강사로 모시고 한 주간 성경공부를 하며 기도회를 사셨다. 그리고 얼마후 같은 선교사들이 장로교와 침례교 선교사들과 함께 이번에도 중국에서 선교하는 스칸디나비아 선교사 프란손(Franson)을 강사로 한 주일간 저녁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는 원산의 한국인 신자들도 참석하였다. 여기 참석한 선교사들 가운데는 한 주 전부터 프란손 목사를 자기 집에 모시고 있던 의료선교사 하디도 있었다.

위의 글에 의하면 화이트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잠시 내한하여 기도회를 가진 것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얼마 후 같은 선교사들이” 프란슨을 모시고 교파연합으로 기도회를 가졌는데 그 기도회에서 하디가 회개하였다고 전하는 점에서 앞서 한국교회사연구회의 기록과 크게 상이한 기록임을 보여준다.
작성일:2020-07-06 23:04:51 114.201.9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