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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Wright, Albert Clement(1880-1971, AP) / Niven, A. G.; McCague, Jane Eliza

닉네임
박지민
등록일
2017-06-30 11:18:32
조회수
2366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35_2011210367_박지민.hwp (7131136 Byte)
I. 기본사항

라이트 선교사 / Wright, Albert Clement (1880-1971)

1. 이름: Wright, Albert Clement / 라이트 / 한국명: 예원배(芮元培)
2. 생몰연도: 1880. 3. 3 – 1971. 7.
3. 출신 및 소속: 호주, 호주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1912. 10. - 1942. 6.
5. 연표
1880. 3. 뉴질랜드, 오타고, 모스기엘 출생
1904. 초 선교지의 부름을 느낌
1904. 던디닌, 오타고 대학에 진학
1908. 호주 아델레이드 대학 선교원 훈련
1908. 던디닌, 녹스칼리지 신학원 수학
1911. 던디닌 노회로부터 목사 안수
1911. 노쓰이스트 밸리 교회 부교역자
1912. 3. 호주 멜버른으로 건너 감
1912. 4. 호스함 교회 부교역자로 사역
1912. 9. 호주 빅토리아 위머라 노회에서 선교사 안수 받음
1912. 9. 한국 파송 선교사로 멜버른 출발
1912. 10. 한국 부산 도착
1912. 11. 마산 지부 사역(마산, 의령지방 순회 사역)
1912. 12. 부산진교회 부임
1914. 10. 부산으로 전근
1915. 9. 엘리스 니븐 선교사와 부산에서 결혼
1920.12. 부산진교회 사임
1927. 7. 진주로 발령받음(진주, 거창 지부 담당)
1927. 12. 엘리스 소천
1928. 9. 부산지부 배속
1937. 9. 예원배 선교사 25주년 선교 기념 예배당 설립(해운대 교회)
1940. 10. 제인 맥카거와 결혼
1941. 11. 일제 경찰에 의해 가택 연금 당함
1942. 6.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함
1942. 11. 일본, 동아프리카 경유하여 호주로 돌아감
1943. 4. 캄버툭 교회 담임
1946. 2. 에르나벨라 원주민 선교부 감독
1950. 6. 프램링햄 교회 사역
1956. 1. 박스힐, 스트랫톤에서 은퇴 생활
1971. 7. 하나님 부르심을 받음
6. 가족사항부인: Niven, A. G (1876-1927), McCague, Jane Eliza (?)


니븐 선교사 / Alice Gordon Niven (1876-1927)

1. 이름: Alice Gordon Niven / 니븐 / 한국명: 니븐, 니번
2. 생몰연도: 1876. 9. 8 – 1927. 12. 7
3. 출신 및 소속: 호주, 호주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1905. 10. - 1927. 12.
5. 연표
1876. 8. 호주 시드니 출생
1876. 던니딘으로 가족과 이주
1901. 7. 호주 멜버른 ‘여교역자 훈련원’ 훈련
1902. 12. 호주 멜버른 ‘여교역자 훈련원’ 졸업
1903. 5. 도르카스로 장로교회 선교회 여전도사 임명
1905. 9. 한국 선교사로 시드니 출발
1905. 10. 한국 부산 도착1908. 교육 사역
1908. 12. 한국어 필기 시험 통과
1911. 11. 안식년 후 복귀
1912. 7. 여름 성경학교, 나환자 요양소, 성경공부 사역 시작
1913. 7. 여성 성경공부반, 동래 사역, 나환자 휴양소 사역 시작
1915. 부산 사역
1915. 9. 라이트 선교사와 결혼
1927. 12. 하나님 부르심을 받음
6. 가족사항남편: Wright, Albert Clement(1880-1971)


맥카그 선교사 / McCague, Jane Eliza (1890-1974)

1. 이름: McCague, Jane Eliza / 맥카그 / 한국명: 麥啓益
2. 생몰연도: 1890. – 1974.
3. 출신 및 소속: 호주, 호주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1918. 9. - 1942. 6.
5. 연표
1890. 북아일랜드 출생
1916. 여선교사 훈련 과정 마침
1918. 4. 한국 선교사로 임명
1918. 6. 한국 선교사로 파송 예배
1918. 8. 한국 선교사로 시드니 출발
1918. 9. 한국 부산 도착
1919. 부산 사역
1920. 통영 사역
1925. 거창 사역
1930. 진주 사역
1940. 10. 라이트 선교사와 결혼
1942. 6. 강제 출국
1974. 4. 하나님 부르심을 받음
6. 가족사항남편: Wright, Albert Clement


II. 선교사 소개

라이트(Wright, Albert Clement, 1880-1971)

1. 라이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선교사로 부르심
라이트(Wright, Albert Clement, 1880-1971, 한국명: 예원배)는 1880년 뉴질랜드 오타고(Otago)주, 타이에리 평원(Taieri Plain)의 모스기엘(Mosgiel)에서 제임스 라이트(James Wright)와 수잔 라이트(Susan Wright) 사이에서 태어났다. 1843년 국교회에서 분리해 설립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의 신앙 배경을 가진 라이트의 조상은 1848년 이후 일단의 스코틀랜드인과 함께 오타고로 이민했고, 라이트가 태어난 곳에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타이에리 평읜의 북동쪽 끝 더니딘으로 가는 관문 모스기엘에는 1870년 당시 더니딘에서 유명한 건축가 로슨(Robert Lawson)이 건축한 예배당 ‘동부 타이에리 장로교회(East Taieri Presbyterian Church)’가 있는데, 라이트는 어릴 때부터 이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가업을 도와 몇 년간 농업에 종사하던 라이트는 1904년 초, 그의 나이 스물 네 살이 되던 해에 선교지의 부름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서 약 20km 정도 떨어진 던니딘으로 가서 오타고 대학에 진학한다.

2. 신학의 길로 들어선 라이트
라이트는 던니딘에 거주하면서 오타고대학의 학부과정을 공부하던 중에 1906년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취지에 동조해 선교자원선언에 서명한다. 1907년 FMC(해외선교위원회)가 총회에 보고한 기록(Minutes of Proceedings)에 따르면, 해외 사역을 신청한 8명의 학생 중 라이트에 대해서는 신학대학원 위원회가 그로 하여금 3년 과정 신학 공부를 주선하도록 권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선교 훈련을 필요로 했기에, 라이트는 오타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잠시 호주로 건너가 아델레이드 선교훈련원(The Missionary Institute, Adelaide)에서 선교 훈련을 받고 뉴질랜드로 돌아온다.
본격적인 선교사로 훈련받기 위해 던니딘의 신학대학원(The Theological Hall, Dunedin)에 입학하고, 동대학의 녹스칼리지(Knox College)에서 생활하며 신학을 공부한다. 그의 신학교육 과정을 신학대학원 보고서(Theological College reports; 1908-1911)를 통해 좀 더 살펴보면, 1908년 대학원의 던롭(Dunlop) 교수는 해외선교 사역을 위해 준비하는 라이트가 ‘신약성경 주해’ 강좌에 참석하고, 와트 박사(Dr. Michael Watt)가 가르치는 ‘교회사’ 과목도 수강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렇게 전 과정을 마치고 1911년에 더니딘 노회(Presbytery of Dunedin)로부터 목회자 인허를 받는다.

3. 선교사로 파송되기까지
신학 공부를 마친 라이트는 뉴질랜드 장로교회 해외선교회(FMC of the Prebyterian Church of New Zealand)에는 파송 선교사 자리가 없어서 그는 해외로 나가기 전에 던니딘 노회의 주선으로 던니딘시 북쪽에 위치한 오포호(Opoho) 교구 산하 노스이스트 밸리(North East Valley)로 가서 H. B. 그레이 목사(Rev. H. B. Gray)를 도우며 부목사로 사역하게 된다. 이 기간에 예배를 인도하고, 심방을 하며 사역을 배우게 된다. 호주장로교 총회가 해외선교위원회를 통해 던니딘의 신학교 학장이었던 휴잇슨 목사(Rev. Hewitson)와 발퍼 목사(Rev. Graham Henry Balfour)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해 둔 라이트는 드디어 1912년 호주행 배를 타고 뉴질랜드를 떠난다.
1911년 10월 27일에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선교위원회를 통해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였고, 해외선교위원회(FMC)는 12월 5일 이를 수락하여 그를 호주 빅토리아주로 오도록 결정했다. 이에 그는 1912년 3월 호주 멜버른으로 갔으나 바로 한국으로 출발하지는 못했다. 그는 한국으로 오기 전 몇 개월 간 아델레이드와 멜버른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 호스함(Hosrsham)에서 호스함 교회 부교역자로 사역하게 된다. 약 5개월 간 호스함 교회에서 사역한 후 1912년 9월 9일 동 교회에서 개최된 안수식에서 라이트는 그 지역 위머라 노회(Presbytery of Wimmera)로부터 안수를 받고 호스함 교회화 닐(Nhill) 교회 공동 파송선교사로 한국으로 출발하게 된다.

4. 37일만에 한국 땅을 밟고 사역을 시작한 라이트
라이트는 멜버른을 떠난지 37일 만인 1912년 10월 30일에 부산에 도착한다. 도착해서 약 5일 정도 후 바로 첫 사역지인 마산으로 떠난다. OMAW 보고에 따르면 부임해서 첫 6개월은 한국어를 배우는데 집중했다. 그의 사역지를 살펴보면, 1912년 11월 – 1914년 10월 마산 지부에서, 1914년 10월 – 1927년 7월 부산 지부에서, 1927년 7월 – 1928년 9월 진주 지부(진주, 거창 담당)에서, 1928년 9월 – 1942년 6월 부산 지부에서 사역하고 1942년 6월 출국한다. 이렇게 부산과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30년간 선교 활동을 하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1912년부터 1924년까지 마산에서 활동하고,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진주에서 활동하였으며, 1928년부터 1942년까지 부산(좌천동 471번지)에서 선교 활동하였다.

5. 부산진교회 부임과 경상노회 회원으로 시작
1912년 12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상노회(慶尙老會) 회원으로 시작하여 1916년 9월 20일 경남노회로 분립된 이후까지 계속 참여하였으며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1919년 총계위원을 비롯하여 마산과 부산의 시찰위원, 부산지방 성경학원 강사, 종교교육부 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진교회 분규사건 때에는 특별위원으로 활동하며 교회 분규를 수습하는데 노력했다. 경남노회는 1937년 라이트 선교사의 한국선교 25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으로 해운대에 기념교회를 건립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1919년 12월 부산진교회에 부임하여 1920년 12월까지 시무한바 있으며 그 후에도 종종 당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6. 사별의 슬픔... 그리고 재혼과 시련의 날들
1927년 12월 첫 부인 니븐(Niven)과 사별(死別)하였으며 1940년 10월 25일 맥카그(J. E. McCague)와 서울에서 재혼하였다.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와 해운대교회를 찾아 거기서 잠시 머물렀다.
1930년대 중반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이 문제는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등 선교에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당국은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1936년 2월 마산에서 열린 선교협의회에는 23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마라연(Dr. C. McLaren)을 의장으로 진행됐는데 이 회의에서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은 신사참배에 응할 수 없다고 결정해 선교부 공식 견해로 2월 8일에 발표한다. 그러나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고, 결국 호주 선교 50주년을 1년 앞둔 1938년에 신사참배 문제로 선교회 학교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계속해서 핍박은 거세갔고, 그럼에도 1939년 선교협의회 특별회의는 “교회와 학교에서 우리는 신사참배하기를 거부한다.”고 다시 결정한다. 이렇게 라이트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애를 썼지만 일본 당국의 압박과 간섭은 갈수록 심해졌다.

7. 강제 출국과 호주에서의 마지막 나날들
마지막 선교를 맥카그와 함께 하는데 그 당시에는 신혼여행을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압제로 인해 선교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열약했다. 그래서 호주 당국에서 한국 선교사들을 많이 소환했다. 이런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결국 1940년대 말이 되자 외국인 선교사 90%는 한국을 떠나게 된다. 결국 마지막 남은 호주 선교사들은 모두 1942년 2월 23일자로 모두 가택연금된다. 결국 1942년 6월 2일 강제 출국당한다.
이렇게 강제 출국 당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친척들을 방문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러다가 한국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선교사로 다시 돌아가기를 꿈꾼다. 하지만 모든 뜻을 하나님께 맡겼고, 하나님은 호주에서 남은 선교 사역을 감당하길 원하셨는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진 못했다. 그러다가 1971년 7월 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니븐(Alice Gordon Niven, 1876-1905)

1. 선교사의 자녀 니븐
니븐(Alice Gordon Niven, 니븐, 1876-1905, 한국명: 니븐, 니번 )은 1876년 9월 8일 호주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해에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 던니딘으로 이주해서, 던니딘 제일교회에 출석하며 뉴질랜드 장로교회 신앙 배경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할아버지 제임스 니븐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과 연합장로신학원에서 공부한 후 연합장로교 선교회에서 파송 받아 서인도제도 자메이카에서 1935년 이래 30년 간 개척 선교사로 사역했다. 그녀의 부친 제임스 니븐(James Niven) 2세는 1838년 아버지가 사역하던 자메이카 프렌드쉽에서 출생해 1863년 에딘버러 연합장로회에서 인허를 받은 후 1864년 10월 뉴헤브라이드즈 선교사로 개혁장로교회 대회에서 안수받은 목사다.

2. 선교사의 꿈을 품고 있던 니븐
니븐은 어렸을 때부터 던니딘시 제일교회에 출석하며 음악을 공부하여 음악교사가 된다. 하지만 가족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의 꿈을 꾸며 자란 그는 학교를 마치고 선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해 1901년 7월 호주 멜버른으로 간다. 그리고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가 설립, 운영하는 ‘여교역자 훈련원(Deaconess Training Institute)’에서 1년 6개월 간 교육을 받고 1902년 12월에 졸업한다.
중국 선교를 계획하던 니븐은 한국 선교를 택하게 된다. 하지만 건강 상의 문제로 바로 출발은 하지 못하고, 건강이 회복된 후 한국으로 떠나게 된다. 여전도회연합회(PWMU)의 교육선교사로 임명된다. 시드니에서 배를 타고 브리스베인을 지나, 써스데이 아일랜드, 다윈, 잠보앙가, 마닐라에 들린 후 홍콩에서 상하이를 경유해 나가사키로 가는 중국 배로 갈아탄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해서 기차를 타고 모지로 가서 시모노세키 호텔에 머문다. 다음 날 저녁에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1905년 10월 26일 부산에 도착한다.

3. 한국 사역을 시작한 니븐
꿈 꾸던 한국에 도착한 니븐은 켈리와 함께 박신연으로부터 한글을 배운다. 1906년 9월 니븐은 켈리와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몇몇 집회에 참석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니븐은 교육을 중점으로 사역한다. 니븐은 멘지스의 질병으로 인한 공백으로 후에 일신여학교로 발전하는 ‘여자학교(Girl’s School)’와 소녀들을 위한 저녁반을 가르치고 감독했다. 또한 니븐은 교육 사역 뿐만 아니라 순회 사역도 했다. 농촌의 여성반을 맡아서 주 1회 성경공부반을 진행했다. 그리고 주일에는 동래로 가서 30 여 명의 세례 준비 여성반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기도 했다. 한 주에 한 번 꼴로 나환자요양소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사역을 하던 중 라이트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4. 니븐의 순교
니븐은 남편 라이트와 함께 1927년 7월 경 진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이런 과정 중에 몸에 무리가 있었던 니븐은 건강을 잃게 되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니븐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지만 12월 10일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의 순교 소식에 추모하는 물결이 줄을 이루었다. 니븐은 처음에 맥킨지 목사의 어린 아들 짐이 매장되었던 부산진 선교부 뒤편 복병산 언덕 한 쪽에 묻혔다가, 곧 짐의 시신과 함께 좌천동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이후 다시 진주 평거동으로 옮겼다가, 1992년 부산 기장읍 철마면 만화리 부산진교회 묘역에 묻혔다.


맥카그(McCague, Jane Eliza, 1890-1974)

1.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맥카그
맥카그(McCague, Jane Eliza, 맥카그, 1890-1974, 한국명: 맥카그, 맥카거)은 1890년 초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어렸을 때 가족들은 호주로 이주했고, Sea Lake 지역 Mallee에 정착한다. 맥카그는 어느 날 집회에 참석해 한국으로 떠나는 한 젊은 선교사의 작별 메시지를 듣고 소명을 받아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2. 한국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게 된 맥카그
1916년 여선교사 훈련 과정을 마치고 여전도회연합회에 한국 선교사로 지원했는데, 여전도회연합회는 그녀의 건강진단서 결과를 조건으로 하여 1918년 4월에 한국선교사로 임명한다. 그리고 1918년 6월 10일 성 앤드류 칼튼교회에서는 선교사로 임명된 맥카그를 위해 파송예배가 드려진다. 그렇게 8월 21일 한국을 향해 떠났고, 9월 19일 부산에 도착한다.

3. 맥카그의 사역들
부산에 정착한 맥카그는 언어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고, 1919년 그녀의 다음 사역지를 통영으로 정하게 된다. 1920년 통영으로 가서 언어 공부를 하면서 주일학교와 야간 학교, 그리고 시골 성경 공부반 사역을 도왔다. 또한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의 시작을 열기도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사역에 집중했고, 중간에 안식년을 다녀온 1925년부터는 거창에서 사역을 한다. 이어서 1930년에는 진주에서 성경여자반과 성경공부반 및 성경학원 예비반을 맡아 사역한다. 거기에 1932년에는 순회 전도 사역까지 더하게 된다.

4. 라이트 선교사와 결혼, 그리고 그 후
라이트 선교사와 1940년에 결혼한 후 그와 함께 한국 선교에 혼신을 다한다. 여러 사역을 감당하다가 결국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강제 출국 당하고, 호주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 1974년 4월 5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작성일:2017-06-30 11:18:32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