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장로교회


호주의 빅토리아 선교회에 이어 미국 남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도 1892년에 한국선교를 개시했다. 하나였던 미국 장로교회가 1861년 남북전쟁과 더불어 남북장로교로 분열되면서 해외선교도 잠시 위축당했으나 다시 활기를 띠어 1892년 한국선교를 시작할 즈음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미 중국, 이탈리아, 브라질, 멕시코, 쿠바, 희랍,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한 상태였다.


프레스톤(J. Fairman Preston)의 지적대로 남장로교회의 한국선교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체재 중이던 1891년 9월에 시카고의 맥코믹신학교에 들려 신학생들에게 한국선교 상황에 대해 강연하였는데, 이때 남부 출신 테이트(崔義德, Lewis Boyd Tate)가 큰 감동을 받았다. 그 해 10월 미국 내쉬빌(Nashville)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 해외선교대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 한국의 언더우드와 밴더빌드대학교에 재학 중인 윤치호(尹致昊)가 강사로 초빙을 받았다. 이 대회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 참석하였던 미국 안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선교대회였다.


이 연례행사에 언더우드와 윤치호 두 사람이 초빙되어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강연을 했다. 언더우드는 확신과 경험 속에서 나오는 한국선교의 가능성과 선교사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모인 많은 신학생들을 감동시켰다. 한국인 가운데 영어를 가장 잘한다고 알려진 윤치호도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한국선교의 당위성을 미전역에서 온 젊은이들에게 역설했다. 해외선교를 꿈꾸던 테이트(Lewis Boyd Tate), 존슨(Cameron Johnson), 레이놀즈(李訥瑞, William David Reynolds) 등 남장로교 소속 목사 후보생들이 감동을 받고 한국선교를 결심했다. 후에 전킨(全緯廉, William McCleary Junkin)이 일행에 합류했다.


테이트를 시작으로 이들은 자신들을 한국 선교사로 보내 줄 수 있는지를 남장로교 해외선교담당 실행위원회에 타진하였으나 위원회로부터“새 선교사업에 착수할 가망이 없다”는 통지를 받았다. 한국에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이들 네 사람을 한국선교지에 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 네 명은 자기들이 속한 교단의 지교회들을 찾아가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저들은 “언더우드 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버지니아주와 북 캐롤라이나주의 대도시 교회를 역방(歷訪) 선전(宣傳)하고 또한 한국에 관한 기사를 여러 교회 신문에 발표했다.”1892년 2월 전킨과 레이놀즈는 당시 저명한 선교지 미셔너리(The Missionary)에 “왜 우리는 한국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을 통해 한국선교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언더우드는 북미의 다른 친구들의 협력과 자신이 애써 모은 거금 3,000달러를 마련하고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를 운영하는 형 프레드에게 부탁해 2,000달러를 마련해 총 5,000달러를 한국선교를 위해 써 달라며 미국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선교기금으로 보냈다. 이는 두 명의 선교사가 2년간 선교할 수 있는 경비였다. 또한 뉴욕의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가 25,000달러를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에 보내 왔다. 이렇게 되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더 이상 한국선교를 지연시킬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선교를 지망하는 전킨(W. N. Junkin), 테이트(L. B. Tate), 레이놀즈(W. B. Reynolds), 마티 테이트(Mattie S. Tate),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팻시 볼링(Patsy Bolling), 메어리 레이번(Mary Leyburn) 등 일곱 명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그 이듬해인 1892년 10월 18일과 11월 3일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도착 후 곧 이들은 레이놀즈를 회장, 테이트를 회계, 그리고 전킨을 서기로 한 남장로교 선교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하고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1893년 1월에 장로교 공의회 조직 때 레이놀즈가 의장에 선출되는 등 남장로교 선교회는 처음부터 한국선교에 적극 참여했다. 이들은 즉시 한국어 습득에 들어가 1년 정도 지나 간단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자 1893년에 레이놀즈는 강화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테이트는 마포삼열과 더불어 평양을 비롯한 북부지역에 선교여행을 떠났다. 1894년 2월에 열린 제 2차 남장로교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테이트(L. B. Tate)와 그의 여동생은 3월 19일 서울을 출발해 전주로 향했다.


여동생은 찾아오는 부녀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고, 테이트는 어학 선생의 도움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처음부터 5명에서 8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했으며, 그 중 여섯 명이 성경 진리를 확신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사역은 동학난과 청일전쟁으로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청일전쟁으로 “全州에 居住하던 南美宣敎師 李訥瑞 崔義德 全緯廉 等은 避難하야 京城에 寓居”하다 6개월 후 1895년 2월 전쟁으로 도시 중 3분의 1이 폐허가 된 전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全州와 群山을 傳道의 中心地로 作定하고 事業을 擴張”함으로써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거두었다. 복음 전도와 함께 이 지역의 의료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한 재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요청에 따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에 최초의 남장로교 의료 선교사 잉골드(Mattie B. Ingold)를 파송했다. 1897년 입국한 잉골드는 전주에 정착해 1년간 어학을 습득한 후 1898년 11월 3일 호남 지역 최초의 의료기관인 전주예수병원을 설립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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