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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04/Hoffman, Robert Edwin/3-3반 정주원

닉네임
정주원
등록일
2020-07-06 23:32:52
조회수
685
첨부파일
 Hoffman Robert Edwin.pdf (1300261 Byte)
한국교회사 과제 기초자료조사
Rev. Robert Edwin Hoffman
/ Mrs. R. E. Hoffman, R.N. (nee Marilyn Veith)

Ⅰ. 기본사항

이름: Robert Edwin Hoffman / 호프만/ 한국명: 함부만
생몰연도: 1923년 5월 13일 ~ ?
출신 및 소속: 미국 남 장로교회
한국선교기간: 1955. 5 – 1979. ??
연표1929. 05. 13. 한국 병천에서 출생(아버지 호프만 선교사는 내한 선교사였음)
1946 - 1950 College of Wooster
1950 - 1953 Prinston theology seminary(B.D) 1953. 06. 06. Marilyn Veith와 결혼
1953. 04. 20. New Castle 교회로부터 선교사 자격취득
1953. 10. 11. New Castle 교회로부터 선교사 위임.
1953 – 1954 Hanover. wilmington에서 사역
1954 – 1955 Northfork Church에서 사역
1955. 05. 15 한국으로 사역지 결정
1955. 10. 07 Pacific Bean 호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
1955 – 1976 한국 선교사로 사역, 목포, 전주, 서울
1966 – 1967 잠시 귀국하여 Prinston theology seminary(Th.m)
1967. 한국으로 재입국
1971 – 1972 다시 귀국 하여 Prinston univ
1976. 미국으로 귀국 가족사항 부모 Hoffman, Clarence S(부), Hoffman, Katherine D.(모)
부인 Mrs. R. E. Hoffman, R.N. (nee Marilyn Veith)
자녀 1.Mark Robert (55.06.25),
2.Frank Timothy (57.02.21)
3.Pamela Vane, (59.05.18)
4.Andrew Ashton (?)
Ⅱ. 선교사 소개: Robert Edwin Hoffman (호프만 / 함부만/ 미국 / 남장로교 )

한국에서 태어난 선교사의 자녀

호프만은 1929년 한국에 내한 선교사로 있었던 c.s 호프만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c.s 호프만 선교사는 2남2녀를 낳는데, 그중 첫째 아들이 함부만(호프만)선교사이다.
함부만의 아버지 ‘함가륜’선교사는 한국에 초대 선교사로서 교육선교사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아버지 함가륜은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 고국에 돌아갔고,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이기도 하다.

그 선교사의 아들, 함부만이 다시 한국에 온 것이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영향도 있었을 것이요, 아버지가 한국에서 추방당한 뒤 가지게 된 아픔들을 해소하기 위한 자녀의 도리였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1941년 추방당하기 까지 약 13년의 어린 시절을 보낸 한국 땅은 함부만에게 있어선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2. 다시 찾은 한국, 그리고 선교활동.

함부만은 1955년 남장로교회 소속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41년에 추방당했으니, 꼭 14년 만이다. 그가 이렇게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올수 있었던 이유는 어렸을적 생활경험, 그리고 아버지의 간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목포’ ‘전주’ ‘서울’등에서 선교활동을 한 후에 1979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한국선교가 중반, 후반에 이른 때여서 이미 다수의 한국인들이 교회 지도자로 세워져 있던 시기였기에 그의 활약상은 기록상으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개척자 신분이 아닌 이상 이름이 기록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여기에서 함부만이 선교했던 지역을 토대로 몇 가지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목포에서 먼저 사역했다는 것이다. 목포에서 그의 사역은 무엇이었을까? ‘교육선교사’로서 명성이 있었던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마도 그는 미션학교에서 근무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목포의 미션학교는 ‘정명학교’ ‘영흥학교’가 있는데, 그중 선교사의 사택이 있었던 곳은 ‘정명학교’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함부만은 목포에서 교육선교사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상상해 볼 수 있다.
둘째, 그는 전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이때,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 역사’ 한국선교 이야기를 토대로 볼 때, 함부만은 남장로교 선교사 ‘배사라’의 지시로 ‘전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주’에서 그의 사역을 생각해 볼수 있는데, ‘신흥학교’가 그의 사역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또 하나의 상상이 발휘될 수 있는데, ‘배사라’ 선교사가 어떤 선교사였는가? 이다. 배사라 ‘사라 베티’ 선교사는 함부만과 같은 해 1955년 남장로교의 파송을 받고 한국으로와 ‘광주’에서 주로 사역을 한 선교사이다. 그녀는 교회를 돕다가 ‘대학생’들을 돕는 사역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녀가 창시한 대학생 모임이 오늘날 ‘UBF’가 된다. ‘UBF’는 1961년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대학생들의 성경읽기 모임이었는데, 이때 배사라 선교사는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 남장로교가 넘어가서는 안되는 지역인 충청권, 서울권까지 진출하게 된다. 네비우스 정책은 다음과 같다.
1) 전도의 목표를 상류층보다는 노동계층에 두는 것이 더 낫다
2) 후대에 미치는 부녀자들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부녀자와 소년, 소녀들의 전도를 특수목표로 한다.
3) 시골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워서 기독교 교육에 효과를 내고 그 가운데서 남학생을 교사로 양성하여 파송한다.
4)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교역자를 양성한다.
5) 빠른 시일 내에 정확하게 성경을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6) 모든 문서 활동에는 한자를 벗어나서 한글을 사용한다.
7) 자립하는 교회를 목표로 한다.
8) 한국인 대중의 전도는 한국인 자신들에게 맡기기 위해서 선교사는 적은 수의 전도사 양성을 목표로 한다.
9) 의료선교는 외래 중심보다는 입원 중심으로 전개시킨다.
10) 지방에서 온 장기 입원환자는 퇴원 후 심방해서 그 지방 전도사와 연결시킨다.
같은 선교회 소속으로 같은 년도에 입국한 선교사 동료가 하고 있었던 사역을 함부만은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배사라의 지시로 전주에 가게 된 것 역시도 배사라의 사역의 방향에 맞게 움직였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볼 수가 있다.

3. 다시 고국으로
1979년 함부만은 다시 미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복귀는 아버지 C.S 호프만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C.S 호프만 선교사는 1941년 추방되어 다시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체로 1978년 11월 사망하게 된다. 아마도 아들 함부만아 소식을 접한 것은 한, 두 달이 지난 시간이었을 것이고, 함부만은 자신의 사역을 정리하고 1979년 귀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결론 : 남장로교의 정책에 따른 은혜의 선교
호프만 선교사는 자신의 사역을 남장로교의 정책에 따라 사역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사역에 있어서 네비우스 정책은 아주 중요한 사역의 뼈대였을 것이다. 선교 사역에 있어서 교육과 의료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호프만 선교사는 교육에 있어서 자신의 사역의 역량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해 배출된 선교자들의 양성에 더욱 신경을 썼을 것이고 그들을 통해 전주와 목포에서 많은 자국내 선교사를 배출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학교를 통해서 많은 아이들을 상대로 선교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의 사역은 교육과 의료 등 남장로교의 정책에 따른 은혜의 선교였다.
작성일:2020-07-06 23:32:52 1.249.16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