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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Tipton, Samuel Powell(1888-?, NP) / Tipton, Vannie Knorr

닉네임
문종성
등록일
2017-06-30 16:01:51
조회수
2361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53_2015210160_문종성.hwp (1302528 Byte)
I. 기본사항

1. 생몰연도(출생 및 죽음 연고지)

S. P. Tipton : 1888년 8월 31일, Hernando, DeSoto County, Mississippi 출생
정확한 사망일과 장소는 알려지지 않음.
Vannie Knorr : 1888년 3월 27일, Sunbury, Northumberland County, Pennsylvania 출생
1960년 12월 14일, Albany, Alameda County, California 죽음

2. 학력 : 정보 없음

3. 경력

1914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충북 청주 선교부에 소속되어 의사면허, 재정문제로 1916 의료사업 시작
1917.12 청주 시내에 병원 마련하여 진료
1918 선교부의 재정지원이 원활하지 못하여 선교사직 사임
1년간 시베리아에서 적십자를 통한 봉사활동
1919 평북 선천 미동병원의 샤록스 원장의 건강 악화로 선천으로 이주하여,
1924년까지 미동병원장으로 활동, 부인은 간호사로 함께 의료선교
1924 건강 악화로 귀국

4. 가족사항 : Tipton, Vannie Knorr(부인; 1888-1960)
첫째, Helen Tipton, 1915년 9월 19일 한국 탄생
1970년 12월 22일, Mill Valley, Marin County, California 죽음
둘째, Mary Tipton(정보 없음)
셋째, Elizabeth Tipton, 1922년 4월 25일, Sunbury, Northumberland County, Pennsylvania 출생
2007 3월 24일, Linn County, Oregon 죽음
넷째, John Tipton(정보 없음)

5. 논저: 정보 없음

6. 참고문헌: <기백> 15권; 구미인조시록; 전휘집 18; KMYB; CMYB; HKMP, Ⅰ,Ⅱ.



II. 선교사 소개 : 팁톤(S. P. Tipton) & 베니 크노르(Vannie Knorr)

1. 한국에 도착한 푸른 눈의 의료 선교사

1914년 12월, 푸른 눈의 팁톤(S. P. Tipton)이 도착했다. 그 해는 전 세계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까닭이다. 세계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한제국 시대가 끝나고 1910년부터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까닭이다. 조선총독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긴 했지만 모든 관할은 일본에서부터 통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팁톤은 의료선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다.
처음 그가 배속된 곳은 충북 청주 선교부였다. 이곳에서 의료사업을 개척했는데 두 가지가 그의 사역을 발목 잡았다. 하나는 의사면허 및 재정문제였다. 때문에 의료 업무를 위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는 한국이 아닌 일본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때문에 1916년 1월까지 의료선교를 시작할 수 없었다. 그동안 정부는 새로운 정부 요구 사항을 준수해야했으며 팁톤 박사는 면허 시험을 위해 두 차례 도쿄를 방문했다.
면허를 딴 뒤 한국에 돌아온 팁톤은 거의 반 년 동안 무려 1,500건이 넘는 치료를 했다. 한국의 위생 상태가 워낙 좋지 않은 까닭도 있었지만 의료 시설 또한 낙후되었다. 팁톤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수급보다 제반 시스템을 정착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를 비롯한 여러 의료진들이 노력을 기울인 결과 1916년에 방송국에서 도심지의 진료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래서 다음 해에 1500달러의 비용으로 교회 부지가 확보되고 병원이 세워졌다. 그 해에 한 남자가 발이 아픈 자기 부인을 병원으로 데려왔다. 부인의 치료를 위해 남편은 병원까지 5일을 걸려 왔던 것이다. 그녀는 발을 수술했고, 감사하게도 다시 건강을 회복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환자였던 그녀는 중간 교리 문답을 읽고, 배웠으며 암기했다.
도심 병원은 1917년 12월에 청주 시내에 병원을 마련하여 문을 열었다. 1918년 6월 보고서에 의하면 총 4천명의 환자가 치료를 받았다.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나 병원 건물은 연료가 부족하여 연중 내내 폐쇄되었다.
이때쯤 무리한 업무 등으로 팁톤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게 되었다. 의료 활동을 수행하기에는 기금이 부족했고, 이로 인해 팁톤은 사임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의료활동이 필요했기에 윗선에서는 충주에 남아 있기를 부탁했다.
1918-19년 겨울에 팁톤은 선교부의 다른 의료진들과 함께 시베리아에서 적십자사를 위해 몇 달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1919년 연례 회의에서 팁톤은 선천에 발령되어 그곳에서 의료 활동을 지속했다.

2. 덩컨병원(Duncan Hospital)에서의 활동과 전도 사역

덩컨 병원은 팁톤이 내한해서 잠시 머물며 의료 선교를 한 곳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의료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일본 정부에서 허가하는 의료면허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팁톤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텅컨 병원이 있던 청주는 북장로회의 선교구역으로 발전하였다. 중부지방 선교의 중심지로 돋보여 1902년부터 그 선교부 개설이 모색되었고, 1905년 북장로회의 밀러(F. S. Miller) 선교사 부부가 상주하면서 선교활동이 급진전하였다. 마침내 1908년에 독립선교부로 확정되었고, 홀(E. H. Hall), 맥리어(H. McLear), 카긴(E. Kagin) 선교사 등이 청주주재 선교사로 활동했다. 한편 1904년에 청주시내 최초의 교회인 청주제일교회(당시 청주읍교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에 농촌동에 성동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20년 송정동에 서청주교회, 1921년 봉명동에 중앙교회, 봉명교회, 1923년 용암교회, 1926년 우암동에 우암교회가 계속 설립되어 장로교 중심도시로서 교세성장을 기했다.
또한 1907년 대구에서 활동하던 북장로회 눌(M. M. Null) 의사가 도래하면서 본격적인 의료선교사업이 시작되었고, 1912년에는 청주진료소의 건물도 지었다. 또한 퍼비안스(W. C. Purviance) 의사, 팁톤(S. P. Tipton) 의사 부부 등이 계속적인 의료 활동을 폈다. 그밖에 교회 부설 학교를 개설하여 교육선교에도 큰 성과를 올렸으며 유치원, 주일학교 등의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청주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한 먼저 덩컨 병원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겠다. 덩컨 병원이 있는 충북 청주는 1907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 눌(M. M. Null)이 부임하여 의료사업을 전개함으로써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 개척자였던 눌이 건강 악화로 귀국한 후 1908년 8월 퍼비안스(W. C. Purviance)가 청주로 부임하여 의료사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1909년 뉴욕의 덩컨(J. P. Duncan)이 기부한 금액으로 새 병원을 위한 건축을 시작하였고, 1912년 7월 20일 덩컨병원(Duncan Hospital)이 준공되었다. 20병상 규모로 우물과 수도시설, 수위실을 갖춘 병원이었다.
퍼비안스가 1913년 귀국한 후 1914년 팁톤(S. P. Tipton)이 내한하였지만 일본정부로부터 의사면허를 얻기 위해 일본에 시험 여행을 하는 관계로 1916년 1월부터 병원에서 진료 업무를 개시할 수 있었다. 1919년에 팁톤이 선천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 후임자인 말콤슨(O. K. Malcolmson)이 부임한 때는 1922년이었다. 그는 그해 11월 소민의원(蘇民醫院)을 개원하다가 1924년 평양으로 임지가 변경되어 청주를 떠났다. 소민의원은 1929년 로우(D. S. Lowe)가 부임할 때까지 의사가 부재한 채 운영되었다. 로우는 1941년 2월 강제 소환될 때까지 소민병원을 운영하였다. 여기까지가 덩컨 병원의 역사다.
팁톤은 의료 활동을 위한 면허를 발급받기 전 전도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15년 역시 의료 선교를 위해 쉐플리 부부가 한국에 도착했다. 쉐플리 부부는 에비슨 박사 부부와 함께 지내며 도움을 받았는데, 부임 첫 해 한국말을 익히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주로 한국인과 어떻게 인사를 나누고 필요한 것을 부탁하고 지시하는지에 관한 일상회화였다. 쉐플리가 치과진료와 교육을 계획하고 하는 동안, 루스 엘 쉐플리 부인은 유치원과 부녀자 교실에서 교육을 하거나, 외국인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런데 쉐플리는 12월 초부터 몸이 점점 약해졌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휴가로 3일 동안 청주를 여행했다. 그곳에서 쉐플리는 동료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팁톤, 밀러와 함께 전도지를 배포하며 시골로 산으로 수 마일을 걸었다. 당시 의료 활동에 제약이 있었던 팁톤은 밀러와 쉐플리와 함께한 전도 여행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셋은 모두 즐거워했고 쉐플리 역시 다시 건강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1916년 3월 초에는 발열로 눕고 말았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루스 엘 부인이 남편을 지극정성 돌보았고, 4월 1일 새학기부터는 모든 일을 정상적으로 수행했다.

이때 쯤 팁톤은 미국 장로교인 에 글을 썼다. "의학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산물이다. 우리는 비기독교인 땅에 대해 그들에게 기독교의 다른 부수적인 것들 혹은 교육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들의 병을 고쳐 줄 수 있고, 의학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서양 의학의 발전은 하나님에 대한 증인으로서 공유되어야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의 유익을 얻어야 한다.

3. 미동병원(美東病院)에서의 활동

1901년 평북 선천에서 의료사업은 당시 미동병원의 원장이던 북장로교 선교사 샤록스(A. M. Sharrocks)에 의해 시작되었다. 샤록스는 이곳에 와서 1901년 11월 작은 초가집을 구입하여 임시 진료소로 사용하였다. 1905년 11월 샌프란시스코 청년회에서 보낸 기금으로 새 병원인 미동병원(In His Name Hospital)이 준공되었다. 이곳에서 팁톤 또한 의료사역을 담당했다. 그렇다면 잠시 미동병원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1900년 선천을 방문한 바 있는 샤록스는 이듬해 휘트모어(N. C. Whittemore)와 함께 선천에 이주함으로 선천 선교부를 개설하게 되었다. 그리고 1901년 11월 25일 시약소의 형태로 병원을 정식 개설하였다. 병원을 개설하자마자 콜레라가 북부지방을 휩쓸어 샤록스는 광범위한 지역을 순회하며 진료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샤록스 자신이 장티푸스에 걸린데다 주문한 약품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1902년에는 겨우 4개월 가량만 진료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1100명, 이듬해 3500명 이상을 치료하는 성과를 보였다.
1904-1905년에 걸친 노일전쟁 중에는 부상당한 병사들이 이 병원에서 치료받기도 했다. 늘어나는 환자수에 비해 진료 시설은 보잘 것 없었다. 이에 새로운 병원 건축을 추진하여 1905년 현대식 건물을 마련하였다. 이 건축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노회의 청년들은 2500달러를 모급해 보내오기도 했다. 새로 건축된 병원 안에는 목욕탕도 있어 일반인들에게도 사용을 허락했으며 새로운 의료기구를 도입하여 지역사회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샤록스는 병원 내에 의료원 양성소를 설치하여 한국인 의사를 양성하였는데 1910년 최초로 5명의 의사가 배출되어 평북, 평남, 황해도 지역에 파송되었다. 또한 1909년부터 오하이오주에 거주하고 있는 휘트모어의 보조로 이 병원에 간호원이 파송되게 되었는데 초대 간호원으로 온 헬스트롬(H. Helstrom) 양을 비롯하여 1913년에 샌더즈(E. Sanders) 양, 1916년에 잉거슨(V. F. Ingerson) 양이 각각 파송되어 왔다. 특히 잉거슨은 간호원 양성소를 설치하고 한국인 간호원 양성에 주력하였다.
북장로회 선교부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미동병원은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며 1913년경부터 또 다시 새로운 건물 건축이 요구되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아키볼드(H. T. Achibald) 부인이 그녀의 어머니를 기념하여 병원 건축기금을 보내와 1915년 2층 벽돌로 된 새 건물을 마련하였다. 10여년에 걸쳐 12만 8천여명을 치료한 그 전 건물은 약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천 뿐 아니라 인근 정주, 곽산, 철산, 구성 멀리는 강계에서까지 부상자들이 미동병원에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강계에서 후송되어 온 탁창국, 김명하는 치료 도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게다가 창설자로 미동병원을 이끌어 오던 샤록스가 그해 가을 병으로 귀국하였다가 크리스마스 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병원의 한국인 직원들은 그를 기념하는 비석을 병원 입구에 건립하였다.
다행히 병원에는 샤록스가 귀국하기 전 청주로부터 옮겨 온 팁톤(S. P. Tipton)이 있어 그가 병원을 관리하게 되었다. 팁톤은 이에 응하여 선천 선교부에 배속되었다. 그는 1924년 건강 악화로 귀국하기까지 미동병원장으로 의료선교에 종사하였다. 부인인 크노르 여사도 간호원으로 남편을 도와 한국에서 함께 의료선교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1924년 건강 악화로 귀국하였고 대신 1923년 선천에서 온 키솜(W. H. Chisolm)이 병원장이 되어 병원을 꾸려 나갔다. 그리고 팁톤은 1924년 10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작성일:2017-06-30 16:01:51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