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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10 / Jackson Carrie Una

닉네임
윤선교
등록일
2020-07-02 13:57:36
조회수
631
첨부파일
 내한선교사 3-3반 B010번 윤선교 2018210170.pdf (8449292 Byte)
내한선교사 Jackson Carrie Un

I. 기본사항

1. 이름: Jackson, Carrie Una, (한국 이름: 차선)
2. 생몰연도: 1883.8.27.-1962.9.4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감리교회
4. 한국선교기간: 1911-1940, 1947-1948
5. 학력
1903년 테네시주 잭슨시의 여자전문학교 졸업
1909-1910년 켄터키주 말빈대학에서 음악 전고
1910년 스카릿신학교에서 1년간 신학 수업
시카고대학, 피바디대학, 스카릿대학에서 수학(안식년)
6. 경력
1911.8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원산 루씨(누씨)여학교에서 음악 강의, 춘천지방 여선교회 사업
1922 배화여학교 교장으로 1년간 봉직
1931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1934 교장 및 루씨유치원장으로 5년간 봉직
1940 귀국
1947 재내한하여 활동
1948 건강악화로 귀국
1950 선교사직에서 은퇴
7. 가족사항
차선 선교사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아이를 두고 있지 않았다.


II. 선교사 소개

1. 출생 및 성장
Jackson, Carrie Una의 한국 이름은 차선이다. 그녀는 1883년 8월 27일 미국 켄터키주 아링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테네시주 잭슨시에 있는 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음악 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전공을 살리고자, 1909-1910년 켄터키주 말빈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게 된다. 또한 선교사 파송을 위해 1910년 스카릿 신학교에 입학하여 약 1년간 신학수업을 받게 된다.

2.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차선 선교사는 미국 남감리교로부터 파송 받아 조선 땅에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그녀의 선교 사역은 그녀가 파송 받던 해에 8월, 원산에 있는 루씨(누씨) 여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또한 춘천지방에서 농촌 사업 진행하였다. 춘천 선교를 개척한 무스 부부는 1911년 개성으로 옮겨갔고 대신 힛치 부부와 춘천 선교를 주관하면서 여선교사들 에드워즈, 노이스, 잭슨, 핸슨, 스미드, 올리버 등이 계속해서 여성 선교와 사업을 주관한 것으로 알려진다. 차선 선교사는 1922년 배화여학교 6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지만, 약 1년 뒤, 그녀는 다시 춘전 지방으로 돌아가 농촌 사업을 계속하였다.
배화학교는 이화학교 다음으로 조선 땅에 세워진 근대식 여성학교였다. 배화 학교는 남감리교회의 여선교부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학교다. 당시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켐벨 부인은 여선교부의 임명을 받고 조선으로 파송 받게 되었다. 조선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켐벨 선교사는 1898년 10월 2일 서울 시내 내자동 75번지에서 다섯 명의 여아를 데리고 교육을 시작하였다. 처음 교명은 케로니라 학당이라 불렸는데, 이는 미국의 남케로리나의 소년 소녀들이 약간의 보조금을 보내 준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켐벨 부인이 이 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교회와 사회를 이끌 인물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여성이 여성을 지도할만한 인물이 적었다. 당시 부인의 이런 교육 사상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이화를 창설한 스크랜튼의 교육사상은 단지 여성교육을 선교의 수단이다 방편에 두었다면, 켐벨 부인의 교육은 교계와 사회 전반의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매우 폭넓은 교육관을 보여주고 있다.
배화의 이런 교육사상은 일본의 여성교육과도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일본의 여성교육의 목적은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교육이 인의 양처가 되고, 인의 현모가 되며, 일가를 정리하고, 자녀를 훈계하고 양육하는데 필요한 기질과 재능을 길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는 사회의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배화학교의 교육사상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아마도 이는 조선 사회현실이 여전히 어두웠기에 생긴 차이로 보인다.
1903년에는 제래 서당재를 중학 예비과로 개정하고, 명칭도 케로라이나 학당에서 배화학당으로 바꾸면서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게 되었다. 이후 4년제와 중학과과 소학과를 병설했다. 1912년에는 학교를 확장해 충실케 하고, 12월 16일부로 학 측 변경을 청하여 다음해 5월 15일 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중학과를 고등과로, 소학과를 보통과로 개칭한다. 1917년 4월 1일에 유치원을 부설했고 8월 3일 예비과를 폐지하였다.
당시 일본은 헌병통치와 무력통치로 조선의 민족성을 없애고 일본에 동화 시키려 했다. 그러나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월 1일 독립운동은 일본의 대 조선 통치 노선을 변경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일본은 무력(헌병)통치를 청산하고 문화통치로 조선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것의 일환으로 1911년 8월 데라우치가 발표했던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1922년 2월 4일 ‘신교육령’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당시 배화학당에 교장으로 있던 차선 선교사는 이 ‘신교육령’에 맞춰 학칙을 개정하였다. 기존의 4년제 보통과를 6년제로 변경하였고, 고등과는 기존대로 4년제로 유지하였다. 그 결과 1922년 4월 7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학교가 발전하면서 강부인은 좀 더 체계적으로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서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적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의 10년간의 선교 경험이 그녀로 하여금 한국여성을 교육함에 있어서 동양적인 규례와 풍속을 존중하면서 조선의 가정과 형편에 맞는 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배화학당은 매일 오후 10시에 기도회가 있는데, 여기서 반드시 학생들은 성경을 지정하여 요한복음이나 사도행전으로 정하고 한 학생으로 10절식 외우도록 했다. 주일이면 현 종교교회로 인솔하여 학생들에게 쓰개치마를 쓰게 한 후 나와 예배에 참여 했고 삼일이면 자유로 참여토록 했다. 모두가 전근대적 시대여서 이화와 별 다름이 없었다. 교과과목은 거의 다 성경이었고, 한 주간에 성경시간이 6시간이었다. 당시 공부한 학생들은 거의 신앙이 독실했고, 오늘의 각 교회에서 중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배화학당은 우리나라 신교육이 처음 학교로서 민족과 교제의 여성을 지도하는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그 끼친 공로는 다채롭다. 즉 한국여성을 이끌어 주는 현모양처요 지도자요, 선생이며, 복음의 사자들이었다.
1909년 4월 27일 다시 이 학교는 학교명을 배화여학교라고 변경하였다. 또한 4년제의 중학과와 소학과를 병설하였다. 1912년에는 학교를 확장하였으며, 12월 16일부로 학측변경을 신청하여 다음해인 1910년 5월 15일에 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중학과를 고등과로, 소학과를 보통과로 개칭하게 되었다. 1915년 4월에는 주민들의 요구로 유치원를 설립하려 했지만, 교사의 부족으로 소아예비과를 부설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1일에서야 유치원을 부설하게 되었고, 8월 3일에는 예비과를 폐지하였다.
1920년에 조직된 남감리회 여선교회는 대회를 조직한 후 체계적 임원을 구성하고 활발한 선교사업을 추진해나간다. 1924년 서울대화 여자관에서 모인 임원 및 조직으로 차선은 자선사업 관리자를 맡았다. 그 사업은 국내 선교와 국외 선교사업으로 나눠지는데, 1926년에 잭슨은 선교(서적) 사업관리자로 중앙임원을 맡아 여선교회에서 활동을 했다. 여선교회 조직은 사경회, 지방회 등을 통해 정기적으로 만났으며 종교, 신앙 조직으로 이뤄져 항일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여선교회 활동 중에는 예배와 교육 외에 사회적 관심사를 놓고 토론회를 가진 것으로 보아 이미 여선교회는 여성들의 대사회적 민족운동 구심점이 되어갔고, 이러한 민족운동사적 기능은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차선 선교사를 파견한 남감리교회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남감리교회의 여성 사업은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강부인(켐벨)이 조선에 오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908년 1월 16일 개성 성경 학원에서는 왕래 목사와 캐롤양의 주선으로 십작회라는 여성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의 목적은 보호여회처럼 회원들의 수양과 친목을 기반으로 했지만, 더 나아가 전체 지방의 선교 및 여성의 문제점들을 공동 토론하고 추진하는 성격을 지닌 조직이었다.
개성에서 회를 조직한지 5년 만인 1913년에는 좀 더 발전된 여선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전도부인이었던 김한나씨의 사회로 남감리회에서는 처음으로 여선교회다운 여선교회가 조직된 것이었다. 이는 원장 쿠퍼의 수고의 열매였던 것이다. 이 회의 목젖ㄱ은 원산 지방 내에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복을 전하고 교회가 없는 곳에 전도부인을 파송하여 선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회조직 운동은 계속 다른 지방에서도 실시되어, 춘천, 개성, 서울 등지에서도 진행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기존의 선교사들의 사역의 틀에서 벗어나, ‘오로지 우리 사업은 우리 손으로’라는 슬로건 아래서 우리 여성들이 직접 나서서 회를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되고 있다.
1920년 여선교회는 전국 여선교회 연합기구를 탄생시켰다. 개성, 춘천, 경성, 원산 등 4 지방이 연합해서 대회를 열고 창립총회를 열게 된 것이다. 이 모임은 종교 예배당에서 모였으며, 춘천 지방 6명, 개성 지방 35명, 경성 지방 12명, 원산 지방 23명으로 총 82명이 모이게 되었다. 이 제1회 여성선교회 전국 대회 때 회장에 최나오미, 부회장에 어윤회, 총무에 마의시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이 대회는 1921년 5월 제2회 여성선교회 전국대회, 1922년 5월 제3회 여선선교회 전국대회, 1923년 5월 제4회 여선선교회 전국대회, 그리고 1924년 제5회 여성선교회 전국대회로 이어지게 되면서 점차 조직화 되어갔다. 자료를 통해, 이 조직에서 Jackson, Carrie Una, 곧 차선 선교사는 ‘자선사업 관리자’로 섬기고 있었다.
1920년대 들어오면서 남감리교의 여선교부는 이전과는 다른 선교적 특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감리교 여선교부는 보다 다각적인 방법으로 선교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지역을 순행하면서 성경반을 만들어 성경지식을 보급하는 것이 주된 선교방식이었다. 구체적으로 원산지방, 서울지방, 송도지방, 춘천지방 4곳에 지방별로 센터를 만들고 여기서 여성을 위한 여러 가지 부문을 두고 이들을 선교와 연관을 가지고서 실시하는 정책이었다. 서울의 사회복음센터(Social Evangelical Center)가 대표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 센터 안에는 교육부, 어린이공중위생, 사회사업, 선교부로 구성되었다.
1920년대의 선교는 이와 같이 일종의 문화선교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선교 옛 모습 탈피하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각적인 선교를 모색한 것으로 이해된다. 시대가 흐르면서 여성들의 수준도 달라지게 되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선교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특히 남감리교 선교부는 이런 점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실천에 곧바로 적용하데 앞장섰던 교단이었다.
이러한 선교 정책 가운데 원산 지방의 선교 활동을 보게 되면, 원산 지방에도 개성과 서울 더불어 다양한 선교패턴을 가지고 다각적인 선교 활동을 벌리고 있었다. 보혜여자관, 겨울성경학교, 전도부인, 야간학교가 그것이다. 보혜여자관은 미스쿠퍼가 시작한 것으로서 다각적 선교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선교 정책의 하나이다. 보혜여자관은 문자 그대로 ‘넓고 풍성한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다. 원산 지역의 여성을 위한 복음센터이다. 겨울성경학교는 보혜여자관에서 겨울동안 진행되는 과정이었다. 전도부인, 평신도 요원, 기타 성경지식을 요구하는 여성을 만들기 위한 훈련과정이었다. 또한 야간학교를 개설하여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할 다리를 놓게 되었다.
이 가운데 전도부인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여전도사로서, 영어로는 Bible Women으로 불렸다. 전도부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배경에는,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도부인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엄격한 내외법이 있었기에, 여선교사들이 한국여성에게 복음을 전하려함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전도부인제도였던 것이다. 전도부인은 성경책을 들고 자유롭게 각 가정을 출입하면서 한국 여성들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초기 전도부인은 전도와 권서의 역할을 담당했으나, 1916년에서 1919년 사이에 어간이 되면 전도와 권서의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전도부인은 전도에만 충실하게 된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여성의 출현과 여자유학생의 귀국 등으로 운동의 중심 세력이 일반 기독교 여성 중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 중심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즉, 전도부인, 일반 기독교 여성, 기독여학교 여성들이 교회를 거점으로 1910년대 여성 운동을 담당했으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 지식인들이 출현하여 이들 중심으로 교회에서만이 아닌 사회에서도 여성운동단체를 조직하여 여성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남감리교 여선교부가 활발히 활동하던 원산 지역에서 Jackson, Carrie Una, 곧 차선 선교도 여선교사로서 충실히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차선 선교사는 1931년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차선 선교사는 그곳에서 2년간 교수하다가, 1934년 같은 학교에서 교장으로 5년간 시무하게 된다.
루씨여학교는 여성을 위한 학교로 기숙학교로 설립되었다. 이 학교 건축비는 미국 북캐롤라이나 여선교회 회장 루시 커닝햄이 보조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루씨여학교로 지었다. 이 학교의 교육목표는 고등보통교육을 실시함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게 하며 부덕의 함양과 사회의 봉사자를 양육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당시 학교 시설로는 가사과 시슬십, 이화학 실험실, 지리와 역사 시간 등을 위한 특별실, 표본실, 음악관, 원예 실습지 등을 완비하여 전국적으로 볼 때에도 뛰어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3. 귀국 이후
차선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면서 안식년으로 귀국할 때마다 학업을 계속하여 시카고 대학 피바디 대학, 스카릿 대학에서 수학했다. 1940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에 본국으로 건너갔다가 귀환하지 못했고, 해방 후 1947년 다시 한국에 나왔다가 건강 악화 문제로 이듬해 귀국하였다. 차선 선교사는 1950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였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V. 참고문헌

단행본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서울: 기독교문사, 1984)

김세환, 『배화60년사』 (배화여자중⋅고등학교, 1958)

김홍수, 『내한 선교사 총람(수정 중보판)』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윤정란,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역사』 (서울: 국학자료원, 2003)

이만열, 『한국교회 전도부인 자료집』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장병욱, 『한국감리교여성사』, (서울: 성광문화사, 1979), 217-218

2. 웹사이트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96277412/carrie-una-jackson

https://www.geni.com/people/Carrie-Jackson/6000000005367681139
작성일:2020-07-02 13:57:36 220.117.1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