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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25 / Billings, Bliss W.(1881-1969, M) / Taylor, Helen

닉네임
김중원
등록일
2020-07-06 13:47:39
조회수
703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25_김중원.pdf (1405717 Byte)
기본사항

1. 이름 : Billings, Bliss W. (변영서)

2. 생몰연도 : 1881년 1월 7일 ~ 1969년 3월 8일


3. 출생 및 소속 : 미국 오하이오 주 그린 필드 출생 / 북감리교


4. 학력 : 데포우대학교 졸업

유니온신학교 대학원,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졸업
1923년 데포우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학위


5. 연표

1908년 미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평양숭실대 교수와 광성학교 교장으로 근무
1915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영어와 종교학 강의, 문과 과장
1917-1922년 4월 연희전문학교 부교장으로 근무
1923년 데포우 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 취득
1932년 연희전문학교 교수직 사임,
감리교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1939년까지 8년 동안 한국 신학의 발전과
목회자 양성에 노력
1940년 10월 2일 신학교 휴교, 추방되어 필리핀 마닐라에서 선교
1942년 1월~1945년 필리핀 일본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1945년 해방 후 재 내한, 기독교 세계 봉사회 한국관리자로 구호사업
- 6.25 사변 시에는 전쟁 이재민 구호에 헌신
1953년 정년으로 은퇴하고 귀국
1963년 3월 8일 오레곤주 칸빌리스의 선한사마리아 병원에서 사망


6. 가족사항

부인 : Billings, B. W.

Mrs. B. W. Billings. 유니온 신학교와 콜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내한한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수 였던 변영서 부인(Mrs. B. W. Billings)은 성령 체험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또한 초대교회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새로 믿는 신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아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7. 논저

1) [논문] 가치감식의 생활, 신학세계
2) 배스포드 감독 약사, 신학세계
3) 사람의 가치, 신학세계
4) 성경과 생명, 신학세계
5) 성신충만한 생활, 신학세계
6) 알벌 쉬바이처, 신학세계
7) 신약의 배경, 신학세계
8) 영혼불멸론, 신학세계
9) 예레미야의 기도생활, 신학세계
10) 예수의 기쁨, 신학세계
11) 예수의 절대성, 신학세계
12) 윌리엄 켈리의 생애, 신학세계
13) 종교가 주는 안정 신학세계


선교사 소개


1. 출생부터 선교사로 방한까지

빌링스는 미국 오하이오 주 그린필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데포우대학교를 졸업한 뒤 유니온신학교와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을 각각 졸업하였다. 해외 선교활동을 지원하여 1908년 한국 선교사로 나오게 되었다.

2. 내한과 교수 사역

1908년 4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에서 브라운과 해밀이 내한하여 조선주일학교사업 협조문제를 협의 하였고 1911년 4월 세계주일학교협회를 대표하여 다시 한국에 내한하여 발전을 이루는데 당시 위원으로 남장로교 스윈하르트, 북장로교 블레어, 크로터스, 캐나다장로교 푸트, 호주장로교 맥래, 남감리교 콜리어, 북감리교 빌링스, 노블부인, 현순, 윤치호, 한석원, 남궁혁, 홍병선등이 있었다.

1908년 평양 숭실대 교수와 광성 학교 교장으로 근무 하였고, 1915년 4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영어와 종교학을 맡아 강의하였다. 문과 과장에 취임한 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 부 교장에 취임하여 1922년 6월까지 봉직하였다. 기미년 독립운동 때 이화의 초기 졸업생인 박인덕(인덕대학 설립자)과 신줄려(류형기 감독의 부인) 등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빌링스가 벌과금을 지불하여 두 사람이 풀려 나온 일도 있었다.

1923년 데포우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감리교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당시 남녀 협성신학교가 합동을 하고 감리교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 교장은 채핀이 취임했고, 종전의 교수 외에 정경옥 교수가 부임하여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최상현 도 들어와 〈신학세계〉 편집을 담당했다. 한국 감리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가 내한한 지 50주년이 되는 1935년 3월 빌링스 교장은 감리교신학교 학제를 4년에서 5년으로 연장했다. 당시 일제의 대학제도에 맞추어 예과 2년, 본과 3년으로 승격시켰던 것이다. 이후로 1939년까지 8년 동안 봉직하면서 한국 신학의 발전과 목회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3. 일제의 강제 추방과 귀국 그리고 소천까지

그러나 일제 말기인 1940년 10월 2일 감리교신학교가 친미 경향과 민주사상이 농후 하다는 이유와 1942년 일본 감리교회와 한국 감리교회가 통합되어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태동되었다. 조선감리교단은 자신들의 규칙에 국민을 교화하고 그 도덕생활의 향상과 정신문화 발전에 공헌하려 함 에 설립 목적을 두고 명문화 했다. 즉, 이제 교회가 종교 단체가 아닌 일본국민화를 위한 교화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학교는 군사교육 및 신사교육을 포함하기 위해 재조직 되고 외국인들은 권력의 보직에서 해직 되었다. 무기한 휴교 됨과 동시에 그도 한국에서 추방당하여 필리핀으로 옮겨 갔고 마닐라에서 선교활동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필리핀이 다시 점령당한 후인 1942년 1월 체포되어 필리핀 감옥에서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자유의 몸이 되었고 곧 해방된 한국으로 다시 내한하였다. 1945년 4월 처치 월드 서비스를 대표하는 빌링스 박사가 10명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한국 관리자로 임명되어 한국인 구호사업에 헌신하였다. 특히 한국전쟁 중에는 전쟁 이재민 구호에 혼신을 다하였고, 휴전 무렵인 1953년에 정년으로 은퇴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1969년 오레곤 주 칸발리스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작성일:2020-07-06 13:47:39 123.213.73.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