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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24 / Lomas, E. K.(미상, AP)

닉네임
이민형
등록일
2020-07-06 23:20:06
조회수
67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3_24_이민형.hwp (311808 Byte)
Ⅰ. 기본사항

이름: Lomas, E. K. / 로마스 / 盧馬是 / 한국 이름: 노마시

1. 생몰연도: 출생연도는 알려진 정보 없음
뉴질랜드 출생


2. 출신 및 소속: 뉴질랜드
정병준 <호주 기독학생운동의 발전과 한국선교, 1889~1942>
Otago Univ. 학생자원선교사(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SVM)
Otago Univ. 기독학생연합(SCU) 리더
교회 내 청년성경반(Young Men’s Bible Class) 리더
뉴질랜드 웰링턴 사범대학 과학 교사
호주 해외선교위원회


3. 한국선교기간: 1914.1-1916.2 (마산)


4. 연표
1913.6.18. 한국 교육 선교사 임명
1913.11.18. 선교사 안수
1913.11.26. 탕고마루 호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
1914.1. 마산 선교사역 시작
1914.1-1916.2. 마산에서 교장직 수행
1916.2. 귀국
1916.2. 웰링턴 사범대학 과학교사 재임


5. 가족사항
알려진 정보 없음





Ⅱ. 선교사 소개

E. K. Lomas(노마시) 선교사는 마산에서 약 2년간 선교사로 있었다. 내한 선교 기간이 짧아서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1. 선교사로 방한 전까지

정병준 <호주 기독학생운동의 발전과 한국선교, 1889~1942>
E. K. Lomas(노마시) 선교사는 오타고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오타고 대학에서 기독학생연합(SCU)의 리더였다. 그 뿐만 아니라 로마스 선교사는 웰링턴의 그의 교회에서 청년성경반(Young Men’s Bilbe Class)의 리더였다.

https://m.blog.naver.com/jbjoon63/30096285775
그는 오타고 대학에서 학생자원선교사(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SVM)에 소속되었다.

이후 그는 뉴질랜드의 교육부 산하 웰링턴 사범대학의 과학교사로 재직하였으며,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국에 가는 교육 선교사로 임명받기 위하여 해외선교위원회에 지원하여 소속되었다.

http://www.chedulife.com.au/정병준-교수의-호주선교사-열전43/
로마스 선교사는 1913년 6월 18일에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해외선교위원회는 그를 빅토리아로 데려와 선교사로 안수하여 한국으로 파송시키도록 실행위원회에 위임했다.

그는 11월 18일에 선교사 안수를 받았고, 6일 후인 11월 26일 시드니에서 탕고마루 호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2. 내한과 마산에서 선교사역

1906년에 진주와 마산에서 남학교와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미국인들의 철수로 인해 진주에 남녀 중등학교를 세우기로 한 계획이 수정되어 부산에는 여자중등학교, 마산에는 남자중등학교를 운영하기로 했다. 데이비스(Miss Davies)가 일신학교를 맡게 되었으며, 1916년에는 중등학교를 조직했다. 마산에 세워지기로 한 중등학교는 The Henry Davies Memorial로 불리기로 했으며 멜버른의 해외선교위원회에 의해 지원받도록 하였다.

1913년에 뉴질랜드에서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한국으로 온 로마스 선교사는 1913년 말 창신중학교의 교장을 맡기로 하였다.

로마스 선교사는 마산에 도착한 즉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교장직을 수행하였다. 창신중학교는 1915년에 8명의 한국인 교사들과 181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로마스 선교사는 창신중학교의 교장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 주에 4시간씩 노래와 영어를 가르쳤으며, 세 명의 교사들에게 한 주에 2번씩 영어를 가르쳤다.


3. 귀국

1915년에 일본당국이 도입한 개정사립학교규칙으로 인해 선교사 교육이 큰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총독부의 사립학교정책은 선교사 교육정책을 흔들었다. 그것은 교육으로부터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학교 안에서 종교 교육과 예배가 금지되었다.

이윤미 <식민지시기 호주 선교사의 교육활동: 호주장로회 선교부 자료를 중심으로>
이 규칙으로 인해 종교교육을 정규교과에서 다루지 못하도록 하였고, 의무화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자격 있는 교사에 의한 교육과 교수용어의 일본어 사용도 규정했다. 규칙에 따라 10년의 유예기간동안 재정, 시설, 교사자격 등에서 요건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 규칙은 내한 선교사들의 교육 선교에 아주 큰 지장이 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마산의 학교 설립 계획은 중지되었다. 종교 교육과 예배를 할 수 없는 판국에 로마스 선교사는 정부 당국과 협력할 수 없었다. 로마스 선교사는 한국에서 기독교교육의 미래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짧은 기간 동안, 창신중학교의 교장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4. 귀국 이후

로마스 선교사는 약 2년간의 짧은 선교사역을 마치고 1916년 2월 한국을 떠나 귀국하였다. 1916년 그가 귀국한 이후 그의 선교에 대해 해외선교위원회는 빅토리아장로총회에 보고서를 보냈다.

로마스 선교사의 선교에 대해 해외선교위원회가 빅토리아장로총회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2년 동안 그의 외국인과 한국인 동료들로부터 깊은 애정과 존경을 받았던 로마스 씨의 선교사직 사임은 우리 사역에 또 다른 손실이 되었다. 로마스 씨는 한국에서 일본 당국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은 신교육법을 사용해서 신앙인으로서 그의 양심에 반하는 행동에 학생들을 참여시키도록 지시했다. 그는 공손하면서도 확고하게 저항했고 그에 대한 당국의 응답은 ‘우리는 일본 천황이 첫째이고, 모든 다른 신들(gods)은 그 다음이다.’는 것이었다. 본위원회는 한국에서 우리 교육사역에 일어난 헤아릴 수 없는 손실에 깊은 유감을 표하지만 이러한 특수한 상황에서 로마스 씨가 취한 행동 이외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는 것에 공감한다. 로마스 씨는 뉴질랜드 교육부 산하 웰링턴의 사범대학의 과학교사로 과거의 직에 다시 임명되었다.”

귀국 이후 로마스 선교사는 뉴질랜드 교육부 산하 웰링턴 사범대학의 과학교사로 재임명 되었다.
작성일:2020-07-06 23:20:06 121.161.157.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