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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57 / Collyer, Charles T.

닉네임
정광윤
등록일
2020-07-06 23:08:33
조회수
761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_57_정광윤.pdf (164789 Byte)
콜리어(고영복) 선교사 / Collyer, Charles T. (1868-1944)


I. 기본사항

1. 이름: Collyer, Charles T. / 콜리어 / 한국명: 고영복(高永福)

2. 생몰연도: 1868.2.23. - 1944.6.25. (76세)

3. 출신 및 소속: 미국 / 남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897.1.27 - 1919.

5. 연표
대영성서공회 선교사로 중국 상해에서 수년간 활동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스미디와 결혼, 남감리회로 이적
1897.1.27.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
부인과 아들은 5개월 후 윤치호와 함께 내한하여 합류
1897.11 개성지방 책임자(리이드는 서울)로 개성 이주
1898 윤치호, 김흥순 등의 도움으로 교회 설립, 학교, 병원, 교회를 위한 선교부 건물 마련
1900 개성구역회 조직, 구역장으로 강원도까지 선교 확장
1906 춘천으로 옮겨 춘천구역 담임
1908 서울 광희문교회 담임, 지경대구역 관장
1909 개성에서 송도 동구역 담임, 평양에 있던 부인 병사
1910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톡에서 YMCA의 군인휴양소 봉사
종전 후 귀국, 체코에서 성서반포사업
1921부터 미국에서 목회활동
1924-34 Baltimore MEC에서 10년 동안 사역
1944.6.25. Bridgewater에서 영면, Bridgewater의 Greenwood Cemetery에 묻혀있다.

6. 가족사항: Collyer, L. Smithy(부인), Collyer, Chalie(아들)
Carroll, Arrena(부인)

7. 논저: 〔저서〕 『영ᄋᆞ부』 조선예수교서회, 1918.
〔논문〕 「Filial Etiquette, a Confucian Tract」, KRV.VI, 1906
「The Culture and Preparation of Ginseng in Korea」 TKR. vol.3. Part 1. 1903


II. 선교사 소개

1. 영국출신 남감리회 선교사이자 목사
고영복(Collyer Charles T., 1868-1944)는 영국 케임즈에 있는 트위큰햄(Twickenham–on-Thames)에서 1868년 2월 23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반더빌트 대학교(Vanderbuilt University)에서 수학했으며 1895년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대영성서공회 소속 선교사로 수년간 활약하으며, 그 기간 중에 미국 남감리회 해외선교회 소속으로 역시 중국 상해에서 활약하던 스미디(L. Smithy)와 결혼하였고 이를 계기로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가 되었다.

2. 1897년에 한국 입국
1896년 가을 미국 남감리회 한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을 받아 1897년 1월 27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부인과 아들(Chalie)은 그보다 5개월 후에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내한하여 합류하였다. 그는 1897년 8월에 최초의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한 리드(C. F. Reid)선교사와 함께 한국에서의 남감리회 선교사업을 개척하였는데, 리이드가 서울을, 그가 개성 지방을 책임지게 되어 도착한 그해 11월 개성으로 이주하였다.

3. 선교 활동의 성과
그는 윤치호 및 윤치호의 이모부 이건혁(李建赫:개성의 토호)의 도움을 얻어 선교기지를 매입하고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다행히 미감리교회에서 한국인 전도인 김흥순(金興順)을 보내주어 그를 비롯해 한국인 권서들과 함께 전도한 결과 1년 사이에 9명의 세례지원자를 얻을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개성에서 이만한 결과를 얻은 것은 큰 성과였다.

4. 선교 활동의 확장
1898년에는 개성 시내에 남부교회와 문산포에 또 다른 교회가 각각 설립되었으며 그해 미국에서 보내온 1,800달러를 기초로 하여 학교, 교회를 위한 선교부 건물을 마련하였다. 1900년에 이르러 개성(송도) 구역회가 조직되면서 그 초대구역장이 되어 개성뿐 아니라 강원도 지역에까지 선교활동을 확장시켰다. 1900년에는 이미 그의 관할 하에 10개 이상의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고, 그는 이들 교회를 순회하며 계속적인 발전을 꾀하였다. 1906년부터 춘천으로 옮겨 춘천구역을 담임하였고 1908년 서울 광희문교회를 담임하면서 지경대구역을 관장하였으며, 1909년 다시 개성으로 돌아와 송도 동구역을 담임하게 되었다. 무스선교사에 이어 1897년에 한국에 온 콜리어 (한국명 고영복) 선교사가 1907년부터 순회전도사로서 교회를 이어받아 더욱 부흥을 하게 되었다. (원주제일교회)

5. 개인적인 슬픔과 연합군 지원 선교사로 선발됨
그러나 1909년 2월 아들(당시 평양외국인학교 재학 중) 뒷바라지를 하면서 평양에 머물러 있던 부인이 병으로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 그는 이듬해 1899년에 내한하여 개성에서 활약하던 캐롤(A. Carroll)과 재혼하였다. 이후 계속 개성에 머물면서 활동하다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선교부는 연합군을 지원할 선교사로 그를 선발하였고 이에 1919년 그는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곳 YMCA에서 운영하는 군인휴양소에서 봉사하였다.

6. 미국으로 귀국 후 목회활동
종전 후 그는 본국에 돌아갔다가 한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로 가서 그곳에서 성서 반포사업에 종사하다가 1921년에 미국 볼티모어 연회로 옮겨 목회를 하였다. 그는 34년까지 버지니아주 쇼우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34년 은퇴하였다. 그리고 1944년 6월 25일 영면하였다.
작성일:2020-07-06 23:08:33 112.146.187.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