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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36 / Brown, George Thompson (미국, SP) / Brown, Mardia Alexander Hopper (미국, SP)

닉네임
배영운
등록일
2020-07-02 15:49:46
조회수
679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36_배영운.hwp (6217216 Byte)
Ⅰ. 기본사항
이름: Brown, George Thompson(부명광)

1. 생몰연도: 1921.4.30. - 2014.1.21.
2. 출신 및 소속: 미국 / 남장로교
3. 한국 선교 기간: 1952-1973년 (1958년은 안식년으로 인한 미국 행)
4. 연표:
1921. 4. 30 중국 장시성 쿠링에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의 둘째 아들로 출생
평양 외국인 학교 졸업
1942 미국 데이빗슨 대학(B.A.)
1942-1945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육군 통신대 장교로 복무.
1949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B.D.)
1950 프린스턴신학교(Th.M.)
1950-1951 노스캐롤라이나 게스토니아에 있는 애덤스 메모리얼 린우드
장로교회에서 목사로 2년 동안 섬김
1952 부인 마리아 사모와 함께 미국남장로교 총회 세계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 받은 후 목포와 광주 등지에서 선교사역
광주성경학원 원장, 전남대학교 영어성경반 출강
1955. 3. 1 광주성경학원을 호남성경학원으로 개칭, 원장 역임
1958 안식년으로 인한 미국으로 귀국
1959 한국 재내한
1961-1967 호남신학원, 호남신학교 원장, 교장 역임
1961. 1. 10 순천 매산신학교, 광주야간신학교, 호남성경학원을 통합해
호남신학원 설립
1961. 4. 11 호남신학원의 초대 원장으로 취임
1963. 5. 21 호남신학교로 개칭하여 초대 교장에 취임
1963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Th.D.) 학위 취득
1967 미국 남장로교 총회 세계 선교부 아세아 총무 봉직
1967-1973 한국 장로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강의
1971. 1. 18 호남신학교 초대 이사장
1973 미국 애틀랜타로 귀국
1973-1981 미국 남장로교 총회 국제선교부 총무 역임
1981-1989 애틀랜타의 컬럼비아 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수 역임
2011. 2. 8 호남신학대학교 명예신학박사 1호 수여
2014. 1. 21 스톤마운틴의 파크스프링스 양로원에서 파킨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하여 향년 93세로 별세.
5. 가족사항: Brown, Mardia Alexander Hopper (부인) 및 5자녀
- 생몰연도: 1922.11.22. - 2018.4.10. 미국 남장로교회 하퍼 선교사의 딸
- 출신 및 소속 : 미국 / 남장로교
6. 논저:
Christianity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John Knox Press, 1983)
Mission to Korea (and Korean Translation,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1984)
Presbyterians in World Mission (CTS Press, 1995)
Earthen Vessels and Transcendent Power: American Presbyterians in China, 1837-1952 (Orbis Books, 1997)
Face to Face: Meditations on the Life Everlasting (Geneva Press, 2001)
How Koreans are Reconverting the West (Xlibris Corporation, 2008 and Korean Translation, 2009)


Ⅱ. 선교사 소개
1. 출생 및 성장
1) 조지 톰슨 브라운(Brown, George Thompson)
조지 톰슨 브라운 선교사는 1921년 4월 30일 중국 장시성 쿠링에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42년 데이비슨 대학을 졸업(B.A.)한 그는 미 육군 통신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1949년에 뉴저지주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B.D.)하였고, 1950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Th.M.)하였다. 그 후 노스캐롤라이나 주 게스토니아의 애덤스 메모리얼 린우드 장로교회에서 2년 동안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회 하퍼 선교사님의 딸 마리아 여사와 결혼하였다.

2) 메리 알렉산더 하퍼 브라운(Brown, Mardia Alexander Hopper)
메리 알렉산더 하퍼 브라운 선교사는 1922년 11월 22일 한국 군산에서 태어났다. 메리와 그녀의 두 형제인 조와 조지는 부모님과 부모님의 동료 선교사들의 지도로 목포에서 칼버트 코스라는 홈스쿨링 과정을 통해 배웠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선교사 후원 기숙학교인 평양 외국인학교에 다녔다. 그 후 메리는 조지아주 디케이터에 소재한 아그네스 스콧 대학에서 성서연구를 전공하였고, 졸업한 후 조지 톰슨 브라운과 결혼을 하여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살았다. 그 후 1951년 메리와 조지는 중국으로 갈 장로교 선교사로 배정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몰락으로 상황이 변하였고, 메리와 조지는 도쿄에서 한국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2년을 지낸 후, 남한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2.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1952년 한국동란 때 그의 아내인 메리 사모와 함께 미국남장로교 총회 세계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 받은 후 한국에 도착하였다. 브라운 선교사는 선교사들의 주된 역할이 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브라운 선교사 부부는 한국에 도착 후 광주와 목포에서 수십 개의 새로운 교회들과 함께 일하였다. 그리고 광주성경학원을 열어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전남대학교에서 영어성경반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후 1955년 3월 1일에 광주성경학원을 호남성경학원으로 이름을 변경한 후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61년 1월 10일에 순천 매산신학교, 광주야간신학교, 호남성경학원을 통합하여 호남신학원을 설립한다. 그 후 호남신학원의 원장으로써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힘썼으며, 호남성경학원에서 1955년까지 신약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61년 4월 11일에 호남신학원의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였고, 1963년 5월 21일에 호남신학교로 개칭하여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의 주역으로 수고하며, 1967년에 미국 남장로교 총회 세계 선교부에서 아세아 총무를 봉직하였고, 1967년에서 1973년까지 한국 장로교 신학대학원에서 성경 신약을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동아시아 지역 담당 비서, 이후 한국 현장담당 비서 등을 지냈다. 1971년 1월 18일에 호남신학교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73년 메리는 여러 한국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일을 하였으며, 한국에서의 마지막 몇 주간 동안 빌리 그래함 목사의 1973년 서울 전도집회를 도왔다. 그 후 1973년에 이 부부는 애틀랜타로 귀국한다.

3. 귀국 이후
1) 조지 톰슨 브라운(Brown, George Thompson)
1973년 애틀랜타 귀국 이후 그가 국제 선교에서 리더쉽을 발휘했으며, 한국에서 선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 남장로교 총회 국제선교부 총무를 역임하게 되었다. 그의 지도력과 전문성은 교단이 전 세계교회와 진정한 파트너십을 맺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후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조지아 주 디케이터에 있는 컬럼비아 신학대학원에서 세계기독교 선교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장로교회의 중국 관련 특별 컨설턴트로도 활동하였다. 그 후 2011년 2월 8일 호남신학대학교에서 조지 톰슨 브라운 선교사의 헌신과 공로를 인정하여 명예신학박사 1호를 수여하였다. 그 후 2014년 1월 21일 스톤마운틴의 파크스프링스 양로원에서 파킨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하여 향년 93세로 별세하였다.

2) 메리 알렉산더 하퍼 브라운(Brown, Mardia Alexander Hopper)
1973년 귀국 이후 디케이터 장로교회는 부부가 선교사로서 생애를 보내는 동안 꾸준히 후원하며 도움을 주었던 곳이었기에, 그 교회에서 집사와 장로로 여러 해를 섬겼다. 이 시기에 그녀는 콜롬비아 신학생들을 비롯하여 입을 만한 헌 옷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미션 헤이븐 옷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 후 2018년 4월 10일 조지아주 스톤마운틴의 파크스프링스 양로원에서 지병으로 향년 95세로 별세하였다.

4. 선교사 부부와 관련된 부록들
1) 조지 톰슨 브라운(Brown, George Thompson)
조지 톰슨 브라운 선교사는 그가 집필한 『mission to korea』에서 한국 사람들의 생활상과 역사를 충실히 전하는데, 그는 “한국의 가마는 작은 네 기둥으로 된 닫집으로 가로 세로 3자에 높이 4자 정도로 되어 있으며 메고 가는 두 장대가 있다. 타고 가는 사람은 가마 안의 상자 같은 의자 위에 앉는데 커튼이 있어 밖을 바라볼 수도 있고 찬바람을 막기도 한다....가마꾼들이 매 3마일마다 길 한복판에 가마를 내려놓는데, 그렇게 못하게 하면 안 된다. 그들이 술을 한잔 하거나 담배를 피우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라고 상세하게 기술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호남지역의 옛 모습에 대해서 묘사를 하는데, 순천을 “비옥하고 웃고 있는 계곡의 들머리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도시”라고 묘사하였고, 목포를 “바위가 많은 큰 강변 둑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림 같은 마을”이라고 묘사하였다. 이렇게 묘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한국을 많이 사랑하며, 많은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에 오자마자 “평생 함께 살고 일해 온 세계 기독교인들은 우리 장로교회의 삶에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였고, "모든 민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와 구원에 대한 그들의 필요성에 대해 상당히 자연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함을 통해 그가 선교에 대하여 얼마나 힘써왔고, 그가 선교했던 한국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2) 메리 알렉산더 하퍼 브라운(Brown, Mardia Alexander Hopper)
메리 브라운 선교사는 어렸을 때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던랩, 배런)의 빨강머리로 인한 소동이 유명하였는데 그 빨강머리는 결국 백발이 되었다. 메리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어느 날 그녀가 엉엉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한국인 아이들 모두가 자기를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메리를 작은 악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자 메리의 어머니께서 메리에게 “메리야, 너는 이 사람들이 본적이라곤 없는 검은 머리가 전혀 없는 유일한 어린 아가씨란다. 네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빨강머리 어린 소녀들을 대표하는 대사님으로 한국에 와있다고 생각해봐.” 라는 말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린 메리는 마음이 녹기 시작하였고 삐쳤던 일이 끝나게 되었다. 만일 어머니의 현명한 대답이 아니었다면 과연 메리 선교사가 한국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지 의문이다. 그때 현명하게 이야기했던 어머니로 인해 메리 선교사가 한국에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올 수 있었고, 남편인 조지 톰슨 브라운 선교사와 함께 남한에 하나님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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