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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Scholes, Nellie R.(1881-1919, AP)

닉네임
3반김현승
등록일
2017-06-30 15:42:50
조회수
2340
첨부파일
 내한선교사 기말보고서_M0134_2005210205_김현승.docx (2119030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Allen, Horace Newton / 알렌 / 한국명: 시원(柴園) 교장
2. 생몰연도: 1881-1919. 4. 14
3. 출신 및 소속: 호주, 호주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884.9.20.-1890.
5. 연표
1907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진주에 파송, 커렐을 도와 여자 소학교에서 교육
1909 시원학교 설립, 진주지방 여학교 교육에 전념
1913 진주지역 순회 전도자로 활동
1916 건강악화로 순회전도사역 멈춤
1916 시원여학교 운영, 주일학교 가르침
1919 멜보른에서 소천

6. 가족사항
7. 논저


II. 선교사 소개 : 넬리 R. 스콜스 (Nellie R. Scholes) (호주장로교/1881-1919)

1. 한국에 온 근대 교육 전문가 넬리 스콜스
Nellie R. Scholes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이다. 그녀가 속했던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아동 및 여성교육을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 이유는 여성교육은 유가적 한국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영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경남지방은 경기, 이북지방에 비해 보수적이었음으로 여성교육에 대한 무관심이 더욱 심각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호주 선교사들은 근대적 의미의 교육활동, 곧 교육은 특수한 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교육의 대상이며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특히 여성교육을 강조한 것이다.
호주 선교사 ‘커렐 의사(Dr. M. Currel)’ 부부가 1905년 서양인으로 맨 처음 진주에 정착해 진주에서 의료 및 선교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커렐 부부는 선교사 사택 옆 진주의 최초의 학교를 세운다. 넬리 스콜스는 커렐부부와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이 때 많은 영향을 받고 스스로 커렐부부가 섬기고 있는 조선의 진주지역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헌신하였다.
넬리 스콜스의 아버지는 교육가였다. 그녀는 교육학을 전공했고, 아버지의 학교에서 견습교사 훈련을 받았다. 넬리 스콜스는 어릴 때부터 학교 교장인 아버지로와 여러 선생님들의 삶을 통해 교사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삶으로 경험했다. 근대 교육의 이론과 실제가 체질화 되었던 넬리스콜스는 ‘여성훈련소’에서 조선선교를 위한 1년의 준비기간을 가지고 1907 년 2월 27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녀는 조선에 오자 마자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뛰어난 습득력과 적응력을 보였다. 그 후 그녀는 커렐 부부가 있는 진주지역으로 10월에 이동했다.
넬리 스콜스는 1907년 10월 진주지역에 와서 1919년 사망시까지 ‘시원여학교’의 교장으로 봉사했다. 이 기간동안 ‘시원여학교’를 진주지방의 최초의 근대학교로 발전시켰다.
‘시원여학교’는 호주선교회에 의해 운영된 여학교다. 진주지역 여성교육기관의 효시이다. 1906년 진주군 대안면 2동에 사립 정숙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고, 1909년 남학교인 안동학교와 통합하여 사립 광림학교로 인가를 받아 광림학교 부속 여자부, 광림여학교로 불렸다. 1924년 11월 5일 광림학교로부터 분리되어 여학교로 인가를 받아 ‘시원여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그 이름은 ‘시원여학교’의 첫 이름 ‘정숙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재직했던 호주여선교사 넬리 스콜스를 기리어 ‘시넬리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2. 신분 계층의 장벽을 무너뜨린 선교사
호주 선교사 ‘커렐 의사’ 부부는 1908년 10월 휴가를 떠나게 됨으로 넬리 스콜스는 함께 조선에 왔던 호주선교사 메리켈리와 진주지역에 남게 되었다. 1909년 2월 말, 진주 학교와 교회는 부흥을 하여, 수 많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학교와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는 사실은 매우 즐겁고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찾아왔다. 초기 한국교회는 바울 시대의 교회 처럼, 신분 계층의 장벽이 너무나도 컸다. 양반과 천한 것들이 구분이 되어, 예배를 드리는 일들이 있었고, 심지어 교회의 분열의 위기까지 있기도 했다. 넬리 스콜스가 섬기고 있었던 진주 지역의 교회에 천한 계층인 백정의 가족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래서 진주 교회 안에 양반계층과 천한 계층이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형편에 양반계층들은 천한 계층인 백정들과 같이 예배드리기를 거부하며 교회를 떠났다. 신분의 특권의식으로 분열의 위기에 놓인 진주교회를 섬겼던 넬리 스콜스와 메리 켈리, 두 여자 선교사가 양반계층과 천한계층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싸움이 연속되었다. 천한계층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떠나겠다고 제안했고, 양반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양반들의 마음이 움직여 천한계층과 양반계층이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되었다. 이 두 여선교사들의 사랑과 섬김과 수고와 인내, 그리고 기도가 이 신분계층을 무너뜨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PWMU 해외 선교 위원회는 두 여선교사들의 공로에 감사와 경의를 표했다.

3. 경남지역 순회 전도자 넬리 스콜스와 그녀의 죽음
1913년부터 1916년까지 넬리 스콜스는 여러 번 시골 순회여행을 다녔다. 비록 여성의 몸으로 현지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시골 마을 곳곳을 다니며 예수의 사랑과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교육)를 나누기를 매우 즐거워했다. 넬리스콜스는 시골 순회여행을 하면서도 학교사역을 병행했다. 하지만 그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지속적인 시골 순회 여행을 멈추게 되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1918년 7월 휴가를 떠났다. 여러 달동안 한국에서 한국인들의 사랑과 돌봄을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서 본국으로 돌아간 넬리 스콜스는 1919년 4월 멜보른 ‘영원한 쉼’을 누리기 위해 하늘나라로 옮겨졌다.
선교회는 아래와 같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의 생애는 이 나라에서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아낌없이 드려졌다. ~~ 그녀에게는 상냥함, 지혜, 재치와 인내가 발견된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들 중에서 대부분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녀의 동료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어떤 말로도 한 생애에 대해 완벽한 묘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따뜻한, 그의 순결함으로 이 인물의 향기와 매력을 말로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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