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23 / Biggar Meta Louise

닉네임
김윤수
등록일
2020-07-06 23:13:38
조회수
818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23_김윤수.hwp (3372032 Byte)
[한국교회사 과제]
비거 선교사 / Biggar, Meta Louise (1887-1959)

Ⅰ. 기본사항
이름: Biggar, Meta Louise (비거/ 白美多(백미다)/ 미국/ SP)

1. 생몰연도: 1887-1959
2. 학력: 정보없음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4. 경력
1910.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농촌선교사로 자원하여 광주지방에서 지방순회전도.
1913. 순천선교부로 전임, 농촌 부녀자 전도.
매산학교에서 여학생 교육, 달성경학교 부녀반 강사.
일제 말 매산학교, 순천선교부 폐쇄하자 귀국.
1948. 재내한, 매산학교 재건에 노력하며 순천에서 활동.
1952. 은퇴 후 귀국, 은퇴선교사 안식관에서 거주.
1959. 사망.

5. 연표

1910. 남장로교 한국 여선교사. 한국명 백미다(白美多). 남장로회 선교부에 외지선교사로 자원. 1910년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내한. 농촌선교사로 자원하여 광주지방에서 농촌순회전도에 참여.
1911. 4. 15.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매산여학교를 설립하여 개교. 백미다(Miss. M. L Bigger) 선교사 초대 교장 취임.
1913. 순천에 선교부가 개설될 당시 순천지방 선교사로 전임. 이곳에서도 농촌선교에 헌신. 이에 많은 농촌부녀자들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생활개선에도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됨. 순천에 설립된 매산학교에서 교육을 맡았던 두퓌양이 군산으로 전임되자 그의 후임이 됨. 매산학교의 여학생부를 맡아 학생들을 지도하였고 주일이면 학생들과 함께 농촌 전도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음. 순천선교부에서 운영하던 달(月)성경학교 부녀반 강사로도 활동. 일제 말기 신사참배의 강요로 매산학교가 폐쇄되고 이어 순천선교부마저 폐쇄되자 곧 본국으로 귀국.
1948. 해방 후 1948년에 다시 내한하여 매산학교를 재건. 농촌사업에 다시 헌신. 매산학교 재건 후 역시 여학생 교육을 맡음. 이어 6.25 사변 당시에는 일본에 잠시 머물렀고 재차 내한.
1952. 은퇴 시까지 순천에서 활동.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 은퇴 선교사 안식관에서 여생을 보냄.
1959. 별세.

Ⅱ. 선교사 소개

1. 백미다의 선교 중심지: 순천

1) 순천의 매곡동

순천의 매곡동(梅谷洞)은 순천의 북쪽경계를 정의해온 난봉산(蘭鳳山, 423 m)의 진입부인 매산(梅山)의 구릉지이다. 매곡동은 겨울골짜기라는 ‘동곡(冬谷)’의 지역어로 ‘저우실’이라 불려온 곳이며 역사 속에서 순천부 읍성으로부터 시신들을 버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매곡동은 봄소식의 전달자인 홍매화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피는 곳으로 최근 홍매화의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매곡이라는 이름은 조선조의 유학자이며 순천의 고서인 ‘매곡집(梅谷集)’을 저술한 배숙(裵璹, 1516-1589)의 호인 매곡(梅谷)을 따라서 지어졌다. 매화는 겨울에도 꽃이 피는 설중매(雪中梅, Winter Plum)라 불리며, 소나무와 대나무와 함께 ‘학자들의 3대 친구’로서 비유되어왔다.
순천 매곡동의 진입부는 의료원 로터리에서 언덕길인 매산길이 시작되는 도립순천병원(1919, 현재 순천의료원)이다. 매산길은 순천 기독 진료소로 사용되었던 조지 왓츠 기념관(George Watts Memorial Hall, 1925), 순천읍 교회(1910, 현재 순천중앙교회), 순천 성서 신학교(1925, 현재 순천노회), 프레스턴 선교사 주택(1913), 매산 학교(1915)까지 순천 근대 건축의 줄기이다. 또한 매산 고교의 교정에는 알렉산드리아/ 안력산 병원(安力山病院, 1913)의 시작이 된 ‘순천 병원’의 개원 장소이며, 삼풍 그린파크 아파트 부지 옆에는 결핵과 한센병을 치료했던 애양 재활원이 입지한다.

2) 프레스턴 선교사 주택

순천 매곡동의 기독교 선교활동의 중심부는 매산 여고의 교정입구에 입지한 존 프레스톤(John F. Preston, 1875-1975, 변요한) 선교사의 주택(1913)이었다. 존 프레스톤 선교사는 미국 조지아 주 태생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존 프레스톤은 1903년 한국에 입국하여 1940년까지 순천을 포함해 목포와 광주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순천읍 교회(1907)에서 시무하였으며 순천 노회장(1923)의 설립과 순천의 농촌 교역자와 지도자를 양성을 도우며 가곡리 교회(1914), 평중리 교회(1919), 사룡리 교회(1920)의 설립에 기여하였다.
매곡동 매산길 언덕 북쪽 끝에 입지한 애양 재활원은 과거 선교사들의 주거 컴플렉스이다. 이곳에는 로버트 코잇(Robert Thornwell Coit), 여수 애양원의 로버트 윌슨(Robert Manton Wilson, 우월순) 등의 선교사 가족이 거주하였다. 이후 이 컴플렉스 는 미국 남 장로회 순천 선교부가 1981년 철수하면서, 여수 애양원이 인수하여 한센병 환자들의 재활 시설로 이용해왔다.

3) 매산학교

매곡동의 매산중교, 매산고교, 매산여고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매산학교(梅山學校)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매산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의 존 프레스톤(John F. Preston, 1875-1975) 선교사와 로버트 코잇 목사(Robert T. Coit, 고라복)이 1910년 금곡동(소안면 청수리)에 4년 교육과정을 갖춘 은성 학교로 시작되었으며, 초대 교장은 로버트 코잇 목사였다.
이후 매산학교는 존 크래인(John Curtis Crane, 구례인)과 라바렛 두피(Lavalette Dupuy, 두애란)이 광주로부터 순천으로 파견되어 오면서 남학교와 여학교로 운영되었다. 당시 여학교는 1915년 현재 삼풍 그린 아파트 부지에, 남학교는 1916년 현재 매산관 부지에 ‘왓츠 기념 남학교’라고 불린 벽돌 건물이 조성되었고 이후 1930년 화강석 외장의 매산관이 신축되었다.
매산학교는 1921년 성경교육과 함께 2년제의 중학교육과정인 고등과를 포함한 6년제로 운영되며 순천지역의 대표적인 사립학교로 성장하였다. 당시 남학생들은 농·공 관련 직조, 축산, 제재, 주물 등의 실업 교육을, 여학생들은 단추 공장을 통해 학비를 조달하였다.

백미다가 교장으로 취임한 매산여고를 소개하면, 기독교 미션스쿨으로, 이 때문인지 평준화 일반고라 입학이 추첨인데도 기독교인 지원자가 많아 많은 학생들의 종교가 기독교이다. 다만 종교가 없거나, 천주교나 불교 등의 다른 종교를 가진 학생도 많다. 선생님들께서도 절대 다수가 기독교이다. 입학할 때 입학생 전원에게 무상으로 성경책을 제공하며, 2014년 입학생을 제외하고는 근 5년간 입학생들 전원이 같은 디자인에 색상만 다른 성경책을 받았다.
기독교인 만큼 학교에 교목이 세 분 계시며, 이 외에도 다른 목사님들이 정기적으로 오시고 교목실이 따로 존재한다. 수요일에 학년 예배시간이 있으며, 각 학급별로 일주일에 1시간씩 종교 시간이 존재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종교 시간은 무조건 들어야 하며, 매산고와 달리 철학 시간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종교 시간은 거의 자습이므로 큰 관계는 없다. 3학년은 1학기가 끝날 때 종교 시간에 목사님께서 팥빙수를 만드는 이벤트를 하시기도 한다. 학년 예배 또한 모든 학생이 종교에 상관없이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에 숨어서 땡땡이치다가 걸리면 혼난다. 또한 0교시와 1교시 사이에 예배시간이 있다.

4) 남장로교회 조지와츠 기념관 / 순천기독진료소

매곡동 매산길의 입구에 위치한 순천 기독 진료소(1928) 건물은 미국 남장로회 한국 선교회가 순천의 선교 활동을 후원한 조지 왓츠(George Washington Watts, 1851–1921)의 선교 후원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벽돌 건물이다. 이 건물은 현재 재단법인 순천 기독 결핵 재활원이 소유하고 있다.
존 프레스턴(John. F. Preston)은 1910년 광주 선교부로부터 순천 선교부의 설립이 승인되자, 순천 매곡동 언덕에 부지를 매입하여 건축 계획을 완료하였다. 조지 왓츠 기념관은 조성 후 순천 고등 성경학교(현재 순천 성서 신학교) 건물로 이용되었고, 이후 선교사 숙소, 순천노회 교육관으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조지 왓츠 기념관은 1962년 군산 출생인 휴 린톤(Rev. Hugh M. Linton, 1926-1984, 인휴) 목사 부부가 1960년대부터 결핵 환자들을 위한 순천 흉곽내과 진료소를 운영한 곳이며, 1973년부터 결핵 환자들을 위한 순천 기독 재활원으로 이용되었다.

4) 조곡동 철도관사 커뮤니티

조선 총독부 교통국은 (구)순천역의 조성에 따라 1936년 남조선 철도 사무소를 광주에서 순천으로 이전하였다. 이에 순천은 남조선 철도 사무소의 거점 도시로서 최근 호남권 철도기능이 세개권 분리(전남, 광주, 전북)된 2006년까지 70년간 호남지역 철도 업무의 중심부였다. 이러한 철도 거점의 흔적은 무엇보다 순천역의 북쪽으로 죽도봉 남쪽 사면인 조곡동에 1936년 조성된 철도관사 커뮤니티에 남겨져 있다.
조곡동 철도관사 커뮤니티는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근대적 주거 신도시의 도시설계 원형이다. 조곡동 커뮤니티의 동-서 경계는 조곡 금호타운-이수 중학교와 죽도봉 길, 그리고 북-남 경계는 죽도봉와 이수로로 정의된다. 조곡동 커뮤니티의 형태는 350x450m의 직사각형으로, 그 안에 20x50m의 장방형 격자형 주거블록들이 폭 6m의 도로들로 정의되어 있다. 이곳에는 철도 기관고, 철도 사무소, 클럽, 공동 목욕탕, 철도 근로자들을 위한 기숙사, 관사 등을 포함한 약 150세대의 2층 규모의 주거건물 100개와 77동의 철도 시설들이 조성되어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조곡동 커뮤니티의 중심길은 현재 자경2길로 개천이 흘렀다고 전해지며, 철도 공무원 아파트 부지에는 공동 목욕탕과 클럽이 입지했다. 또한 현재 수정 아파트 부지에는 철도 국장의 관사가 입지했으며, 구역내 상당수의 필지들이 1960년을 전후로 민간에게 매각되어 개발되었다. 또한 철도 종사자들을 위한 철도 운동장(현재 순천체육공원)과 철도 어린이집 부지에 순천 철도 진료소(1937, 1982년 폐쇄)가 기능하였다. 현재 이곳은 2012년부터 주민 주도의 마을 자치사업인 ‘순천 철도문화 역사 마을 만들기’가 철도 공사와 순천시의 지원으로 진행되고 있다.
(구)순천역 앞 남쪽에는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순천 시가지 계획을 근거로 원형 플라자가 조성되어 이후 풍덕동의 방사형태 도시개발의 거점이 조성되었다. 역전 앞의 원형 플라자는 당시 일본 도시 설계가들이 유럽의 도시 설계 언어를 학습하며 실험해본 초기 작업물의 예이다. 이러한 로터리형 원형 플라자는 진해에서도 동일한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상설 시장인 역전시장, 그리고 도로 끝부지에 공업용지가 계획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2. 순천 선교부의 설립

순천을 처음으로 방문한 선교사는 1894년 호남 일대를 순회한 레이널즈(이눌서) 목사 일행이다. 그 후 1897년에 테이트(최의덕) 선교사가 그 지방에 선교 여행차 들러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장터 전도를 했는데, 그때 돌렸던 전도지가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어느 주막집 벽에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순천 선교부의 개설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광주에 거점을 마련한 오웬이 순천에 와서 복음을 전파한 후 몇 교회를 설립하였고, 1909년에는 프레스턴(John Fairman Preston)과 벨이 이곳에 와서 보니 이미 순천에 50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목도했다. 이들은 신앙문답을 실시하고 원입교인을 세우는 등 이 지역의 교회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1909년에는 프레스턴이 한 달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1910년부터는 봄과 가을 정기적으로 두 차례씩 문답을 실시하여 이곳 교회를 관리해 나갔다. 1910년에는 니스벳(Nisbet)이 처음으로 순천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1911년에는 순천에 선교기지를 구입해 정식으로 순천 선교부가 개설되었다.
1912년 광주 선교부에서 코잇트(Robert Thomwelll Coit, 高羅福)와 스윈하트(Martin Luther Swinhart, 徐路得)가 순천에 선교사 주택을 건축하고 그 이듬해 4월 코잇트와 프레스턴 가족이 순천으로 이사했다. 이어 두 명의 여선교사 비거(Meta Louise Biggar, 백미다)와 두피(Lavalette Dupuy, 두애란),그리고 알렉산더 병원을 설립한 의료 선교사 헨리 타몬스(Henry Loyala Timmons, 김로라),순천 선교의 공로자 크레인(John Curtis Crane, 구례인)이 합류해 순천 선교는 놀라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3. 미국교회의 전적인 후원과 선교사 지원

그보다 전인 1911년, 프레스톤은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났다. 그는 새로운 순천 선교부의 스텝과 다른 센터에서 섬길 33명의 선교사를 모집하는 사명을 받고 떠났다. 당시 미국 교회들은 해외선교를 위한 열정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1907년 평신도 선교 운동이 후원하는 새로운 선교강령의 채택에 따라 모든 교회는 7개 선교현장에 속한 총 2500만 명의 복음화를 위해 분명한 선교의 책임을 수락했다. 각 교회 교인들은 믿음으로 이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도록 요청받았다. 선교부의 목표는 1년에 1인당 4달러였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지원을 강조하는 좋은 기회였다. 프레스톤은 프래트 목사와 함께 이 평신도 선교 운동의 후원을 받아 선교사와 재정 후원자를 찾기 위해 교회를 순회했다. 고국 교회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해에 33명의 선교사가 선발되고, 그들의 한국 지원이 약속됐다. 가장 놀라운 일은 더램 제일장로교회에서 일어났다.
프레스톤 목사가 강단에서 한국의 사정에 대해 설교한 그 자리에는 조지와츠라는 사업가가 있었다. 프래트 목사는 설교가 끝난 그 주말에 와츠 씨를 방문했다. 그리고 선교사 한 사람의 후원이 아닌, 순천 선교부 전체의 후원을 요청했다. 며칠 후 조지와츠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순천에 세워질 새로운 선교부를 보강할 13명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1만3000달러씩 후원하기로 했다.
프레스톤이 지원금을 가지고 순천으로 돌아오자 순천 선교부 건축은 급물살을 탔다. 중국, 일본, 한국의 일꾼들이 근처 산기슭의 화강암을 다듬어 무거운 돌을 50km 정도나 지고 산길을 넘어 아래로 운반했다. 포구에는 미국에서 보낸 시멘트와 각종 자재가 도착했다. 곧 전체 선교부가 지어지고, 선교사들이 채워지는 보기 드문 역사가 일어났다. 1913년 4월에 드디어 코잇과 프레스톤 목사 가족도 순천으로 이사했다. 두 가정의 여성들은 말을, 남자들은 자전거를, 아이들은 가마를 탔다. 가마꾼들이 담배를 피우는 사이 아이들은 잠시 가마 밖에 나와 풀을 따고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다. 그렇게 인구가 늘고 교회와 학교가 생겨나면서 순천 선교부는 그 모습을 현실 가운데 활짝 드러냈다.

4. 이질로 아이들을 잃고

그러나 순천 지역 선교사들은 불과 같은 연단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순천으로 이사 온 후 일주일도 되기 전, 4월 26일과 27일에 코잇 목사의 어린 딸 로버타(2세)와 아들 우즈(4세)가 차례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코잇 부인도 이질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있었지만, 순천과 광주 선교사들의 중보기도와 치료로 살 수 있었다. 이 시기를 지난 코잇 부인의 간증은 멀고 낯선 땅에서 가족을 잃은 선교부에게 인내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 의료사역을 위해 이곳에 도착한 티몬스(김로라) 박사 부부와 간호사 그리어 자매는 알렉산더 병원을 설립했다. 순천 선교의 리더격인 크레인(구례인) 목사의 여러 가족은 남학교 사역을, 여선교사 두피(두애란) 자매는 여학교 사역을 위해 부임했다. 또한 여성들을 위한 복음선교와 성경사역에는 여선교사 비거(백미다) 자매가 부임했다. 이들 여러 선교사들은 순천의 일반·농촌 선교와 함께 매산학교 설립 등의 학원 선교, 알렉산더 병원을 통한 의료 선교를 서로 분담해 하나님의 역사를 펼쳤다.

5. 백미다가 머물렀던 선교사 마을

1) 이름 속에 남은 기억 - 순천 선교사 마을

전라남도의 도시 순천에서 프레스턴 주택과 조지와츠 기념관이라는 멋진 양관은 백 년도 더 된 서양식 주택이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장소이다. 순천은 그 외에도 서너 군데 선교사들의 흔적이 깃든 장소가 있다. 언덕 위의 선교사 마을, 1913년 고라복 선교사는 순천 동산 밖 언덕 위에 지어진 학교 앞에서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립 은성학교로 인가를 받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는 날이었다. 배유지, 오기원 두 선교사의 본격적인 활동으로 미 장로회 해외 선교부의 사역 활동이 순천까지 넓어진 지 10년, 교세는 학교와 병원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확장됐다. 미국 본토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의료와 건축을 담당할 선교사들이 지속적으로 순천에 당도했다. 변요한, 백미다, 기안라, 한삼엘, 안채륜, 구례인 등, 많은 선교사들이 순천에서 함께 일했다.
고라복은 ‘로버트 코잇’, 변요한은 ‘존 프레스턴’, 배유지는 ‘유진 벨’, 오기원은 ‘클레멘트 오웬’, 백미다는 ‘비거’, 한삼엘은 ‘리딩햄’, 서로득은 ‘마틴 스와인하트’, 기안나는 ‘안나 그리이’의 한국식 이름이다. 안력산의 본명은 ‘알렉산더’, 구례인은 ‘크레인’이다. 서양인들은 어려운 외국 이름이 아니라 한자로 된 이름을 써서 한국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인 비거는 백미다가 이름이 되었을 때 순천 사람이 되었다.
선교사 마을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신사참배 문제로 일본 경찰과 자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40년 선교사들은 마을을 폐쇄하고 모두 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 땅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의 본명을 되찾았다.

2) 백 년 전 생겨난 선교사 마을

전라남도의 끝자락 순천에 선교사촌이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전략적 배경이 있었다. 광주와 목포에 위치한 미 장로회 선교부는 벌교와 순천 중 한 곳을 전라 내륙을 위한 정식 선교부로 삼으려 했다. 그 중 순천이 선택되었다. 교통의 요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더 크며, 여수로 선교지역을 확장하기에도 좋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선교사들은 순천읍성 북문 밖의 구릉지에 터를 잡았다. 순천 시내를 조망할 수 있었고 시장과도 가까웠다. 게다가 높은 언덕에 서양식 2층 건물을 지어 순천의 조선인들이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난봉산 기슭에 1910년대부터 1920년대 말까지 선교사들을 위한 주택 여섯 채, 병원과 간호사시설, 남녀 기숙사를 포함한 아홉 채의 학교 시설, 교회 등이 세워졌다.
마을의 건설 과정은 고라복 선교사가 미국 본부에 띄운 편지에 자세히 담겨있다. “일꾼들이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롭습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산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 석공들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돌을 다듬느라 분주합니다. 다른 편에서는 매우 낮은 임금을 받은 한국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무거운 짐을 옮깁니다. 다른 사람들은 본부의 기초를 닦거나 길을 고르게 하며 많은 수는 타일을 만들어냅니다.”
대부분의 건축 재료들은 순천 주변에서 조달하고 벽돌과 타일은 가마를 설치해서 직접 구웠다. 석재는 순천 읍성이 해체될 때 나온 돌을 가공해서 쓰기도 했다. 회색 벽돌과 화강석을 주로 쓴 까닭에 건물은 색채가 그리 드러나지 않는 차분한 분위기다. 그 외, 시멘트와 미국산 목재,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건축재와 페인트는 미국에서 배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왔다.
한옥의 지붕선을 닮은 건물도 있고, 고즈넉한 숲과 정원이 감싸고 있어 완벽하게 감추어진 굴뚝 나온 이층집도 있었다. 언덕 가장 위쪽에 선교사 주택이, 그 아래에 남학교와 여학교가 엄격히 나뉘어 세워졌고 병원은 순천 사람 누구나 올 수 있도록 독립된 위치에 자리 잡았다. 교회와 성경학교는 시민들과 자주 만나도록 마을의 초입에 세워졌다. 이를 두고 후대의 건축학자들은 마스터플랜을 갖추고 선교사 마을을 형성한 최초의 사례이며, 일본을 통해서 세워진 변형된 서양식 건물이 아니라 미국에서 활발하게 지어지던 서양식 건축이 곧바로 유입된 현장이라고 설명한다.

3) 이름 따라 걷는 아름다운 산책

수십 채의 건물은 대부분 사라지고 고작 여섯 채만이 남아있지만, 그 경건함과 고즈넉함은 여전히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선교사를 양성하던 성경학교로 세워진 조지 와츠 기념관이 초입에 있고, 매산학교는 매산중학교로, 여학교는 매산여고로 역사를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애양원이라는 한센병 재활직업보도소가 있는 언덕까지 선교사 마을은 이어진다.
마을에서는 옛 선교사들의 이름이 여전히 불린다. 주요 시설마다 백 년 전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건물이 한 채씩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순천의료원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따라가면 보물찾기하듯 건물을 하나씩 만나게 된다.
산책은 조지와츠 기념관에서 시작된다. 단정한 2층 건물은 선교 기념관이자 조지 와츠 선교사를 추억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건물은 1925년에 성경학교로 지어졌는데, 거쳐간 학생이 천 백여 명에 이른다. 진료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기독진료소라는 명패가 붙어있다. 현관이 중앙에 있어 대칭형 건물에 뾰족한 박공지붕이 깊게 내려왔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단정하다.
조지 와츠는 누굴까? 1930년에 지어진 매산관(지금의 매산중학교)에 교사가 생기기 전 그 자리에 있었던 건물이 바로 조지 와츠 기념 남학교였다. 초창기 마을이 생겨날 무렵부터 지금까지 언급되며 칭송받는 이 사람. 그는 순천에 선교사들이 파견될 무렵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인물이었다. 헌금을 희사하고 선교사를 보내는데 도움을 준 덕택에 그의 이름이 타국 만리 먼 곳의 작은 도시에 백년이 지나도록 불리고 있다.
매산관은 1930년에 세워진 것이나 학교의 역사는 더 깊이 올라간다. 학교를 세운 것은 1910년, 2층 회색 벽돌 건물을 지어 은성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은 것이 1913년이었다. 이곳은 성경 교육을 제외하고 기존의 보통학교로 교과를 바꾸는 문제로 인해 폐교에 이르렀다가 1921년 다시 사립 매산학교로 복교한 역사가 있다. 이후엔 신사참배로 인한 마찰로 다시 자진 폐교하는 사태로 이어졌지만, 학교 건물만큼은 굳건히 남아서 매산학교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작성일:2020-07-06 23:13:38 211.117.5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