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랑의 사도, 산돌 손양원 목사”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그[손양원]는 하나님을, 이웃(나환자들)을, 나라와 겨레를,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믿음을 지키느라 자신의 목숨도 바친 위대한 사랑과 믿음의 용장이었다. - 1968, 안용준 - 

 

 

  서 론

 “20세기에 대한민국이 낳은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님은 기독교계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다.” 1968년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 안용준이 손양원에 대해 평한 글이다. 손양원의 순교 2주년을 맞는 1952년 9월 28일 파수군에는 손양원을 추모하며 세 가지 사실을 들었다. ‘참 목사,’ ‘진리의 참 파수자,’ ‘참순교자’가 그것이다. 그는 “애양원을 사랑하기를 자기의 부모, 처자보다도 아니 자기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손양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구현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손양원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02년 6월 3일 경남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에서 태어나서 한국동란이 한창 진행되던 1950년 9월 28일 48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살았던 20세기 전반기 우리 민족은 전에 없는 민족적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을사늑약, 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합병, 삼일독립운동, 신사참배강요, 그리고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민족적 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가 원하던 원치 않던 손양원은 이 민족적 위기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가 온 몸으로 보여준 사랑의 실천은 기독교인들만 아니라 온 백성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선한 목자로 양무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고, 신사참배 강요 앞에 타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삼았고, 마지막에는 거룩한 죽음을 맞았다. 안용준은 원수까지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했던 그의 생애를 더 이상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사랑의 원자탄”으로 명명했다. 

이 땅에 살았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모함과 신앙의 실천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믿고 깨달은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변호하고 그 진리를 지키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으며, 말로만의 신앙이 아닌 삶 속에서 그 진리를 실천으로 옮겨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초대교회의 폴리갑과 한국의 주기철과 손양원은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지키는 일에 생명을 다했고, 그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바쳤다. 당대의 이단 사설과 천황숭배에 용감하게 맞섰다는 점에서, 그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잃고 순교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에게는 그 놀라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압도되어 하나님만 섬겼으며,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사랑이라는 횡적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그 중에서 손양원은 이 횡적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주님을 가장 빼어 닮은 롤 모델이었다. 이 횡적 사랑의 근원은 신애(神愛)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손양원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었다. 그래서 손양원은 신사참배의 무서운 도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으며, 자신의 양무리를 지키다 목숨을 빼앗겼다. 손양원이 순교하고 약 한 달 후 1950년 10월 29일 남대문교회 노천 추모회에서 박형룡 박사가 손양원을 가리켜 “1. 위대한 경건한 사람 2. 위대한 전도자 3. 위대한 신앙의 용사 4. 나환자의 위대한 친구 5. 위대한 원수 사랑자 6. 의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신 위대한 순교자”라고 예찬한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순교자로 알려진 손양원의 삶을 지배해온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복음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이었다. 하나님 사랑 때문에 그는 목숨 걸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고, 자신을 위해 죽으시고 온 인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고 사랑했고 애양원이라는 버림받은 신앙의 공동체에서 사랑을 실천하다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그런 면에서 그는 예수님을 가장 빼닮은 이 시대의 진정한 표상이었다. 본고에서는 위대한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의 생애를 ‘하나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고 한다. 

 

1. 손양원의 성장과정과 신앙형성

 

손양원은 1902년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에서 부친 손종일(孫鍾一, 1871-1945)과 모친 김은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양원이 구성리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09년 일곱 살 때 부친 손종일이 기독교로 귀의하면서였다. 구성리교회는 1909년에 세워진 교회였다. 당시 평양대부흥운동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성령의 바람이 멀리 함안까지 불어온 것이다. 1909년 함안군에는 외암리교회와 북교회 그리고 구성리교회 등 3교회가 설립되었다. 손양원의 부친 손종일은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겼고 구성리교회 초대장로가 되었다. 

 

부친의 회심과 가정의 복음화

 

구성리교회에 대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함안군 구성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남경오, 김씨련이 신종전도하야 교회를 성립하고 손종일을 장로로 장립하야 당회를 조직하니라.” 부친 손종일은 1909년 4월 13일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깎고 5월 2일부터 믿기 시작했다. 8개월이 지난 1910년 1월 10일 학습을 받았고 다시 1910년 12월 17일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고 바로 시무집사로 피택을 받았고 1914년 3월 18일 영수로 피택되었고, 다시 1919년 1월 5일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는 처음 예수를 믿고 10년 만에 장로가 된 것이다. 손양원이 태어난 1902년부터 아버지 손종일이 장로로 피택을 받은 1919년까지 17년 동안 우리 민족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수난의 시기에 태어난 손양원은 2살 때 러일전쟁, 3살 때 을사늑약, 5살 때 고종의 퇴위, 8살 때 한일병탄, 9살 때 105인 사건, 그리고 17살 때에 삼일운동을 만났다.

 손양원은 일곱살 나던 1909년 5월 2일부터 부친을 따라 성실하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1914년 3월 17일 이종윤 조사로부터 학습을 받은 손양원은 그해 4월 1일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나이든 사람이 보통학교에 다니는 것이 흔한 시대였으니 12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이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공립학교 생활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912년 7월 30일 명치천황이 세상을 떠난 후 일제는 공립학교에 동방요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보통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동경을 향해서 동방요배를 한 후 수업을 시작했다. 신도의식이 모든 공휴일 마다 개최되었으며 학생들은 천황사진에 절을 해야 했다. 1916년 3학년 때 손양원은 궁성요배를 하지 않아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손양원은 맹호은(孟皓恩, Frederick John Learmonth MacRae) 선교사로부터 1917년 10월 3일 세례를 받았고, 그의 도움으로 다시 칠원공립보통학교에 복교하여 1919년 3월 24일 졸업했다. 

 

일본유학시절 영적체험과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손양원

 

1919년 1월 5일 장로로 피택받은 손종일은 2달 후 3월에 엄주신, 박경천, 윤형규 등과 함께 칠원장터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월 24일과 4월 3일 2차례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손양원이 부친을 상당히 공경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부친 손종일의 나라사랑, 민족사랑은 아들 손양원에게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손양원은 1919년 칠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서울 중동학교에 진학하여 고학을 하며 어렵게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 손종일이 3.1독립운동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언도 받고 복역하고 있는데다 고학으로 학업마저 힘들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 그는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출소하자 향학열에 불타던 손양원은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3년 과정인 동경사립스가모(巢鴨)중학교 속성과 야간부에 입학해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하며 학업을 마치고 1923년 7월 귀국했다. 2년 동안의 짧은 일본 유학기간이지만 그는 이 기간 깊은 신앙도 체험했다. 특별히 동경판교성결교회(板橋) 목사 중전중치(中田重治)의 설교를 듣고 깊은 신앙생활의 진체를 깨닫고 동양선교회의 일본 전도활동에 깊은 도전을 받았다. 

19살부터 21살까지 일본에서 유학하는 2년 동안은 손양원에게 너무도 중요한 기간이었다. 그는 이 기간 일본사람, 일본교육, 일본교회, 일본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그가 다닌 동양선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 등 4중 복음의 체험 신앙을 강조하였고, 전도열이 대단했으며 신사참배반대운동에도 앞장섰다. 손양원은 동양선교회의 노방전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가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구로사키 고오키지(黑崎幸吉), 오야마학원(靑山學院) 교수 다카기 미츠타로(高木任太郞), 그리고 일본 동양선교회 창립자 나카다 쥬지(重田重治)의 저서들을 읽은 것도 이 기간이었다. 손양원이 동양선교회를 다니고 이들의 작품을 읽은 것은 손양원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한국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던 무교회주의자였고, 일본의 한국지배를 반대했다. 손양원은 귀국 후 장로교 부산시찰회 소속 전도사로 사역할 때 무교회 잡지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정기구독했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받은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동양선교회는 정식 교파가 아니라 일종의 선교회 성격이 강해 종교적으로는 비주류였고, 일본정권에 저항적이었으며, 신앙적으로는 체험적이었다. 제도적인 교회가 일제에 편승할 때 무교회주의자들과 동양선교회는 제도적인 교회와 달리 일본정부에 저항적이었다. 일본의 거의 모든 교파와 교단들이 신사참배를 수용할 때도 이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손양원이 동양선교회나 무교회주의 우치무라 간조에 매력을 느꼈던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동양선교회의 열정적인 전도열에 도전을 받고 같이 북을 메고 거리로 나가 전도하였으며, 밤에는 고요한 곳을 찾아 열심히 기도했다. 손양원은 일본 유학 기간 동양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깊은 영적체험을 했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쓰가모 중학교 야간부를 다니면서 일본을 몸으로 배웠다. 그는 일본에서의 동양선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통해 장로교 밖의 다른 교단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카다의 메시지는 손양원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그의 설교를 통해 손양원은 참된 신앙의 의미를 깊이 체험했다. 비록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일본에서의 신앙체험은 손양원을 기도의 사람, 복음전도로 불타는 사람, 은혜를 간절히 체험한 확신의 지도자로 세우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손양원과 성서조선 사건

 

1924년 1월 17일 19세의 옥렬교회 교인 정양순과 결혼한 손양원은 그해 10월 23일 칠원교회 집사로 임명을 받고 2년간 집사로 칠원읍 교회를 섬기던 중 1926년 4월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했다. 손양원은 주기철 목사가 1925년 12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경남성경학원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선생과 제자로 그곳에서 만났다. 경남성경학원은 3년 과정이었고, 교사진은 주로 호주장로교 선교사들과 목회자들로 구성되었다. 1927년 당시 왕대선, 예원배, 권임한, 안다손, 정덕생, 김만일, 김길창, 주기철, 최상림, 김리제, 리자익 등이 가르쳤다. 경남성경학원에의 입학은 곧 목회자로의 입문을 의미하였다.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하던 그해 그는 부산 감만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해 1932년까지 6년간을 섬겼다. 손양원은 당시 교계로부터 이단시 하던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가지고 사경회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감만동교회를 사임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문신활이 1935년 4월 <성서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심장”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小生이 聖[書]朝[鮮]誌를 通하여 골아졌던 生命이 蘇生함을 얻은 때는, 1932년에 釜山 戡蠻里癩病院에서 孫良源 傳道師任이 성조[성서조선]지에서 얻은 所感으로 써 說敎하든 때이었습니다. 그 當時 감만리교회에서 손양원 전도사님은 성조지를 가지고 査經工夫처럼 일주일간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其時로부터 부산 감만리나병원의 背後에도 福音의 꽃송이들이 드문드문 피게 되었지요. 暗黑에서 잠겼든 감만리교회는 光明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골아졌든 생명들은 생생하게 소리를 쳤더이다. 아! 모든 법과 의식에 結縛이 되여 苦痛과 煩悶으로 예수를 뜻없이 믿는 소생은 날로 때로 생명적으로 자라는 참 진리로 解放을 받아 한없는 喜悅이 넘쳤나이다. 뭇 생명들이 그처럼 滋味스럽게 해방을 받아 나아가든 도중에, 불행하게도 소위 목회자라고 하는 몇 사람의 猜忌로 因하야 손양원 전도사님도 감만리교회 일을 못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는 참이라고 날뛰든 사람들도 敎權者들이 威脅하는 바람에, 한 사람 두 사람 次次 다 떠러지고 六百餘命 中에서 겨우 五六人이 진정한 복음 안에서 참 진리를 呼吸하는 한 食口가 되어있었나이다.”

 

감만동교회를 사임한 손양원은 부민정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에 전념하다 1935년 4월 5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손양원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이미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단단히 다진 것이다.

 

손양원과 평양장로회신학교 진학

 

 그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던 1935년부터 1938년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평신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1935년 제 24회 장로회총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새로운 입학조례를 채택하여 1936년 4월 1일부터 실시했다. 모든 지원자들에게 건강진단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고, 전문학교 졸업자가 아니라면 25세 이상된 자에 한해 입학을 허용했다. 평신 입학지원자는 가급적 40세 이하로 제한하며, 세례 받은 지 5년 이상된 무흠한 세례교인, 입학전 5년 동안 양호한 품행을 보인자, 성경전부와 소요리문답을 열독한 자, 그리고 성경학교에서 가급적 2개월 이상 수양하고 교회 사역에 경험이 약간 있는 자로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월에 입학시험을 치러 1과목이라고 낙제한 자는 입학을 불허하였다. 시험과목은 조선어와 한문, 산술 및 대수, 세계지리 및 세계역사, 영어, 구약상식, 신약상식, 성경지리 등 일곱 과목이었다. 기독교 계통의 전문학교 졸업자는 전 과목 시험을 면제하였고, 중학교 졸업자는 1-4과목을, 성경학교 졸업자는 5-7과목 시험을 면제하였다.

손양원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그가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학업에 임하며 목회를 준비했는가는 상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평신 2학년 때인 1936년 가족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를 통해 그의 관심사를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징조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움을 증거하고 또 우리의 신앙이 점점 약하여 가는 것을 보든지 각 교회의 형편을 보아도 아무래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옴이 다 된 것을 깨닫겠습니다.” “동인이는 신사 참배하는 날은 학교에 보내지 말며 신당 앞에서도 절하지 말게 하며 나중에 학교에서 알게 되어 퇴학시킨다거든 퇴학을 당하였지 신당에는 절할 수 없으니 꼭 절하지 말라고 동인에게 부탁하소서. 제 둘째 계명이오니 반드시 못할 일이외다. 아버님께도 잘 이야기해 드리십시오.” 손양원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손양원에게 재림신앙과 신사참배반대운동은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정부를 손양원이 달갑지 않게 본 것은 당연하다.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키는 일본정부야 말로 손양원이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손양원의 신앙관은 그의 국가관도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이 시대 손양원의 국가관을 살펴볼 수 있는 두 편의 설교가 있다. 1937년 8월 11일 수요일 저녁에 이사야 46장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국가의 행복에 대하여”라는 설교와 그해 8월 29일 주일에 이사야 11장 1-10절을 본문으로 설교한 “평화의 국가왕국을 희망하자”이다. 이 설교에서 손양원은 국가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적인 국가와 세상의 권력이 지배하는 지상의 국가, 둘로 구분했다. 이 두 개의 국가 개념은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 루터의 두 왕국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령적 국가나 육적 국가나 행복의 원리는 일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국가 행복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특별 비상시기에 처한 우리는 더욱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국체 단결에 있습니다. ... 2. 국민의 충심에 있습니다. ... 그런고로 비상시국을 당한 이 때에 더욱 단결해야 되겠습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습니다. ... 그런고로 국가 행복을 위할진대 이상의 3개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있는 이 평화의 국가는 주전 700여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내세에 평화의 국가가 올 것을 예언한 것인데, 전 세계 국가에 모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국가마다 이 평화를 위하여 정치를 잘 해서 국가의 평화와 행복을 누리도록 노력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참 평화의 국가가 되는 방법은 이 본문에 있습니다. 1. 공의를 좇는 국가입니다. ... 2. 전쟁이 없는 국가입니다. ... 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국가입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상의 내세적 평화의 국가를 희망하는 동시에 오늘 현세 국가가 먼저 평화의 국가로 이루어 가도록 공의를 좇는 국가, 전쟁 없는 국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국가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손양원은 현 일본정부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국체단결’이 필요하고 ‘국민의 충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침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평화의 국가에 대한 손양원의 설교는 분명히 일본정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평화의 국가는 주전 700년 이사야를 통해 예언한 내세에 임할 나라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좇고, 전쟁이 없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국가는 ‘내세적 평화의 국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현세국가’ 일본이 그런 평화의 국가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자고 촉구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의 국가와 너무도 다른 일본 국가에 대해 손양원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피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설교는 전쟁을 일삼는 일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이요, 일본이 계명을 어기게 만드는 적그리스도라는 의식을 그는 갖고 있었다. 

 

주기철의 일사각오 설교

 

평신에 입학한 후 주기철과의 역사적 만남이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손양원에게는 축복 중의 축복이었다. 그가 평소 존경하던 주기철 목사님이 마산 문창교회를 사임하고 1936년 평양산정현교회에 부임했을 때 손양원은 평신에서 2학년 학생으로 신학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1935년 12월 17일부터 3일간 열린 사경회 마지막 날 주기철이 요한복음 11장 16절,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고백을 본문으로 ‘일사각오’ 제목의 설교를 외쳤을 때 손양원도 1학년 학생으로 그 현장에 있었다. 

 

“(1)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 예수를 환영하던 때는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도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 ...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 성 도마의 일사각오! 인도 도상에 뿌리는 피!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를 따르는 일사각오가 있어야 함이라!

(2)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예수의 일생은 순전히 남을 위한 일생이니 이 세상에 탄강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의 죽으심도 죄인을 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 도마의 일사각오! 오늘 우리에게도 남을 위한 일사각오!

(3) 부활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기 위해서 피로써 전지우전하여 내려오는 것이다. ... 바티칸 궁중에 봉쇄된 성경을 개방하여 만민의 성경이 되기 위하여는 위클리프의 백골이 불에 타고 틴델[틴데일]의 몸이 재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생 여러분! 제군이 읽고 있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이다.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사이다. 일사각오,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위하여 인도도상에 피를 뿌리었소. 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복음을 위한 일사각오!”

 

 그날 손양원을 비롯한 평신의 재학생들은 주기철 설교에 깊은 도전과 감동을 받았다. 주기철은 평양신학교 사경회 그 이듬해 1936년 7월 평양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중심지 평양에서 손양원과 주기철은 역사적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애양원교회 사경회 인도

 

손양원이 애양원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인 1937년 가을이었다. 애양원 교회에서 그를 사경회 강사로 청빙한 것이다. 이 역사적 첫 만남에서 그는 애양원교회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금까지 강사들은 초청을 받아 오면 일반적으로 애양원교회에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들어갈 때 흰 가운과 장갑을 꼈다. 그러나 손양원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흰 가운 없이 교회에 들어갔다. 이 같은 손양원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적 동기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 온 사람이 호랑이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호랑이를 잡겠느냐. 이곳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병을 무서워해서야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 손양원이 애양원교회 예배당으로 들어가면서 한 말이다. 손양원이 애양원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1937년은 광주 양림에 있던 애양원이 순천으로 이사온지 꼭 11년째 되던 해였다. 환자들이 급증하면서 애양원에 목회자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였다. 1926년 보고에 의하면 한센병 환자 수는 점점 증가하였다. 당시 무지한 두려움과 편견 때문에 한센병 문제는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복지 시설이 충분하지 않았던 그 시절 이들을 돌보는 몫은 선교사들이었다.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 생활해야 하는 그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은 힘든 만큼 영적 결실도 대단했다. 1925년 598명의 환자들 가운데 3명의 장로와 10명의 집사가 배출되었고, 208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는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영적으로 가장 살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그곳이었다. 1909년 처음 9명으로 시작된 애양원은 1925년에 이르러 1,000명이 넘어섰다. 안용준은 <사랑의 원자탄>에서 당시 애양원의 영적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곳 애양원이란 남장로교 선교단의 전도 사업의 일부인데 1909년에 광주 양림에서 시작된 나환자 수용소가 1925년에 이곳으로 이전해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홉 명으로 시작된 것이 현재는 근 천명의 환자를 수용해서 그들의 생활을 도울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모두가 신앙적으로 살려는 데에는 여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 더러는 치료를 받아 다시 사회로 나가서 생활하는 이도 있고 대개는 일생을 이곳에서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애양원에는 부속학교인 성산 소학교가 있어 초등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윌슨 박사와 웅어 선교사는 애양원의 환자 촌에서 환자들끼리 결혼시키는 일을 시도했다. 우선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지적으로 적절한 사람 10명을 뽑아 애양원 안에 있는 처녀들과 결혼하도록 주선하고 대신 정관수술을 하기로 했다. 애양원의 어린 아이를 양자로 입양하는 일은 허락되었다. 이 같은 계획은 “한센 환자촌의 삶을 더욱 정상적으로 만드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711명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는 애양원의 상태가 어떤지 1938년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센 환자촌의 정신은 바로 소망과 협력이었다. ... 기숙사 생활보다 가정을 갖는 것이 장려되었다. 그들은 교회, 어린이 학교, 운동장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가 되었다. 150건은 경작한 땅에서 자급하고 25건은 반 자활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야채, 돼지와 토끼를 길렀다. 주민회는 열 개 부서로 나뉘어 일을 분담하고 관리했다. 재정, 농사, 위생, 의료, 도로, 훈련, 기름, 종교생활, 교육과 학교, 공업, 촌락은 자체적인 상점과 화폐가 있었다. 기름은 촌락 소유의 산에 저장했다. 이해 봄에는 십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오십개 가정은 그들이 입양한 어린이들과 깔끔한 오두막에서 행복하게 살며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바로 그 즈음에 손양원이 애양원에 부임한 것이다. 애양원 사람들은 손양원이 평신에 재학하고 있을 때 전해준 감동적인 메시지와 다른 목회자들과 다른 차별화된 감동적인 행동을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깊은 도전을 준 손양원을 애양원 교회 담임으로 모시길 원했다. 

신학교 재학 중이던 3년 동안 손양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진지하게 기도하며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해주에서 사경회 초청을 받고 애양원교회에서도 사경회를 인도한 것을 보면 손양원은 설교자로서도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평신의 신학교육, 특히 교수들과 동료들도 손양원의 신앙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손양원은 1938년 평신을 졸업할 때까지 3년간 라부열, 박형룡, 박윤선 등 훌륭한 교수진 밑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며 지도자로서의 양육 받을 수 있다. 그가 평신에 재학할 때 준비된 신학생들이 여러 명 재학하고 있었다. 명신홍이 2년 선배였고 방지일, 김진홍, 한상동이 1년 선배였으며, 강신명, 계일승, 김양선, 박성겸이 동기였고, 안광국, 황은균이 1년 후배였다. 손양원이 평신에 재학하고 있을 때 선배들과 후배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31회 (1936. 3. 12) (38명)

 

 

 

 

 

 

 

姜炳哲

高雲瑞

具然直

金庚燦

金斗七

金商根

金世烈

金仁鉉

金志宗

金哲勳

金泰鎬

金海述

權連鎬

權泰義

田守昌

梁充黙

龍熙昌

李永泰

李東禧

李熙禎

李禹錫

明信弘

朴相健

朴斗英

朴天欽

朴華善

朴永魯

宋奇億

宣在連

申厚植

宋永吉

尹玉璟

禹成玉

尹濟萬

張世煥

鄭一永

崔圭煥

崔貞弼

 

 

 

 

 

 

 

 

 

 

 

 

제32회 (1937. 3. 10) (39명)

 

 

 

 

 

 

 

姜佑根

金明執

金尙權

金石九

金世榮

金受恩

金信出

金周鉉

金鎭鴻

金顯晶

金亨元

金熙善

金求澤

金聖徒

金容錫

權順天

南基宗

丁奎三

李相國

李裕澤

梁東赫

劉東熙

李丙烈

李載珪

方之日

朴來承

徐景淵

宋熙用

徐成一

兪正淳

張成道

張成珪

張永淏

趙英達

朱埰元

池潤衡

韓尙東

洪箕疇

洪淳鐸

 

 

 

 

 

 

 

 

 

 

 

제33회 (1938. 3.) (43명)

 

 

 

 

 

 

 

姜信明

桂一勝

金圭唐

金東璿

金良善

金禮鎮

金錫泰

金榮潤

金永厚

金俊應

金載轍

金炯模

金炯禹

金熙涉

金應律

李圭恒

李相業

李昌燮

黃熙燮

李昌哲

李春仲

李泰壤

李學仁

李君賢

朴道洪

朴錫鉉

朴遜赫

朴喜石

裵雲煥

白梅秀

白宗世

薛命和

孫良源

禹龍鎮

尹術龍

鄭海圭

趙順天

嚴永基

鄭大赫

朴基煥

朴聖謙

韓正敎

黃熙燮

 

 

 

 

 

 

 

 

 

 

 

 

 

 

 

 

 

제34회 (1939. 4. 13) (52명)

 

 

 

 

 

 

 

金   健

金鍾大

姜順明

姜元模

金能百

金得浩

金相光

金祥順

金允燦

金義道

金宗燮

金昌洙

金致恒

金孝翰

郭致瑞

羅德煥

李根澤

李南奎

李守弼

朴炳勳 

朴昌睦

白英基

蘇道烈

孫彼得

安德潤

尹東國

安明鎮

安光國

元昌權

張潤成

鄭昌淳

鄭喜秀

曺允承

崔感恩

韓大植

許應淑

黃殷均

姜秉模

金明善

李再鳳

朱詳秀

崔文植

崔相殷

黃聖旭

姜憲集

梁龍根

劉載漢

朴贊植

元容赫

張錫仁

鄭箕煥

韓昌大

 

 

 

 

 

 

 

 

                                                      출처: 총회 100년사

 

총독부는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만들어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교회를 압박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때 평신학생들 가운데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1938년 2월 평양신학교 재학생 장홍련이 평북노회 노회장 김일선이 평양신학교 교정에 심은 기념식수를 뽑은 것이 발단이 되어 김인준 교수와 박형룡 교수 그리고 장홍련, 한창선, 장윤성, 조윤승, 장윤홍, 안광국, 김양선, 지형순, 김영윤, 배운환 등 10명의 재학생이 연행되어 조사받았다. 평북노회장 김일선이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 때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그 노회 목사후보생으로 평신에 와서 공부하던 장홍련이 그 소식을 듣고 화가 나 김일선이 심은 기념식수를 뽑은 것이다. 주기철은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었다가 27일 만에 풀려났다. 손양원은 연행되지 않았지만 졸업을 앞두고 평양신학교에서 진행된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소용돌이를 생생하게 경험하였다. 평양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는 평양산정현교회만 아니라 평양신학교 학생들에게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적지 않은 평양신학교 재학생들이 산정현교회 주일오후 성경공부, 수요예배에 참석해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듣거나 그가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손양원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당시 평양 산정현교회는 조만식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평양산정현교회는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기철이 담임으로 부임한 후에는 신사참배반대운동과 민족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주기철 목사를 흠모했던 손양원은 그의 설교, 그의 사상, 그의 한국교회 사랑과 신사참배반대운동에 큰 도전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중요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손양원이 앞으로 사역해야 할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27차 총회는 손양원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1938년 9월 10일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손양원의 평양신학교 졸업과 부산시찰회 순회전도사역

 

1938년 3월 16일 제33회로 43명의 동료들과 함께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손양원은 5월 17-19일 동래해운대예배당에서 개최된 제 41회 경남노회에서 강도사인허를 받고 경남노회 부산시찰회 순회전도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4월부터 부산지방 선교사 대리로 이듬해 7월 14일 애원원교회 부임할 때까지 약 1년 4개월 동안 부산 좌천동에 있는 호주장로회 선교부의 라이트(A. C. Wright) 선교사와 동역하며 라이트 선교사의 선교구 부산, 양산, 울산, 김해, 함안 지방을 순회하면서 순회 설교를 했다. 

1938년 한 해 동안 그는 청원교회, 울산읍교회, 부산진교회, 전북삼례교회, 물금교회, 구천리교회, 무안교회, 칠원교회, 동래읍교회, 초량교회, 남부민정교회, 무안교회, 양효리교회, 초량교회, 대연교회, 호고교회, 항서교회, 해운대교회, 수산교회, 우봉교회, 하단교회를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교회를 순회하며 섬겼다. 그에게 주어진 책임은 약한 교회를 돌며 순회설교를 하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이었다. 각 교회를 돌면서 이 기간 그가 가장 많이 한 설교는 말세 설교였다. 손양원의 종말론 설교 역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들이 가진 천년왕국 사상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손양원은 1938년 11월 27일 양산읍교회 주일저녁설교를 하면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알렸다. “그날 밤 손양원은 우리신자들은 종내와 달라서 교회당에서 신앙할 필요는 없다. 교효ㅚ 밖에서 믿기도하고 전도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신앙목적으로 하는 지상천국에는 절대 갈 수가 없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그날 약 20명이 그의 설교를 들었다. 설교 후 양산읍교회 전도사 이상호와 대지교회 전도사 금석호에게 “신사불참배 문제에 대해서 설명하여 주었다.” 이상호의 표현을 빌린다면 “나는 대단히 놀라 이 교회 신자들은 신앙심이 약한 신자들인데 그런 약한 신자들에게 그런 설교를 하는 것은 신자들을 미혹시키는 악한 결과가 된다, 고로 절대로 그런 설교는 금후에 하지 말라는 항의를 했다.” 이런 이성호의 항의에 손양원은 “최근 설교 방법과 신앙방법이 종내와는 변했다”고 답했다. 1938년 9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것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총회의 결정을 거스르고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성도들에게 일깨워준 것이다. 이상호는 경찰관에게 이렇게 진술했다. 

 

“그날 밤 신자들에게 설교한 후 동교회 내 사무실 내에서 나와 동교회 신자대표 금석호에게 대하야 신사참배를 하고 있느냐고 묻기로 나는 평양 기독교 신자들의 신사불참배 문제가 있은 후 단지 양산경찰서의 적극적 지도에 의해서 양산읍내 교회 신자 약 20명은 전부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우리 일본국민으로 신사참배하는 날은 반듯이 신자들도 일반 읍민과 함께 양산신사에 참배하고 있다고 대답한 즉 손양원은 다시 십계명에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교리원측에 의해서 신사는 절대적으로 우상이다. 그 우상인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교리 위반으로 따라서 신사참배하는 신자는 천국에 못가는 고로 참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해주었다. 금석호와 나는 그러나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교리가 있는고로 가령 우리 신자중 제국군인으로 출정하여 적국군인을 죽였을 때 그 출정한 신사는 교리위반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신자가 양산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국민의 본분으로 절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 즉 다시 경찰당국에게 신사에 대해서 강제적으로 참배시키는 것은 유부녀가 강간당하는 것과 같다고 또 자발적으로 참배하는 것도 신자로서는 절대 잘못이라고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있어서 금석호와 나를 상대로 해서 의론할 필요가 없다[고] 약 30분 후 작별하였다. 그런즉 그 다음날 양산읍내를 떠났다.” 

 

손양원에게 ‘신사’(神祀)는 ‘천조대신을 제사하는 신궁(神宮)이다.’ 이성호는 손양원이 “대단한 위험 인물이라고 느꼈다.” 이상호와 금석호는 손양원의 호소와 달리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부산시찰의 각 교회에서 전개하는 것은 “국가에 대해서 미안한 일인 동시에 기독교 신자의 신앙심을 미혹하게 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시찰회장에게 알려 손양원이 시찰회 전도사를 못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상호와 금석호 전도사가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는 것이 국가에 대해서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기록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이 곧 일본제국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신자의 신앙양심을 미혹하게 만드는 행위로 판단했다. 이것은 신사참배를 신앙양심으로 옳은 행위로 판단했다는 의미이다. 1938년 제 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총회 산하 각 시찰회와 노회가 신사참배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상호는 금석호와 상의한 후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난 뒤 부산에 와서 부산시찰회장이자 부산항서교회 담임 김길창(金吉昌) 목사에게 상황 보고를 했고, 그는 손양원을 부산시찰회 순회전도사에서 권고 퇴직시켰다. 손양원은 강도사 인허를 받은 지 불과 1년 반 만에 부산시찰회 순회 사역을 그만 둬야 했다. 손양원이 애양원으로부터 청빙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이 때 평신 동창 김형모 목사가 애양원 엉거(J. K. Unger, 元佳里) 선교사에게 손양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 손양원의 애양원 부임을 측면에서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손양원에게 애양원교회 담임으로 엉거 선교사가 보낸 청빙 편지를 받았다. 

 

2. 손양원의 애양원교회 부임과 사랑의 실천

 

손양원은 신사참배강요가 한창 몰아치던 1939년 7월 14일 애양원교회에 부임했다. 손양원은 애양원교회 부임 당시만 해도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다. 손양원은 1946년 2월 19-20일 마산교회에서 열린 47회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1939년 8월 23일 오후 4시에 열린 당회의 당회록에는 손양원을 ‘목사’로 호칭하고 있다. “1. 부산 거주하시는 손양원 목사를 본 교회 목사로 청하시되 임시로 6개월 동안 계시기로 가결하다. 2. 목사 봉급은 원장님이 40엔, 원(가리) 목사님이 10엔, 본 교회에서 15엔 금 65엔씩 드리기로 가결하다. 3. 손양원 목사로 금 8월부터 본 교회 당회장권을 담임하게 하기로 가결하다.” 손양원은 애양원교회에 부임한 후 바로 원가리 선교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손양원이 경남노회 소속이고, 애양원교회가 순천노회 소속이라 정식 이명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애양원교회가 순천노회를 탈퇴하여 이명절차 없이 손양원은 애양원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부임한 후 첫 당회에 목사로 호칭된 것을 볼 때 1939년 7월 14일 부임하고부터 첫 당회가 열린 1938년 8월 23일까지 그 사이 40일 동안 어느 시간에 목사 안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손양원이 당회장으로 당회를 인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원가리 선교사가 손양원에게 목사 안수를 준 것이라 판단된다. 

손양원 전도사가 애양원에 부임하면서 애양원의 영적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가족과 사회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에게 최고의 위안은 주님이었다. “처음부터 일생을 이 사업에 바친 윌손 박사와 이 수용소 교회 담당 선교사인 원가리 목사는 참 신앙적 인도자들이기 때문에 신사 불참배로 문제가 되어 경남 노회에서 문제 중인 손 목사님을 맞이해서 이 교회 식구들을 철저히 지도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나환자들에게 대단한 감동을 주었다. 손양원이 부임해서 보여준 모습은 크게 2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신사참배 반대이고 둘째는 애양원교회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다. 버림받은 나환자를 사랑하는 모습은 곧 잃어버린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박형룡이 손양원을 가리켜 “나환자의 위대한 친구”라고 평한 것처럼 손양원은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대했다. 그들과 동거동락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손양원은 나병환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고 잠자리를 같이했으며 말로만의 사랑이 아닌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양떼들을 목양했다. 이광일은 손양원의 애양원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애양원에 부임한 손 목사의 하루는 나환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 이외에는 없었다. 당시 애양원에 있는 분들 중에는 병에서 완쾌된 상태의 분들이 많았지만 그 동안 심한 병마와 투병 과정에서 눈을 잃어버린 사람, 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형태로 일그러진 분들이 많았다. ... 당시 애양원에는 ... 병이 악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14호실은 애양원 전체에서 가장 상태가 심한 중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이었다. 14호 중환자실에는 같은 환우들도 가기를 꺼리는 곳인데 손 목사는 그곳에 들어가서 중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아주면서 기도를 해주었다. ... 이 중환자실에 몇 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흉악한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 이러한 방을 손 목사님은 서슴치 않고 들어가서 맨손으로 방바닥을 치우고 그곳에 앉아서 그 흉한 환자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해주었다. 그리고 기도 후에 그곳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이러한 손목사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성 프란시스를 가리켜 평화의 사도라고 칭했다면 손양원은 사랑의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손양원을 지배해온 근본 원리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데서 왔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설교와 삶에 그대로 나타난다. 사랑은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힘이 있다. 손양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일관되게 실천했다. 손양원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곧 성부의 사랑, 성자의 사랑, 성령의 사랑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포괄하는 의미였다. 성부의 사랑이란 예정해 주신 사랑,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 성자를 보내주신 사랑, 성경을 주신 사랑을 말한다. 성자의 사랑이란 사람되어 오신 사랑, 인간고를 당하신 사랑,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랑, 부활하사 중생의 생명을 주신 사랑, 승천하시어 천당길을 열어주신 사랑을 의미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랑이란 자신의 일생을 보혜사를 통하여 지도해 주시는 사랑, 날마다 탄식하며 대신 기도하시는 사랑을 의미했다. 

손양원의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은 요한일서 4장 7-21절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 사랑 곧 삼위일체 사랑이 그의 신앙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손양원은 한 설교에서 이와 같이 고백했다. “삼위의 사랑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시행되는 중이다. 또한 미래에도 반드시 있을 것이니 나는 이 삼위의 사랑을 깨달은 자에 합당한 사랑의 종이 되겠다. 내가 하는 신앙생활은 미래에 있을 복보다도 과거에 이미 받은 삼위의 사랑에 감격해서 사랑의 종이 되고자 한다. 내가 범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나의 당하는 수치나 욕이나 지옥에 들어가는 벌 때문이라는 것보다도 삼위의 큰 사랑을 깨달은 까닭이다.” 손양원의 사랑은 이미 받은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에 응답하여 가난한 자 병든 나 버림 받은 나환자를 사랑한 실천적 사랑이었다. 

 

손양원의 사랑의 실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자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서 실천에 옮길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확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1940년 10월 22일 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경찰관의 취조에서 손양원이 밝힌 내용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로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만민을 위해서 구주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현 세상에 강림하시게 하여 십자가를 지여 만민을 구원하고저”하신 것이다. 손양원은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손양원의 다음과 같은 설교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오, 그의 행하는 전부가 다 사랑이시오, 그의 내용이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지배하고 계시는 자이시다. 그리하여 내게 나타나는 모든 사변을 다 사랑으로 운전하시고 계시는 나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 우주 만물은 그 사랑의 발로이며, 나는 그 사랑을 찬송할 자이다. 모든 사변에서 찬송의 곡조가 되어 주를 노래하는 자이다.”

 

손양원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의 신앙원리처럼 그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광일이 손양원의 사상을 “하나님의 사랑 중심 사상”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는 이웃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연원하기 때문이다. 손양원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나오는 사랑, 둘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셋째, 죄인을 위하여 몸 바치신 그 사랑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함으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가르침이다. 한 마디로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이 일생동안 보여주신 그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손양원에게 자신이 일생동안 추구하고 감당해야 할 영원한 롤 모델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고 예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나도] 순종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자연히 그 사랑은 희생으로 표출되야 한다고 보았다. 죄인을 위해 죽기까지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주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이해했다. 

 

“내 주의 영화만을 위하여 내 것을 희생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나라는 인간 자체는 내 집을 위하여, 내 애양원 교회를 위하여, 대한의 기독교를 위하여, 오직 신영(神榮)만을 위하여, 나 자체는 녹아지고 썩어지고 낮아지고 죽어지는 희생 자체가 되게 하소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손양원은 그가 그토록 실천하기를 원했던 주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이 자신의 힘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했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했다. 이 모든 손양원의 사랑의 이해는 그가 남긴 기도의 시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온 생애 동안 실천하려고 했는지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과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을 당한 자들이옵고,

부모와 형제의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옵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자들이오나

오 주여, 그대로 난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심지어 나의 일신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된다면 이들과 함께 기뻐하며

일생을 같이 넘기려 하오니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사

어루만지심 같이 내가 참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약 내가 여기서 쫓겨남을 당하여 나가게 될지라도

나는 이들을 사랑하여 쫓겨난 그대로

남은 세월을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랑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로부터 나온 나의 사랑이옵고 또한 주를 위하여

사랑하게 되는 것이매 내 어찌 주보다 더 사랑케 되오리까?

그러나 나의 일신과 부모와 처자보다는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되 

주를 사랑하는 그 다음은 이 애양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무슨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 위하는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해 일른[는]지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을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중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애양원을 위한 손양원의 기도는 마치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기도를 연상케 한다. 손양원은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 주님이 행하신 그 사랑을 간절히 닮기를 원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램이 아니라 일종의 사명이었다. 손양원의 사랑이 위대한 것이 여기 있다. 그 사랑이 인간적인 가식적인 사랑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진정한 사랑이기를 소망한 것이다. 손양원의 기도는 애양원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거짓이 없는 진실된 사랑, 주님의 사랑을 빼 닮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애양원에는 더욱 더 변화가 찾아왔다. 진리에 대한 단호함과 이런 사랑의 실천이 그의 목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은 것이다. 주기철의 목회를 통해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요람이 되었고 견고한 신앙의 터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손양원의 연행

 

부임 후 손양원은 애양원교회 강단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단호한 설교를 계속 외쳤다. 이미 신사참배를 총회가 결정한 상황에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지도자들이 구속된 상황에서 손양원의 이와 같은 행위는 보통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되는 행위였다. 그는 설교 때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으며, 신사를 강요하는 일제는 망할 것이라고 외쳤다. 종말신앙은 손양원에게 새로운 설교가 아니라 이미 평양신학교 입학 전부터 가지고 있던 신앙이었다. 그러나 주기철의 일사각오 설교를 듣고 그와 지속적으로 접촉을 하면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으로 인식한 것이다.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인해 이미 순회전도사직을 사직해야 했지만 손양원은 포기하지 않고 종말론 설교를 하면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자신의 설교를 통해 일관되게 피력했다. 

나환자들의 특수성 때문에 침묵을 지키던 일경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손양원을 연행했다. “전라남도 경찰부에서 경변형사(경변형사)는 여수경찰서 형서를 대동하고 여수애양원교회에서 삼일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시는 손목사님을 검속하여서 자동차로 여수읍 경찰서까지 데리고 오니 때는 1940년 9월 25일 영시 45분경이었다.” 공교롭게도 손양원의 연행은 소화 13년[1938년] 9월 10일 신사참배를 장로교 총회가 결정한지 1년이 된 때였다. 아버지 손 장로는 누가복음 9장 62절과 마태복음 10장 37-39절을 기억해라고 부탁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안용준의 말대로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교훈이다.” 여수경찰서에서 손양원을 “신사참배 거부와 종말론 설교를 문제 삼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체형조서’에는 손양원의 죄목을 이렇게 적시했다: “이자는 쇼와 14(1939)[년] 7월 초순경부터 상기 주거지 소재 율촌 애양원 목사로 취직한 이래 포교 중이던 바 치열한 신사불참배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일상 불온 기괴한 말세론을 설교하여 원내 환자 신도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있는 듯이 들리며 수사한 즉 상기와 같은 범죄 사실을 인정하므로 이에 보고함.” 우리는 여기서 ‘반일사상’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손양원의 설교는 일본 정부가 볼 때는 일본 정부에 대한 저항이었다. 증거를 찾기 위해 경찰이 손양원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1939년 11월 중순 주일 오후 6-7시 애양원교회 설교 “현하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와 1940년 4월 중순 주일 오후 2-3시 애양원교회 설교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를 그 증거로 삼았다. 체형조서에 있는 “현하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 설교 요약은 다음과 같다. 

 

“‘현하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라고 제목한 것으로는 그 원고 내용에도 있는 것처럼 ‘현재 우리 조선 교회는 비상시대이며 수난시대이다. 왜 그런 고 하니 각 국가 간에 전쟁이 있고, 각지에 있어서는 한재, 수해, 악병 환자가 년년 증가하며, 조선에 있어서는 우리 교도에게 대하여 신사참배강요 등으로 해서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것이 즉 말세 현상으로 우리가 대망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도 목첩간에 임박해 있다. 이런 때 현아(現我)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는 불원해서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해서 현대와 같은 악마인 불신자 세력으로 지배되는 각국 통치제도를 멸망시키고 그리스도를 수반으로 하는 신천신지(新天新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고로, 현재 국가 국체를 멸망시킬 때 가장 굳굳한 신자를 요구하는 현상인 고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예지 예정설인 성서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미로 설교했습니다. 그 다음에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라는 제목으로는 ‘세상은 벌써 종말기여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확실히 목첩간에 임박해 있다. 우리 교도들에게 대해서 박해를 가하여 괴롭히던 악마인 현재 각국 통치 제도를 멸망시킬 때는 왔다. 현대의 악한 정치를 변혁시켜서 만국을 통치하실 그리스도가 오신다. 만왕의 왕이 되시어서 세계를 통괄하시는 심판장이 오신다. 만왕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다. 현재 각국국체를 멸망시키면 지상 죄악도 없어지고, 총이나 대포 소리도 끝이고 여러 가지 질병, 흉년, 기갈도 없어지고 신자 각자의 나병도 전쾌되어 영원히 평화하고 행복한 신천신지 하나님 나라가 출현한다’하는 의미의 설교였습니다.”

 

손양원은 1940년 10월 22일 천조대신을 제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신사란 황실의 선조인 천조대신을 제사하는 데인데 나는 일종의 우상이라 생각합니다. 우상을 예배하는 것은 교리상 허락되지 못합니다.” 신사불참배를 선동한 사실이 있느냐는 경찰의 심문에 손양원은 숨기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손양원의 시각 속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회개해야 하고, 만약 그런 강요를 계속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일본제국도 천황이 통치하고 있으나 그 통치권을 천황에게 부여하신 이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으로 ... 일본 국제 통치권을 천황의 손에서 빼앗아서 다른 이에게 이전시킬 수도 있다.” 손양원에게 6.25전쟁도 민족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죄의 결과였다. 

 손양원은 이날 “피고는 성경관에서 오는 유심적 말세론에 기해서 현존 국가의 멸망과 천년왕국 건설의 필연성과를 확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우리는 여기서 손양원이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할 때 핵심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손양원은 분명히 주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설교를 했지만 일제는 그것이 신사참배반대운동과 국체변혁을 선동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설교한 것을 일본의 패망과 심판으로 해석한 것이다.

1940년 9월 25일 연행된 손양원은 10월 22일, 12월 20일, 1941년 3월 20일 3회에 걸쳐 여수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취조를 받았고, 5월 24일, 25일, 7월 17일, 9월 30일 네 번에 걸쳐 공자지방법원 검사국 검사 의전극기(衣田克己)의 취조를 받았다. 1940년 10월 19일 여수경찰서 사법경찰과 사무취급 조선총독부 전라남도순사 금성구웅(金星久雄)은 손양원이 치아유지법 제 5조를 범한 범죄라고 판단하고 광주지방법원을 통해 그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체형조서에 의하면 차압한 강연원고가 증거자료로 첨부되었다. 손양원은 2회에 걸쳐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의 공판을 받아 1년 6개월의 구형과 언도를 받았다. 1년이 지난 1941년 10월 28일 판사가 ‘이제라도 반대하던 그 고집을 버리고 돌이키는 것이 어떤가?’라고 동정적 권유를 하자 손양원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돌이킬 생각은 절대로 없다’고 밝혔다. “첫째는 동방요배, 정오묵도,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금하신 계명이니 할 수 없다. ...둘째는 우상에게 절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법이다. ...셋째는 또 국민된 의무로 못하겠다.”

1940년 9월 25일 연행된 손양원은 광주형무소, 경성구금소, 청주구금소로 옮겨 다니며 1945년 8월 17일 해방 후 석방될 때까지 만 5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손양원은 일제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와 찬송과 성경읽기를 계속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애양원은 사랑의 사도를 만나 행복했지만 손양원이 구속되면서 시련기를 맞았다. 일제는 아예 애양원을 접수하려고 온갖 행태를 다 부렸다. 1941년 미국시민들의 추방령이 내려지면서 윌슨(Robert M. Wilson, 1880-1963) 박사와 크레이그 박사가 애양원을 떠나야 했다. 윌슨은 1905년 미국 워싱톤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05년 남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1912년 광주기독병원을 개원하고 나환자 치료에 전념했다. 1941년 추방될 때까지 35여 년 동안 헌신적으로 나환자 치료와 전도에 헌신했다. 윌슨이 귀국한 후 탈메이지(John Talmage, 1884-1964) 부부가 애양원을 지켜야 했다. 탈메이지는 1910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광주선교부에 거점을 두고 광주숭일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수 애양원을 지원하였다. 탈메이지 부부는 애양원의 모든 법적 권한을 넘기기를 강요하는 일경에 맞섰고, 그로 인해 1941년 12월 7일 일경에 의해 강제로 감옥에 가야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탈메이지 박사는 두꺼운 담요와 두툼한 옷을 입고 경찰을 따라나섰다. 가로 6자 세로 10자 감옥에서 1941년 12월 8일부터 1942년 4월 9일까지 121일 동안 그는 투옥되었고, 가진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결국 일경은 포기하고 그를 출옥시켜 1942년 8월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선교사들의 분명한 태도는 손양원에게 적지 않은 도전과 용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3. 옥중에서 보여주는 손양원의 가족사랑

 

손양원은 애양원을 무척 사랑했다. 그 사랑은 참으로 강도 높은 사랑이었다. 온 몸으로 사랑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가족 사랑을 소홀히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얼마나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를 그가 남긴 편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절제된 사랑이지만 결코 가식적인 사랑이나 보여주기 위한 사랑, 형식적인 사랑은 더더욱 아니었다. 애양원 가족을 향한 사랑만큼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도 진심어린 사랑이었다. 손양원은 애양원 가족들에게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에게 깊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 당시 가장이 아내와 부모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글로 표현하여 전달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 손양원이 옥중에서 쓴 편지에는 상세하게 잘 나타나 있다. 손양원 목사가 옥중에 있는 동안 동인이 통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가 동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식에게는 어린 아들이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형편이 어려워 동신마저 부산 통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42년 6월 13일 자 동인에게 보낸 편지에 손양원은 학교에 입학을 하지 못하고 공장에 들어가 일하는 아들에게 틈틈이 공부할 것과 신앙의 인격을 쌓을 것과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할 것을 부탁했다. 1943년 7월 9일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동인을 위로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우으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님과 어린 동생들을 거느리고 가정의 중한 책임에 연약한 어깨는 얼마나 무거우냐?” 물질적 가치관보다 정신적 영적 가치관을 부모에게 물질적 봉양을 하기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임을 분명히 했다. 손양원은 비록 옥중에 있지만 부친에 대한 공경을 잊지 않았다. 그는 두 자녀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동인 동신아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를 잘 공양하여라. 아버지가 보고 싶으냐? 할아버지와 어미님을 잘 모셔라.” 자신과 가족들이 극도의 고통 가운데 있던 1945년 7월 27일 손양원은 가족의 책임을 맡은 동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먹고 입을 것이 귀해졌다하여 마음까지 잃지 않아야 하고, 음식을 잘 먹는 것보다 마음을 잘 먹는 것이 낫고, 의복으로 몸 단장 하는 것보다 선행을 옷입듯 할지니라. 돈에 서름을 당하고 먹을 것이 없다하여 돈과 밥을 더 가까이 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청렴하는 것이 도인의 태도니라. 그래서 모든 만물은 다 볼 탓이오 마음 가질 탓에 호 불호가 있을 뿐이니라. 물질이 귀함을 탄식치 말라. 물극도통(物極道通)이라 물질이 극하여 도통하는 이치요, 포만안일(飽滿安逸)에는 음란과 모든 죄가 자출하되 기한곤고(飢寒困苦)에는 회개와 도심이 발케되는 것이니라. 또는 지금 물질이 귀하다 함은 너와 나 뿐이 아니라 전 세국(全世局)의 환난이니 단념함보다도, 이중에서 번뇌 근심의 우울에 빠짐보다도 생명의 성장 진리의 도를 구할 뿐이라. 물(物)은 욕구(慾求)하되 구지부득이요 사람의 생사는 인의로 좌우됨이 아닌즉 범사를 주께 맡겨 자연히 태연히 걷는 걸음에서 주의 섭리에 권고가 있을찌니, 너희들은 항상 기뻐 범사에 감사의 생애를 보내라. 이것이 기독자니라. 평시 범상시에는 누가 기뻐 안 하리오. 고난 도경에 감사 기뻐함이 신앙생활이다. 고난을 피하려고 염려하지 말고 도리어 감수하고 극복하라, 피하려 애쓰는 자는 근심이 더해지고 감수하는 자는 진리 발견의 기쁨이 충만! 고난을 감수하니 심중이 낙원이오, 만사를 극복하니 용사보다 강하도다. ......”

 

1942년 11월 15일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고생보다 옥중에 있는 자신에 대한 염려로 근심 중에 있을 부모를 헤아리는 깊은 사랑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아버님, 불초자 양원을 위하여서는 조금도 하렴치 말아주소서. 편부 형제 처자의 간절하온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동은 중에서 면식이 여전하오며 한 덩어리의 주먹 밥 한 잔의 소금 국의 그 진미는 그야말로 선인 요리요 천사의 떡 맛이올시다. 세상에 제일미는 구미인가 보이다. 부모형제들은 기한을 열며하시나 들의 백합화를 곱게 입히시고 공중의 참새를 잘 먹이시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요 하물려 일하는 일군 안먹이겠나이까. 보다도 소자는 본래 식량이 적은 사람이오니 이 밥도 만족이었사옵고 또는 키가 작은 자이오니 이 이불이 발등을 덮으니 총후 국민으로서 이만하면 자족 자만이외다.” 

“동인 모친 전”이라는 이름으로 1943년 8월 18일 보낸 아내에게 보낸 손양원의 편지에는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이 그대로 묻어있다. 

 

 병고 중에서 얼마나 신음 하십니까? 이 같은 염천에 고열도 심한데 가중 병고하니 설상가상이외다. 그러나 신애(神愛)와 진리는 기후와 환경을 초월하니 안심하소서. 꽃 피고 새 우는 양춘가절에 만 신애(神愛)가 있을 뿐 아니라, 백설이 분분한 엄동혹한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며, 오곡백화가 성숙하는 가을 9월에만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천출배(汗泉出盃)를 이루는 이같은 염천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며, 금전옥루에서 산해진미를 먹어 하나님의 사랑을 찬미할 뿐 아니라, 수간두옥(數間斗屋)속에 기한 질고 중에서도 신의 사랑을 찬양할지니 항상 기뻐하시고, 범사에 감사하소서. 당신의 신앙이 능히 병고를 극복할 것을 믿고 나는 안심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도 욥의 고난이 더욱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 보다도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부와 지혜는 나중에 타락의 매개(媒介)가 되었으나 욥의 고와 인내는 최후에 영화가 된 까닭이외다. 사람의 영화는 최후를 보아서 알고 참다운 지혜는 죄악을 떠남이 참다운 지혜이겠나이다.

 안심과 희락은 만병의 보약이오니 모든 염려는 주께 맡기시고 부디 병석을 떠나소서. .....”

 

손양원은 아내에 대해 깍듯이 존칭어를 사용하였다. 옥중에 있어 미안하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손양원은 평소에도 아내에게 그 같은 존칭어를 썼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손양원은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고생을 하는 것에 대한 깊은 미안함이 있었다. 손양원의 긴 투옥생활로 가족들은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손양원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을 것이다. 손양원의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 그러나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신앙의 절개가 이 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손양원은 가족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깊이 이해하며 그 고통의 나날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손양원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신 사랑, 계속 공급해주시는 사랑으로 옥중에서도 사랑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그 사랑을 가족들에게 흘려 보낸 것이다. 가장이 옥중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은 그가 보내주는 편지를 통해 전달해 주는 사랑을 먹고 버틸 수 있었다. 손양원에게는 하나님사랑-애양원[교회]사랑-가족사랑이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님 사랑이라는 거대한 우산 하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애양원 사랑, 나라와 민족사랑, 가족 사랑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확실히 위대한 사랑의 사도였다. 우리가 그를 높이 평가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4. 손양원의 사랑의 정점: 원수 사랑과 순교

 

손양원의 긴 투옥생활도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종식되었다. 해방 이틀 후 8월 17일 출옥한 손양원은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왔다. 윌슨 박사는 전후 1946년 1월 한국에 돌아와 1948년 4월 1일 미군정으로부터 애양원의 행정권을 이양 받아 애양원을 복구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노고와 헌신을 기념하여 애양원의 영문 이름을 “윌슨 나환자 촌”(R. M. Wilson Leprosy Colony)으로 붙였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애양원에 다시 활기가 넘쳤다. 해방 후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온 손양원은 애양원에 영적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교우들의 신앙은 다시 불타올랐다. 특히 강단에서 외치는 손양원의 사랑의 메시지, 능력의 메시지, 그가 보여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의 사랑의 실천은 애양원 가족들에게 큰 감동이었고, 도전이었으며,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위대한 힘이다. 

1946년 3월 손양원은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그동안 못다한 애양원 목회에 전념했다. 애양원은 질서적으로도 평온을 완전히 회복했고 영적으로도 성숙한 공동체로 발전해갔다. 하지만 이런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혀 예기치 않은 또 하나의 위기가 애양원에 찾아왔다. 여수순천반란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깊이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을 완전 점령하고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우익인사들을 대거 처형했다. 순천사범과 순천중학교에 다니는 동인과 동신이 이때 좌익계열 학생들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평소 공산주의 문제점을 파헤치며 반공주의를 표방했던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좌익 학생들이 동인과 동신을 붙잡아 공개 처형했다.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난 이틀 후 1948년 10월 21일이었다. 두 형제는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형제애를 살인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두 형제의 순교 소식은 4일이 지나서야 애양원 교우들과 가족들에게 전해졌다. 반란군이 진압된 10월 26일 애양원 교우들은 두 형제의 시신을 거두어 교회 앞에 안치하고 그 이튿날 장례를 치렀다. 두 아들이 순교한 것은 애양원교회가 이인재 목사를 초청하여 사경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이인재는 손 목사를 위로하고 그의 두 아들 장례까지 집례했다. 장례식 끝날 때 손양원 목사는 아홉가지 감사기도문을 참석한 조객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아홉가지 기도문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기독교인의 진정한 감사가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하는 감사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손동희 권사님도 증언하는 바이지만 애양원교회 사경회 기간 중에 처음 그 소식을 접한 손양원은 두 아들을 잃은 충격과 아픔 속에 대성통곡하며 슬픔을 억누를 길 없었다. 손 목사은 깊은 충격에 빠졌다. 이 때 이인재 목사가 손 목사의 등을 강하게 손으로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손 목사, 두 아들 순교한 것이 뭐 그리 슬퍼. 늘 순교, 순교 했잖아. 그런데 때 묻지 않고 순결한 두 아들을 하나님이 순교 제물로 받으셨으니 얼마나 영광이야! 손 목사 정신 차려!” 손양원 목사는 흔들리던 자신의 신앙의 옷을 다시 여미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 손양원의 아홉가지 감사기도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만[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순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년 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자매들이 23[13]년간 나와 내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아 극진히 사랑했다. 이미 동인 동신 장례를 치르던 그 즈음에 손양원은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자신이 양자로 삼으려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손양원은 그를 고려성경고등학교에 입학시켜 전도사로 키워내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원수까지 사랑하셨던 그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규의 말대로 손양원은 메시지를 통해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랑과 용서’를 전하고 실천했다. 석호인은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사랑의 복음을 몸소 체험하고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며 이로써 전 세계를 감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말로는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한다고 하지만, 손 목사의 경우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죽은 자식 대신 그 사람을 아들로 삼아 사랑을 실천한 것은 드물다.” 살인자를 자신의 집에 들여 자신의 양자 삼고 생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시지 않고는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그를 양자 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손양원은 두 아들에 이어 그 자신도 순교했다. 그의 순교에 얽힌 미담은 그의 순교만큼이나 값지고 아름답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파죽지세로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던 공산군이 호남 일대도 점령하자 애양원교회도 문을 닫고 교우들이 피난을 하였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를 지켰다. 손양원은 교회에 계속 남아 종을 치며 매일 특별집회를 가졌다. 물론 그 자신이 강사였다. 교우들이 그를 피난시키려고 무던히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교우들의 간청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송별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랐다 혼자 가방을 들고 육지로 뛰어 내렸다. 그곳의 교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배에서 내려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지키던 손양원은 1950년 9월 13일 애양원에 들어닥친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보름 후인 28일 11시 여수 근처 미평에서 총살당했다. 영광스런 순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1939년 애양원에 부임하여 나환자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그들과 동거동락하며 마지막 주님의 교회를 지키다 순교한 것이다. 1939년 부임해 1950년 9월 28일 순교할 때까지 13년간 일제의 마지막 강점기와 해방 후 6.25전쟁으로 혼란을 맞는 우리 민족이 가장 힘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 때 그는 선한 목자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다 순교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애양원을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고, 마지막에 두 아들과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것이다. 조지 톰슨 브라운은 Mission to Korea 1892-1962에서 1892년에 시작된 남장로교선교회 한국선교를 최종적으로 정리하면서 손양원 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세계 여러 사람들 가슴을 떨리게 한 이야기가 여수 사건 때 있었다. ... 동인과 동신을 사살한 안재선은 이제 죽을 운명이 되었다. 손 목사는 친구인 목사를 시켜 군사령관에게 가서 자기가 아들들의 살인자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말하며 살려주도록 탄원했다. 사령관은 말문이 막혔으나 마침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이와 같은 사랑을 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은 내 상상을 초월한다.’ ... 손 목사의 위대한 용서의 행위는 온 한국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 2년 후 공산군이 이북에서 침공해 왔을 때 손 목사는 한센 환자촌에서 신실하게 그에게 맡겨진 자들을 돌보다가 체포되었다. 그 뒤에 그는 나무숲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는 그의 두 순교한 아들 곁 한센 환자촌 묘지에 묻혔다.”

 

손양원 목사의 생애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기록한 것이다.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 안용준의 <사랑의 원자탄>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손양원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온 국민에게 전달되었고, 몇 년 전 KBS 다큐로 방영되어 기독교인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맺는 말

 

역사를 빛낸 어느 한 인물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다보면 그를 지배하는 중심 원리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좌우명이라고도 표현한다. 손양원의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통한 이웃 사랑으로 집약할 수 있다. 손양원의 글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글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이웃 사랑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말로 외치기보다 그는 몸으로 실천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며, 삶으로 살아냈다. 그 이웃 사랑에는 애양원, 사랑하는 가족들, 그가 만난 사람들, 일제에 맞서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사랑하는 동료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신음하는 이 민족에 대한 사랑이 포함되었다. 호남과 영남의 갈등과 대립 구도 속에 있는 오늘날 손양원은 호남과 영남을 하나로 잇는 진정한 사랑의 사도의 롤 모델이다. 그가 영남 사람이면서 호남에 가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불태우며 사랑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손양원은 지방색에 깊이 물들어 있는 이 시대 진정한 표상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순교하게 된 것도 애양원의 사람들을 두고 혼자 피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그들 곁에 있으며 끝까지 그들을 돌봐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도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손양원만큼 일생동안 하나님 사랑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며 주님의 명령에 그토록 충실한 삶을 살았던 교회사적 인물도 드물 것이다. 바로 이 사상이 손양원의 생애와 사역과 순교에 그대로 노정되었다.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신앙의 절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진 것이다. 애양원은 그에게 그 하나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너무도 훌륭한 장(場)이었다.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소외자들 중에 소외된 자들을 품에 안고 일생동안 그들과 동거동락했던 손양원은 확실히 사랑의 사도였다. 

그의 생애는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었다. 그토록 가족과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던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에게는 같은 뜻을 펼칠 수 있는 훌륭한 선교사가 곁에 있었고, 그가 흠모하고 존경하는 선배 주기철이 있었으며, 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장(場) 애양원이 있었다. 손양원은 민족의 수난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버림받은 나환자들을 돌보는 것이야 말로, 신사참배강요에 용기 있게 맞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시대적 소명이라는 자의식이 있었다. 손양원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고 원수까지 사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너무도 빼닮았다. 손양원이 실천했던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병립구조가 아니라 신애(神愛) 즉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이웃 사랑이었다. 그에게 이웃 사랑은 모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고 믿고 확신했던 신앙관이었다.(*)-수정 2018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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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 편. “체형조서(體刑調書)(1): 고(故) 손양원 목사.” 「파수군」 제64호 (1957.7): 66-75;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2(제64호-제69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체형조서(體刑調書): 고(故) 손양원 목사(2).” 「파수군」 제65호 (1957.8): 54-66;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2(제64호-제69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체형조서(體刑調書)(3): 고(故) 손양원 목사.” 「파수군」 제67호 (1957.10): 56-66;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2(제64호-제69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體刑調書)(4): 증인 심문조서, 증인 김경호(金敬浩).” 「파수군」 제68호 (1957.11): 60-66;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2(제64호-제69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體刑調書)(5): 증인 심문조서, 증인 신길수(辛吉洙).” 「파수군」 제70호 (1958.1): 73-80;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3(제70호-제75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5[6]).” 「파수군」 제74호 (1958.5): 59-68;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3(제70호-제75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體刑調書)(7): 증인 심문조서, 증인 정왈선(鄭曰善).” 「파수군」 제75호 (1958.6): 65-72;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3(제70호-제75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體刑調書)(8): 증인 심문조서, 증인 정기재(鄭基載).” 「파수군」 제77호 (1958.8): 59-64;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4(제76호-제81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體刑調書)(9)].” 「파수군」 제79호 (1958.10): 61-67;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4(제76호-제81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體刑調書) 10: 피의자 심문조서 (제1회) (검사에게), 피의자 대촌양원.” 「파수군」 제80호 (1958.11): 59-66;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4(제76호-제81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體刑調書) 11: 피의자 심문조서 (제2회) (검사에게), 피의자 대촌양원.” 「파수군」 제81호 (1958.12): 66-73;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4(제76호-제81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체형조서(體刑調書): 고(故) 손양원 목사.” 「파수군」 제84호 (1959.3): 57-64;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5(제82호-제87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체형조서(體刑調書)(13): 고(故) 손양원 목사.” 「파수군」 제85호 (1959.4): 55-62;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5(제82호-제87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체형조서(體刑調書): 고(故) 손양원 목사.” 「파수군」 제86호 (1959.5): 57-64;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5(제82호-제87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체형조서(體刑調書): 고(故) 손양원 목사.” 「파수군」 제87호 (1959.6): 54-59;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5(제82호-제87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體刑調書).” 「파수군」 제88호 (1959.7): 60-66;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6(제88호-제93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고(故) 손양원 목사(17): 체형조서(體刑調書).” 「파수군」 제89호 (1959.8): 61-67;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6(제88호-제93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______ 편. “체형조서(體刑調書): 고(故) 손양원 목사.” 「파수군」 제90호 (1959.9): 60-64; 고려신학교 편. 『파수군(The Watchman)』 Vol. 16(제88호-제93호). 서울: 도서출판 목양,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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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박구서. “孫良源 牧師의 家庭敎育에 대한 基督敎 敎育 神學的 解析: Horace Bushnell의 家庭敎育 理論을 中心으로.” 박사학위논문, 계명대학교, 1998.

박순호. “순교자 주기철, 김화식, 손양원 목사의 설교와 사상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관동대학교 대학원, 2006.

박양수. “손양원 목사의 생애.” 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14.

박준영. “손양원 목사 용서 사례의 기독교상담에의 적용.” 석사학위논문, 고신대학교 기독교상담대학원, 2017.

박철희. “손양원 목사의 설교연구.”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1998.

신상철.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한영시학대학교 대학원 신학대학원, 2012.

오환택. “애양원교회를 통해서 본 여수지역 초기선교: 손양원목사와 서현식목사를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한남대학교 학제신학대학원, 2018.

이규형. “손양원 목사의 순교사상.” 석사학위논문, 케이씨대학교 일반대학원, 2018.

이명규. “손양원 설교 연구: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과 설교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 백석대학교 기도교전문대학원, 2016.

이명재. “손양원의 역사적 사실 재조명: 연대, 인물 및 사건의 쟁점을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 호서대학교 대학원, 2017.

이홍술.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유니사상에 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1993.

장병재.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1998.

전리사. “손양원 목사의 삶에 반영된 참 제자도의 모습(1902-1950).” 석사학위논문, 강남대학교 일반대학원, 2013.

조순호. “손양원 목사 설교 연구.” 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 2012.

최은총. “성경의 빛에 비추어 본 손양원 목사(1902~1950)의 고난.”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3.

 

 

[신문 및 웹사이트]

“나 예수 중독자 되어야 하겠다: 손양원.” 「Godpia 기독교지식」, 사랑의교회. <http://knowledge.godpia.com/sub03/sub_3_1.asp?reg_no=M201203130001>, 2017년 1월 26일 접속.

“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sonyangwon.com/main.php>, 2017년 1월 26일 접속.

“孫牧師追慕禮拜(손목사추모예배).” 「동아일보」. 1950년 10월 26일자, 2면.

“神社不參拜(신사불참배)한 普校生三名退學(보교생삼명퇴학).” 「동아일보」. 1937년 10월 21일자, 석간 2면.

“애양원과 손양원목사” 홈페이지. <http://www.aeyangwon.org/>, 2017년 1월 26일 접속.

“藝術舞臺(예술무대)「香(향)」.” 「경향신문」. 1949년 6월 26일자, 2면.

김윤덕. “내 아버지는 聖者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조선일보」. 2010년 8월 14일자.

장열. “죽음 앞에서 찾은 답 ‘내가 널 용서했잖니…’ 고 손양원 목사의 양손자 안경선 목사를 만나다.” KoreaDaily Los Angeles, 「중앙일보」. 2014년 6월 3일자.

 

 

[회록 및 보고서]

“Minutes of the Southern Presbyteian Mission in Korea for the Year,” 1938.

“경남노회 제22회 노회록,” 1927.

“경남노회 제47회 촬요.”

“애양원교회 당회록.”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제41회 촬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로회 제30회 회록,” 1932.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로회 제41회 회록,” 1938.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5회 회의록.”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회의록』 Vol. 11. 1946-1955(32회-41회).

 

 

[기타 자료]

김승태. “손양원과 신사참배 거부항쟁,”「손양원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자료집」.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0.9.28.

손동희 권사와의 인터뷰.

이상규와의 전화 인터뷰. 2018.11.6.

차종순. “손양원 목사의 삶.” 『용서, 화해, 손양원 목사의 사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사위원회 주최 제3회 한국교회사 포럼 강연록, 2010.

 

 

< 관련사진 > 

김구와 손양원 목사(좌측에서 2번째)
김구와 손양원 목사(좌측에서 2번째)
손양원 목사 안장 후 안재선과 가족들
손양원 목사 안장 후 안재선과 가족들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교회 제직들(1948년 6월 12일)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교회 제직들(1948년 6월 12일)
아들의 묘지 앞에 선 손양원 목사
아들의 묘지 앞에 선 손양원 목사
애양원 부임 후 가족들과 함께(1939년 7월 14일)
애양원 부임 후 가족들과 함께(1939년 7월 14일)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1.03.26 09:54
  • 수정 2021.03.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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