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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48_Stewart,Mary S

닉네임
김태
등록일
2020-07-06 10:49:47
조회수
671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3반_48_김태.hwp (206336 Byte)
매리 스튜어트선교사 /Stewart,MaryS (?-1932)


I.기본사항

이름:Stewart,Mary S./스튜워트 /한국명:서수(투)원
생몰연도:?-1935미국필라델피아 출생
학력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 출신 및 소속: 미국,감리교 한국선교기간:1911-1935


연표
1911 미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 원장으로 취임
1912 동대문 옆에 한국 최대의 부인병원 완공,시약소 운영과 환자진료 수행
1914 빈민촌에 왕진,부녀사업에 헌신, 용두리교회 선교사업
1935 은퇴후 귀국, 그해에 소천
가족사항
정보 :기혼녀로서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내한.
참고문헌:기백 9권:Minutesof the Korea Women’sConference,1911-15,1926;50 years of Light;KMYB;구미인조사로기 감리요람 60;미감리교회 조선연회록,1912-33;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 교사;E.W.Poitras,Methodist Mossionaries of Korea;A.D.Clark,ProtestantMissionaries in Korea./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김승태,박혜진 엮음,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1994,481p /기독 교대백과사전 9권,기독교문사 ,1083p /한국기독교의료사,이만열지음,아카넷 339,416p /THE KOREA MISSIONFIELD 1918,한국기독교사연구회 편,165-169p


II.선교사 소개:Stewart,Mary S.?-1935.

간략히 스튜어트 선교사를 소개하자면,미국에서 이미 기혼자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한국에 내한 선교사로 입국해 한국의 여성들을 위한 병원과,의료사역을 위해 힘을 다한 선교사라 할 수 있다.
당시조선의 문화상, 남자의사에게 진료를 받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 여기던 그 당시 인식과 여건 가운데, 전 문적인 여의사의 교육과 양성, 그리고 섬김이 필요했고, 이에 미감리회선교부가 서울 정동에 보구여관(보구녀관)이라는 설립한 부인병원으로 동대문분원에 1911년 스튜어트는 부임하여 22년까지 근무한다. 중간에 1918년 러시아로 휴가를 떠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은퇴할 때까지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여성들의 영성과 건강을 위해 힘쓴 여의사이다. 다행히도 THE KOREA MISSION FIELD 1918년 8월호에 그녀에 대한 글이 기고가 되었는데, 정확히는 그녀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그녀와 함께 사역하는 모습과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잘 기록되어 있다. 아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섬기는 그 모습 가운데에서도, 그것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라, 말할 가치도 없는 평범한 일이며,한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인이라 표현하는 문장은,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이, 이 조선의 부녀자들을 위해, 조선을 위해 섬기는 정신과 마음이 어떠했는지 잘 표현 해주고 있다.
아래는 기독교대백과사전과 한국기독의료사에 기록된 내용들과, 저널의 내용 및 번역이다.
미감리회 여선교사,의학박사,한국명 서투원(서수원).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기혼녀로서 미국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10년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았고 이듬해 (1911)한국선교사로 내한,릴리안해리스기 념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이 병원은 1887년 미감리회선교부가 서울 정동에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하였던 부인병원으로서 1892년 보구여관 동대문분원을 설치 (일명볼드윈시약소)하고 여의사 커틀러 (M.M Cutler)가책임 밭던 중 1899년 9월이 시약소와 보구여관을통합한 후 1902년 해리스의 별세를 기리 기위하여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으로 명명된 것이었다.
이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한 스튜어트는 이듬해 (1912)동대문 옆에 한국 최대의 부인병원 건물을 완공하고 시약소 운영과 환자진료 등의 벅찬 일을 커틀러와 함께 수행하였으며 그래 12월 여의사 힐먼(Hillman)을 동료로 받아들였다. 1914년에는 간호원 리나(Lena)를 대동하고 빈민촌에 왕진도 하였으며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가난한 인근 어린이들을 초청, 오찬회를 베푸는 등 미개한 초창기 부녀사업에 헌신적으로 활약하였다.1915년에는 간호원양성소에서 10명의간호후보생을 양성하여 당국으로부터 간호보조원 허가를 받았는데, 그 중에는 2명의자격 간호원이 끼어 있어 한층 병원 일이 수월하였다. 이 해의 병원보고에 따르면 환자가 1만816명, 결 신자가 2,478명,170신자 가정방문,260명의 비신자가정 방문 등 의료사업과 선교사업은 밀접하게 병행되었다. 그후 스튜어트는 1935년에 은퇴, 귀국했고 그해 별세하였다. 스튜어트 여의사는 의료진으로 1922년까지 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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