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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Edmunds, Margaret J.(1871-1945, M)

닉네임
3학년4반김민준
등록일
2019-12-13 11:34:33
조회수
935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B017_김민준.pdf (471649 Byte)
내한선교사_3-4_B017_김민준


Edmunds Margaret J(에드먼즈 / 미국 / M)


1. 기본사항

1. 이름 : Edmunds Margaret J / 에드먼즈
2. 생몰연도 : 1871 07. 25 ~ 1945. 10. 12
3. 출신 및 소속 : 임명 : 미국, 북감리회 해외여자 선교부 / 후원 : 톨레도 엡워드감리교회
4. 출생 : 1871년 7월 25일 캐나다 온타리오 스미즈 폴즈

5. 학력 : 1894년 12월 미시건대학교 제2회 간호원양성학교 졸업 Ibid. 185

6. 가족사항
: Noah Edmunds(아버지) , Mary Rose(어머니), Harrison(남편)
, Margaret Selina(딸, 1909-91), Willam Charles(아들, 1911-85)

7. 생애 도표 Ibid. 185-225


1871. 07. 25 캐나다 온타리오 스미즈 폴즈 출생
1894. 12 미시건대학교 제2회 간호원 양성학교 졸업
1895 ~ 1902 오하이오 주 간호원으로 고용, 도시 빈민 환자를 돌보는 방문 간호원
1902 미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
1902. 04 보구여관의 초대 간호원장 임명
1902. 12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 설립(커를러 의사의 도움)
1903 한국 최초로 조산원, 간호원 후보자 2명 양성
1904 교육과정 마련
1904 간호복, 규칙, ‘간호원’ 용어 제정, 간호복 재단 및 양재
1905 감리회와 장로회의 연합 간호원 양성학교 계획
1906 쉴즈(E. L Shields)에 의해 간호원 양성사업 시작
1906. 01. 25 첫 예모식(가관식)
1907 부인병원과 세브란스병원에서 정식 간호교육 실시
1907. 08 군대해산 전투와 구급간호
1908 해리슨(Harrison)과 결혼/ 첫 한글 간호 교과서의 발간
1908 대한졸업간호원회 창립
1908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 제1회 졸업(김마르다, 이그레이스)
1909, 1911 목포에서 딸 셀리나, 아들 찰스 출생
1911 보구여관 간호양성학교에서 ‘간호 윤리’ 가르침
1923 조선간호부회를 위해 헌신봉사
1928, 08 은퇴 (26년간 한국 간호 인력 양성과 의료 봉사를 위해 헌신)
1928 미국 켄터키로 돌아감(남편 사망으로 인해서 은퇴 결심)
1928 The Mustard Seed(한국 간호 교육 경험 내용)을 남장로회 선교부 출판
1945 10. 12 사망(아들의 결혼과 대한민국 광복을 보고 돌아가심)

2. 선교사 소개

1. 어린시절의 Margaret Edmunds
에드먼즈는 어머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어려운 환경에서 어떤 시점에 간호원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1854-55년 크리미아 전쟁 때 흑해의 야전 병원에서 그녀의 간호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전율을 느꼈다. 어느 날, 이웃 집에 사는 한 사람이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그녀는 그 환자를 밤새 돌보겠다고 자원했다. 에드먼즈의 이런 성장 배경은 이후 오하이오에서 도시 빈민 간호 사역과 한국 간호 선교의 자산이 되었다. 에드먼즈는 국가, 인종, 지역, 계층의 차이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2. 오하이오 톨레도에서 도시 빈민 간호, 1895-1902년
에드먼즈는 1894년 12월 미시건대학교 간호양성학교를 제2회로 졸업했다. 이후 1895년 미시건에서 1시간 거리인 오하이오 주 톨레도 시의 킹스도터즈 조합의 간호원으로 고용되어 도시 빈민 환자를 돌보는 방문 간호원이 되었다. 이 조직은 여집사(deaconess)의 일환으로 지역 사회의 어린이와 산모와 빈민의 건강을 도모했다. 에드먼즈는 간호사업이 확장되는 톨레도에서 지도력과 사회성이 있고 책임을 다하는 유능한 간호원으로 인정 받았다. 톨레도에서의 사역은 미래 한국에서 간호원 사역에 대한 유익한 준비가 되었다.


3. 미국에서 한국으로
Margaret Edmunds은 Miching Univ. 간호학교를 나온 후, 톨레도의 엡워스 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에서도 활동적이었다. 하루는 한국에서 온 선교사 커틀러(Mary M. Cutler)의사가 서울에서 한국인 소녀들을 간호원으로 훈련시킬 간호원장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심사숙고 후, 그는 한국에 가기로 결정하고 북감리회 해외여자선교회에서 지원서를 보냈다. 그리고 1902년 미국 감리교 부인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톨레도 엡워드감리교회의 후원과 뉴욕 북감리회 해외여자선교부의 임명과 지원을 받은 에드먼즈는 1902년 9월 3일 뉴욕항에서 영국 런던 행 기선을 탔다. 영국에서 수에즈 운하를 거쳐 한국에 갈 계획이었다. 이미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커틀러 의사와 홀 의사와 동행하게 되어 한국과 의료사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
결론적으로 1903년 3월 18일 서울에 도착했다. 에드먼즈의 6개월간의 여행은 당시 일반 선교사들의 태평양로 여행에 비해 4배이상 걸린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여행으로 그는 커틀러에게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해서 더욱 배울 수 있었고, 한국 사역을 빨리 시작할 수 있었으며, 영국 간호와 나이팅게일 간호이론을 더 풍성하게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4. 초대 보구여관 원장 에드먼즈
그는 내한한 해(1903) 보구여관에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설립하고 1903~1908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했다. 새로 시작하는 분야이므로 일은 매우 어려웠으나 그는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조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라는 점에 두고 훌륭한 간호원 양성에 혼신을 다했다.

5. 본격적인 의료 사역
교육과정을 6년으로 정한 탓에, 6년간 오랜 수습 기간 동안 독신으로 남아 있어야 했기에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주로 젊은 과부가 좋은 학생이 될 수 있었다.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가 첫 번째 학생이었다. 그 둘은 장애인이었지만 또한 보구여관이라는 신앙공동체 속에서 훌륭하게 성장하게 된다. 이후 1904년에 에드먼즈는 의료활동에 불편한 한복 대신에 한국적인 간호복을 재단하고 양재했다. 짧은 저고리 대신 깃이 길게 내려가는 상의에 흰 치마가 간호복이었다. 이어 규칙과 규정을 제정함으로써 간호원의 임무를 분명했다. 또한 명칭도 ‘간호원’이라는 명칭을 처음 만들어서 사용하게 된다.
이후 1904년에 교육과정을 마련했고, 하루 12시간의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낮 근무는 오전8시 기도회와 성경 공부, 암송, 환자 투약과 10시 간식, 환자 돌보기, 점심, 오후 환자 돌보기와 1시간 휴식, 5시 저녁 식사, 환자 돌보기, 7시 30분 강의 수업(없는 날도 많음)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905년 8월에는 러일 전쟁 기간 일본 적십자사 간호부의 활약에서 보듯 일본의 간호 교육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1905년 여름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에드먼즈는 두 명의 학생을 자비 부담으로 일본에 데려가 현장 시찰을 통한 교육을 실시했다. 그 외에도 그는 1908년 첫 한글 간호 교과서를 발간하고, 대한졸업간호원회를 창립했으며, 한국간호에 선구자 역할을 했다.

6. 에드먼즈의 이후 생애, 1908~45년
에드먼즈 간호원장은 1908년 9월 2일 고향 캐나다 온타리오 페트롤레아에서 남장로회 선교사 해리슨 목사와 결혼하고 선교사의 아내로 1928년 은퇴할때까지 전라도 목포(1908-12)와 군산(1915-28)에서 봉사했다. 목포에서 딸 셀리와 아들 찰스를 낳았는데, 이들은 나중에 평양 외국인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에드먼즈는 전라도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간호 발전을 위해서 계속 노력했다.
1911년 초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에서 간호 윤리’를 가르쳤다. 또한 군산으로 옮긴 후에는 1910년부터 간호원을 교육한 군산 구암예수병원 간호원 양성학교를 위해서도 일정하게 도왔다. 1923년 조직된 조선간호부회를 위해서도 도왔다.
1928년 남편이 건강을 잃자 은퇴하고 미국 켄터키로 돌아갔다. 1928년 에드먼즈는 한국 간호 교육 경험을 내용으로 한 소책사 The Mustard Seed를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출판했다. 25년 전에 한국에 뿌린 작은 씨앗이 자라 풍성하게 추수하게되어 여자 간호원들과 의사들이 활동한다는 내용이었다. 소책자에는 보구여관에서 치료한 환자였던 유각경(유성준의 딸) 부인이 보낸 감사의 편지도 들어있다.
1928년 9월 남편이 사망하자, 아들이 다니는 대학 근처로 이사하여 노스캐롤라이나 무어스빌에서 거주했다. 1945년 10월 12일 사망하기 전 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보았으며 한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것을 보았다.
작성일:2019-12-13 11:34:33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