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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McRae, Duncan Murdoch(1868-1949, CP) / McRae, Edith Frances Sutherland

닉네임
이하늘.
등록일
2017-06-30 15:57:15
조회수
2661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247_2015210186_이하늘.hwp (1426432 Byte)
I. 기본 사항

1. McRae, Duncan Murdoch(맥레/ 한국명: 마구례(馬求禮) )
2. 생몰연도: 1868. 11. 15~1949. 12. 1 캐나다 노바스코티아 케이프브레텐 출생
3. 출신 및 소속 : 캐나다 장로교 소속/ 할리팍스 달하우지대학 졸업, 장로교 신학대학 수료
4. 한국선교기간: 1898~1937년/ 1937년 은퇴 후 귀국하여 캐나다 노바스코티아 베드덱크에서 사망(1949.12.1.)


Ⅱ. 선교사 소개

1. 시작하는 말
맥레 선교사의 출생과 출신지는 앞의 기본사항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맥레 선교사는 어떻게 하여 캐나다에서 이 먼 이국 땅 한국까지 복음의 사명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을까? 이 맥레(마구례)선교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은 어떤 계획과 뜻을 보이시려고 하신 것인지를 연구해 보았다. 연구하는 내내 당시 한국 시대상황의 비극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 가운데 복음사역을 위해 헌신하였던 맥레 선교사를 통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선교사에 대한 내용들이 더 많이 알려지고 지금의 신앙인들이 노고를 알고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마음이 든다.

2. 그의 첫 발자취와 사역
맥레 선교사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대장장이일을 하던 사람이었따. 21세가 되던 해 1888년에 한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회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로 서원하게 된다. 그래서 이전에 중퇴 했던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가 졸업 후에 대학에 진학하고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모든 과정을 마치게 된다. 신학대학에 재학중이던 어느날 캐나다 장로교에 한국 사람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것은 한국에서 선교하던 매켄지 목사가 1895년에 갑작스레 별세하게 되어 같은 지역에 살고 있었던 서경조씨가 편지를 보낸 것인데 그것의 내용인 즉슨, 그의 후임자를 보내달라는 편지였던 것이다. 그 편지를 받아든 맥레 선교사는 바로 선교를 청원하게 되는데 재정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신학대학학생회에서 그의 경비를 부담하여 그를 파송하게 된다.


그는 1898년 9월 그리어슨, 푸트 선교사와 함께 캐나다 3총사로서 내한, 함경남도에서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그 후에 1900년에 뒤따라온 서더랜드 양과 결혼하였다. 선교사 부부는 함흥 신창리에 초가집을 마련하여 한복을 입고 살게 된다. 한국말을 빠르게 익혀 반용산 밑 일대의 수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선교 본부로 삼았다. 그는 많은 선교기관을 세우게 되는 것인데 교회와 사택과 학교, 병원 등 복음과 의료와 교육의 선교사의 최대의 3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는 이런 목회의 부분적인 요소뿐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사역을 하게 되는데 그는 토목, 건축, 축한, 농업을 지도하였고, 성격이 매우 용감하고 의분이 강하였다.
이러한 모습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맥레 선교사는 실천력이 강하고 힘이 장사여서 교인들과 무슨일이든 함께 했다. 바로 솔선수범의 지표가 되어 많은 성도들로 하여금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귀감이 되었다.
필자가 맥레 선교사의 사역을 연구하면서 그의 성품이나 그의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는 언제나 선교적 사명을 머릿속에서 놓치지 않았던 것 같다. 늘 집중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그의 선교 사역과 관련시켰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역의 일환으로 여기며 그것을 선교의 적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적용시켜 나갔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성도들의 신뢰를 얻는 귀한 자질이 되었던 것이다.

3. 그의 사상과 철학
맥레 선교사는 1903년 함흥지역의 선교부를 개척하면서 복음만을 전한 것이 아니었다. 성경 반 운동, 순회전도와 동시에 계몽사업을 활발히 하며 지역민들의 시대정신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교육 사업에도 힘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큰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원산대부흥 운동이었다. 이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의화단 운동을 통해 자신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었고, 하디선교사는 자신의 선교동기와 신앙상태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며 한국기독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적 허물과 교만, 특히 백인으로서 가졌던 우월감 등의 죄를 고백하였다. 그래서 이 기도회는 선교사들 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신앙체험을 겪을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체험은 선교사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던 문화적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선교방법론을 수정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인들에게는 피동적인 선교대상에서 스스로 자립적인 선교주체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성경공부반>


<기독교 여학교 학생들>
그런데 이 선교사의 사역가운데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일제 식민지 교육정책 아래에서 펼친 대안적 제도교육이다. 1930년대에 들어 신사참배문제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제 황인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기독교 교육기관에 강요할 때 또다시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학교를 문닫고 교육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교육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입장으로 설명하고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이런 캐나다 선교부의 입장은 미국 장로회 선교부와 호주 장로회 선교부와 일치되지 않는 것이었다. 캐나다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일부 반대가 있었다. 특히 필자가 연구한 맥레 선교사는 신사참배를 조상숭배와 천왕 신격화의 한 형태로 보고 신사에 참배하는 타협보다는 필요하다면 학교교육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캐나다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선교사를 연구하며 너무나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다 잘못된 일에 받아들이자고 할 때 맥레 선교사는 잘못된 것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성도들이나 한국인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진리를 선포할 수 있느냐는 입장이 너무나 감사했다.

그러나 캐나다 선교부는 분명 신사참배를 수용한 선교사들이 복음전도에 무관심했다고나 일제 식민지배를 허용했던 것은 아님을 다시 한 번 알아야 하긴 할 것이다. 그 가운데 충분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며 그래도 교육 사업을 통해 그들을 일깨우고자 했던 한국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 만큼은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Ⅲ. 사진 및 기타자료 (사진은 위의 사진 자료로 대체합니다.)

1. 활동지역
캐나다 선교사들이 최초로 선교했던 함경도 지역, 특히 맥레 선교사가 활동했던 함경도라는 지역은 어떤 땅이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팔도 총론”에서 함경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백두산의 큰 맥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하늘을 자른 듯이 끊어져서 령(領)이 되었다. 령 동쪽이 곧 함경도인데 옛 옥저의 지역이다. 남쪽으로는 천령이 한계이고, 동북쪽은 두만강이 한계이다. 남북 길이는 이천 리가 넘으나 동서로는 바다에 다가서 백리도 못된다.’

한국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밑에 험준한 산악지대로 펼쳐진 함경도는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중국과 러시아가 접하고 있다. 예부터 이 곳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포부가 크며 그 이상이 높았다. 비록 자연환경은 열악하고 추운 곳에 산다 할지라도, 그곳 사람들은 강직하고 뜨거운 열정이 넘쳤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론에서 함경도 사람들의 성격을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표현하였다. 진흙 밭에서 싸운 개의 모습에 비유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 곳 사람들은 힘든 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참고 견디며 반드시 뜻한 바를 이룬다는 의지력 있는 성경의 소유자들로 설명하고 있다. 산악지대가 지하자원은 풍부하지만 경작지가 협소하여 살림살이는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동해로 접한 지역들은 해산물 자원을 근거로 좀 여유가 있었으니 내륙으로 들어올수록 살림살이가 어려웠다. 이들은 버림받고 척박한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느 지역 사람보다 강인하고 진취적이었다. 억세고 강한 생명력을 갖고 새로운 내일을 창조하는 열린 미래의 개척의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 지역에 진정 복음으로 들려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선 팔도 중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척박한 땅, 함경도 그곳은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곳의 선교는 인간의 계획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종합평가
맥레 선교사는 지역의 특성과 지역 주민들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었고 지역 주민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간적인 모습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아마 맥레 선교사가 아마 그들에게 있어서 탁월한 지도자의 상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연구를 통해서 본 지역과 선교사의 사상이나 철학들이 복음 선교에 큰 적용점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준비됨을 보며 이것이야 말로 진정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음 사역. 필요하시다면 하나님이 적재적소에 배치시킴으로서 가장 탁월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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