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스(J. Henry. Davies, 1856-1890, 덕배시[德倍時])

 

Ⅰ. 기본사항

    이름: Davies, J. Henry(덕배시) 

 

  1. 생몰연도: 1856-1890. 4. 5.
  2. 출신 및 소속: 호주 / 호주장로회 
  3. 한국선교기간: 1889. 10 – 1890. 4. 5. 

4. 연표

   1856. 8. 22.  뉴질랜드 왕가라이에서 9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

   1860. 부모를 따라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

   1868. 아버지 폐렴으로 소천

   1876. 호주 CBS (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선교사로 자원

   1876. 9. 인도 선교사로 19개월 간 사역

   1878. 5. 21. 멜버른으로 귀국

   1881. 3. 멜버른대학 졸업

         4. 코필드 그래머 스쿨(Caulfield Grammar School) 설립, 교장 취임

   1886. 어머니 소천

   1888. 4. 인도 선교사로 자원 

         5. 한국선교사로 자원 결심

         8. 존 이윙의 권유로 에딘버러 뉴 칼리지로 신학유학

         11. 5.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총회 멜버른 남노회 정기모임에서 한국선교사로 승인

   1889. 5. 30. 호주 벨버른으로 귀국

         8. 5. 목사고시 합격 후 스코츠교회에서 목사 안수

        10. 5. 누이 메리와 함께 서울 도착

               이후 5개월간 한국어 공부

   1890. 2. 5 – 3. 10. 서울 근교 전도사역

         3. 14. 자신의 한국어 선생과 한 명의 고용인과 함께 서울 출발

         4. 4. 약 20일 동안 300마일의 답사여행 후 부산 도착

         4. 5. 부산 도착 후 이튿날 천연두, 급성폐렴으로 소천

  

5. 가족사항

   누이 Davies, Mary. T

   조카 Davies, Magaret Sandiman(1887-1963)

 

 

Ⅱ. 선교사 소개

 

  1. 성장 배경

   Davies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 왕가라이(Wangarai)에서 9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가 4살이 되던 1860년 그의 가족은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한다. Davies의 부모는 플리머스형제단에 속한 신실한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그러나 그가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또한 병약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장남(형은 어려서 사망) 이었던 Davies는 10대 때부터 가장 역할을 한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일하던 법률사무소의 서기로 일하면서 밤에는 공부를 하였다. 

   11세 때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 후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살아갈 것을 꿈꿨던 Davies는 법률 서기직을 그만두고 멜버른의 투락 칼리지(Toorak College)의 교사로 직업을 바꾸면서 멜버른대학교 문과에 등록하였다. 

 

  2. 20세 때 인도선교사로   

   그러던 중 그의 여동생 사라가 1875년 10대의 나이로 인도 남부의 벨로레에 호주 성공회 CMS(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선교사로 파송된다. 어느 날 그녀는 편지를 통해 교사와 대학생활을 병행하던 오빠 Davies에게 인도의 열악한 선교의 현실을 알렸다. 

   이에 Davies는 곧바로 인도로 향한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열정만을 가지고 떠난 인도 선교는 그의 건강악화와 선교훈련 부족 등으로 한계에 부딪혔으며, 결국 1878년 5월 21일 19개월의 짧은 선교를 마감하고 멜버른으로 돌아왔다. 

 

  3. 대학 졸업 후 교육 사업의 길로    

   멜버른대학에 복학한 Davies는 학업에 전념한다. 특히 라틴어와 헬라어를 비롯한 고전어와 자연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난 그는 1881년 3월 졸업하면서 고전어 부분 최우수상(An Exhibitioner and Honour Man in Classics)과 자연과학부분 특별상(A Scholar in Natural Science)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Davies는 강사직 제의 등 보장된 앞길을 뒤로 한 채 선교사로 가기 전까지 교육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1881년 4월 그는 코필드 그래머 스쿨(Caulfield Grammar School)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7년간 재직하였다. 

 

  4. 한국선교사로 자원하다    

   Davies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코필드 그래머 스쿨은 명문 사립학교로 발전하였으며, 그의 삶 또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선교사로 나가길 원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다시 선교지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 Davies는 자신이 교장으로 재직하던 학교를 성공회 목사였던 바넷(Rev. E. J. Barnett)에게 인계하고 1888년 4월 다시 인도 선교사로 자원한다.
   그러나 당시 중국 푸저우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CMS 소속 선교사 울프(Archdeacon John R. Wolfe)가 한국의 부산을 방문한 이후 한국 선교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호주 교회 앞으로 보낸다. 그의 편지는 성메리교회의 메카트니(H.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발행하는 「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으며, 이를 접한 Davies는 인도에서 한국 선교로 급선회한다. 

   그는 CMS 한국 선교사로 지원했으나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니며 아직 한국에는 CMS 선교부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그러자 Davies는 한국 선교사로 가기 위해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소속을 옮겼다. 

   멜버른의 투락장로교회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목회자 이윙(Rev. John F. Ewing)의 도움으로 Davies는 1888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총회 멜버른 남노회 정기모임에서 한국선교사로 승인받는다. 이어 노회의 결정에 따라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6개월간의 신학교육과 시험 등 일련의 과정을 마친 그는 1889년 8월 5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5. 누이 메리와 함께 한국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Davies는 누이 메리 데이비스와 함께 1889년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한다. 시드니를 거쳐 40여 일간의 긴 항해 끝에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에 도착한 Davies 남매는 제물포를 거쳐 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한국에 도착한 첫 번째 호주 선교사들이었다. 

 

  6. 6개월의 짧은 한국 선교 그리고 소천   

   서울에서 보낸 5개월간 데이비스는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면서 동료 선교사과 한국인 매서인 전도자들과 함께 서울 인접지역들 -과천, 수원, 용인 등- 을 답사한다. 그러던 중 선교지역을 결정하기 전에 부산까지 답사여행을 결심한 Davies는 1890년 3월 14일 누이 메리를 서울에 남겨두고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필요한 물품 등을 준비하여 출발하였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 수원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에 이르는 300마일에 이르는 약 3주간의 긴 험난한 여정과 추위와 비 등 궂은 날씨로 인해 그는 천연두와 폐렴에 감염되고 만다. 

   4월 4일 부산에 도착한 Davies는 곧바로 당시 부산에 머물던 선교사 게일의 집에서 머물다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튿날 오후 1시경 34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한국 파송 전 누이 메리와 함께
한국 파송 전 누이 메리와 함께
1884년 코필드 그래머 스쿨의 교사들과 함께 한 교장 데이비스 (앞줄 가운데)
1884년 코필드 그래머 스쿨의 교사들과 함께 한 교장 데이비스 (앞줄 가운데)
내한 후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관에서 발급받은 데이비스 선교사의 한국여권
내한 후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관에서 발급받은 데이비스 선교사의 한국여권
한국여권에 기재된 데이비스 선교사의 이름(덕배시)
한국여권에 기재된 데이비스 선교사의 이름(덕배시)
데이비스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여 한글과 한문을 공부하던 공책
데이비스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여 한글과 한문을 공부하던 공책
데이비스 선교사가 부산으로 답사여행 중 기록한 일기와 선교여행 지도
데이비스 선교사가 부산으로 답사여행 중 기록한 일기와 선교여행 지도
1910년 부산에 묻힌 데이비스 선교사 묘비 앞에서 제수 J. Davies와 조카 마가렛(우측)
1910년 부산에 묻힌 데이비스 선교사 묘비 앞에서 제수 J. Davies와 조카 마가렛(우측)
호주 빅토리아 청년연합회가 데이비스 선교사를 기리며 호주장로교 총회건물 벽면에 설치한 추모명판
호주 빅토리아 청년연합회가 데이비스 선교사를 기리며 호주장로교 총회건물 벽면에 설치한 추모명판

 

** 출 처: 

이상규. “서른세 해의 삶이 찍은 굵은 점 하나.” <크리스찬리뷰> 2009. 10. 7.

http://www.christianreview.com.au/205

 

김명동. “결코 몰라도, 잊어서도 안된다.” <크리스찬리뷰> 2017. 10. 23.

http://www.christianreview.com.au/5404

 

 

Ⅳ. 참고문헌

[단행본]

유영식, 이상규, 존 브라운, 탁지일. 『부산의 첫 선교사들』 .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5.

에디스 커.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역사 1889-1941』 . 서울: 동연, 2017.

정병준.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관련논문]

Sang-gyoo Lee, “A Study of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Work in Korea, 1889~1941,” (Th.D. diss., Australian College of Theology, 1997). 

김인수.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순교자들에 대한 연구.” 「장신논단」 제17집 (2001. 12): 88-106. 

이상규. “호주장로교의 첫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 「부·경 교회사 연구」 제5호 (2006. 11): 75-95. 

정병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형성과 한국선교 동기.” 「한국기독교와 역사」 22호 (2005. 3): 159-191.

“To Korea with Lov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Work in Korea(1889-1941)”
- Lee Sang Gyoo/ Melboure, 2009 -

http://contents.kocw.or.kr/document/lec/2012/YeounSei/LeeSunHo3/8.pdf

 

 

[관련기사]

M. S. Davies. “The Pioneer Australian Missionary to Korea.” KMF Vol.17. No.2 (Feb, 1921): 24-25. 

 

이상규. “서른세 해의 삶이 찍은 굵은 점 하나.” <크리스찬리뷰> 2009. 10. 7.

http://www.christianreview.com.au/205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오헌 실장 정리 **

 

김명동. “결코 몰라도, 잊어서도 안된다.” <크리스찬리뷰> 2017. 10. 23.

http://www.christianreview.com.au/5404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1.04.02 16:13
  • 수정 2022.02.1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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