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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Cook, Welling Thomas(1878-1952, NP) / Cook, Maude Hempill

닉네임
김용산
등록일
2017-06-30 15:34:14
조회수
2413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96_2015210081_김용산.pdf (455672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Cook, Welling Thomas (쿡 / 鞠裕致(국유치) / 미국 / NP)
2. 생몰연도: 1878-1952.1.16 (미국에서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08.11.19.-1951
5. 연표
1878. 미국 출생.
1881.09.16. Missoula, Missoula Country, Montana U.S.A 출생.
1908.11.19.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청주 선교부에서 활동.
1917. 안동선교부에서 활동.
1918. 선천선교부에서 활동.
만주지역 한인선교 책임을 맡고, 목단·장춘지구에서 활동.
미국교회에 만주선교지원 요청, 교회당, 성경학교 설립.
1920. 흥경(Hingking)에서 활동.
1921. 흥경(Hingking) 선교부에 L. P. Henderson 부부와 함께 사역을 동역.
1924. 장로교의 대표로 감리교와 협조 관계를 유지하며 선교 활동.
1925. 미국 필라델피아 베들레헴 장로교로부터 5천 달러의 선교비 후원.
만주에 베들레헴 교회를 설립.
1937. 중일전쟁 발발로 만주에서 철수, 재령선교부에서 활동, 일제말 강제 추방,
해방 후, 재내한하여 계속 활동.
1940. 청주로부터 파송되어 감독직으로 활동.
1951. 정년으로 은퇴, 고국으로 귀국.
1952.1.15. 펜실베니아주 모스호펜에서 소천.

6. 가족사항
부모: Milton Lewis Cook & Mary D. Thomas.
부인: Maude Rose H. Hempill.


II. 선교사 소개: Cook, Welling Thomas (쿡/ 鞠裕致(국유치) / 미북장로교 / 1878-1952)


1. Cook 선교사 부부 한국에 내한과 사역의 시작

Cook, Welling Thomas 선교사는 1878년 9월 16일에 출생하여, 1952년 1월 15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Milton Lewis Cook & Mary D. Thomas 부모 밑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라왔으며, 소명을 받은 후, 미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로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된다. 한국명으로는 국유치(鞠裕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Cook 선교사는 일찍이 선교 사역에 뜻을 두었고, 1908년 11월 19일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부인(Cook, Maude Hempill)과 내한하였다. 처음에는 청주 선교부에 배속되어 활동하다가 1917년 경북 안동 선교부로 옮겼으며, 그 이듬해인 1918년에 다시 선천 선교부로 이전되었다. 그 후, 다시 만주지역 한인 선교 책임을 맡고 목단 · 장춘지구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스코틀랜드 선교부에서 선교 활동을 담당해 왔는데, Cook 선교사 부부는 이들과 협력하면서 특히 고향을 떠나 먼 만주 일대에서 유랑하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전도에 중점을 두었다.


2. 선교 사역의 기초가 첫 열매로 맺혀지다.

서부의 간도라고 불리는 만주는 지난 10년 동안 괄목상대(刮目相對)할만한 성장과 체계적인 조직화를 이루었다. 1917년 이전에 Kangkei 지역의 선교사들은 압록강(Yalu River)를 가로질러 서쪽 지역을 복음화하였다. 당시 그 해에, 지역의 땅을 구매할 계획이었고, 지금의 흥경(Hingking)이라고 불리는 곳에 선교부를 위한 건물을 설립할 계획이었다. 흥경(Hingking)에는 동쪽의 목단과 압록강(Yalu River)의 고속도로를 잇는 약 160km의 도로가 놓이게 되면서 교통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은 남만주의 개신교라고 알려진 곳의 중심부가 된다. 약 50만명의 한국인이 살았고, 그 곳에 거주하는 대부분은 10년 동안 한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밖으로 이주하게 만든 것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종교적인 이유들이었고, 이러한 문제를 해소시켜주기 위한 조건들을 중국이라는 땅에서 을 찾고 있었다. 이러한 탈출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믿음과 삶의 형태가 마치 핵분열 하듯이 커져갔고, 교회는 자립하면서 그 전체의 수가 60개에 이를 정도로 성장해갔다. 1917년 이전에는 3명의 한국의 목사가 그 곳으로 파송되었고, 그 곳에서 가정집을 근간으로 3가지 전략을 가지고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시도했던 선교 사역은 점차 발전하게 되었고, 그 영역은 점차 넓혀져갔다. 그 곳은 지금까지 10명의 한국의 목사들이 부임하여 사역했고, 38명의 장로들이 세워졌었으며, 5,685명이 세례를 받아 교인이 되었다.


3. 흥경(Hingking)에 선교부가 세워지다.

1924년부터는 한국 감리교회에서도 이곳에서의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장로교·감리교 선교 연합기구가 마련되고 Cook 선교사 부부는 장로교회를 대표하여 감리교회와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흥경 지역의 특별한 점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조직체의 일부였다는 점과 중국의 교회들과 한국으로 목사를 파송하는 북미 장로교를 지원하였다는 점이다. 만주에서 압록강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존 매킨타이어(McIntire)나 존 로스(Ross)가 비록 조선인들을 전도하고, 조선인들을 위한 복음서를 인쇄하였지만, 그들만이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1891년 모펫(Moffet)과 게일(Gale)이 목단에서 의주 선교에 관여한 존 로스를 만났고, 그들은 의주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가 선교할 수 있도록 그 좋은 환경을 넘겨주었다. 그들은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만주 전역에서도 조선인들을 위해 보다 활발하게 선교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조선인들을 위해서 방문한 북장로교 선교부가 남만주에 조선인 선교를 위한 선교부를 설치하고자 했고, 1913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선교부에 요청하였을 때,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는 긍정적으로 받아드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수차례 회의하였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 연합선교부는 남만주 일대 조선인 선교하는 것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이양하였다. 이에 북장로교는 흥경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흥경에 선교부 활동을 시작한 것은 선교사 사택이 건립되고, 만주에서 선교할 선교사 선임이 끝난 1921년부터 시작되었다. 첫 부임은 W. T. Cook부부와 L. P. Henderson 부부였다. 스코틀랜드 선교는 학교의 교육 사역와 교회 그리고 병원의 의료 사역을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 1920년, 처음 흥경에 살았던 Cook 선교사 부부는 미국 선교의 힘이었다. 그리고 Henderson 선교사 부부는 1921년에 그들의 선교 사역에 동역하게 되었다. 이 선교 사역은 현재 벽돌로 된 독서실과 2곳의 성경 연구 시설 그리고 거주할 수 있는 2곳의 시설이 남아있다.


4. 만주에서 베들레헴 교회를 설립하다.

그들은 미국교회에 만주선교지원을 강력히 요청했는데 그 결실로 1925년에는 미국 필라델피아 베들레헴 장로교회로부터 5천 달러의 선교비가 도착했다. 이 선교비는 교회의 규모를 크게 짓도록 기여하였고, 교회의 이름을 만주의 “베들레헴 교회(Bethlehem Church)”라고 지었다. 또한 성경학교와 그 부속건물을 지어 교육활동에도 남다른 심혈을 쏟았다. 1926년, 베들레헴 교회의 베들레헴 예배(Bethlehem Chapel)는 공식적으로 제정되었고, 500명 이상의 예배자들로 차게 되었다. 언제든지 교리와 성경 공부, 또한 각종 연구를 위한 모임들이 생겨났다. 이 모임은 해마다 성경을 연구하고자하는 젊은 남성 45명과 30여명의 여성들의 지원이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또한, 교육과 관련한 사역을 병행하였는데, 개신교의 감독 하에 16개의 초등학교와 70명의 학생들을 위한 1개의 중학교를 세워 가르쳤다. 그러나 1937년 중국과 일본의 전쟁 발발로 인하여 만주 선교지에서 철수하였고, 이후 황해도 재령선교부에 배속되어 선교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그 후에 일제 말기 서양선교사들의 강제 추방과 함께 본국으로 일단 귀환했으나 해방 후, 다시 내한하여 한국선교를 도왔다. 이후로 10년 동안 교인들은 최소 4,000명에서 최대 6,000명으로 성장했으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북한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다. 한국은 어디에서나 좋은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인구와 교회가 균등하게 안정을 이루는 곳이었다.


5. 한국 땅을 마지막으로 밟고, 고국의 품으로..

1940년대의 한국 선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교회 내에서 가정이 확정되었다는 것과 해외 선교가 활성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의 군인들에 의한 노예 박해와 다양한 핍박, 그리고 심지어 그들은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수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외국 땅으로 자유롭게 퍼져나가는 등 계몽적이었다. Mr.Reiner는 평양으로 파송되었고, Adam 박사는 학교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는 Mr.Cook의 "주교(bishop)"로 할당된 지역을 여행하며, 기쁘게 사명을 감당했다. 그의 여행일정표를 배열했고, 지역을 위해 하나의 교육 수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이 사역을 기쁘게 감당했고, 도움을 주기 위해 Mr.Cook 선교사가 청주로부터 파송되었다. 특별히 그는 약간의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함께 사역을 감당했다. 그 해, 휴가 주인 Mr.Cook 선교사가 지원되지 않는 곳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43개의 교회로 사역이 배정되었다. 제2도시 교회의 정목사(Pastor. Chung)는 영토 내에서 진행되는 수업을 돕는 자들에게 많은 감사를 보내왔다. 그리고 또한, 그 수업은 Adam박사와 Mr.Cook 선교사가 여행했던 지역을 위해 개최되기도 했다. 1951년 정년으로 은퇴하여 귀국하였고 1952년 1월 16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모스호펜(Meshoppen, Wyoming County, Pennsylvania, USA)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부인은 이후 캘리포니아 듀아트에서 홀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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