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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Renich, Edwin A.(미상, NP) / Renich, Ethel Eckel

닉네임
강석
등록일
2017-06-30 15:54:42
조회수
2391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38_2015210139_강석.hwp (698368 Byte)
Ⅰ. 기본사항

ⅰ. Renich, Edwin A.
1. 이름: Renich, Edwin A. / 레니크 / 한국명: 여라기(黎羅基), 연위득(延威得)
2. 생몰연도: -
3. 출신 및 소속: 미국, 미북장로회(Northern Presbyterian)
4. 한국선교기간: 1910년 9월 3일 – 1913년 7월 16일
5. 연표
-1910.9.3.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경북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
-1910 부인 사망
-1913.7.16. 사직하고 귀국
* 청송군 노래교회 및 삼하선교회 설립
6. 가족사항
부인: Renich, Ethel Eckel.(1889-1910)

ⅱ. Renich, Ethel Eckel.
1. 이름: Renich, Ethel Eckel. / 레니크 / 한국명: -
2. 생몰연도: 1889-1910
3. 출신 및 소속: 미국, 미북장로회(Northern Presbyterian)
4. 한국선교기간: 1910년 9월 3일 – 1910년
5. 연표
-1910.9.3.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안동의 남부지역 순회하며 여성 대상으로 선교, 계몽활동
-1910 사망
6. 가족사항
남편: Renich, Edwin A


Ⅱ. 선교사 소개: 여라기, 연위득(Renich, Edwin A)

ⅰ.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 연위득 선교사.
연위득 선교사는 그의 부인과 함께 선교를 왔다. 당시 그 지역은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이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60여개의 기독교 단체와 3000여명의 교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은 어른들은 단지 120명에 불과했다. 또, 장로도 한국인 목사도 없이 단지 몇 명의 설교자만이 존재하였으며, 자연스레 한 설교자가 30개 이상의 기독교 단체를 섬겨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넓은 지역의 새로운 또, 급격하게 발전하는 교회들에 대한 책임은 연위득 선교사를 비롯해 Welbon 선교사, Crothers 선교사의 책임이었다. 이들 지역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관리되었는데, 북서쪽은 Welbon 선교사가 담당하였으며 북동쪽은 Crothers 선교사가, 남쪽은 연위득 선교사가 맡아서 담당을 하였다. 이후, 연위득 선교사의 후임으로 Winn 선교사가 남쪽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Welbon, Crothers, Winn) 새로운 교회의 기틀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의 3년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연위득 선교사는 사실 한 것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냥 와서 얼마 되지도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있다가 다시 돌아간 것으로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당장 그는 안동 지역의 중요한 순간에 와서 복음의 명맥이 끊이지 않도록. 더 나아가 발전할 수 있도록 그 줄기를 유지시켜주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그가 감당하고 있던 일들이 Winn선교사에게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후 교회의 기틀을 형성하는 일에도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 제대로 된 설교자가 없던 때에 안동 남부 지방을 다니면서 설교를 하였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올바르게, 제대로 선포하는 일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연위득 선교사는 안동 지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료를 통해서 살펴보면 노래교회, 삼하 선교회 등을 세웠다. 따라서 안동 지역의 교회의 기틀이 잡히고, 세워지고, 성장하는데 있어서 연위득 선교사를 제하고서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ⅱ. 부인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한 연위득.
Renich 부인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안동 남부를 돌아다니며 선교활동과 계몽 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녀와 그의 남편인 연위득 선교사가 온 시기가 1910년도 9월이고 그녀가 죽은 해가 1910년임을 보아서 그녀의 사역은 그렇게 길지 못하고 최대로 길게 잡아서 고작 4개월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매우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머나먼 조선 땅까지 왔는데 고작 4개월 만에 죽어버리다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이렇게 시간의 양을 가지고 평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비록, 그녀의 죽음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우린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그렇게 이 낯선 타국 땅에 와서 그녀의 생명을 바침으로 우리나라에 복음이 꽃 피우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이러하 점은 이 레니크 부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져버린 선교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헌신이, 순교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어떤 책에는 연위득 선교사가 부인이 죽자 사직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있는 것처럼 나와 있는 책이 있다. 이는 마치 부인이 죽자 상심하여 맡겨진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오해하게 할 소지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부인이 거의 오자마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위득 선교사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한다. 당시, 지역의 요구에 따라 또, 시기의 요구를 따라 설교를 하며, 교회를 세우고, 훈련을 시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인간이 인생을 살면서 겪는 가장 큰 힘듦이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힘듦 가운데에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감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어진 자료의 한계로 인해서 그가 왜 본국으로 돌아갔는지 우린 알 수 없지만, 본국으로 돌아간 이유가 부인의 죽음 때문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며,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진 본분을 잃는 우리에게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을 하나님께로 두고 어느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ⅲ. 겸손함을 잃지 않고 현지인들을 섬길 줄 알았던 연위득 선교사.
경상노회의 제 1회 즉, 창립회 회의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외국선교사에 손안로 부해리 왕길지 심익순 맹의와 위철치 인로절 오월번 권찬영 연위득 거렬후 라대벽 맹호은 매견시 왕대인‘

이는 당시 노회 회원들의 명단을 이야기 한 것인데, 그 지역을 섬기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목록이다. 여기에 연위득 선교사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활발하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자료를 더 살펴보면 그에 관한 부분이 또 나온다.

‘안동목사 오월번 연위득 김영옥 진주목사 맹호은 라대벽 제씨의 출석치 못하는 편지 를 회장이 서기로 낭독하매 회중이 그 참석지 못함을 금번에 받기로 하니 그 출석치 못하는 연고가 불가한 줄로 알고 이후에는 다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서기에게 위임하여 편지하기를 동의하여 가결하다.’

이를 통해 다시 노회에 연위득 선교사는 불참하였으며, 그 불참의 이유를 노회에 제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노회는 이를 받아 불참을 인정하였으나, 그 이유가 부적절하기에 다음 번에는 불참하지 말고 참석하도록 권면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이제 막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들어온 상태라서 선교사들의 권위는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창립회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막 시작한 것이라 아무 것도 모르고 마냥 선교사의 말을 따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것이 처음 해보는 것이기에 방향을 잡고 나아가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이 때, 선교사가 그 방향을 잡아주었으리라고 우린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노회가, 노회의 구성원들이 선교사에게 불참한 것은 잘못이며 다음 번에는 참석하라고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 유추해볼 때, 당시 선교사들은 권위를 가지고 선교를 하며, 군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함께 섬기던 현지 목사들과 장로들을 동등한 관계에서 대하였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선교사들에게 그렇게 권면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사실, 어느 선교지라도 복음을 들고 들어간 선교사에 대한 의지가 큰 문젯거리가 되기 일쑤이다. 첫째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교사들이 현지의 목회자보다 낫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현지인들이 선교사를 너무 의지해서 그들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혹은, 그들의 말이 오히려 성경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문제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린 당시 현지 목회자들과 연위득을 포함한 선교사들과의 관계가 이렇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선교사들이 당시 현지 목회자들을 어떻게 섬기고 있었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비록 미숙하고 부족하지만 현지의 목회자들을 모두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노회의 권면을 통해서 드러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선교사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있지만, 찾을 수 있는 자료가 너무나 없었음을 밝힌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분명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상황들이 존재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의 연위득 선교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그런 존재였다. 이런 선교사들이 있기에 우리에게 복음이 들어올 수 있었으며, 꽃 피울 수 있었고, 이제 그들을 본받아 우리가 세상 속으로 주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작성일:2017-06-30 15:54:42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