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 개교 12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총신 120년의 역사, 신앙, 평가: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총신대학교까지 1901-2021

                                              

박용규 교수
(총신대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들어가면서 

총신대학교는 2021년 올해로 120주년을 맞았다. 한국선교 137년의 역사 속에서 총신이 12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럽다. 지난 120년의 역사는 저절로 만들어진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헌신과 희생의 결과로 만들어진 역사요, 하나님이 이끌어 오신 주권적인 섭리의 역사였다. 하지만 세상의 역사가 그렇듯이 120년의 총신의 역사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그대로 남긴 질곡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강조하는 칼빈주의 장로교 전통을 자랑하면서도 지난 역사 속에 어느 때는 인간의 문제가 심각하게 노정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총신을 한국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신 120년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는 1901년 설립된 평양장로회신학교, 해방 후 진행된 1946년 고려신학교와 1948년 장로회신학교(1951년 장로회총회신학교), 그리고 1959년 통합과 분리 후 총신대학교로 이어져 온 역사이다. 이런 역사는 처음 설립된 평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려는 강한 움직임 속에서 진행된 역사였다는 점에서 지난 120년의 역사는 평양신학교 설립, 평양신학교 복구, 평양신학교 계승이라는 역사의 흐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시대(1901-1940), 장로회총회신학교 재건: 평양장로회신학교 복구시대(1945-1960), 그리고 총회신학교, 총신대학교 재건: 평양장로회신학교 계승시대(1960-2021)로 크게 대별해 볼 수 있다. 

한 편의 논문으로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담아내는 것은 사실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도가 필요한 것은 총신의 지난 역사를 통시적이고 총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오늘의 총신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이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처음 복음을 전해준 장로교선교사들이 한국장로교회를 설립했고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했고 졸업생들이 안수를 받고 교회를 맡아 교회, 노회, 총회, 한국교회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총신의 120년의 역사는 신학교와 노회 및 총회, 더 나아가 전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와 맞물려 진행된 역사였다. 하지만 본고는 총신 120년의 역사의 중심 맥을 고찰하기 위해 신학교에 집중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제한된 한편의 논고에서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를 통시적이고 총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사료와 역사적 사건의 선별이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역사의 흐름을 전개해 나가는 저자의 역사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총신 설립 120주년을 맞는 이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서, 또 이 120년의 역사 중에서 30년을 교수로 신대원 입학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40년을 총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또 역사신학을 전공한 한 학자요 목회자로서 가능한 객관적으로 역사를 기술하려고 한다. 우리는 각 시대의 특징을 분명히 이해하되 통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전체 120년의 총신 역사의 중심 흐름을 먼저 파악하며 지난 총신의 120년의 역사를 교회사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총신 120년의 역사를 고찰하는데 중요하게 참고해야 할 1차 사료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 (1916년, 1931년), <신학지남>, 선교회 연례보고서의 평양장로회신학교 관련 기록들, <미국북장로교선교사> I 1984-1934, II 1935-1959, Korea Mission Field, 총신대학교 100년사 2, 3권의 역사 사료, 그리고 신앙과 신학적 입장을 밝힌 문헌들이다. 

본고는 크게 4부로 구성될 것이다. 1부는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장로교미션공의회를 중심으로 한국장로교 선교와 태동에 깊은 영향을 준 선교사들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발전의 역사를, 3부에서는 해방 후 진행된 장로회총회신학교 복구 움직임의 역사를, 4부에서는 1959년 통합과 분열된 후 총신대학교 재건과 발전의 역사를 고찰하려고 한다. 선교 초와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전해온 한국장로교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포함한 전반적인 총신 120년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I. 한국장로교선교와 개척자들: 평양장로회신학교 형성 주역들(1884-1901)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입국하면서 공식적으로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알렌의 입국은 그가 장로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곧 한국장로교 선교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듬해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언더우드가 입국했고 이어 많은 유능한 장로교 선교사들이 속속 한국 땅을 밟았다. 이렇게 시작된 장로교선교를 통해 한국은 불과 선교 25주년을 맞는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때 가히 세계가 주목할 정도의 눈부신 선교지로 발전했다. 

1884년부터 1909년까지 첫 25년 동안 주목할 만한 사건은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 채택, 1893년 장로교공의회 결성, 1901년 제 1회 장로교미션연합공의회 조직과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제 1회 평신졸업생 배출과 독노회 조직, 1909년 한국선교 25주년을 들 수 있다. 이 기간 한국장로교 선교는 초석이 놓여지고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졸업생을 배출하고 공식적으로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따라서 첫 25년 동안 한국선교를 담당한 초기 장로교 개척선교사들은 의심할 바 없이 한국장로교 신앙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4개의 장로교선교회가 한국에 입국해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1884년 알렌의 입국으로 북장로교선교회가 시작되었고, 1889년 호주빅토리아선교회 헨리 데이비스의 입국, 1892년 레이놀즈를 비롯한 남장로교선교회의 선교착수, 그리고 1898년 캐나다장로교선교회의 선교착수로 이어진 한국장로교 선교는 독자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하나의 장로교 설립을 목적으로 삼았고, 이를 위해 1893년 장로교공의회를 결성하고 연례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1893년 처음으로 미북장로교선교회(PCUSA), 미남장로교선교회(PCUS), 호주빅토리아장로회선교회가 참여한 장로회공의회가 조직된 후 나중에 캐나다 장로교선교회가 참여하여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선교사들은 하나의 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하여 전체 한국선교를 함께 논의하고, 진행해 나갔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북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선교회, 캐나다장로교선교회, 그리고 호주장로회선교회는 상호 협력과 논의 속에 한국선교를 추진했다. 이 공의회에서 한국장로교선교를 위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각 선교회가 연합과 협력으로 한국장로교 선교를 실행했다. 1901년 신학교 설립, 1907년 독노회 결성과 12신조 채택 그 모든 과정을 결정한 것도 장로교공의회였다. 하비 칸이 언급한대로 이들이 이 땅에서 이룩한 “한국 초대교회의 역사는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역사이다.”

따라서 1901년 장로교미션연합공의회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물론 한국장로교 선교 태동과 발전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중요하다. 1893년 장로교공의회가 결성되었지만 캐나다장로교선교회가 1898년에 입국했기 때문에 4개의 장로교선교회가 함께 모인 가운데 가진 1901년 장로교미션공의회는 매우 의미가 깊다. 1901년 장로교공의회 때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출신의 27명의 선교사들이 함께 촬영한 역사 깊은 사진 한 장이 있다. 최근 필자는 PHS(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에서 이들 사진 속의 각 인물들이 누구인가를 밝힌 자료를 찾았다. 이들 27명의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장로교 선교와 발전은 물론 한국교회의 신앙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들이다. 이들 27명의 명단과 입국년도 및 출신학교는 다음과 같다. 

1901년 9월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 참석 선교사들(출처- 미국 PHS)
1901년 9월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 참석 선교사들(출처- 미국 PHS)

 

< 제 1회 장로교미션연합공의회 참석자 명단 >

          

이 름                          

입국년도   

소속선교회.     

출신학교

1

F. S. Miller

1892

PCUSA

New York Union Sem.

2

L. B. Tate

1892

PCUS

McCormick Sem.

3

J. E. Adams

1895

PCUSA

McCormick Sem.

4

W. B. Harrison

1894

PCUS

Richmond Union Sem.

5

N. C. Whittenmore

1896

PCUSA

New York Union Sem.

6

A. G. Welbon

1900

PCUSA

San Francisco Sem.

7

W. L. Swallen

1892

PCUSA

McCormick Sem.

8

G. O. Engel

1900

AUS

Basel, Edinburgh Univ.

9

S. A. Moffett

1890

PCUSA

McCormick Sem.

10

D. M. McRae

1898

Can

Dalhousie Univ.

11

C. C. Vinton

1891

PCUSA

Princeton Univ. & Columbia’s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12

W. F. Bull

1899

PCUS

Richmond Union Sem.

13

H. M. Bruen

1899

PCUSA

New York Union Sem.

14

W. B. Hunt

1897

PCUSA

Princeton Sem.

15

W. M. Baird

1891

PCUSA

McCormick Sem.                                  

16

Cyril Ross

1897

PCUSA

McCormick Sem.

17

R. H. Sidebotham

1899

PCUSA

Princeton Sem.

18

A. F. Robb

1901

Can

PineHill Coll. 

19

C. F. Bernheisel

1900

PCUSA

McCormick Sem.

20

W. N. Blair

1901

PCUSA

McCormick Sem.

21

W. M. Junkin

1892

PCUS

Richmond Union Sem.

22

W. R. Foote

1898

Can

PineHill Coll. 

23

Andrew Adamson

1894

Aus

인도장로교신학교

24

E. H. Miller

1901

PCUSA

San Francisco Sem.

25

J. S. Gale

1888

PCUSA

Toronto Univ.

26

C. E. Sharp

1900

PCUSA

McCormick Sem.

27

W. M. Barrett

1901

PCUSA

McCormick Sem.

 

이들 27명에 어떤 이유에서 참여하지 못한 언더우드(H. G. Underwood/ PCUSA, 1885년 내한, New Brunswick Sem.), 그래함 리(Graham Lee/ PCUSA, 1892년 내한, McCormick Sem.)와 레이놀즈(W. D. Reynolds/ PCUS, 1892년 내한, Richmond Union Sem.)를 포함시킨다면 초기 한국장로교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 장로교선교사들은 약 30명 정도이다. 이들은 초기 한국장로교 역사, 신앙, 영향을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개척선교사들이었다. 이들 30명의 선교사들을 선교회 별로 살펴보면 미남장로교선교회(PCUS) 출신은 5명, 호주 빅토리아 장로회선교회는 2명, 캐나다장로회선교회 3명, 그 외 나머지 20명은 모두 미북장로교선교회(PCUSA)이다. 이들 명단을 통해서 우리는 적어도 이들 초기 장로교 개척선교사들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선교사들은 파송국, 파송교단, 출신학교가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 두 국적 출신이다. 당시 캐나다와 호주가 영국령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미국과 영국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장로교 선교를 주도한 것이다. 당시 영미에서 일고 있는 신앙운동과 선교운동은 한국장로교 특별히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이어져 온 총신의 신앙전통과 신학적 뿌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둘째,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초기 선교사들은 모두가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한 장로교단 배경에서 파송 받은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칼빈주의 장로교 전통을 배경으로 한 ‘장로교’라는 정체성이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끈이었다. 

셋째, 이들 선교사들 대부분은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일고 있던 학생자원운동과 복음주의해외선교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해외선교사로 지망한 이들이었다. 불타는 가슴을 안고 피묻은 복음을 들고 미지의 땅을 밟은 것이다. 이들 모두는 전도의 열정으로 불타올랐고 역사적 복음주의 신앙을 견지했으며, 브라운의 말대로 신앙적으로 자질적으로 탁월한 선교사들이었다. 이런 훌륭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해 한국장로교를 형성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넷째, 북장로교선교회 소속 장로교선교사가 전체 공회 소속 장로교선교사 30명 가운데 20명을 차지했고, 이들 20명 가운데 무려 10명이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었으며, 이들이 평양선교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맥코믹출신들이 초창기 한국장로교선교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학교도 평양에서 시작되었고 독노회도 평양에서 조직되었으며, 1907년 첫 독노회장도 맥코믹신학교 출신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장 마펫이 맡았다는 점에서 볼 때 맥코믹신학교는 평양장로교신학교는 물론이고 한국장로교 신학과 신앙 형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개척선교사들은 하나의 공의회를 조직하고 1890년부터 사경회를 개최하면서 한국장로교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 일에 가장 먼저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은 언더우드였다. 그가 1890년 한국의 장로교인들을 모아 첫 사경회를 개최하고 집중훈련시킨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후 사경회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래함 리, 마포삼열, 스왈른 등 맥코믹신학교 출신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집중된 평양선교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평양에서 놀랍게 복음이 확산되면서 그래함 리, 사무엘 마펫, 스왈른, 번하이젤, 베어드, 클락을 비롯한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 한국장로교 선교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II.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 발전, 폐교(1901-1940)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최초로 신학교육을 시작한 것은 1888년이었다. 하지만 목회자 양성을 위해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한 것은 그로부터 13년이 더 지난 1901년이었다. 그 후 1940년 폐교할 때까지 이 학교는 한국의 유일한 장로교신학교로 4개의 장로교선교회가 운영하였다. 

기생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 평양에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가 세워졌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 이미 로버츠 토마스 선교사가 입국해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고 훗날 그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들이 평양의 복음화의 초석이 되었다. 1890년부터 평양선교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1894년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평양 지역의 복음화는 놀랍게 성장하였고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선교지로 부상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지나면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그런 점에서 평양의 교회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오문환의 증언에 의하면 사무엘 마펫이 초기 평양에서 복음을 전할 때 토마스가 전해준 성경을 소지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마펫의 표현을 빌린다면 “나는 그 후에 여러 사람들에게 학습과 세례를 주었고 그 중에는 선천에서 온 … 도마쓰 목사에게 성경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1901년에 설립된 평신은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개강을 연기하다 1940년 폐교할 때까지 40년 동안 한국장로교 목회자를 배출하는 유일한 장로교신학교로 한국장로교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기간의 평신의 역사와 신앙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1916년과 1931년에 발행한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이다. 이 두 요람은 이 기간의 평신의 역사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이다. 1916년 요람에는 학교를 상징하는 학교 인에는 “조선국장로회신학교인”이라고 되어 있다. 신학교 위치를 조선 평양이라고 분명하게 명기하였다. 속표지에 설립년도와 첫 졸업생 배출년도를 명기하고, 평양장로회신학교(이하 평신으로 통일)는 네 개의 선교회가 합력 운영한다는 사실도 밝혔다. 

 

創立 年은 一千九百零一年(창립년은 1901년) 

制 一回 卒業 一千九百七年(제 1회 졸업 1907년)

 

(合力하는 밋손會): 

美國北長老會, 美國南長老會, 英國가나다 長老會, 오스트렐냐 長老會

 

여기서 우리는 평신의 설립년도와 운영주체가 누구인지, 첫 졸업생을 언제 배출했는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평신은 한국에 파송된 4개의 선교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목회자 양성기관이었다. 

 

1. 초기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역사 (1901-1916)

1916년 요람에는 평양신학교의 역사를 압축한 “본신학교 약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평신의 초기 역사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다. 평신의 태동 성격을 아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장로회신학교는 원래 성경을 전문으로 교수하던 사경회 중에서 자연한 결과로 산출하야 점차 조직된 것이라.” 평양신학교의 기원을 사경회와 연계시킨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마포삼열이 1916년 <신학세계>에 기고한 ‘장로회교 신학교 약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지원자들은 평신 신학교 입학하기 전 조사를 위한 3년의 성경반을 반드시 이수하고 통과해야 평신 입학이 가능했다. 이것은 초기 평신의 설립과 신학교육이 선교사들이 주도했고 사경회의 사경반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사경회가 성경공부와 실천에 초점을 맞추었듯이 블레어(Herbert E. Blair)가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과 관련하여 지적한 대로 평신에서도 “성경은 강조되고 연구된 하나의 교과서이다.” 

사경회는 영미에서 널리 실시하던 것인데 한국에서는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한 후 그 일환으로 해마다 실시해왔다. 한국장로교는 해마다 사경회를 개최하여 교인들을 훈련시켰고, 사경회에서 훈련 받은 이들이 정식으로 한국인 목사가 배출되기 전에 목양을 담당했다. 조사를 위한 3년의 성경반을 이수한 사람들 가운데 신학생을 선발하여 신학교육을 시킨 것이다. 

주지하듯이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포함한 한국장로교선교 전반은 장로교미션연합공회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1901년 공의회와 대리회가 실시되기 시작했으며 1907년 독노회가 창립되기 전 한국장로교회는 선교사미션공회 관할 하에 있었다. 장로교미션공의회는 전국적으로 지역 공회위원들로 세분화되었고, 이들 장로교공회원 선교사들은 사경회를 성실하게 이수한 자들 가운데 목사 후보생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을 목사 지망생으로 추천하여 신학교가 입학절차를 거쳐 이들을 대상으로 신학교육을 시켰다. 1900년 평양공회위원들이 목사 후보생을 선발하여 교육하기로 결의하고 공회 헌의를 거쳐 1901년 두 명을 선출하여 신학교육을 착수한 것이다. 1916년 평신 요람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1900년에 평양공회위원들이 상의하고 우기한 사역자중에셔 기개인(幾個人)을 선발하야 신학과로 교육하기를 공회에 헌의하야 채용됨으로 1901년에 평양장대현교회 장로 방기창 김종섭 양씨를 목사 지원자로 선진(選進)하니 간시(干時) 전국교회 중 치리장로는 차(此) 2인과(二人及) 동교회원(同敎會員) 길선주씨와 황해도 장연교회 서경조 제씨 외는 무(無)하엿나니라. 이후로 차제진보되여 일천구백일년 추에 공회가 신학과정위원을 택하야 당시 조사제씨의 공부를 예비(預備)케 하기 위하야 준비하게 하니 해위원이 개회 전에 임시작정한 과정을 보고하야 공회가 일 년만 임시 채용하기로 결정하엿나니라.”

 

1901년 5월 15일 김종섭과 방기창 2명으로 평양대동문 옆 술막골에 있던 사무엘 마펫의 집에서 ‘신학반’(Theological Class)으로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들 두 사람은 모두 마펫이 담임목사로 있는 평양장대현교회 장로들이었고 평양공회위원들이 이들을 목사 후보생으로 추천한 것이다. 김종섭은 마포삼열에 의해 전도받고 평양장대현교회 제직이 되었다. 길선주와 정익로 장로를 전도한 사람이 김종섭이었다. 1902년에 “본교과정위원이 신학 오학년 과정을 제출하매” 공회는 “1년만 임시 채용”하기로 가결하였다. 1903년에 4명이 더 입학하여 6명의 학생으로 증가하였고, 이들을 대상으로 5개년 신학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1904년] 4월 [러일]전쟁으로 1학기 수업을 정상으로 진행할 수 없었고, 그 외 학기는 재학생 6명 모두가 참석하여 출애굽기와 누가복음 주해 수업을 마쳤고 신약서론을 2학기 동안 수강했으며 1학기 동안에 인류학과 설교학을 수강했다. 그들 모두는 앞서 ‘사도시대’와 윌리엄스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마쳤고 현재 2학년에 올라가기 전 규정된 자율학습 과정을 목회 현장에서 밟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또한 훈련수업과 관련하여 구원론과 성령의 직임과 사역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오는 12월과 1월에 2학년의 과정 혹은 그와 동등한 것을 마치고 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1901년 2명으로 시작된 평양장로회신학교는 꾸준하게 성장하여 1904년에는 26명으로 증가했다. 이중 5명이 서울공의위원회, 15명이 평안공의위원회, 5명이 전라공의위원회, 그리고 1명이 경산공의위원회에서 천거한 신학생이었다. 1906년에 재학생이 50명으로 증가했고 반도 세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다. 1907년에는 재학생이 76명, 그 이듬해 1908년에는 4개 학년 98명, 1909년에는 5개 학년 138명으로 증가하였다. 재학생들 중 절대 다수가 평양과 선천 출신으로 1909년 138명의 평신 재학생 중 선천선교부 출신이 35명이었다. 이것은 평양대부흥운동을 지나면서 이 지역의 교회들이 폭발적으로 성장을 해서 은혜를 받은 유능한 젊은이들이 대거 목회자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1909년에 8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졸업생 김필수가 6년 후 1915년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07년 6월에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그해 9월 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해 4개의 장로교선교회로 구성된 장로교미션공회에서 평신이 공식적으로 인준을 받고 신학교 명칭을 “장로교신학교”(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Korea)라고 붙였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신학반(Theological Class)으로 불렸다. 처음부터 장로교공의회가 주관하는 학교였지만 평양공회위원회가 맡아 진행했으나 1907년 이후 더욱 더 4개의 장로교선교회가 평신 교수진에 적극 참여하는 장로교공회의 주관 학교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1907년 6월 20일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그해 9월 독노회 때 목사안수를 받았다.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으며 1909년 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1909년까지 평신은 1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이후 매년 거의 해마다 16명에서 33명이 졸업하여 1915년까지 147명이 평신을 졸업했다. 이들 147명 가운데 절대 다수가 개교회 담임 목사로 전국의 여러 교회를 섬겼으며 이기풍을 비롯한 2명은 제주도에 파송을 받아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3인은 산동성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1명은 블라디보스톡(해삼위)에 파송을 받았다. 또 1명은 일본에 파송 받아 동경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1916년 당시 평신의 재학생은 187명이었고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에는 43명이 재학하여 재학생은 총 23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 신학교”로 발전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인해 평양신학교가 어려움을 겪었으나 1921년 봄 학기에 85명이 입학해 2학년 43명, 3학년 18명, 별신학생 36명 총 182명으로 회복했다. 1921년 9월 가을학기에는 91명, 1922년 3월 봄 학에는 110명이, 1922년 가을학기에는 117명이, 1923년 봄학기에는 108명(1학년 34명, 2학년 35명, 3학년 39명), 1923년 가을학기에는 120명이 평신에서 공부했다. 1924년 봄학기에는 신입생 31명이 입학하고 2학년 48명, 3학년 28명 합 99명이 재학했고, 1924년 가을학기에는 100명(1학년 34명, 2학년 37인, 3학년 29인)이 수업을 받았다.  1926년 봄 학기에 38명의 지원자 중 6명이 탈락하고 32명이 입학하였으며, 2학년 23명, 3학년 30명 합 85명이 1학기 학업을 마쳤다. 평양장로회신학교가 개교 25주년을 맞는 1926년 봄을 기준으로 그동안 평신에서 수업을 들은 전체 재적생은 471명이었고 그중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사람은 396명이었다. 라부열 교장은 개교 25주년을 맞는 1926년 7월 <신학지남>의 “신학교 소식” 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렸다.

 

“本校 創立이 干玆 二十五주년이라 校運이 漸隆하야 卒業生 三百九十六인이오 在籍生이 四百七十一인에 達하엿습내다 莫大하신 主恩을 새로히 感謝하옵나이다.”

  

1926년 가을학기에는 1학년 31명 2학년 26명 3학년 35명 합 91명이 재학하였으며 그해 3학년 재학생 35명 중에서 “구학제대로 졸업한 사람”은 12명이었다. 1931년 봄학기에 115명이 등록했는데 그 중 19명이 대학을 졸업했고 35명이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32명이 성경학교를 졸업했다. 26명이 입학시험에서 떨어져 입학이 거절되었고 당시 신학교 재학생 대부분이 약 30세 가까운 나이였다. 이는 대학이나 중학교를 졸업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33년까지 평신은 57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1934년 당시 그중 92명이 세상을 떠났다. 1934년 학년도에는 평균 약 110명의 신학생들이 평신에 등록했고, 30명이 졸업했다. 점차 대학 출신의 신입생이 증가하여 1935 학년도 4월 45명의 신입생이 입학했는데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평양숭실대학과 중국과 일본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한 자들이다. 1935-1936년 학년도에 평균 110명이 등록했고 1936년 3월 12일 38명이 졸업하여 1936년까지 전체 졸업생이 650명으로 증가했고 이중 많은 이들이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났지만 450명은 그 당시에 현역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1937년 3월 39명이 졸업을 했고 4월에 61명의 신입생이 입학했고 9월 23일 시작한 가을학기에는 1학년 54명, 2학년 38명, 3학년 33명 합 125명이 등록했다. 1938년 92명이 새로 입학했고, 전체 등록생 수는 191명이었으며, 3월에 40명이 졸업했다. 1939년 4월까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은 다음과 같다.

 

<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 현황(1907-1939) >

졸업연도

졸업회기       

졸업생 수

 

졸업연도              

졸업회기              

졸업생 수

1907. 6. 18

1회

7명

1924. 12. 19.

18회

26명

1909. 6.

2회

8명

1926.

19회

(전기- 3. 20)
30명

1910. 6.

3회

27명

1926. 20회

(후기- 12. 22)
12명

1911. 6

4회

15명

1927.

21회

(전기- 3. 15)
16명

1912. 6

5회

11명

1927. 22회

(후기 12. 31)
5명

1913. 6

6회

33명

1928. 3. 14

23회

21명

1914. 6

7회

18명

1929. 3.

24회 

21명

1915. 6

8회

28명

1930. 3. 12

25회

23명

1916. 6

9회

20명

1931. 3. 18

26회

21명

1917. 6

10회

31명

1932. 3.

27회

24명

1918. 6

11회

20명

1933. 3. 15

28회

33명

1919. 12. 20

12회

7명

1934. 3. 14

29회

32명

1920.

13회

(전기- 6. 10)
18명

1935. 3. 14

30회

31명

1920. 14회

(후기- 12. 20)
17명

1936. 3. 12

31회

38명

1922. 12. 20

15회

20명

1937. 3. 10

32회

39명

1923.

16회

(12. 20)
19명

1938. 3

33회

43명

1923. 17회

(12. 19)
33명

1939. 4. 13

34회

52명

 

총 

799명

* <총신 100년사> 에 수록된 졸업생 명단에 기초하여 정리

 

2. 1901-1919년까지 평신의 학제와 입학자격

평신의 학제는 크게 둘로 대별된다. 첫 단계는 1년 3개월 신학교 수업과 9개월 현장실습과 자율학습의 5개년 과정으로 1901년 설립부터 적어도 1918년까지 시행되었고, 이어 1919년 봄학기에 이어 가을학기제를 도입하고 1922년에 완전히 3개년 학제, 1년 3학기 학제로 변경하였다. 5개년 1년 3+9개월 교과과정과 관련하여 1916년 요람에는 “본교졸업연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본교 졸업 년 한은 五개년으로 정함 一. 매년 3월 10일부터 6월 15일까지 3개월반 동안은 학생들이 본교 내에서만 수업할 것 二. 매년 방학 후 8개월 반은 학생들이 기본회에서 교역에서 종사하면서 연습할 것. 但 연습할 과목은 이하 과정표와 여히 개인으로 8개월반 자습공부한 거슬 차년 입학시에 시험을 수하나니라. 

 

위 1916년 요람에 있는 대로 첫 5개년 학제는 매년 3월부터 6월 중순까지 약 3개월 동안 집중교육을 실시하고 나머지 9개월 반은 현장에서 목회를 실시하는 교육 방식이었다. 자율학습의 형식을 취했지만 9개월이 지나 신학교로 돌아왔을 때 반드시 시험을 치르고 통과해야 했다. 교장 마포삼열이 신학세계 창간호에서 밝힌 것처럼 “9개월간은 무교(務敎)에 종사케하여 교회를 주장케하고 사경을 인도케하며 정한 과목에 대하여 자택에셔 자습하여 연구케한 후 차시 귀교시에 시험을 수케하였다.” 처음 19년 동안 진행된 신학교의 5개년 교과과정에서 재학생들이 평양의 신학교에서 와서 수강하는 3개월의 학사과정은 년 중 신학교육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1916년의 경우 학사 일정은 다음과 같다. 

 

< 1916년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사일정 >

일 자

중요학사내용

 

일 자

중요학사내용

1916. 3. 2-3.

입학시험

 

4. 28.

후(後)학기 시작

3. 4.

선(先)학기개학

 

5. 2.

본교이사회

3. 21.

춘계황령제

 

5. 15.

전졸업생 개학

4. 4.

춘기식목절

 

6. 1.

성찬시행

4. 25.

선(先)학기 시험

 

 6. 3-4.

후(後)학기시험

4. 26.

선(先)학기 말일

 

6. 15.

(1) 전졸업생강설회, (2) 교장의 환영회,
(3) 전졸업생회

4. 27. 

휴학일

 

6. 16.

졸업예식

 

 

학교는 매년 3월 소속 노회에서 목사지원자들을 받아 입학생들을 선발했다. 3월 입학 외에 특별하지 않는 경우가 아니면 추후 입학을 불허했다. 노회의 추천 목사후보생들 중에서도 정해진 자격 요건을 충족해야 입학이 허용되었다. 평신 강사회[오늘날 교수회]에서 정한 입학 자격 요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25세 이하의 경우는 입학요건의 자격을 갖춘 대학 졸업생이어야 한다.” 둘째, “27세 이하의 경우는 중학교 졸업생이어야 하고 만약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자는 27세까지 중학교에서 공부한 자”로 정했다. 셋째, “40세 이상의 경우는 특별한 자격이 유하여한다”고 명시하였고, 넷째, 25세와 40세 중간에 있는 자 중에 대학과 중학을 마치지 못한 자는 다음 요건을 구비한 자로 제한하였다. (1) 언문 외에 한문이나 일문이나 영문이나 3문 중에 1문으로 작문할 수 있는 자 (2) 수학과 세계지리를 대강이해할 수 있는 자 (3) 신구약을 다 공부하야 열람한 자 (4) 성경학교나 도사경을 기 4학기 공부한 자 (5) 창세기 출애굽기 복음 중 일 책 사도행전을 공부한 증서가 있던지 차를 강의할 수 있는 자 (6) 천로역정과 구약사기와 조선야소교장로회신경과 요리문답과 교회정치를 강의할 수 있는 자 (7) 3년간 교회 직분으로 시무한 자로 정했다. 다섯째, “신학교에서 3년 공부하는 동안에 조사나 장로직분을 수행치 못한자는 특별 허락 외에는 4학년에 입학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명문화하였다. 교회를 위한 현장 중심의 신학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매년 입학시험을 학교에서 실시하여 신입생을 선발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던 입학절차를 신학교로 따른 것이다. 학사관리도 매우 엄격했다. 과목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3개월 후에 본인이 원하면 다시 시험을 치를 수 있고 통과하지 못할 경우 학생은 반드시 그 과목을 다시 수강해야 했다. 결석이 1/3이 넘는 학생의 경우 교사회[현 교수회]의 특별한 허락이 없다면 해당 과목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신학교 재학생들은 대부분이 장로나 조사로 직분을 가지고 다년간 전도를 열심히 한 이들이었지만 학교가 재학생들을 전도부에 소속하게 하여 전도훈련을 강하게 시켰다. 

 

3. 1916년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진과 이사진

신학교 이사회 구성은 4개의 장로교선교회로 구성된 ‘장로회미션연합공회’에서 이사를 택하는 방식을 취했고 이사회의 이사 임기는 1년으로 제한했다. 1916년에는 최의덕 목사와 위대모 목사, 1917년 왕길지 목사와 원두우 목사, 1918년에는 마포삼열 목사와 이눌서 목사, 그리고 1919년에는 안의화 목사와 업아력 목사가 평신 이사로 섬겼다. 이사회 의장은 마포삼열이었고 서기는 왕길지 목사였다. 이들 이사들은 평신의 설립과 운영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었다. 평신에는 신학교 교사(校舍) 주당위원들을 세웠는데 위원들은 배유지, 방위량, 마포삼열, 곽안련, 마포삼열, 이눌서, 왕길지였다.

1916년 평신 요람에 따르면 1903년 당시 평신의 교수는 마포삼열, 배위량, 소안론, 이길함, 한위렴, 편하설 목사였고, 1904년 교수진은 원두우, 전위렴, 왕길지 3명이었고, 마펫이 2년간 교장에 선임되었다. 1904년 남장로교 전위렴과 캐나다선교회 선교사 푸트(Dr. Foote)가 교수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09년에는 소안론, 이길함, 기일, 이눌서, 배유지, 부두일, 마로덕, 왕길지, 곽안련이 교했고, 1910년에는 마펫, 소안론, 곽안련, 매커친(McCutchen), 엥겔, 푸트였고, 게일, 샤프(Sharp), 벨(Bell)이 교수진에 참여했다. 따라서 원두우, 마펫, 배위량, 소안론, 이길함, 한위렴, 편하설, 전위렴, 왕길지, 이눌서 등 10명의 초기 선교사들은 초창기 평신의 신학과 신앙전통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마펫과 리는 함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평양선교를 개척한 개척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크게 4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19세기 말 학생자원운동과 복음주의해외선교운동의 영향을 받고 한국에 입국한 복음주의 전통의 장로교 선교사들이다. 대부분이 영미 장로교 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입국한 복음전도, 성령의 놀라운 역사, 역사적 복음주의 정신에 투철한 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둘째, 대부분의 교수진들이 평양선교공회원들로 시카고의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다. 이들은 북장로교의 구학파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복음전도와 부흥의 열정으로 불타오른 이들이었다. 셋째, 1907년까지 설립 후 약 7년 동안 첫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평신을 주도한 이들은 장로교 공의회 선교사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평양공회위원 북장로교선교회 선교사들, 그리도 다시 그 중에서도 평양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1901년과 1907년 사이에 주지하듯이 한국장로교는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하며 한국선교의 확장을 견인하는 주역이었고, 그 중심에는 평양이 있었다. 1907년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하던 그해 9월 노회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되고 1916년까지 평신의 교수로 섬긴 선교사들은 모두가 4개의 장로교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설립 후 몇 년 동안 교수진의 변동이 있었지만 약 1906년부터는 학생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해당 과목을 전담하는 교수들이 세워져 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다. 1916년 당시 교수진은 다음과 같다.   

 

< 1916년 현재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진, 담당과목, 출신학교 >

 

교수이름

직책

담당 교수 과목

소속선교회와 출신학교

시무기간

1

마포삼열 

(S. A. Moffett)

교장

신도 교회정치 

성찬 선교사기

미북장로회

(McCormick Sem.)

1901

-1916

2

소안론 

(W. L. Swallen)

교사

도덕학 신구약 해의

미북장로회

(McCormick Sem.)

1906

-1916

3

왕길지 

(G. O. Engel)

교사

교회사기 교수법

빅토리아

(Basel, Edinburgh Univ.)

1906

-1916

4

이눌서 

(W. D. Reynolds)

교사

신도 신약해의

미남장로회

(Richmond Union Sem.)

1906

-1916

5

기일 

(J. S. Gale)

교사

말세학 신약해의

미북장로회

(Toronto Univ.)

1909

-1916

6

곽안련 

(C. A. Clark)

교사

강도법

미북장로회

(McCormick Sem.)

1906

-1916

7

사우업 

(C. E. Sharp)

교사

목사지법 구약사기

미북장로회

(McCormick Sem.)

1907

-1916

8

어도만 

(W. C. Eerdman)

교사

구약해의

미북장로회

(Princeton Sem.)

1911

-1916

9

원두우 

(H. G. Underwood)

교사

신도, 심리학

미북장로회

(New Brunswick Sem.)

1905, 1910-14

10

배유지 

(Eugene. Bell)

교사

신도, 신약해의

미남장로회

(Louisville Sem.)

1908

-1916

11

마로덕 

(L. O. McCutchen)

교사

신구약해의

미남장로회

(Richmond Union Sem.)

1909

-1916

12

라부열 

(S. L. Roberts)

교사

신구약해의

미북장로회

(Princeton Sem.)

1913

-1916

13

업아력 

(A. F. Robb)

교사

교회사기 신약해의

가나다회

(PineHill Coll.)

1915

-1916

14

久保徹

교사

각반국어[일어]

일본교회

1915

-1916

 

* 1916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3-4]에 근거 필자정리

 

위에서 언급된 14명의 교수들 외에도 평신 교수로 오랫동안 봉사한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이길함(Graham Lee, 미국북장로회, McCormick), 전위렴(W. M. Junkin, 미국남장로회-별세, Richmond Union), 배위량(W. M. Baird, 미국북장로회, McCormick), 구례선(R. G. Grierson, 캐나다장로회, Pine Hill), 노세영(Cyril Ross, 미국북장로회, McCormick), 안의와(J. E. Adams, 미국북장로회, McCormick), 하위렴(W. B. Harrison, 미국남장로회, McCormick), 방위량(W. N. Blair, 미국북장로회, McCormick), 한위렴(W. B. Hunt, 미국북장로회, McCormick), 모삼열(S. F. Moore, 미북장로회-별세, McCormick), 최의덕(L. B. Tate, 미국남장로회, McCormick), 편하설(C. F. Bernheisel, 미국북장로회, McCormick) 등이다. 상당수가 맥코믹신학교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신학교가 설립되고 나서 정식 교사나 임시교사로 평신의 태동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전위렴과 모삼열처럼 소천하거나 안식년으로 일시귀국하거나 이길함의 사례에서 보듯이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사를 사임하고 영구 귀국한 경우이다. 

이들 교수진 명단과 담당과목을 통해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당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신학교육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1916년에 접어들어 평신의 교수진은 상당히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둘째, 호주장로교 1명과 캐나다장로교 1명을 제외하면 모든 교수들이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다. 그 중에서도 미남장로교선교회 소속 선교사는 3명이고 8명이 미북장로교선교회 소속 선교사들로 평양장로회신학교 신학교육을 주도한 이들은 미국남장로회선교사들과 미국북장로회선교사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그중에서도 McCormick 신학교 출신들이 초창기 평신 교수진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임교수 14명 가운데 4명이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고, 12명의 주요 시간 강사 가운데 9명이 맥코믹신학교 출신으로 전체 합하면 맥코믹신학교 출신 교수가 전체 26명 가운데 13명이나 된다. 교수 50%가 맥코믹신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초기 성격을 이해하는중요한 열쇠이다. 이것은 적어도 1884년 한국장로교선교가 시작되고 나서 1901년 평양신학교가 설립되고 1916년 평신의 요람이 만들어질 당시까지,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라부열 선교사가 마포삼열의 뒤를 이어 평신 교장에 오르던 1924년까지 40년 동안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 한국장로교의 리더십과 신앙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현상 이면에는 맥코믹신학교 출신 마펫과 리가 평양선교회를 개척했고 평양선교회에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 대거 합류하여 그곳을 가장 놀라운 선교지로 만들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평양신학교를 착수했으며, 신학교를 평양에 유치하고 맥코믹신학교 출신 마포삼열 선교사가 1901년 설립 때부터 1916년까지 교장을 맡으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신 교수 중에는 신구약성경관련 교수들이 전체 14명 가운데 9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평신의 신학교육에서 성경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크고 중요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신학교가 교회를 위한 신학교육을 실시하면서 목회자를 양성했음을 말해준다.

 

4. 1918년 <신학지남> 창간과 그 의의

이 같은 평양장로회신학교 신학교육 방침은 <신학지남>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여기에 실린 수많은 논고들을 통해서 그 영향력은 신학교를 넘어 한국장로교회를 섬기는 차원으로 발전했다. 1918년 3월 창간된 <신학지남>은 처음부터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회에서 경영하는 평신의 기관지였다. 왕길지 편집인은 창간호 사설에서 이렇게 창간의 목적을 밝혔다. 

 

“신학의 진지남(眞指南)은 성경이어늘 엇지하야 차기보(此期報)의 명칭은 신학지남이라 하느뇨. 차(此) 잡지는 성경과 같으냐 결단코 아니라. 차기보(此期報)는 성경으로 진남(眞南)을 삼아 의하야 매기(每期)에 특별히 오(吾)장로교회의 목사와 신학생들에 신학의 광해(廣海)에 방향을 지남(指南)하려는 목적이 잇나니라.”

 

이어 편집인 왕길지 선교사는 <신학지남>의 발간 목적을 이렇게 계속 밝혔다. “오(吾)신학교는 학생들의게 신학의 제 과정을 교수하여도 시기가 부족함으로 만족하게 교수하지 못하는고로 오(吾) 졸업생들이 신학에 속한 문제를 더 공부하랴면 혹 매년에 평양으로 가셔 졸업후 별과를 공부할 수가 잇기는 잇스나 만일교회의 사무나 사사형편(私事形便)이나 원상거(遠相距)나 여행하기를 금하는 경우에는 타(他) 방법으로 용(用)하야 신학지식을 증가할 필요다(必要多)하니라. 차기보(此期報)는 특별히 여차(如此)한 시국(時局) 중에 오(吾)졸업생들을 방조(幇助)하려는 목적이 잇나니라. 오(吾)교회의 목사들이 매주일과 매수요일에 예배당에셔 강설할 시국이 잇스니 차기보(此期報)는 강도문제나 기도회제목에 대하야 방조(幇助)하려는 목적으로 차제일호(此第一號)에는 절반을 강도부에 속하게 하엿노라.” 

 

이것은 <신학지남> 창간 그 출발 자체가 평신의 신학교육의 연장차원에서 논의되고 착수되었음을 밝혀준다. 년 중 3개월 교육과정으로는 신학교육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한 교수회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에게 신학지남을 통해 신학적 성경적 실천적 견문을 넓힐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또한 신학분야와 성경해석 및 설교를 두 축으로 삼겠다는 것은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신학지남>을 향후 신학의 지남(指南)이면서 동시에 강단과 목양을 돕는 성경해석의 보고(寶庫)로 만들겠다는 선언을 의미한다. 이것은 평신이 향후 성경을 신학과 목양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신학교와 한국교회를 이끌고 가겠다는 방향 제시였다. 평양신학교 교수회가 <신학지남>의 영어명칭을 The Theological Review: A Theological and Homiletic Quarterly라고 결정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목차 앞에는 “장로회신학교 교수회 발행”이라고 되어있다. 

1918년 3월 창간 후 <신학지남>은 1940년 10월 25일 폐간될 때까지 22년 동안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지로 자리 잡으며 한국교회 신학발전과 교회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하였다. 이 기간 동안 왕길지(1918-1921), 배위량(1922-1927), 라부열(1929), 곽안련(1931), 남궁혁(1928, 1930, 1932-1940)이 편집장의 책임을 맡았다. 신학교 교장과 발행인을 분리시켜 곽안련(1918-1919, 1922-1927, 1929-1940), 사우업(1920-1921), 라부열(1928)이 발행인으로 섬겼다.

1918년 창간부터 <신학지남>은 평신의 학술지요 기관지로 한국장로교 신학의 보고요, 한국장로교의 신학을 대변하는 대변지요, 한국교회 신학의 방향을 이끄는 말 그대로 지남의 역할을 감당했다. <신학지남>은 평신의 재학생과 졸업생, 교수와 재학생, 교수와 졸업생, 더 나아가 신학교와 전국교회를 연결하는 소통의 창(窓)이자, 브리지(架橋)였다. 1921년 10월 <신학지남> 4권 1호부터는 <신학지남>에 “신학교 기별”이라는 이름으로 신학교의 중요한 소식을 <신학지남>을 통해 정기적으로 알렸다. 이 코너를 시작하면서 교수 라부열은 이렇게 공지했다.

 

<신학지남>에 본교 상황과 본교 졸업생의 소식을 시시(時時) 기재(記載)코져 하오니 본교 신구(新舊)학생은 본교 졸업생의 특별한 소식을 평양신학교로 통지하여 주심을 앙망(仰望)이오며 위선(爲先) 본교 상황(狀況) 수조(數條)를 여좌(如左) 소개하나이다.

 

192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열렸을 때 학교는 총회의 요청에 응하여 신학교 기숙사를 총대들의 숙소로 제공하였다. 라부열은 이 사실을 신학지남을 통해 알렸다. “금년 총회가 평양에 개최됨으로 총회 접빈원(接賓員)의 요구에 의하야 본교 기숙사를 총회원(總會員) 기숙소(寄宿所)로 허락하엿나이다.” 본래의 창간 목적대로 <신학지남>은 학교에서 수강할 수 없는 그러나 꼭 필요한 장로교 역사와 전통을 소개하는 일을 꾸준하게 감당했다. 그 중의 하나가 배위량 선교사의 “미국장로교회사기”이다. 그는 장로교가 미국에서 어떻게 조직되고 발전되었으며, 장로교의 핵심교리가 무엇인지, 총회가 조직되고 19세기 분립의 상황, 미국에 있는 다른 장로교단들, 그리고 장로교의 위치와 역할 차별화까지 아주 탁월하게 기술했다.

<신학지남>이 평신의 신학을 가장 잘 대변하는 기관지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신학지남>에 실린 많은 논고들과 기고자들은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신학과 신앙전통을 이해하는 너무도 중요한 사료라고 판단된다. 정성구의 말대로 “<신학지남>은 평양신학교의 학술지이며 기관지로서 신학교의 입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신학지남>은 교수들의 강단과 같았다.” <신학지남>의 모든 기고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전통에 충실한 장로교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어서 “편집자나 교수들의 사상이 철저히 칼빈주의적이었고 복음주의적이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한국인 교수진이 보강되고 이들이 <신학지남>의 책임과 주요 집필자로 활동하면서 <신학지남>은 한층 더 발전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25년 가을학기 평신의 조교수가 된 남궁혁이 1928년 <신학지남> 편집장을 맡았고, 1927년 귀국한 당시 숭실중학교 교사였던 박형룡, 숭실전문학교 교수 채필근이 <신학지남> 기고자로 초빙을 받아 합류한 후 <신학지남>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들 한국인 교수들의 합류와 한국인 필진의 보강으로 <신학지남>에는 다양한 논고들이 실리기 시작했다. 1927년 이성휘가 평신 교수진에 합류했고, 이어 1928년 박형룡이 평신의 임시교수를 거쳐 1930년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훗날 총신이 <신학지남>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신학지남>은 평신의 신학전통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평신과 총신을 잇는 가교라고 할 수 있다.

 

5. 라부열의 교장 취임과 1930년대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진 

1924년 24년 동안 교장과 교수로 평신을 섬긴 마포삼열이 명예교장으로 물러나고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한 북장로교선교회 라부열 선교사가 교장에 올랐다. 그는 교장에 오르기 전 이미 오랫동안 평신에서 교수사역을 맡아온 영향력 있는 교수 일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교의 리더십 교체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평신의 리더십의 교체는 맥코믹신학교 출신의 리더십에서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의 리더십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1922년에 접어들어 한국의 가장 큰 북장로교선교회 소속 선교사들 40명 중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이 16명으로 11명의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을 능가했고 샌프란시스코(4명), 뉴욕유니온신학교(3명)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공교롭게도 라부열이 교장에 오르기 직전 평신의 학제와 교과과정도 대폭 개편 강화되었다. 1922년 평신이 5개년 1년 3개월과 9개월 현장실습의 학제에서 3개년 과정 1년 3학기제로 완전히 바뀐 뒤에 1924년 라부열이 교장에 오른 것이다. 1924년 8월 라부열과 함께 미국에서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이눌서 선교사가 평양에서 조직신학 전임 교수로 계속 시무했다. 평신 학생회는 이 두 사람을 환영하는 환영식을 성대하게 가졌다. 1924년 10월 30일 평양신학교 이사 최의덕 선교사의 사회로 마포삼열 교장의 퇴임식과 라부열의 교장 취임식이 동시에 열렸다. 이 때 마포삼열은 신학교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총회장 이자익 목사가 축도하고 임택권 목사가 성경을 낭독하고 김성택과 변인서의 기도가 있은 후 신임 라부열 교장이 “본교의 목적”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평신이 마포삼열의 시대가 일단락되고 라부열의 시대로 새롭게 진입한 것이다. 그동안 이사장을 학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남장로교선교회 최의덕 선교사는 1925년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귀국했다. 평신의 교장 마펫과 이사장 최의덕 모두 현직에서 물러난 셈이다. 1925년 봄학기 평신의 교수는 라부열, 이눌서, 왕길지, 곽안련, 부두일, 김선두, 민노아, 구례인이었다. 

교장에 오른 라부열은 바로 그 이듬해 1925년 봄 신학교 환경 정비를 진행해 학교 정문을 철문으로 개선하고 학교 교정으로 진입하는 정문내 도로 좌우와 정원에 여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또한 신학교 이사회는 1925년 가을학기부터 평신교수로 영입되는 남궁혁 외에 한국인 교수 1명을 더 청빙하기로 결정하고, 평신 캠퍼스에 교수 사택 건축 2동을 착수했으며, 또한 학교 보조를 하여 일본 신학교 유학을 하던 것을 폐지하기로 했다. 물론 이 사실을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한국인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가 추론해 본다. 평신의 신학과 한국장로교의 신학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의미를 지닌다. 평양신학교 재단법인(재 조선야소교장로파선교회 신학교 재단법인) 인가를 조선총독부로부터 허락받았다. 

확실히 여러 의미에서 라부열의 교장 취임은 평신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01년에 설립된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라부열이 교장에 오른 뒤에도 꾸준한 발전을 이룩해 1928년에는 평신의 기념비 중 하나인 <성경사전>이 평신 교수들에 의해 출판되었다. 1932년에 접어들어 평신은 수준 높은 7명의 선교사 교수들과 2명의 한국인 교수들을 갖춘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교로 발전했다. 그가 교장에 취임한 후 본래의 평신의 본질적인 신앙전통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이전에 비해 더 한층 학구적인 측면이 강조되었고, 조직신학과 변증학이 강화되었으며, 자유주의와 현대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반박하는 움직임이 더 한층 강화되었다. 이런 변화에 한국인 교수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중에 박형룡은 단연 변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북장로교선교회 소속 선교사 중 신학교 교수로 신학교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마포삼열, 그래함 리(이길함), 클락(곽안련), 게일(기일), 샤프(사우업), 그리고 어드만(어도만)이었다. 이들 외에도 남장로교 레이놀즈(이눌서), 캐나다장로교 럽(업아력), 호주장로교 엥겔(왕길지)이 평신의 교수로 오랫동안 사역하며 영향을 강하게 미쳤다. 평신의 1대 교장과 2대 교장 모두 북장로교선교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국에 파송된 장로회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이 북장로교선교회에서 파송된데다 평양선교를 개척한 이들은 북장로교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 절대 다수였다. 곽안련은 1921년 가을학기부터 완전히 평양으로 거쳐를 옮기고 “교무에 전무”하여 라부열의 증언대로 “본교의 전정에 막대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1925년 평신교수는 교장 라부열, 교수 왕길지, 곽안련, 이눌서, 부두일, 어서만, 조교수 남궁혁이다. 

1925년부터 1931년까지 평신의 교수진에 합류한 3명의 한국인 교수 남궁혁, 이성휘, 그리고 박형룡 모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출신들이었다. 남궁혁은 1925년 가을학기부터 조교수로 평신 교수진에 합류했고 이성휘는 1926년부터 임시 교수로 강의를 맡다 1929년 9월 조교수가 되었고 박형룡은 1928년부터 임시 교수로 강의를 시작했다. 이 같은 변화가 꼭 라부열 교장이 취임하면서 나타난 변화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라부열이 교장에 취임함으로 프린스턴신학교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927년 12월에는 레이놀즈를 책임자로 <성경사전>을 출간했고 남궁혁이 1928년 <신학지남> 편집인을 맡았다. 1928년에도 동일한 교수진이 신학교 교육을 전담했다. 1929년 가을학기에 Mr. Hill이 3개월을, 1930년 봄학기에 Soltau가 2개월 반을 평신에서 교수했다. 1931년 당시 평신의 교수진은 다음과 같다.

 

<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진 >

 

이 름

직 책

담당과목

소속 선교회와 출신 신학교

1

라부열

(S. L. Roberts)

교장

성경해석

 미 북장로회선교회

(Princeton Sem.)

2

마포삼열

(S. A. Moffett)

원로교장

교회학

 미 북장로회선교회

(McCormick Sem.)

3

왕길지 

(G. O. Engel)

교수

성경방언

 호주장로회선교회

(Basel, Edinburgh Univ.)

4

이눌서

(W. D. Reynolds)

교수

조직신학

 미 남장로회선교회

(Richmond Union Sem.)

5

곽안련

(C. A. Clark)

교수

실천신학

 미 북장로회선교회

(McCormick Sem.)

6

어도만

(W. C. Eerdman)

교수

구약해석

 미 북장로회선교회

(Princeton Sem.)

7

남궁혁

교수

신약해석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신, Princeton, Richmond Union Sem.)

8

이성휘

교수

성경해석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전, San Francisco,  Princeton Sem.)

9

업아력

(A. F. Robb)

교수

교회사

 캐나다선교회 

(PineHill Coll.)

10

박형룡

강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실대, 금릉대, Princeton, Southern Sem.)

*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 3.

 

몇 가지로 정리한다면 1916년에 비해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진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첫째, 1931년에 접어들어 전임 교수진들이 확실하게 정착하여 해당 과목을 전담하는 학제로 바뀌었다. 이것은 1916년 이후 이들 해당과목을 담당한 교수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10명의 전임 교수 중에서 4명이 신구약 성경해석을 담당했고, 그의 조직신학, 실천신학, 교회사, 성경언어 담당이 각각 1명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평양신학교가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에 초점을 두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둘째, 외국 선교사들의 경우 7명 중에 4명이 북장로회 선교사이고 미국남장로교, 가나다선교회, 호주장로교선교회가 각 1명씩으로 여전히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교수진이 많다. 

셋째, 가장 눈에 띠는 것은 1931년에 접어들어 남궁혁, 이성휘, 박형룡 등 한국인들 3명이나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진에 합류한 일이다. 이들 모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1931년 요람에는 박형룡은 강사의 직책이었고, 해당과목도 명기되지 않았다. 박형룡이 평신에서 교수한 것은 <신학지남>에 실린 논고를 참고할 때 변증학이라고 판단된다. 비록 한국인 교수들이 평신의 신학교육을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들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1916년 당시 평양장로회신학교 신학교육을 주도하던 중심인물들이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었으나 라부열이 교장에 오른 후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평신 교장을 비롯하여 평신 교수진에 프린스턴신학교 출신들이 가장 많았다. 이것은 1930년대에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며 서서히 평신의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1920년대 후반 신학교 교수진에 한국인 교수들이 대폭 보강되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에 접어들어 평신 이사회도 선교사들과 한국인들로 구성되었다. 과거 이사회 구성은 전적으로 장로교미션공의회 선교사들로 구성되었으나 1931년에 와서 이사회는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참여하는 이사회로 바뀐 것이다. 당시 이사장이 마포삼열이고 서기는 변인서였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사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분

평양장로회신학교 이사회 이사 명단

선출년도

1

왕길지 박사, 김영훈 목사, 최재형 목사, 권찬영 목사

1931년

2

업아력 박사, 변인서 목사, 강학린 목사, 함가륜 목사

1932년

3

강운림 박사, 이자익 목사, 姜鎭晋 목사, 곽안련 박사

1933년

4

마포삼열 마로덕 

1934년

 

위 이사회 명단에서 알 수 있듯이 선교사들과 한국인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1930년대에 접어들어 서서히 한국인들에게 리더십을 이양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4년 당시 신학교 이사회는 14명이었고 그 중 8명은 4개 장로교선교회에서 파송한 이사들이었고 6명은 총회가 임명한 이사들이었다. 

이미 총회와 노회는 한국인들이 주도하였고, 신학교의 신학교육도 한국인들에게 넘기기 시작한 것이다. 신학교 예산은 약 6천 달러였고 그 중의 1400달러는 북장로교선교회에서 감당했다. 한국인 신학교 교수 중 남궁혁 목사의 사례는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지불했다. 

 

6. 캠퍼스의 발전과 1930년대 평양장로회신학교 교과과정

1918년 <신학지남>을 창간하고, 그 이듬해 1919부터 5개년 과정에서 3개년 과정으로 전환했고, 교과과정의 커리큘럼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발전적인 변화였다. 평신이 얼마나 발전되고 체계화되었는지는 1931년 요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평신의 발전은 학제개편, 교수진과 이사진, 외형적인 발전, 학사관리와 입학요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교과과정의 커리큘럼이 대폭 바뀌었고, 입학조건들이 더욱 세부적으로 분명하게 정착되었다. 

 

캠퍼스 시설 확충과 입학 • 학사관리

평양장로회신학교는 평양의 “미국장로회미슌회선교사거유지”에 위치하였고 사방에는 숭실전문학교, 숭의여학교, 숭실학교, 남자성경학원, 여자고등성경학교, 연합기독교병원이 둘러 있다. 1908년 5월 15일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 언덕 위 6,000평의 대지 위에 미국 시카고 맥코믹 여사의 헌금으로 2층 한옥의 신학교 교사가 건립되었다. 8에이커에 달하는 신학교 부지에는 남장로교의 알렉산더 기숙사, 호주장로교의 빅토리아 기숙사, 학교 교사 외에 외국선교사 교수들과 한국인 교수들을 위한 6개의 사택이 들어서 있었다. 그 외에도 3개의 작은 기숙사가 신학교 캠퍼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학교에는 총회가 언더우드를 기념하여 세운 “언더우드 도서관”을 포함하여 3천권의 영어, 중국어, 일어 원서와 한국어 서적들이 있었다. 

평양신학교 건물에는 5개의 교실, 교수연구실 6개, 교장실 1개, 기도회실, 응접실과 실내운동장, 등사실, 도서실 등이 있고 하층에 목욕실이 있다. 그 외 작은 기숙사가 7동이 있으며 그 중 1동을 제외하고는 한국식 건축이었고 전기 수도 책상 부방 식당 등으로 사용되었다. 학교 발전, 특별히 외형적인 학교 건물 확충과정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은 맥코믹여사였다. 신학교 규모가 커짐에 따라 시설을 확충하고 새 교사가 필요한 상황에 이르렀지만 실제로 이를 위한 재정확보가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신학교 당국과 북장로교선교회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1921년 방위량 선교사가 미국 시카고 맥코믹 여사를 방문했을 때 그녀가 평신 신축교사 건축비 전액을 헌금하여 3층의 현대식 새교사를 완공하고 1922년 9월 27일에 봉헌식을 올렸다. 1923년 1월 학감 라부열은 <신학지남> “신학교 통신 신학교 소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알렸다. 

 

본교 신교실은 예기와 갓치 낙성되여 작년 9월 27일에 봉헌식을 행하엿는대 본교 이사회장 전국 최의덕 목사의 사회 하에 본이사원 김선두 목사 기도와 김성탁(金聖鐸) 목사 성경낭독이 잇섯고 선천 양전백 목사의 ‘교회 설립의 기초’이란 제하의 강연이 잇슨 후 라부열 목사의 본교 역사 설명 중에 년 전 방위량 목사 귀국 간선(幹旋)으로 매코맥 노부인이 다대한 금전을 출하야 차교실을 신축하게 된 사실과 또 곽안련 목사 소열도 장로 양인이 건축위원으로 무한 수고한 결과 건축상 제도구조가 완미하게 된 것을 찬하하엿스며 사회 최의덕 목사의 기도에 용력하는 권유가 잇슨 후 방위량 목사의 축복으로 폐식(閉式)하엿사오며.

 

맥코믹여사는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 주도한 평신의 신학교육이 재정적인 압박 없이 놀라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헌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학교 교사가 건립되어 공간이 확보됨에 따라 1923년 3월 주일학교부를 신설하고 전국의 주일학교 교육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1901년 미미하게 시작된 신학교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1931년에 접어들어 평신의 학교 교사도 상당한 규모의 건물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1920년대 접어들어 여전히 입학과 학사관리는 엄격했다. 매 과목 65점 이상을 받아야 학점을 이수 받을 수 있었고, 2과목 혹은 그 이상 낙제한 학생의 경우 반드시 그가 속한 노회에 이 사실을 통지하도록 했다. 어떤 학기던지 3과목 이상 낙제한 재학생은 그 학기 공부를 다시 한 후 재시험을 치러야 했다. 

평신은 1922년 1월 <신학지남>을 통해 “장로교신학교입학조례”를 구체적으로 공지했다. 지원자는 반드시 해 교회와 노회의 추천을 받아 응시해야 하고 일정한 학력, 실력, 영력을 갖춘 자여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입학규례만 보아도 평신 교수회가 전국의 교회와 노회의 협력 속에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신입생을 엄선했음을 보여준다. 소안론 목사의 성경통신과 졸업자는 4, 5과목 시험을 면제 받았다. 

 

평양장로회신학교 5개년과 3개년 교과과정비교

주지하듯이 평신의 교과과정은 1901년부터 1918년까지 5개년 과정이었고, 그 후 1919년부터 점차 학제를 3개년 과정으로 바꾸었다. 5개년 과정도 과목이 처음부터 확정되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조금 변화가 있었다. 1907년 장로교미션공의회 회의록에 수록된 5개년 교과과정은 다음과 같다.

 

 

 

 

 

 

 

 

 

 

 

 

 

장로교미션공의회록에 나타난 평신의 교과과정은 비록 4학년 과목이 누락되기는 했지만 1907년 5개년 과정을 1916년 5개년 교과과정과 비교할 때 과목 수가 적고 학년 간 열람과가 없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중요과목에 있어서 어느 정도 연속성을 지닌다. 이는 1907년에 이르러서는 평신의 5개년 교과과정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3개월의 평신교정에서의 수업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1908년의 경우 4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5월 15일부터 6월 30일까지 진행되었다. 전기에는 마펫, 스왈른, 전킨, 푸트, 언더우드가 맡았고, 후기는 마펫, 엥겔, 휘트모어, 게일, 벨이 맡았다.

1916년 요람에 나타난 교과과정은 1907년에 비해 과목이 3-4개 과목이 더 많다. 이는 3개월 동안 집중 훈련을 위해 교과과정을 강화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다음은 1916년 평신 요람에 실린 3개월의 정규 수업과 9개월의 목회현장에서의 자율학습 교과과정이다.

 

 

 

 

 

 

 

 

 

 

 

 


1916년 당시 교과과정의 각 성경과목은 중국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오늘날에는 익숙하지 않다. 1910년 해리 로즈가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한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는 5년제 평신 교과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를 참고하면 당시 5년제 교과과정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 

5년 과정의 교과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각 학년별 교과과정을 넘어가기 전 1학년과 2학년 사이, 2학년과 3학년 사이, 3학년과 4학년 사이, 4학년과 5학년 사이에 ‘학년간 열람과’를 두어 부족한 과목을 이수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교과과정은 5학년 학제로 운용하고 매학년 3개월 반 정도로 신학교에 거주하면서 수강하도록 교과운영을 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불가피한 결과이다. 3개월 반 동안 수강하지 못하는 필수 과목을 목양을 실천하면서 현장에서 준비하여 새학년 진급 전 시험을 치르도록 계획된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평신의 5개년의 전체적인 교과과정이 교회 현장에 직접 접목할 수 있는 성경 중심의 교과과정으로 짜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분야별로는 성경신학과 성경에 관한 과목이 26과목, 조직신학계통이 16과목, 실천신학과목 17과목, 교회사 관련 7과목, 국어와 음악 교양과목 8과목 등이다.

1919년 가을학기를 도입하면서 처음 실시하다 1922년에 들어서 5개년 과정을 3개년으로 완전 개편하고 학년 사이의 학년간 열람과를 없애 버리고 대신 영미에서 실시하는 쿼러제를 도입해 한 학년 3학기제를 실시했다. 여름 방학 기간과 크리스마스 기간을 제외하고 1년 내내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조정한 것이다. 1922년 변경된 3개년 교과과정을 이전의 5개년 교과과정과 비교할 때 학제 연수와 과목에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는 교과과정 구성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날의 교과과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알차게 운영한 것이다. 매학년 1주일에 18-19시간을 수강하고 성경원어 과목을 개설하여 자격 있는 재학생들이 신약의 원어, 구약의 원어, 영어를 수강할 수 있도록 교과과정을 배려했다. 

3 학기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1922년부터 시행해온 평양장로회신학교 교과과정은 1931년 요람에 나와 있는 교과과정과 비교할 때 “열람강”과목이 학년과 학기 사이에 5과목이 있는 등 몇 과목에서 차이가 있다.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에 있는 새로 개편된 교과과정은 다음과 같다.  

 

 

 

 

 

 

 

 

 

 

 

 

 

 

1931년 평신요람에 실린 개편된 평신의 3개년 교과과정은 신구약성경은 물론 조직신학, 교회사, 실천신학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과목을 이수토록 짜여져 있다. 3개년 평신의 교과과정은 5개년 교과과정과 비교할 때 몇 가지 점에서 변화가 있다. 

첫째, 교과과정 전체를 종합하여 볼 때 신구약성경, 조직신학, 교회사, 실천신학 관련 과목을 균형 있게 배정하려고 노력했다.

둘째, 그럼에도 신구약 성경 전체를 공부하도록 성경중심의 교과과정이 구성되었다. 이 점에서 5개년 과정과 3개년 과정 사이에는 긴밀한 연속성을 지닌다. 신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전체 신구약성경을 공부할 수 있도록 교과과정이 구성되었다. 

셋째, 심리학, 교수법, 예배모범, 권징조례, 청년기지도법을 포함한 교회 목양을 위한 실천적인 과목들이 상당히 보강되었다. 

넷째, 1931년 요람에 있는 3개년 1년 3학기 교과과정의 과목명과 각 성경명칭이 한글명으로 변경되어 오늘날의 교과과정의 과목명으로 정착되었다.

마지막으로 교과목을 면밀히 살펴보면 성경 중심의 신학교육을 실시하되 조직신학, 교회사, 실천신학 등 각 분야의 신학이 서로 연계성과 유기성을 갖도록 교과과정이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 분야의 신학이라도 그 분야의 독자적인 전문성을 강조하기보다 목회자 양성이라는 본래의 신학교 설립 목적에 맞도록 각 신학분야의 유기적 연계성을 통해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는 교과과정을 실천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학교는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학교적인 차원에서 실천에 옮겼다. 1937년에는 신년에 1주일 동안 학교문을 닫고 교수 학생 모두 120개 교회를 방문하여 온 종일 혹은 1주일간 저녁에 부흥회를 개최하였고, 그 결과 120개 장소에서 첫해 200명이 초신자가 생겨났다. 이는 평신이 학교적인 차원에서 실질적인 복음전도와 영혼구원을 위한 영적훈련을 중요하게 다루었음을 증거한다.  

 

7. 평양장로회신학교 신학교육 목적과 신경

평양장로회신학교가 교육철학을 가지고 신학교육을 실시했고, 그 학교의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신앙과 전통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중요하다. 간하배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가장 영향을 미친 인물로 마펫, 클락, 레이놀즈를 꼽았다. 마펫은 저술은 많이 남기지 않았지만 개인 상담과 개인 지도를 통해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보수주의적이었으며 또한 확실하게 칼빈주의적이다.” 1908년 평신에서 교수 사역을 시작하여 1922년 전임교수가 된 클락은 수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레이놀즈는 1892년부터 1937년까지 45년 동안 한국에서 사역했고, 그 중 35년을 평신에서 교수했으며, 1924년부터 1937년 은퇴할 때까지 조직신학 주임교수로 섬겼다. 그는 성경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했고 그런 방향에서 평신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 나라[한국]에서 장로교 선교사역의 중심 센터인 평양장로회신학교는 평양에 위치하고 있다. ...신학교에서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 나라의 전 장로교 사역에 있어서 성경은 오류 없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항상  존중되고 인식되었으며, 그리고 그 가르침은 미국에서의 프린스톤의 역사적 입장과 유사하게 강력한 복음주의와 보수주의 톤으로 특징되었다.”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의 북장로교 선교사 블레어(Herbert E. Blair)는 당시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의 특징을 성경강조, 웨스트민스터신앙표준과 정치조례의 장로교 형태를 강조하는 역사적 칼빈주의적 배경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성경은 강조되고 연구된 하나의 교과서이다.” 간하배의 지적대로 “일반적으로 말해서 초대선교사들의 열심은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적인 그리고 더욱 특별하게 장로교적인 신학을 가르치려는데 있었다.”  평신의 한 교수는 “평양신학교는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가르치는 보수주의 학교였다”고 회고했다.

평신의 교육이념과 교육철학 교육목적 그리고 신앙고백은 1931년 평신 요람에 잘 나타나 있다. 평양장로회신학교가 목표로 삼는 신학교육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교육 목적 제 1항과 2항에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성경을 참으로 밋고 정당히 이해하며 열심히 사랑하고 명확히 해석하며 … 구원의 복음을 완전히 또 단순하게 열심히 전파하기를 노력하는 복음의 사역자를 양성하기로 함[과] 사회적 책임을 심절(深切)히 의식하는 참 그리스도의 사자(使者)이며 … 전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 ‘본교의 목적과 신경’ 제 4항에는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이 지향하는 목표가 “본교는 학생의게 복음주의(福音主義)의 진정한 정신과 차(此)에 대한 개인적 책임감을 고취하고 장려하야 내외국인(內外國人)의게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를 확립케하기로 목적함”이라고 분명히 천명하였다. 평신은 처음부터 성경의 권위에 대한 철저한 신뢰, 복음전파의 사명, 그리고 사회적 책임과 복음주의 정신에 투철한 장로교 목회자 양성을 신학교육의 목표로 삼은 것이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위해 요람에 있는 전문을 그대로 싣는다. 

 

본교의 목적과 신경 

1,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삼으로 진실되히 밧은지라 따라서 모든 신령한 지식의 원천이오 우리의 생활과 행위에 대하야 하나님께셔 주신 준칙인 고로 본신학교의 목적은 성경을 참으에[로] 밋고 정당히 이해하며 성심으로 사랑하고 명확히 해석하며 또 성경 가온대 표현한 구원의 복음을 완전히 또 단순하게 열심으로 전파하기를 노력하는 복음의 사역자를 양성하기로 함

1, 본교는 학생으로 하여곰 성경을 전심연구케 하야 진리의 말삼을 난호아주기 합당한 자격이로 잇고 능력이 잇스며 진실한 목사를 교회에 적당히 공급하야 그 사업을 후계케 함을 목적함으로 이를 위하야 상당한 준비가 잇는 학생의게는 성경의 원어를 교수함

1, 본교는 목자의 의무를 다하며 영적 도덕적 지적 우는 사회적 책임(社會的 責任)을 심절히 의식하는 참그리스도의 사자되며 양을 먹이는 주의 깁흔 목자가 되며 그리스도를 위하야 지혜잇는 전도자가 되며 주안에서 거륵[룩]한 성전을 일우을 숙달한 건축사가 될 인재를 양성함으로 목적함 

1, 본교는 일반학생의게 복음주의(福音主義)의 진정(眞正)한 정신(精神)과 차에 대한 개인적 책임감을 고취하고 장려하야 내외국인의게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따라서 그리스도교회를 확립케하기로 목적함 

1, 본교는 학생의게 연구적 정신을 고취하고 상당한 학력을 통양케하야 졸업한 후 일반 인사의게 존경과 신임을 밧으며 또한 교회의 진리를 옹호하야 거즛된 이론주의를 물니치며 정교리를 보호하고 이단을 막을 만한 인물을 양성함을 목적함, 은혜와 지식을 겸한 완전한 목회사업을 일우기 위하야 보조기관으로 연구과를 치함.”

 

복음주의 정신의 고양은 한국선교열과 건강한 연합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장로교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한국선교를 위해 일치와 연합에 앞장선 것이다. 이미 1905년 9월 11일 한국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 선교회는 복음주의선교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결성했고 Korea Mission Field를 공동으로 발행했으며 한국선교 발전을 위해 많은 분야에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평양신학교는 바른 교리를 보호하고 이단을 막을만한 인물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삼고 이를 위해 ‘장로교회의 역사적 표준 즉 [웨스트민스터] 신경, 요리문답, 정치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신앙의 기초교리로 삼았다. 

 

장로교회의 역사적 표준 즉 신경, 요리문답, 정치권징조례와 예배모범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신앙의 기초교리를 명백하고도 단순하케 충분히 지시한줄 밋는 고로 본신학교는 교리와 정치상 본질에 잇서 이것들을 교육의 표준으로 밧는 동시에 본교의 입장을 명백히 하랴고 좌기와 갓치 신경을 선언함. 

一, 신구성경은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의 계시하신 바로 밋으며 이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대하야 유일무이한 표준으로 밧음 

二,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로 영원히 존재하시고 살아계신 진신 하나님 한분을 밋음

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과 참 인성을 밋으며 또 동정녀의게서 탄생하시고 완전히 무죄하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인속죄하심과 육체로 부활하사 승천하심과 우리를 위하사 대제사장이 되심과 크신 권능과 영광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친히 재림하실 것과 만국을 의로 심판하실 것과 그의 모든 원수에 대하야 완전히 승리하실 것과 맛참내 그의 나라를 성부께 밧칠 것을 밋음 

四, 성신의 절대적 신성과 인성과 또 창조와 섭리와 구원, 특히 신자의 중생과 성결과 영광 주장하심을 밋음 

五, 하나님 압헤셔는 천하 만민이 다 죄인인 것을 밋으며 끗까지 회개치 안는 경우에 이 죄의 대가로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 사망할 것을 밋음 

六,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밋은 자들은 성신의 권능으로 중생하야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을 밋으며 또 이외에는 구원 엇을 길이 업는 줄노 밋음 

七, 의인과 불의한 자의 몸이 반드시 부활할 것을 밋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자들은 영생 엇을 것을 밋음. 

 

위 신앙고백은 1907년 채택한 12신조로 알려진 대한장로교회신경과 전체적인 맥을 같이한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된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육목적과 신경이 1931년 평양신학교 요람에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1901년 평신이 설립되고 1938년 평신이 폐교당할 때까지 평신의 신앙전통과 신학교육목적이었다고 이해해도 맞을 것이다. 

여기 있는 평신의 신학교교육목적과 신경을 통해 평신의 신앙과 신학전통이 무엇인가를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성경을 신조와 신학교육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실천에 옮겼다. 성경이 신학교육목적과 신경에서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둘째, 평신은 장로교 전통에 충실했고, 장로회 유일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중요한 장로교 신조로 채택하고 실천에 옮겼다. 셋째, 성경을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로 믿고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 육체적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을 믿는 성경과 종교개혁의 전통에 충실한 장로교 목회자를 양성하려고 하였다. 넷째,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복음주의의 진정한 정신을 고취하는 목회자 양성을 교육 목적으로 삼았다. 이는 당시 자유주의 전통과는 달리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앙노선을 확고히 한 것이며, 사회와 문화적 책임을 등한시 하는 근본주의와 달리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심어주는 것을 중요한 교육 철학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복음전도에 충실한 실천적인 목회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상당한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일반인들에게 존경과 신임을 받는 목회자, 은혜와 지식을 겸비한 목회자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평신이 표방하고 있는 신학교육은 너무도 분명했다.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을 실시하여 말씀의 사역자, 말씀대로 실천하는 장로교회 목회자 양성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리문답 12신조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적 책임 구현을 신학교육의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이 모든 것은 종교개혁이후 진행된 역사적 복음주의 전통과 칼빈주의 장로교 전통을 계승한 목회자 양성이 신학교육의 목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0년대 이미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가 세계신학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프린스턴신학교마저 신학적으로 변천을 맞고 있을 때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칼빈주의 장로교 목회자 양성, 사회적 책임과 복음주의 정신에 투철한 목회자양성, 이단과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목회자양성, 복음전도에 충실하면서도 상당한 학적 지식을 갖춘 은혜와 지식을 겸비한 목회자 양성을 모토로 삼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한편으로 현대주의와 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 근본주의 분리주의를 거부하고 종교개혁과 장로교 전통에 충실한 칼빈주의 복음주의 목회자 양성을 신학교의 교육 목적으로 삼고 실천한 것이다. 

 

8. 평신의 마지막 폐교와 <신학지남> 폐간(1934-1940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던 1934년 평양주재 선교사들과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매우 낙관적으로 미래를 전망했다. 1935년 11월부터 평양에서 신사참배강요의 바람이 이전보다 강하게 불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그로부터 몇 년 후 신학교가 폐교될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는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예견했던 것보다 강렬하고 용의주도하게 진행되었다. 1936년 5월 한국천주교가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이어 그 이듬해 1937년 6월 한국감리교가 그리고 1938년 9월 한국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38년 6월호 신학지남 ‘신학교소식’란을 통해 중요한 학사일정을 알렸다. 1938년 2학기 개학을 9월 29일 9시에 실시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공지하고 신학지남 9월호를 통해서 다시 공지했다. 하지만 장차 험난한 여정을 예견한 교장 라부열은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기 바로 직전 1938년 8월 29일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 가을학기 개강을 당분간 연기한다고 알렸다. 1939년 겨울학기도 연기되었고, 이어 봄학기 개강도 불확실했다. 이런 일련의 신학교 학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39년 3월 15일로 예정되었던 정기 이사회를 앞당겨 2월 1일 소집했다. 신학교는 신학지남 1939년 3월 호 ‘신학교 소식’란을 통해 이사회의 중요 결정을 통지하였다. 

 

  一, 본신학교 이사회는 지난 2월 1일 오후 4시에 라부열 교장 댁에서 회집되여 종전대로의 여러 가지 보고와 임원 개선이 있은 다음 라교장이 안식년으로 귀국하는 동안에 교장사무취급은 곽안련 목사에 위임하기로 하고 특히 본교개학문제에 관하야는 다음과 같이 결정되다. 

(가) 금춘 4월에는 개교치 못하고

(나) 내 추계 9월에 개교여부는 이사회실행부에 일임하기로!

(다) 실행부는 곽혜방, 라부열, 곽안련, 윤하영, 제씨로

二, 금춘에 통신수험으로 졸업할 사람은 오십여명이라고

三, 금춘 4월부터 좌기조건에 적응한 자에게 통신수험은 개시하리라고

(가) 2학년 3학기(6학기전부)까지를 전부필업한 자

(나) 제 3학년 1학기는 수업하였으나 제 2학년 제 2학기나 제 3학기를 필업하지 못한 자 이상

 

47명의 졸업반 학생들이 통신으로 학업을 마치고 1939년 4월 13일 졸업했고, 추가로 5명이 졸업 요건을 충족하여 졸업장을 받았다. 평신의 마지막 졸업식은 마치 예수님의 마지막 성만찬처럼 애찬회, 졸업기념예배, 졸업예배 순으로 진행되었다. 34회 졸업식이 평신의 마지막 졸업이었다. 졸업생들은 계속된 개학 연기, 통신 수업,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다면 정상적으로 수업을 들은 재학생들 모두를 졸업시키려는 교수들의 의지를 눈으로 목도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졸업식이라는 것을 예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학교 당국은 학교를 폐교한다고 공식 발표하지 않았다. 1939년 신학지남 XXI권 4호에는 “본교 이사회실행부에서는 본교 추기개학을 래 8월 31일 오전에 가기로 결정”되었음을 공지하였다. 하지만 학사 일정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신학교 교장 대행 곽안련은 1939년 8월 21일 “기보한 본교 추계개학에 대하야는 각재학생들에게 좌기와 여한 통지문을 발송하였다.”

 

主恩中 貴體萬安하심을 仰祝하나이다. 새로운 形便의 因하야 前日 廣告한 八月 三十一日에는 開學하지 못하고 此를 當分間 延期하게 되었읍니다. 다시 通知할 것을 기다리시고 爲하야 祈禱만이 하여 주심을 바랍니다. 8월 21일 代理校長 郭安蓮.

 

신학교 대리교장 곽안련은 이런 사실을 신학지남을 통해 전국에 공지했다. 사실, 신학교 당국은 폐교를 한다고 공식 선언하지 않고 “개학을 연기한다”고 통지했다. 평신 이사회는 1939년 총회에 참석하여 신학교에 대한 보고를 하는 한편 “우리의 신학교를 폐교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 개강을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열도록 만들어 주실 때까지 단지 연기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주지시켜주었다.” 교수회는 교수들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하고 개학을 준비하였으며 그동안 <신학지남>, <표준성경주석> 등 책임자들을 선정하여 각자의 책임과 역할을 맡겼다. 평신은 1940년 사실상 폐교에 들어갔으며 52명이 졸업한 1939년 4월 13일 거행된 제 34회 졸업식이 결국 마지막 평신 졸업식이 되고 말았다. 

이미 평신은 1936년부터 큰 변화에 직면하였다. 한국선교의 개척자 중 한명이요, 평양선교회 초석을 놓았고 1901년 평신 설립부터 교장으로 교수로 섬기며 30년이 넘게 신학교를 섬겼던 마펫이 1936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3년 후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곽안련이 헌정의 글에서 밝힌 것처럼 ‘조선교회의 아버지’와 같았던 마펫의 소천은 ‘전 조선교회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1935년 10월 22일 캐나다선교회 업아력(A. F. Robb) 선교사가 세상을 떠났고, 호주장로교선교회 왕길지(G. Engel) 선교사도 31년 동안의 선교사역과 교수 사역을 은퇴하고 1937년 3월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39년 5월 24일 멜보른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1937년 6월 평양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조직신학을 교수하였던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역시 45년간 한국사역, 그 중 31년의 평신 교수사역을 마친 후 은퇴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1936년 이후 평신은 너무도 큰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엥겔의 뒤를 이어 호주장로교선교회 커닝험(F. W. Cunningham)이 후임자가 되었고, 1937년 9월 학기부터 “이눌서 교수 대신으로 순천게시든 구례인 목사께서 조직신학 담임교수로 취임하였다.” 1937년 클락이 안식년을 맞아 본국으로 귀국했다가 1938년 9월 1년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동안 그 과목은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가 대신 맡았다.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던 1938년 그해 5월부터 신학지남에도 이미 뚜렷한 변화가 찾아왔다. <신학지남> 5월호 첫 페이지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총후보국강조주간을 맞이하면서”가 실렸다. “금번 총독부에서 거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를 특히 ‘국민정신총동원 총후보국강조주간’으로 조선에서 일제이 지키도록 결정”한 것에 대한 일종의 후속 조치였다. 1938년 5월 호 <신학지남> 분량도 대폭 조정되었다. 편집인은 편집의 말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금월호 본지는 당국의 지시에 의하여 3분의 1로 감혈(減頁)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평신교수회가 자발적으로 첫 페이지에 국민정신총동원 글을 실은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 다음 호 신학지남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우리는 지금 난국을 당하야 우리의 신앙을 굳게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려면 우리 손에 쥐인 하나님의 말슴을 숙독해야 하겠고 –또 열심히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1938년 11월호부터 이성휘 교수가 그동안 연재하던 “출애굽강해는 사정에 의하야 중지하고 히부리서해석”으로 갑자기 바꾼 것도 출애굽강해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식민지배의 저항을 부추긴다고 일제 당국이 의심의 눈총을 보냈기 때문이다. 

의주에서 모이는 제 28회 총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동작’이 있기를 빌었지만 전혀 총회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신사참배를 결의로 영적 중추신경이 끊어진 총회는 친일을 넘어 일제에 부역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궁혁이 신학지남 1939년 9월 권두언에서 “이 시대에서도 교회는 어떠한 존재 이유와 의의를 가지는지? ... 교회는 이 시대에 무엇을 공현하며 이 시대 중에 처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그런 문제의식의 발로로 해석된다.

1939년 크레인이 미국에서 안식년을 지내고 있었으며, 로버츠와 커닝험도 1939년 여름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교회사 학과장으로 내정되어 1939년 가을학기 예정이었던 솔터가 사임하고 북장로교선교회를 떠나면서 가을학기 리차드 베어드(Richard Baird)가 그를 대신하여 가르쳤다. 확실히 평신은 1936년부터 급격한 교수진의 변화, 신사참배의 도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직면하였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오랫동안 실천신학을 교수하던 찰스 알렌 클락(C. A. Clark)이 평신의 임시 교장으로 섬겼고 블레어(W. N. Blair), 힐(H. J. Hill), 해밀톤(F. E. Hamilton), 킨슬러(Francis Kinsler) 등이 폐교 전 평신의 교수사역을 맡아 진행했다.  

평신이 이런 변화와 위기의 시대에 직면했지만 신학생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1938년 3월 31일 시작된 1학기에 1학년 신입생이 90명이나 입학했고 2학년이 49명 그리고 3학년이 43명 합 182명이나 되었다. 신학지남 편집인이 밝힌 것처럼 이것은 “예년에 비하야 초기록”이었다. 1938년 신입생이 90명이나 되고, 1935년 30명이던 졸업생 수도 1939년 52명으로 증가했다. 곧 다가올 신사참배로 인한 위기의 시대를 준비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라고 해석된다.  1938년 평신은 개강을 연기하였지만 신학교육은 1938년 평신에 들어온 마지막 입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통신으로 2년 동안 더 계속되었다. 자율학습으로 신학교육을 진행한 것이다.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정한 총회는 그 이듬해 1939년 신학교를 복구하기로 결정하고 채필근을 교장으로 선교회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학교를 공식적으로 개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신학교위원회는 장로교공의회에 평신 건물을 임대해줄 것을 장로교공의회에 요청했다. 하지만 평신의 실질적 소유권자인 장로교공의회는 1939년 9월 29일 서울에서 모임을 갖고 32대 7의 투표를 통해 정부의 신사참배 요구사항을 충족하면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거부하고, 학교의 설비와 시설을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이양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새신학교에 관하여. 우리가 신학교를 열수 없었음으로 총회는 필요한 모든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고 새 신학교 설립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신학교가 인가를 받고 공식적으로 4월에 문을 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모든 학적부를 넘겨 달라고 요청했으나 우리는 우리 신학교가 폐교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개강을 연기했을 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 독립 채산 아래 장로교 공의회가 그 신학교 건물의 법적 소유권자이고 그것을 관리해왔다. 지난 1939년 9월 온 종일의 논의 후 공의회는 양심상의 이유로 우리는 현재 요구되는 요건 하에서 인가를 요청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음으로 그 밖의 어느 누구에게도 그들이 이 일들을 행하도록 신학교 건물의 어떤 것도 빌려주거나 양도할 수도 없고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의했다. 따라서 누구도 우리 신학교 건물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는 장로교공의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총회가 일방적으로 채필근을 교장으로 설립한 후평양신학교에 대한 협력을 사실상 거부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자 후 평신의 설립자들과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평신의 건물을 점거하려고 시도했다. 장로교 공의회가 투표를 진행하기 전 이미 후 평신 학생들은 평신의 기숙사를 점령하였다. 후평양신학교는 평양신학교 당국에 평신의 학사 기록을 넘길 것을 요청했으나 당시 임시 교장을 맡고 있던 임시 교장 클락(C. A. Clark)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학생이 요청할 경우 그 요청을 들어주어 250명 가운데 80명의 학부생 학적부를 넘겼고, 학생들이 요청하는 학교에 있던 텍스트와 학습 자료는 그들에게 판매했다.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 이후 진행된 불확실성의 연속으로 인해 본래 세웠던 평신의 기숙사, 시설, 예배당, 도서관, 교수사택, 기금, 장학금 확충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 

 총독부의 검열과 신사참배의 무서운 강요로 자의적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도 신학지남을 발행할 수도 없는 위기의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었다. 신학지남은 편집여언에서 이렇게 간구했다. “펜테코스테- 이때에 성령이 임하시여서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은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아니합니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우리를 인도하소서.” 신학교육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22년 동안 지속해오던 <신학지남>도 1940년 9월 폐간을 맞았다. 폐간호 신학지남은 보통 때보다 2개월 이상 늦게 출간되었다. 신학지남은 폐간하면서 첫 페이지에 이렇게 공지했다.

 

“社 告!!

讀者 여러분께 깊이 謝過하나이다! 其間의 深甚한 愛護를 받어오던 中 今番 用紙關係로 不得己 本誌를 本號限 廢刊하게 되오니 深深 照亮하심을 千萬仰望하나이다. 

 

昭和 十五年 十月     日

 

神學指南社 白 

愛讀者 各位

 

1918년 이후 22년 동안 큰 탈 없이 계속 발행해오던 신학지남이 용지관계로 폐간한다니 무슨 당치 않는 말인가!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폐교당한 것이고 <신학지남>도 폐간을 당한 것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수들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고 편집인의 한국인 조사가 투옥된 상태여서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들었다. 1941년 3월 평신은 2년 7개월 동안 문을 닫았고 그동안 한국인 관리자는 끊임없이 위협을 당했다. 

 

9.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영향과 평가

 

평신은 한국장로교만 아니라 전체 한국교회와 사회 더 나아가 민족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1901년부터 1940년 평신이 폐교될 때까지 38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가 한국장로교와 사회와 민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 기관이었고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이 운동을 한반도 전역으로 저변 확대시킨 주역이었다. 1907년 당시 평양장로회신학교는 개강수련회부터 강력한 성령의 부으심이 임했다. 당시 졸업생이었던 길선주가 전국적으로 활동하며 부흥의 불길을 한반도 전역으로 실어 날랐다.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이자 장대현교회 담임이었던 이길함, 스왈른, 헌트, 번하이젤, 블레어 모두 대부흥의 주역이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었다.

(2)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07년 첫 졸업생 7명이 처음 조직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때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로 임직을 받거나 해외선교를 지망했으며, 한국장로교 조직과 발전에 중심 역할을 했다. 독노회 조직 불과 5년 만에 한국장로교는 1912년 총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신학교가 신학생들에게 복음전도와 해외선교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민족복음화의 열기를 불어넣어 한국장로교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중요한 틀을 제공했다. 선교사들의 리더십 하에 평양장로회신학교 출신들이 전국의 주요 교회 담임을 맡아 한국장로교 성장과 발전을 견인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평양장로회신학교 출신들에 의한 놀라운 복음의 확장, 즉 “구평양장로회신학교의 승리와 성공의 비결은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알고, 사랑하고, 그 표현하는 진리대로 가르치고 전하게 하는 올바른 신학교육에 있었다.” “교회의 올바른 신학교육, 바른 신앙생활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교회 전체가 무너짐을 면’할 수 있었다. (3)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18년 <신학지남>을 창간하여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바른 신학의 방향을 제시하고 목회자료를 제공하는 등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토대를 구축했다. 1918년 창간된 <신학지남>은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신앙과 전통을 가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목회자들에게 신학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남의 역할, 일선 목양의 향방을 바르게 이끌고 나가는 목양의 지남 역할을 감당했다. 

(4) 평양장로회신학교는 기독교 민족운동의 중심 기관이었다. 삼일운동의 서명자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고 이중 7명이 장로교인이었으며 그 중 다섯 명이 평신을 졸업했거나 재학했던 인물이었다. 평양에서 삼일운동을 전개할 때 장로교 숭덕학교에서 함께 모여 행진했고, 당시 평양시내의 장로교인들과 총회장 김선두, 평양장대현교회 담임 길선주, 부목사 변인서, 평양산정현교회 담임 강규찬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기념식과 예배를 드리고 시가행진을 했다. (5) 1920년대와 1930년대 평신 출신 목회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계몽운동을 선도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금연금주운동, 농촌운동, 청소년운동, 주일학교운동, YMCA, YWCA, 청년면려회를 비롯한 다양한 청소년운동을 주도했다. (6) 평신과 평신출신들은 신사참배에 단호하게 맞서며 일제강점기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1938년 한국 장로교선교회의 평양장로회신학교 폐교 결정은 신사참배를 수용하면서 신학교를 운영하기보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선언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기독교 민족운동의 주역 이승훈, 김병조, 양전백, 유여대 등 3.1운동 서명자들, 산정현교회 담임 강규찬(당회원 조만식 장로)을 비롯한 사회계몽운동의 선구자들,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주역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이기선, 주남선 모두 평신 출신이었다.

40년의 평신의 역사는 분명 질곡의 역사였지만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너무도 훌륭하게 쓰임받은 영광의 역사였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했지만 선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신학교육을 실시하기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폐교하는 쪽을 택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너무도 큰 영적 유산을 물려준 것이다. 1901년 설립된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약 40년 동안 한국장로교의 유일한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수많은 목회자를 양성하며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공헌했다. 1901년부터 1940년까지 40년의 평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면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미북장로교선교회, 미남장로교선교회, 캐나다장로회선교회, 호주 빅토리아선교회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장로교공의회를 결정하고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한국인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한 일이다. 

둘째,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01년 설립부터 1938년 폐교하기까지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왔다는 사실이다. 1925년 남궁혁을 필두로 이성휘와 박형룡 등 3명의 한국인 교수가 영입되었지만 평신의 1대와 2대 교장 모두 선교사들이었고, 평신의 신학교육을 주도한 이들은 바로 이들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이 신학교육을 주도하였고 자연히 이들의 영향력이 신학교육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특별히 언더우드, 마포삼열, 이길함, 이눌서, 곽안련, 편하설, 소안론, 게일을 비롯한 평신에서 교수하는 선교사들의 강의는 평신에 재학하는 신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자연히 이들의 리더십이 신학교육에 반영되었고 신앙과 신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 선교사들을 통해 선교사들의 신앙과 정신이 한국인들에게 전해졌다. 한국장로교 목회자의 유일한 목회자 양성기관인 평신에서 교육을 받고 여기서 배출된 장로교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을 견인했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은 한국장로교 목회자 양성만 아니라 한국장로교 신앙과 신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셋째, 4개의 장로교선교회 가운데 미북장로교선교회와 남장로교선교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중에서도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 대거 교수진에 합류하여 신학교육을 주도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한국장로교에 깊이 미치게 되었다. 신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하고 있을 때 곽안련 선교사는 모교에 보낸 편지에서 평신을 “한국의 맥코믹신학교”라고 불렀다. 그만큼 평신은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 신학교육을 주도했고, 한국에서 맥코믹신학교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학교를 운영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맥코믹신학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적으로는 구학파 전통을 계승했지만 무디 부흥운동과 학생자원운동, 그리고 19세기 복음주의해외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평할 수 있다.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한국장로교 선교, 특별히 평양을 중심으로 선교를 진행하면서 교회가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충만한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교회로 세워져 부흥운동, 해외선교,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라는 중요한 가치를 실천하는 목회자 양성을 모토로 삼았다는 점이다. 역사적 칼빈주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 전통에 충실한 복음주의 노선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학교육의 이념과 사상은 신학교 요람에 분명하게 명시되었고, 1905년 결성된 복음주의연합공의회 결정을 주도한 것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넷째, 1920년대 말부터 평신 안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한국인 교수들은 신학교와 총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했다. 남궁혁이 <신학지남> 편집인이 되었고 박형룡은 총회신학조사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총회가 주도하는 표준성경주석 편집 위원장을 맡았다. 1930년대에 접어들어 <신학지남>에 진보 노선의 글들이 등장했고 박형룡은 ‘정통주의’를 강조하며 신학적 보수성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신학교과 총회 안에 이와 같은 신학적 갈등의 표출로 인한 이런 변화의 움직임은 결국 해방 후 한국장로교의 신학적 지형에 변화가 일어나고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예견하는 분명한 전조였다. 

 

 

III. 장로회총회신학교시대: 평양장로회신학교 폐교와 복구기간(1940-1960)

 

주지하듯이 평양장로회신학교가 1938년 개강을 연기하고 2년 동안 통신으로 교육을 실시하다 1940년 폐교하였고, <신학지남>도 2년 동안 발행을 계속하다 1940년 폐간했다. 1940년 평양장로회신학교가 폐교되고 이어 <신학지남>마저 폐간된 후 1960년까지 20년 동안 옛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지만 이 기간은 어두움과 빛이 공존하는 쉽지 않는 여정이었다. 이 기간은 다시 1940년부터 1946년까지, 1946년부터 1954년, 1954년부터 1960년까지 기간으로 나뉠 수 있다. 1940년부터 1946년까지는 참으로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던 암흑기였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암흑기 동안 한국장로교 총회는 정통성을 상실했고 평양장로회신학교도 깊고 어두운 터널의 시대로 진입했다.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평신에서 오랫동안 교수하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한국인 교수들도 망명을 떠났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던 1938년 9월 박형룡은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고, 교장 라부열은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났으며, 최초의 평양신학교 한국인 교수 남궁혁도 그 이듬해 1939년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1940년 1월 <신학지남> 18쪽 박형룡의 논고 “신관념의 유래” 마지막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신학지남> 공지가 게재되었다.

 

본사(本社) 주간(主幹) 남궁혁 박사(南宮爀 博士)는 지난 [1939년] 십일월(十一月) 하순(下旬)에 상해(上海)에로 여행(旅行) 중(中) 박형룡 교수(朴亨龍 敎授)는 동경(東京)에 체류(滯留)하시면서 표준주석편찬(標準注釋編纂)에 진력(盡力) 중(中).

 

남궁혁은 상해로 ‘여행,’ 박형룡은 동경에 ‘체류’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썼지만 사실상 망명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물론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신학지남>에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를 비롯한 박형룡 박사의 변증적인 논고들이 몇 편 있지만 그것은 일본의 망명 현장에서 전해주는 논고였기 때문에 이전의 영향력과는 확실히 달랐다. 1942년 마지막 남아 있던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떠나고 한국에는 한명의 선교사도 남아 있지 않았다.

 

1. 1945년 해방 후 신학교 재건 운동

해방을 맞은 그 이듬해 1946년 본국으로 돌아갔던 선교사들이 하나둘씩 한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미국 남북장로교선교회, 호주장로교선교회, 캐나다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하지만 옛 평양신학교를 다시 복구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남북이 분단되었고 평양신학교는 북한 공산주의 치하에 위치했으며 장로교회가 놀랍게 부흥했던 서북지역도 북한에서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이를 반대하는 외국선교회와 거리두기를 하면서 한국장로교 총회에서의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1946년 한국으로 선교사들이 돌아오기 시작할 그 즈음 마포삼열에 이어 평신을 이끌고 온 평양장로회신학교 2대 교장 라부열 선교사가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양신학교 복구 책임을 맡아야 할 강력한 리더를 상실한 것이다. 1947년 4월 윌리엄 뉴톤 블레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여전히 평양장로회신학교에는 164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고 교장 김인준은 투옥된 상태였다.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에서의 신학교 현황은 확실히 1938년 당시와 너무도 달랐다. 그것은 1938년부터 1946년 사이에 한국장로교가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과거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장로교단의 유일한 신학교였지만 신학교가 폐교된 후 조선신학교(1940), 고려신학교(1946)가 설립되어 여러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신학교가 북장로교선교회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선교회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1947년 4월 이 학교 재학생 51명이 조선신학교의 교수진, 특별히 김재준의 가르침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총회에 조사를 요청했다. 이들 51인은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조선신학교의 교육이념을 수긍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총회 조사위원회는 학생들의 요구가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제시했다.

 

[조선신학교] 개혁안

一, 이사회 00건

1. 총회에서 이사 7인을 선정 파견할 것

2. 각 선교회에서 1인식 이사 4인을 파견할 것

3.학교측 이사 1인, 설립자 측 이사 1인

4. 이사장은 총회장이 취임할 것

5. 무보수 상임이사를 설치하여 학교운영을 적극 추진(推進)하게 할 것

   상임이사 수 총회 측  1인, 학교 측  1인, 선교회 측 1인, 설립자 측 1인 

   각 이사장을 加할 것

6. 상임사회는 월 1차 정기월례회를 개하고 학교운영을 검토하고 기획할 것

7. 교수는 상임이사회에 추천에 의하여 전체이사회의 결정과 총회의 인준을 득한 후 채용할 것

二, 교수자격 심사

1.  현교수와 강사는 신앙고백서와 총회에서 제시한 문제에 의한 신학교 논문을 제출하여 심사 후 인정할 것

2. 교장은 이사회의 추천으로써 총회의 인준을 득한 후 취임할 것

3. 교직원은 장로교교인에 한하되 신앙생활에 일정 년 수(15년)를 경과한 자로 할 것.

 

총회는 이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만일 총회에서 제출한 개혁안에 순응하지 않을 시에는 특별위원으로하여 조선신학교는 [인가를] 취소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5월 15일까지 신설하여 운영케 할 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보수적인 이사들과 교수들을 보강하고 앞으로 조선신학교 교수 자격 심사, 절차, 인준 과정에서 총회가 적극적으로 감독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이를 거부했다.

 

고려신학교 설립과 신앙노선

이 사건에 앞서 1946년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 해방 후 출옥한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진해에서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고려신학교를 설립했고, 메이첸을 따르는 독립선교회 소속 선교사들과 정통장로교선교회 선교사들이 교수진에 합류하였다. 고려신학교의 설립모토는 분명했다. 옛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복고하겠다는 것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가 만주봉천신학교에서 교수하던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청빙하였고, 조선신학교에 재학하던 51인 동지들이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한 고려신학교로 적을 옮긴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고려신학교는 총회의 인준을 받지 않았고 받으려하지도 않았으며, 총회도 고려신학교 졸업생들을 교단의 강도사로 인허하지 않았다. 

교장에 취임한지 불과 6개월 후 박형룡은 고려신학교 교장을 사임하였고, 박윤선이 교장으로 신학교를 이끌었다. 1949년 당시 105명의 학생이 이곳에 재학하고 있었다. 1950년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은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어디로 가나?”에서 2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 그는 신사참배문제를 비롯한 죄악에 대한 회개가 한국장로교에 없다고 개탄했다. 고려신학교가 “분규파”가 아니라 한상동, 주남선 목사가 외치는 것은 회개하고 나가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방 후 5년 동안 회개가 “명백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치리회의 권위가 떨어지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둘째, 그는 장로교회가 본래 가지고 나오던 칼빈주의 신학을 그대로 가지지 못하고 도리어 이신학적 경향에 섞여 흘러가고 있는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래의 정통주의는 성경무오의 교리를 믿으며 그것을 그 체계의 초석으로 가집니다. 그러나 김[재준]교수는 그 교리를 가지는 사람을 옳지 않게 봅니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의 권위를 기록의 무오에 두지 않고 살아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수립하는데 성공한 오늘에 있어서 승산 없는 옛 싸움을 반복하는 것은 자력소모에 불과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위기 신학자 뿌룬너 박사가 어떻게 심하게도 칼빈주의 신학의 일대 표현인 웨스트민스터신경을 배척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경은 성경의 권위를 기록의 무오에 두었으나 위기신학자 뿌룬너 박사는 성경이 그 원본에도 그릇된 것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의 죄악을 청산하는 것과 본래의 한국교회의 칼빈주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을 중요한 모토로 삼았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복구하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을 “한국의 참된 장로교회”로 생각하고 신사참배를 한 이들을 사탄의 세력으로 이해하였고, 자신들만 정통성을 계승한 적자로 인식했으며, 총회의 인준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고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장로교를 주도할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아야 할 고려신학교는 설립자 한상동 목사와 박형룡 박사 간의 의견대립, 총회의 불인준, 경남노회의 고려신학교 인준 취소로 인해 장로교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고려신학교는 미국 칼 매킨타이어의 ICCC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와 연계하여 분리주의 노선을 걸었다. “고려신학교 설립자와 직원 일동”은 “태국반곡회의”에  “‘우리는 세계기독교연합회[WCC]를 반대합니다.’ ‘우리는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입장을 지지하며 기뻐합니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송했다. 1950년 4월 박윤선은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어디로 가나?”라는 소책자에서 WCC가 “신신학자 위기신학자 사회복음주의자 등이 그 주동인물이 되어 있다”고 지적한 뒤 “세계기독교연합회(WCC)의 비를 아는 선진국가의 교회(미국교계)에서는 벌서 거기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한 세계적 단체를 조직학 명랑한 진리의 기빨을 날리고 있습니다. 이 귀한 단체의 명칭은 기독교 연합회(ICCC)라고 합니다. 이 단체의 주장은 순연한 재래 복음주의 신학을 보수하자는데 있습니다. 이 주장에 공조하는 교파들이 많이 이러나 벌서 29개국에서 온 61교파 대표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작년 12월 태국의 방콕에서도 이 귀한 회(국제기독교연합회)가 모여 거기 모였던 세계기독교연합회와 대립하는 태세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 후 박윤선은 WCC와 ICCC의 핵심 교리를 비교하는 표를 만들고는 ICCC에 대해 이렇게 집약했다. 

 

국제기독교연합회

1. 성경을 그대로 믿고 재래의 개혁파교리를 그대로 지키기 위한 운동임

2. 개혁파의 중요한 신조들을 그대로 파지(把持)하는 십대 교리를 내세웠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무오설을 믿으니, 이는 만전적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그릇됨이 없음을 믿음.

2)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음.

3)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또 참 사람이심을 믿음.

4)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을 믿음.

5)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을 믿음.

6)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부활을 믿음.

7)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셨고 사람이 믿음으로만 받음을 믿음.

8) 구원 받은 자의 영원한 복과 구원 못받은 자의 영원한 고통이 있음을 믿음.

9)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속된 자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영적 통일이됨을 믿음.

10)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교리와 생활의 순결을 파수하여 유지할 필요를 믿음.

3. 진리적이고 영적인 통일만을 찾고 비진리파와 합가리 위하여 진리를 배제하는 일을 적극 반대한다. 

상기 비교표에서 그 내용을 우리는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 장로교회는 이지음 어떠한 태도를 취하여야 합당하겠습니까? 영혼을 이난의 대세주의에 맡기지 않고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탁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은 밝히 판단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세계대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성경의 합동하지 않고 우리개혁파교회의 교리에도 합당하지 않음을 압니다. 개혁파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지상의 명령으로 여깁니다.

 

박윤선은 ICCC의 교리와 가르침이 개혁파의 교리와 일치한다고 확신하고 한국장로교회가 ICCC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하게 촉구했다. 교장 박윤선의 입장이 곧 고려신학교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정체성을 ICCC 노선에서 찾은 것이다.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총회의 인준을 받지 않았고 독립선교회 외에 타 선교회와 교류를 금하고 교단 전체나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사회와 거리두기를 하며 분리주의 노선을 걸어 간 것이다. 고려신학교는 졸업회기도 평양장로회신학교 회기를 따르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분리주의를 표방하는 고려신학교는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연속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분명히 한계를 노정했다. 역사적 칼빈주의와 역사적 복음주의 노선의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매킨타이어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와는 성격과 노선이 분명 달랐기 때문이다. 박윤선의 그와 같은 주장 이면에는 고려신학교에서 교수하는 매킨타이어 ICCC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의 영향이 직 간접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1948년 서울 장로회신학교 설립

예장총회는 조선신학교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데다 총회가 마련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경영 조선신학교개혁안”을 거부하였고, 고려신학교가 총회의 인준을 받지 않았고 또 받으려하지 않는 상황에서 게다가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을 사임한 상황에서 제 3의 신학교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48년 6월 3일 총회가 주도하여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선교사들은 이 학교가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재설립이라고 해석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를 임시교장, 구례인을 명예교장, 윤하영 한경직 두 사람과 선교사 중 한 명을 교수로 정하고 선교회에 협조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돌아온 선교사들도 이 학교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 학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총회 주도의 장로회신학교의 설립은 분명 옛 평양장로회신학교 정신과 신학의 복구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사참배의 분명한 청산과 친일파 청산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학교의 미래는 담보할 수 없었다. 신사참배를 한 목회자들이 대거 참여했고, 총회가 신사참배문제를 분명하게 청산한 것도 아니었고, 신학적으로 WCC를 지지하는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총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거나 신학교육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당시 1948년 장로회 총회신학교가 과거 평신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했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 안에는 한국의 역사적 장로교 전통을 계승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강했다. 1948년 장로회신학교의 설립은 조선신학교와도 차별화되고 고려신학교와도 차별화되는 총회를 배경으로 한 한국장로교의 목회자 양성을 위해 꼭 필요했다. 이 학교에 대해 <북장로교선교사 1935-1959>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신학교와 관련하여 1947년 총회의 결정에 따라 총회의 주류를 형성한 많은 보수적인 목회자들은 ‘장로회신학교’라고 부르는 제 3의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여러 해 동안 평신의 교수를 지낸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이자 표준성경주석 편집인이었던 박형룡 박사가 학장에 선임되었다. 이 그룹은 한국장로교의 주류를 대표하고 그들이 ‘자유주의’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근본주의’로도 분류할 수 없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북장로선교회의 많은 이들이 여기에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미국 북장로교선교회가 여기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뉴욕북장로교 해외선교부가 허락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학교가 총회의 인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어 열린 총회에서 그 학교는 쉽게 인준을 받았다. 선교회는 이제 양 신학교와 자유롭게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가 총회가 요구하는 점에 대해 분명히 하는데 실패한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선교회는 조선신학교와 협력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다. 조선신학교는 선교회에 가르치는 교수진 파송을 선교회에 구체적으로 요청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장로회신학교는 선교회가 이사를 파송해 줄 것과 킨슬러 목사가 신학교 교수로 섬겨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에 응하여 선교회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 학교에서 다른 선교사들도 또한 파트타임으로 가르쳤다.

 

확실히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 안에는 조선신학교, 고려신학교, 그리고 장로회총회신학교라는 분명한 3개의 신앙 흐름이 존재하였다. 이들 각 학교의 중심인물도 점차 분명하게 구형되어 나갔다. 조선신학교는 김재준과 송창근, 고려신학교는 한상동과 박윤선, 장로회총회신학교는 박형룡과 한경직으로 대변할 수 있다. 신앙의 순결과 정체성을 표방하는 이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장로교의 분열의 움직임이 1951년에 접어들어 눈에 띠게 감지되었다.

 

2. 1951년 재편된 장로회총회신학교 설립 

 1951년 5월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노회 총대 일동은 총회가 제 36회 대구 총회의 결의대로 장로회 신조 1조를 위반한 자를 치리하고, 또한 용공사상과 신신학사상을 권장하는 세계기독교연합회(WCC)와 관계를 제고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렇지 않다면 “정통신학과 순복음주의신앙과 장노회 헌법정치에 어그러진 처사에 항의를 지속할 것이며 대한예수교장로회경남(법통)노회로 나아갈 것이다”고 천명했다. 1951년 5월 28일 고려파신앙동지회는 한국신학대학의 김재준은 치리하지 않고 “정통신학과 복음주의 신앙과 헌법을 준수하는 법통경남노회를 총회가 앙압(枊压)한 것은 이야말로 진정한 장로회 정신을 망각한 불법처사”라고 강력히 항의하며 분열의 수순을 밟았다.

결국 이듬해 1952년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고려파가 분립되었고, 이어 1952년 4월 29일 조선신학교 이사회, 교수회, 동창회 역시 1951년 제 36회 총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4개항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분열의 길을 걸었다. 1952년 4월 대구에서 회집한 총회에서 김재준과 서고도 선교사를 면직하기로 결의하고 경기노회에 시행을 명하자 1952년 5월 16일 목포노회는 ‘총회결의의 비법성,’ ‘한국신학대학의 압살,’ ‘김재준 목사의 파면결의는 위헌이며 수치이다’ ‘서고도 선교사에 대한 처단결의는 비법임은 물론이고 한국교회와 민족의 수치이다,’ ‘김재준 목사와 서고도 선교사를 지지하는 사람도 그와 동일한 처단을 한다는 결의는 비법임과 동시에 신앙양심의 유린이요 위협이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학교의 복잡한 갈등 속에서 총회는 1951년 5월 세 학교의 인준을 취소하고 총회가 직접 관장하는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51년 9월 18일 대구제일교회에서 개교식을 거행하고,”  감부열(Archibald Campbell)을 교장으로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은 대구 대신동 283번지에서 장로회총회신학교가 시작되었다. 박형룡, 계일승, 명신홍, 한경직 등이 교수진에 합류했다.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잠정 이를 허락했다. 519명의 학생들이 선발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 신학교가 되었다. 북한에서 피난 온 피난민들과 신학생들이 대거 이 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 행정은 아담스 선교사가 거주하던 사택을 사용했고, 180명의 학생들이 함께 학교의 교실들, 채플홀, 지하실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대구의 두 교회(West Gate & West-South Gate)에서도 수업이 진행되었다. 1952년 봄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첫 졸업식에서 105명이 졸업했고 그중의 84명이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해방 후 1948년에 설립된 서울의 장로회신학교와 1951년 대구에서 시작한 재편된 장로회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목적과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안식년을 맞아 감부열 선교사가 교장직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이사회가 이를 거절하고 대신 킨슬러에게 학장대리를 맡겼다. 대구교회들이 헌금을 해서 옛 아담스 주택 근처에 신학교 건물을 지었고 미국의 교우들의 지원으로 남녀 각각 1동씩 기숙사가 건축되었다.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에 의해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고, 겨울 방학 동안에 학생들이 남한 전역을 다니며 많은 교회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감부열이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후 바로 교장직을 사직하고 박형룡이 교장에 올랐다. 이 학교는 1953년 10월 서울 남산으로 학교를 옮겼다. 처음에는 상급반이 이전했고 겨울 방학이후 준비작업을 거쳐 남산에 옛 신궁에 신학교 자리를 만들어 전체가 이전했다. 이후 남산신학교로 알려졌다. 1956년 이 학교에는 627명이 재학했고 1958년에 111명의 남자와 여자들에게 졸업장을 수여했다.

 양극단으로 흐르는 조선신학교와 고려신학교가 분열되어 나간 상황에서 장로회총회신학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이 시대에 복구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1954년 <신학지남>의 속간은 그런 움직임을 가장 잘 대변한다. 속간호에는 “성경관의 제상”(박형룡), “그리스도의 명칭”(권세열), “칼빈주의 근본정신”(명신홍), “신학사조의 최근 경향”(계일승), 그리고 “한국기독교사연대표”가 실렸다. 장로회신학교 박형룡은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한 신학교가 되기를 원했고, 과거 평신의 신학교육 전통을 장로회 총회신학교 안에 구현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신학지남> 속간호 권두언에 그대로 나타난다. 

 

1903[1901]년 1월 평양에서 2인의 학생으로 개교된 장로회신학교는 … 1938년 진리에 순하여 폐교하였다. 동교의 남은 사업을 완수할 뜻을 품고 그 폐허에 평양신학교가 일어나 다년간 교역자 양성에 종사하였으며 해방 후 동교의 전통을 남한에서 계승하고자 서울 장로회신학교가 일어나 기년간 ‘칼빈’주의 정통신학의 교육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1950년 가열한 전쟁 중에 38선이 잠개(暫開)하고 전국의 교역자 신학생이 남한에서 회합한 뒤를 이어 1951년 추 전국의 교역자 신학생이 남한에서 회합한 뒤를 이어 1951년 추 9월 대구에서 본 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전 평양장로회 신학교의 후신으로 설립되었다. 본교는 신학교육 각 방면에 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습답(襲踏)하기에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의 일부로서 지금은 동교의 기관지였던 <신학지남>의 속간을 단행한다.”

 

속간호에 이어 1954년 7월에 발행된 <신학지남>에는 7편의 논고가 실렸는데 박형룡의 논고가 3편이나 실렸다. 권두언까지 합하면 4편의 글이 그의 논고이다. 권두언까지 합쳐 8개 중에서 무려 반이 박형룡의 논고로 채워졌다. 그해 10월에 발행된 신학지남에도 박형룡의 글이 두 편이 실렸다. 1955년에는 <신학지남>이 1번 발행되었고 1956년과 1957년에는 미발행이고 1958년에 1회 발행되었다. 이는 <신학지남> 발행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속간 후에도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장로회총회신학교와 교단 안에 있었던 WCC 에큐메니칼운동을 둘러싼 신학논쟁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3. WCC 에큐메니칼운동과 장로회신학교  

1954년 총회신학교에서 <신학지남>을 속간하던 그해 총회는 WCC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외국으로부터 들려오자 총회는 에반스톤에서 열리는 제2차 WCC 총회에 명신홍 목사와 김현정 목사를 교단 대표로 파송했다. 돌아와서 한 이들의 보고는 너무도 달랐다. 김현정은 WCC가 문제가 없다는 의견이었고 명신홍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총회는 에큐메니칼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구성원들은 양측이 비등하게 참여하였다. WCC의 문제를 두고 총회는 이를 지지하는 이들과 이를 반대하는 이들 둘로 나뉘고 말았다. 이를 지지하는 이들을 친 에큐메니칼 측이라고 불렀고 이를 반대하는 이들은 NAE 측이라고 불렀다. 친 WCC 에큐메니칼 측에는 미국북장로교선교회, 미남장로교선교회, 호주장로교선교회 소속의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참여하였다.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있는 장로회총회신학교는 이런 총회 안에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박 박사는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반대 입장에 있었지만 노골적으로 WCC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만 할 수 없었다. 박형룡 박사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1954년 속간된 <신학지남>에는 WCC 에큐메니칼운동의 신학적 변천을 우려하는 논고들이 실렸다. 

그러나 우리는 1954년 속간된 <신학지남>이 이후 자주 발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학지남>을 통해 WCC를 반대하는 여론을 교단 안에 확산시키는 것을 우려한 선교사들의 견제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1958년에 발행된 <신학지남>에는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한 3편의 특집이 실렸고, 박형룡이 그중의 2편을 썼다. “에큐메니칼운동의 교리와 목적,” “복음주의 신앙의 현세”가 그것이다. 이 두 편은 당시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야기된 신학논쟁에서 박형룡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운동[WCC 에큐메니칼운동]은 교리적으로는 혼란한 자유주의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정책적으로는 세계단일교회의 구성을 최종목표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고로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존중하며 보수하려는 교회와 신도로서는 이 운동에 방임하고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특집호에 실린 권세열(F. Kinsler)의 “에큐메니칼운동약사”는 특별한 비판 내용이 없이 역사적으로 에큐메니칼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신학생이 그의 논고를 번역한 내용이라 얼마나 원문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할 수 없지만 WCC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분명 매우 비판적인 박형룡의 톤과는 달랐다. 이것은 1958년 당시 이미 신학교 안에는 교수진들 사이에서, 박형룡과 선교사들 사이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적 변화가 노정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1958년 <신학지남>에 실린 박형룡의 “복음주의신앙의 현세”는 신학교와 교단의 향방을 제시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은 복음주의와 정통주의를 교호적으로 사용하면서 “한국교회의 당면한 난국의 귀 험상에 감하여 복음주의 보수적 신앙이 필요 불가결한 것을 역설하였다.”

 

박형룡 교장의 3천만 환의 부당 교비지출 사건

가슴 아픈 일이지만 박형룡의 에큐메니칼운동 비판에 대한 논고가 실리기 바로 전 “1956년 여름과 1957년 여름 사이에 총회신학교의 재정관리에 불행한 사고”가 발생해 신학교와 교단 더 나아가 미국 장로교와 해외선교부가 엄청난 아픔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북장로교선교사(宣敎史)는 이 사건을 신학교의 발전과 운영과정에서 발생한 “신학교 행정의 비극적인 실수”라고 불렀다. 박형룡 교장이 신학교 부지를 구입하려다 박호근이라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총회신학교 기지 알선 및 인가관계로 지출된 총금액,” 30,162,172환의 교비 손실을 초래한 것이 그 핵심이다. 1958년 제 43회 총회는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재정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위원회(위원장 양성봉)가 1959년 1월 20일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정확한 손실 금액 내역과 교장 박형룡과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조서와 의견서까지 포함되었다. 조사위원회는 30,162,172환 중 박호근에게 지불한 22,534,192환에 대해 “기지 및 인가교섭비로 박호근에게 정당한 지출로 인정할 수 없는 금액”이라고 보고했고, 박내승에게 지출한 4,186,700환에 대해서도 “이사회 결의로 박내승 목사에게 정당한 지출로 인정할 수 없는 금액”이라고 보고했다. 보고서에 실린 교장 박형룡 박사의 조서는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 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어 같은 남산에 조새하고 있는 숭의학교에 기지 불하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기에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000불(환액 8,800,000환)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5000-불(2,500,000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18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사건을 취진중 일부 이사 중에서는 격려로써 속히 취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 게시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저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맞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론하여 지출된 것임으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일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에 온 돈 10,000불에 대하여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임으로 내 친구로부터 나에게 보내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고 말씀하면서 경상비에서 임시 17,993,742환을 유용함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복장로교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고저 생각하고 지출한 것이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이상 박형룡 교장의 답변요지).   

 

총무처장 박내승은 박호근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박호근을 상대로 고소를 제기하려고 하였으나 “박형룡 교장의 만류에 의하야 고소를 보류”하던 중 박호근이 먼저 박형룡 교장과 박내승을 상대로 고소를 제기하였다. 고소 내용 중에는 1만 달러를 암교환 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총회신학교로서는 곤란했다. “우리는 세상 법에 고소할 수도 없고 고소당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 박형룡은 박내승에게 박호근과 화해를 모색하도록 지시했다. 김상대 목사를 통해 박호근과 학교 당국이 만나 “지금까지 학교 당국과 모든 거래는 상실하여 백지로 돌리고 박호근의 고소는 취하한다는 조건”으로 화해를 하였다. 사건 조사가 진행되면서 박호근과 박내승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박호근을 총무처장 박내승에게 소개한 것도 교장 박형룡 박사였고 박형룡의 재정 집행이 이사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단독으로 처리를 했으며, 고소 문제도 이사회의 의견이나 교수회의 의견 없이 본인이 단독으로 박호근과 화해를 했다는 점에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운영과 재정 사용에 있어서 투명해야 할 신학교가 너무도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교비 손실에 대한 분명한 조사와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책임을 맡은 교장 박형룡은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했고 이사회는 이를 수리했다. 

이 사건이 예장통합과 합동이 WCC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행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이들은 1959년 분열의 원인을 3천만 환 사건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unfortunate accident)에 대해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과 학감 명신홍은 1959년 분열 후 총회신학교 이름으로 이렇게 미국에 보고했다. 

 

미국의 많은 교인들은 우리 신학교가 미화를 모금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소문을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줄 압니다. 그에 대한 간단한 진술이 사안을 분명하게 해줄 것입니다. 1956년 여름과 1957년 여름 사이에 총회신학교의 재정관리에 불행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박형룡 교장과 신학교 사업담당 박내승 목사는 신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던 그 부지(서울남산공원의 일부)를 사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국정부관리들과 협상을 하기위해 그들은 후에 사기꾼으로 밝혀진 한 중개업자를 썼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온 특별헌금을 포함한 많은 양의 돈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협상도 결렬되었습니다. 따라서 박형룡 교장과 박내승 담당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57년 12월 5일 서울에서 신학교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박 교장의 퇴임에 대해 찬성 20표 반대 17표가 나왔습니다. ...1958년 9월 말 서울에서 열렸던 총회는 이 사퇴를 확인하고 신학교재정관리사고 대한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그 보고서는 신학교 이사회에 제출될 것이었습니다. 신중한 조사 끝에 위원회는 1959년 9월 24일 대전에서 있을 총회가 열리기 바로 전날에 학교 이사회에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박 교장에 관해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학교 책임을 맡은 한 사람으로서 교장 박형룡은 충분한 감독을 하지 않았다. 재정관리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 그의 약점이 이 사건을 야기시켰다.’

 

보고서에는 완곡하게 박형룡의 재정집행 실수로 표현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불행한 사건’이었다. 남산에 신학교 건축 부지를 마련하려던 일련의 계획이 실패로 끝난 후 박형룡은 1957년 11월 7일 미국북장로교해외선교부 에드워드 아담스(Edward Adams)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남산 부지 협상이 완결된 후 편지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협상이 실패했다는 안타까운 소식과 함께 이 편지를 적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상되었던 부지 상부(3,600평)의 구입 또한 청와대에 의해 거절되었습니다. 오직 경제적 손실과 영적 실망감만 초래되었습니다.” 박형룡 박사의 교장 재직 당시 남산에 신학교 부지 구입의 실패와 그 사건이 미친 교단에 미친 파장은 참으로 컸다. 여파에 대해 미국 <북장로교선교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1957-58 겨울에 신학교 행정의 비극적인 실수가 밝혀졌다. 미국에서 신학교 교장[박형룡]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상당히 큰 금액의 돈이 신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남산의 땅에 대한 법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 과정에서 유용된 것이다. 전 이사회가 회집되었고 이 문제를 놓고 비밀 투표를 실시한 결과 박형룡 박사의 교장직 사임을 받아들였다. 이사회, 교수회, 학생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문제로 인해 비통하게도 나뉘어졌다. 박형룡은 이사회로부터 명예 학장이 되었고 평교수로 남도록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1958년 9월에 열린 총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임을 주장하는 이사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이사회 해산과 새로운 학장 선출을 명령했다. 총회장 노진현이 학장대리로 임명되었고, 이사회 이사장 에드워즈 아담스가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59년 봄에 신학교는 신학교가 점유하고 있는 그 자리에 광범위한 다이나마이트 작업을 포함한 국회의사당 건립 준비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 도시의 다른 곳에 임시 학교 교사로 사용될 건물 구입 의뢰가 들어왔다. 정부 공무원이 신학교 소유 건물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옛 신학교 건물을 비우라는 갑작스런 통지가 왔을 때 신학교의 신학생들의 한 그룹과 몇 명의 교수들이 학교 학생기록부를 점유하고 그것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려고 시도하였고 반면 근처의 기숙사의 ‘다른 학생들’이 그 움직임을 발견하고 그런 시도를 봉쇄하기 위해 달려왔다. 박형룡 박사의 지지자들인 이들 다른 학생들은 계속 신학교의 대표성을 주장했다. 그들은 박 박사를 신학교 교장으로 재취임시키려고 하였다. 임시 교장 노진현은 이 그룹에 동정적이었고 행정부가 이 계획을 수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심각한 위기를 가져다 준 이슈였다. 이 그룹은 뉴저지 독립선교회 회장이자 ICCC의 회장인 칼 매킨타이어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매킨타이어 박사는 한국교회 현장을 방문한 후 라디오 캠페인으로 12만 달러를 모금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신학교의 완전한 분리를 보증하는 동시에 전 장로교회, 목회자, 그리고 교인들의 반이나 되는 새로운 장로교회를 분립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3천만 환 사건과 분열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 글의 핵심 논지를 정리한다면 (1)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행정적 실수를 하여 상당한 금액[3천만환]을 잘못 집행하여 그 책임을 피할 수 없고 (2) 이사회가 이 책임을 묻고 교장직 사임을 받았으나 총회가 이사회의 결정을 인준하지 않았으며 (3) 이로 인해 교회 전체가 박형룡 박사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로 나뉘어졌으며 (4) 이후 재정적 압박을 받는 가운데 박형룡이 ICCC 매킨타이어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하여 매킨타이어가 12만 달러를 모금하였으며 (5) 결국 이로 인해 한국장로교는 반으로 나뉘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1959년 분열을 두고 WCC를 지지하는 친 에큐메니칼 측인 예장통합은 분열의 원인을 박형룡의 3천만환 사건에 돌렸고 WCC를 반대하는 NAE 측인 예장합동은 WCC 에큐메니칼운동이 분열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고려신학교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 당시의 분열이 WCC 문제가 아닌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신학교 공금 유용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참으로 애석하고 불행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신학교 행정을 맡은 이들이나 관계자들이 자금 사용과 집행에 있어서 투명해야 하고 신중해야 하고 공적 집행을 진행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어느 정도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3천만환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미 1954년 에반스톤 제2차 WCC 총회부터 에큐메니칼운동의 문제는 총회 안에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3,000만환 공금 유용사건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던 미국북장로교선교회 소속 해리 로즈(Harry A. Rhodes)와 아치발드 캠벨(Archibald Campbell)은 자신들이 편집한 한국북장로교선교사(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Vol. II 1935-1959) 마지막 연대표에서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1959년 9월 28일. 주로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한국장로교 총회가 분열(disruption)되어, 그 결과 장로교회가 세 번째 가장 큰 분열을 맞고 말았다.   

 

WCC를 지지하는 이들이 신앙의 순결보다 교회 연합을 강조하고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면 WCC를 반대하는 NAE 측은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신앙의 일치가 전제되지 않은 연합운동은 일종의 세계종교의 일치운동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정리한다면 1940년부터 1960년까지 20년 동안은 한 마디로 평양신학교의 복구라는 기치를 내걸고 진행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40년 조선신학교 설립, 1946년 고려신학교 설립, 그리고 1948년 총회신학교의 설립으로 한국장로교는 3개의 흐름으로 나뉘어졌다. 그 결과 1952년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고려파의 분열, 1953년 자유주의 성경관으로 인한 기장의 분열, 1959년 WCC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인한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의 분열, 세 차례의 대분열을 맞고 말았다.

 

1. 1952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들이 중심이 된 고려신학교와 고려파 분열 

2. 1953년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WCC 기독교 대한 장로회 분열

3. 1959년 WCC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장로회신학교와 예장통합과 이를 반대하는 NAE 측이 중심이 된 예장합동의 분열

 

해리 로즈와 아키발드 캠벨은 북장로교선교사 II 1935-1959 연표에서 1952년 기장의 분열과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을 그런 방향에서 해석했다. 1952년의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고려파의 분열, 1953년 조선신학교(후에 한신대학교로 변경)를 중심으로 한 기장의 분열, 그리고 1959년 제 44회 총회에서의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의 분열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후 한국장로교의 연합과 일치운동에 적지 않은 장애물로 작용했다. 한국장로교 분열에 ICCC, WCC, NAE를 비롯한 연합기구가 중요한 분열의 배경을 형성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1959년 9월 제 44차 총회 이후 열린 첫 예장합동 총회나 예장통합 총회도 장차 상호 연합을 모색하기 위해 WCC, ICCC, NAE를 잠정 혹은 영구 탈퇴하기로 결의하였다.

 

 

IV. 총회신학교, 총신대학교: 평양신학교 전통의 회복과 계승(1960-2021)

일각에서는 총신과 예장합동이 1959년 통합과의 분열에서 처음 생겨난 것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필자가 볼 때 바른 역사해석과 역사의식이 아니다. 총신대학교 설립 120주년은 그 자체가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삼고 있고 그 유산을 물려받았음을 전제한 것이다. 1959년의 분열과 이후 진행된 총신의 역사는 한국장로교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과거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내려오는 신학과 신앙전통을 회복하고 계승하려는 일련의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총회신학교는 1960년 3월 남산의 대한신학교 교사를 빌려 임시 교사로 사용하다 1960년 8월 22일 새로 구입한 용산구 한강로 2가 319번지 용산교사로 이전했다. 1960년 12월 14일 고려파와 합동 후 1962년 총회 50주년 때 “용산구에 있는 합동측 신학교는 평양신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동일성을 유지함에 있고 광나루 신학교는 연동측 총회가 분란하면서 해교사(該校舍)를 독점하므로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것은 총신을 평신의 전통을 계승한 학교로 재건하고 회복하겠다는 분명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형룡은 예장합동이 분열되어 나왔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예장합동이 본래의 한국장로교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교단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고려파, 기장파, 통합측에 대해 “분리해 나간 3파”라고 단정하고 예장합동을 “최후까지 남아 있는 이 큰집”이라고 신학교와 교단의 성격을 규정했다. 또한 그는 1959년 통합과 분열 후 총회신학교가 평양장로회신학교 전통을 계승한 학교라고 확신했다. 1969년 평양신학교 설립 68주년을 맞던 해 박형룡은 “선지학교의 창립과 중건”에서 이 부분을 분명히 밝혔다. “본교 장로회 총회신학교는 1951년 9월 18일 대구제일교회에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본교의 전신인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01년 3월 ...개시되고 1907년에 신학교로 정식 설립되었다.” 1951년 장로회총회신학교는 평신의 후신이고 총신이 1951년 장로회총회신학교와 동일한 학교이고, 평양장로회신학교 후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총회신학교는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중건’이었다. 

분명, 박형룡은 총신의 역사를 단절의 역사로 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1951년 장로회총회신학교의 중건이나 1959년 이후 총신의 재건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역사성과 신앙전통을 계승한 학교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강조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총회신학교 설립이념이 평신의 설립이념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사실, 다만 중건에만 머물지 말고 시대의 변천에 걸맞게 ‘확대와 증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각은 박형룡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장로회총회신학교 연혁’에도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필자는 총신이 1959년 분열 때 생긴 것이 아니라 1901년 설립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전통과 역사와 신앙을 계승한 학교라는 이런 역사해석의 관점에 동의한다. 총신 공동체는 이 같은 통시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1959년 분열 이전의 60년의 역사와 이후 60년, 120년의 총신의 역사를 조명해야 할 것이다. 

1960년 이후 총신의 역사는 크게 1959년부터 1980년까지의 20여년과 1980년 이후 지금까지의 40여 년 간으로 대별할 수 있다. 1980년을 대별의 기점으로 삼은 것은 1979년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이 있었고, 1980년 합신의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이후 지금까지 40년의 역사는 예장합동의 역사는 다시 좁게 나뉘자면 2005년 구개혁측과의 합동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지난 62년의 역사는 1959년부터 1980년, 1980년부터 2005년, 그리고 2005년부터 현재까지로 대별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는 1959년 분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놀랍게 발전했다. 이 기간 동안에 총신대학교는 놀라운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다.

 

1. 총신대학교의 재건(1959-1970)

1959년 분열된 후 미북장로교선교회, 미남장로교선교회, 호주장로교선교회와 소속 선교사들은 모두 예장통합과 광나루 장로회신학교에 합류하였다. 이들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 가운데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예장합동에 합류하지 않았다. 분명 그들 가운데는 WCC 에큐메니칼운동의 신학적 변천을 우려하는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예장합동에 합류한 선교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시 예장합동과 장로회총회신학교는 해외선교회의 재정 지원 없이 홀로서기를 해야하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에 와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난 60여년의 총신의 역사를 회고할 때 총신 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박형룡, 백남조, 명신홍, 박윤선, 김희보, 간하배, 차영배, 김의환을 들 수 있다. 그 외 간하배 선교사와 이상근 박사, 한철하 박사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파와 합동 이후 합동 조건이었던 윤번제 합의에 따라 1962년 이상근 박사가 교장에, 1964년에 박윤선 박사가 교장에, 1965년 총회가 윤번제를 폐지하고 그해 명신홍 목사가 교장에 취임했다. 부산 부전교회 백남조 장로의 거액의 헌금으로 마련한 사당동 산 31-3번 18,000평의 부지 위에 명신홍 박사가 미국 CRC 등으로부터 4만 달러에 이르는 건축비를 모금해와 1965년 사당동 구 본관을 완공하여 이전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들 인물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총신의 역사와 신학적 흐름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총신대학교와 역사적 칼빈주의

세 개의 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한 명도 예장합동이나 총회신학교에 합류하지 않는 대신 미국 독립선교회 소속 선교사들과 미국 정통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예장합동에 참여하였다. 그렇다고 총신과 총회가 이들이 속한 선교회와 공식적으로 협약을 갖고 교류를 한 것은 아니었다. 1959년 해외선교회와의 단절은 예장합동의 노선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박형룡은 예장합동이 본래의 한국장로교 전통을 계승한 “최후까지 남아 있는 이 큰집”이라는 역사 시각을 가졌지만 우리가 진솔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박형룡은 1959년 이후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노선에서 총신과 예장합동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1959년 분열 후 박형룡은 외국 선교회와의 단절을 추구하고 완전한 독립을 선포했다. 그는 1960년 발간된 <신학지남> 권두언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1959년 분열의 사건을 두고 그는 이것은 “진정한 자주독립의 실현이오 우리가 기대하여오는 목표에 도달한 통쾌통쾌(痛快痛快)한 일이다”고 말했다. 박형룡이 해외선교회와의 단절에 대해 ‘통쾌’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을 존경하고 그들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들의 후원으로 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고국에 돌아와 다년간 평신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해방 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의 회복과 계승을 위해 오랫동안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한국장로교를 재건하는 일에 앞장선 그가 선교사들과의 단절에 대해 이렇게까지 표현하는 표현방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박형룡은 1959년 분열되고 나서 교단과 신학교를 분리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길 원했다. 그것은 그의 <신학지남> 권두언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더 분명한 것은 “근본주의”라는 논문을 통합측과 분열된 후 처음 발행한 <신학지남>에 실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근본주의야 말로 정통주의요 기독교 자체라고 선언하였다. WCC 에큐메니칼운동에 맞서 신앙의 순결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근본주의” 논고는 1960년 8월 8일부터 9일 오전까지 삼각산 제1기도원에서 모인 전국교역자수양회에서 행한 박형룡의 강연이다.

해외 선교회와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재건하고 운영해야 하는 상황에서 박형룡 박사는 상당한 재정 압박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신근본주의 분리주의를 표방하는 ICCC 칼 매킨타이어가 1959년 12월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총회신학교 용산교사를 마련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한 것이다. 박형룡이 삼각산에서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강연을 한 것은 ICCC 매킨타이어의 재정 지원을 받아 마련한 용산교사로 총신이 들어가기 바로 직전인 1960년 8월이었다. 1960년 8월 8-9일 양일간 열린 전국교역자수양회에서 “근본주의”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이를 <신학지남>에 실은 것이다. 박형룡은 ICCC가 신학교 건물을 마련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하고 WCC 에큐메니칼운동에 전투적으로 맞서 투쟁하는 ICCC의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에 깊은 동질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박형룡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1960년 12월 고려측과 합동 후 <파수군>에 “근본주의 신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이 “근본주의자”이고 자신이 속한 교단이 “한국장로교 근본주의 교회”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는 70여년 전에 선교사들을 통하여 받은 성경적인 기독교 본원의 정통신앙을 그대로 지키기로 노력하여 오니 자연히 근본주의 입장이라는 것을 자타공인(公認)하게 된다. ...한국장로교회 왕성의 비밀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정통신앙 근본주의 입장을 고수함에 있다는 것을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교회가 이것을 포기하면 교세의 붕괴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무신앙(無信仰)한 현실에서 근본주의자라는 칭호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교회 고유의 정통신앙을 사수(死守)하여 우리교회의 수은수복(受恩受福)이 무궁케 하기로 재결심하자. 우리는 우리교회의 보수세력이 아직도 우세하다는 것을 우대하여 방심하지 말고 근본주의 신앙의 수호에 전력하여야 한다. ...금번 우리 교회가 WCC 에큐메니칼 운동을 거절하고 보수 양진영의 합동을 이룩한 것은 실로 고유의 근본주의 신앙을 견실히 수요, 실천 또는 전파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박형룡이 즐겨 사용하던 용어는 보수주의, 복음주의, 정통주의였는데, 이제 근본주의를 추가한 것이다. 갑작스런 박형룡 박사의 모습에 총회신학교 안에는 잠시 혼란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불편한 기류가 강하게 감지되었다. 이와 같은 박형룡 박사의 노선에 대해 총회신학교 교수진들은 내심 우려가 컸다. 신복윤 박사의 고백대로 총회신학교 안에는 잠시 혼란이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박형룡이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신학지남>에 싣던 바로 같은 호에 명신홍은 예장합동이 ICCC와 관계할 수 없음을 이렇게 밝혔다. 

 

ICCC는 복음적이며 신앙이 우리와 같음을 널리 인정함이 사실이다. 진리보수에 강하며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하야 힘 있게 싸훔도 사실이다. WCC가 세계의 모든 신교를 대표한 기관으로 행세할 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역증하는데 공헌이 있음은 인정할만 하다. 이와 같이 적극적인 만큼 과격하다. 싸훔을 만히[많이] 한다는 평을 밧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ICCC를 가라쳐 악평을 한 것은 대개 에큐메니칼 측에서 널리 악선전한 결과이며 내지(乃至) 악마의 자식이라고까지 불렀으니 그대로 받아드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ICCC에 가입하려함도 불가능한 일뿐 아니라 가벼운 일이다.

 

ICCC 신근본주의는 분리주의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고 신앙의 순결을 앞세우며 전 세계 여러 곳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박형룡은 신근본주의 방향으로 총신과 교단을 이끌고 나가기를 원했지만 다행히 1960년과 1961년 총회는 ICCC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의했다. 용산교사 구입을 위한 재정지원을 해줄 때부터 ICCC는 예장합동이 ICCC에 가입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가입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총회와 총대들 절대다수의 의견이어서 총회는 2년에 걸쳐 ICCC 문제를 신중히 다루었고 교류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최종 결정했다. 그러자 암스테르담 ICCC의 부총무 A. Warnaar, Jr.는 1961년 2월 1일 박형룡에게 예장합동 총회가 ICCC에 가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의 편지를 보냈다. 

 

물론 박사님의 총회가 지난 9월 ICCC에 가입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박사님의 상황은 이해하며, 또한 신학적으로 우리와 거의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미국기독개혁파교회(CRC, Christian Reformed Churches of America)와 정통장로교회(OPC, Orthodox Presbyterian Church)가 한국교회로 하여금 ICCC로부터 멀리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상황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이해할 수 없으며 한국교회가 이런 반대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교하는 한국교회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살면서 여러모로 많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동안 WCC를 탈퇴하고 또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ICCC에 가입한다면 매우 큰 일이 될 것입니다. 형제여 전투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약 1개월 후 1961년 3월 7일 ICCC의 미국독립선교회 회장 홀드크로프트(J. Gorden Holdcroft) 역시 박형룡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 “만약 한국에 장로교회가 더 나아가 ICCC에 가입했더라면 더 많은 기금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매킨타이어 박사님 및 우리 중 몇 사람이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도 1961년 9월 부산남교회당에서 열린 제 46회 총회에서는 “본 총회와 ICCC(국제기독교연합회)와 우호관계를 끊기로 하고 개인이나 단체들도 단절하기로 선언하다”고 결정했다. 1960년 45회 총회에서 ICCC에 가입하지 않고 우호관계만 갖기로 했다가 46회 총회는 아예 가입은 물론 ICCC와 우호관계마저 끊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박형룡 박사가 공개적으로 근본주의를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논고는 더 이상 <신학지남>에서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총회가 ICCC에 가입하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만 갖기로 결정한 후에도 박형룡은 1961년 2월 25일 칼 매킨타이어의 영향 아래 있는 미국독립선교회 회장 홀드크로프트에게 신학교 재건을 위한 65만 달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대해 홀드크로프트는 3월 7일 “우리가 작년에 용산에 지은 정말 근사한 건물은 앞으로 더 오랫동안 신학교 운영하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면서 “박 박사님, 확실한 것은 신학교만을 위해 65만 달러를 쓰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답신했다. 

1961년 8.9월 안용준은 <파수군> 권두언에서 당시 ICCC로 인한 교단의 복잡한 정서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교계는 실로 난마와 같이 복잡해져 간다. 합동이 되었다는 면보다도 분열되어 가는 면이 더욱 많은 것 같다. 장로교 안에서만 보더라도 성경장로교파라는 새로운 한 교파가 생기게 되었고 세칭 보류파라는 것도 나날이 견고해지는 경향이 있고 단독적으로 어느 교파에 속하지 않고 있는 독립교회 수도 많이 늘어가는 모양이다. 우리 총회 안에서도 ICCC 문제로 해서 앞으로의 전망이 단순할 것 같지 않다.” 이 글은 당시 교단과 총회가 ICCC 문제로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961년 총회가 ICCC와 교류단절을 결정하자 매킨타이어는 1963년 1월 9일 총회신학교에 총회신학교 용산 교사를 총회에서 탈퇴한 ICCC 계열 단체에 이양하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1963년 2월 25일 노진현 이사장은 ICCC 회장 칼 매킨타이어에게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친애하는 매킨타이어 박사님께

저희 한국장로교회가 WCC로부터 탈퇴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 때에 박사님께서 영적 물적 지원을 주신 것에 대해 우리는 늘 감사합니다. ...박사님께서 쓰신 1월 9일자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우리는 박사님께서 의미하시는 바를 잘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한 바, 박사님과 박사님의 동료들은 우리가 ICCC에 가입하는 조건을 걸고 우리를 도운 것이 아닙니다. 박사님께서 기부를 하신 이유는 우리 측 교회가 WCC를 탈퇴하고 에큐메니칼운동에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ICCC가 돈으로 한국교회를 사고 있다고 WCC 측 선교사들이 비방했을 때, 방송과 크리스천 베이컨지를 통해 박사님께서 반복해서 선언하신바 박사님께서는 어떤 조건을 걸고서 한국교회를 돈주고 사는 것이 아니며 1959년 크리스마스 기부는 단지 한국교회가 WCC를 탈퇴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박사님께서 신학교 건물을 우리 총회로부터 탈퇴한 단체에 주라고 요청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국제적 윤리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신앙(evangelical faith)을 가진 우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사장 노진현은 장로회총회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을 ‘근본주의 신앙’과 대비시켜 ‘복음주의 신앙’(evangelical faith)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런 내용을 언급한 것은 신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칼 매킨타이어의 ICCC의 신학적 입장과 차별화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서 총회는 물론 총신 역시 ICCC와 관계를 정리하였다. 이것은 곧 총회와 총신이 ICCC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방향으로 더 이상 나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1960년 예장합동과 예장고신이 합동을 결의하였을 때 <신학지남>에는 복음주의운동에 앞장선 한국성서대학 강태국, 미국대학생선교회 창설자 빌 브라이트의 친구요 풀러신학교에서 수학한 대학생선교회 CCC 김준곤, 생명의 말씀사를 설립한 한국복음주의연맹선교회(TEAM), 현 극동방송국의 전신 국제복음방송(H.L.K.X)이 축하 광고를 실었다. 하지만 박형룡은 교단의 정서와는 달리 WCC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예장통합과 분열된 후 교단의 신앙의 순결을 강조하면서 분리주의적 성향으로 신학교와 교단을 이끌고 가려고 노력했다.

이사장 노진현 목사는 총회가 ICCC와 교류를 단절한 후 정통장로교회 한국선교회가 총회신학교에 와서 교수해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고 이에 대해 1962년 3월 17일 정통장로교회 한국선교회는 매우 신중한 회신을 보내왔다. 그러자 노진현 목사는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1962년 4월 20일 “미국에서 온 그리스도의 대사들에게”라는 편지를 보내 총신과 고려신학교와의 연합, 총회신학교 소송, 박윤선 박사의 교수직 정직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해명했다. 정통장로교회 한국선교회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간하배 선교사를 교수로 파송하는 등 총회신학교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미국정통장로교회 소속 간하배 선교사의 총신 교수 취임, 미국 CRC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지원과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들의 한국방문 등으로 총신은 미국 보수적인 복음주의 장로교단과 개혁교단과 교류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총신은 ICCC 칼 매킨타이어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와 거리두기를 하는 한편 역사적 칼빈주의 노선의 복음주의 교단들과 교류를 정립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총회가 ICCC와 교류를 단절하고 총신 교수진 가운데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면서 총회신학교는 극단적인 근본주의로 흐르지 않고 다시 본래의 위치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은 신근본주의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여 WCC만 아니라 신복음주의를 사회복음을 주창하고 신정통주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위험한 신앙운동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칼 매킨타이어를 비롯한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지도자들이 전형적으로 하는 비판이었다. 김의환이 박형룡에 대해 “그는 신근본주의적 경향의 신학자였다.”고 평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혼란의 과정 속에서 신학교와 교단의 방향을 종교개혁의 전통 특별히 존 칼빈과 칼빈주의 전통에서 찾고 역사적 칼빈주의 노선을 신학교의 방향으로 설정하려는 강한 노력이 총신의 교수회 안에 일어났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예장합동과 고려측이 1960년 12월 13일 합동한 후 총회는 “웨스트민스트 신도계요에 의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명시한 12신조와 칼빈주의 신학에 의하여 합동을 원칙으로 하며,” “칼빈 선생이 가르친 장로회의 교리를 그대로 고수할 것이며 비성경적인 단일교회운동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총회가 합동하면서 교단의 정체성을 웨스트민스트 표준문서에 기초하여 12신조와 칼빈 선생의 가르침과 칼빈주의에서 찾은 것이다. 1961년 12월 28일 장로회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 양 신학교 교수 10명은 서울에서 모임을 갖고 교수회 회칙제정 각 부서조직 학과분담 분교규정을 결의하고 다음과 같이 보직을 정했다. 

 

교    장   박형룡 박사

교무처장   한철하 박사

학생처장   오병세 박사

실천처장   명신홍 박사

총무처장   안용준 목사

도서관장   최의원 박사

부산분교장 박손혁 목사

 

예장과 고려파가 합동한 후 1962년 2월 안용준은 고려신학교와 장로회총회신학교의 합동을 언급하면서 밝힌 것처럼 “장로회총회신학교에서도 옛날의 평양신학교의 후계(後繼)학교로 자처해왔었고 고려신학교 역시 평양신학교의 정신적, 신앙적 계승학교로 자인해 왔었다. 합동원측에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에 의하여 합동함을 원칙으로 하며’라고 하였다.” 총신과 총회가 세계장로교의 전통과 한국장로교의 평양장로회신학교 전통을 계승하면서 칼빈주의 신앙을 정체성으로 삼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교단과 신학교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전통을 계승하되 칼빈주의 전통을 강화시켜 나가겠다는 방향설정은 1962년 <신학지남>에 실린 칼빈 특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특집이 예장고려파와 합동한 후에 <신학지남>에 실렸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았을 때 <신학지남>이 칼빈의 특집을 낸 후 총회 설립 5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에 다시 <신학지남>이 특집을 낸 것이다. 이것은 <신학지남>이 과거의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총신대학교 재건에서 다시 회복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박형룡은 권두언에서 헨리 미터를 인용하여 “칼빈주의의 원리는 개혁당시에 보다 금일에 더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칼빈신학의 기본원리”에서는 이렇게 그의 신학원리를 평가했다. 

 

칼빈의 신학적 교리들은 어거스틴 교리의 부흥(復興)이요, 어거스틴의 교리는 사도바울의 교리의 부흥이었다. 칼빈은 바울과 어거스틴의 교리들을 조직적으로 현대를 위하여 표현한 첫 사람이었다. 

 

박형룡은 칼빈의 기본원리를 1) 하나님의 주권, 2) 섭리에서 하나님의 주권, 3) 영원한 예정에서 하나님의 주권 4) 구속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으로 집약했다. 명신홍은 이일이 있기 여러해 전부터 역사적 칼빈주의 기치를 강하게 내걸었다. 그런 면에서 총신의 칼빈 특집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내려오는 신앙전통을 재진술한 것이다. 

명신홍은 “칼빈의 윤리사상”에서 칼빈의 신학체계 전반을 살펴볼 때 그가 성경을 유일한 윤리의 근원으로 삼았고,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의 권위로 삼았다고 보았다. 그가 볼 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높이고 강조하고 실천하는 칼빈주의는 그 신학체계가 윤리사상을 전제한 것이며, 성경에 대한 순종과 삶에서의 실천이야 말로 칼빈이 강조하는 윤리사상이라고 평가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계획하고 행동해야 한다.” 1959년 통합과의 분열 후 혼란과 부침이 있었지만 총신은 근본주의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노선을 거부하고 점차 역사적 칼빈주의에서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964년 8월 <신학지남>은 공보부에 정식으로 등록되었고 연 4회 계간으로 계속 출간했다. 

 

2) 사당동 캠퍼스 건립과 1967년 신앙고백 비판 

잠시 논지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지도자로 총신대학교 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백남조 장로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예장합동은 1963년 9월 19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라는 교단명칭으로 대표자 이환수 이름으로 등록(등록번호 제 274호)을 마쳤다. 1959년 분열 이후 총신대학교 재건 과정에서 그의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총신대학교가 늦었지만 사당동 캠퍼스 채플을 백남조 홀이라고 명명한 것은 너무도 잘한 결정이라고 판단된다. 사재를 털어가며 총신대학교가 세워질 수 있도록 사당동 캠퍼스 부지를 기증해 오늘의 총신 재건을 가능케 한 백남조 장로의 희생과 헌신은 역사에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본고에서는 지난 120년의 역사와 신앙 전통에 집중하는 관계상 상술은 생략하려고 한다.  

1959년 분열 후에도 예장합동과 총신은 WCC 에큐메니칼운동의 흐름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문제점을 <신학지남>과 <파수군>이나 기타 자료를 통해 소개하는 일을 지속하였다. 조동진의 “뉴델리대회의 해부”는 그중 하나이다. 그는 뉴델리대회가 “상당히 급진적이고 의식적인 에큐메니칼교회 형성의 가치를 뚜렷이 내걸고 있다”고 밝혔다. WCC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분열의 아픔을 경험한데다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 형제 장로교 안에 일어난 신학적 변천, 특별히 수정된 1967년 신앙고백 채택을 총신과 예장합동 지도자들은 깊이 우려했다. 

이에 대해 비판이 강하게 일어났다. 1967년 신앙고백의 문제로 한국장로교회가 큰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해 9월 “1967넌 신앙고백 비판 특집”에 기고한 교수들은 박형룡, 박윤선, 김희보, 간하배, 김의환, 신내리였다. 이 특집은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사상을 반영한 1967년 신앙고백을 한국장로교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명한 천명이었다. 필자가 볼 때 이 특집은 1959년 예장통합과 분열된 후 총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천명한 중요한 사건이다. 이 같은 한국장로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의 결과 통합 총회에서도 1967년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총신은 신학적 정체성을 설정해 나가는 일련의 노력을 경주했다. 1968년 3월 <신학지남>이 창간 50주년을 맞았을 때 “창간 50주년 기념호”를 발간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3) 총신대학교 재건과 명신홍의 ‘교회를 위한 신학’

박형룡에 이어 총신의 신학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명신홍이다. 그런데도 사실 그는 잊혀진 인물로 총신의 역사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명신홍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알고 있다고 해도 사당동 본관 건립을 위해 미국에서 돈을 모금해온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명신홍은 총신대학교 재건과 신학 방향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한 인물이었다. 박형룡이 통합과 분열 후 칼 매킨타이어의 ICCC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방향으로 신학교와 교단을 이끌고 가려고 할 때 균형을 잡아준 주역도 그였다. 그는 실제로 자신을 희생하며 총신대학교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1959년 통합과 분열되었을 때 WCC를 반대하며 예장합동에 박형룡과 유일하게 남아 있으면서 총신대학교 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직장암 수술로 투병 중인데도 명신홍이 1964년 미국에 가서 CRC로부터 신학교 재건 헌금을 모금해 와 그 덕분에 백남조 장로님이 기증한 사당동 캠퍼스에 신학교 본관이 건립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박형룡, 백남조와 더불어 총신 재건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3명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명신홍은 1954년 <신학지남> 속간호에서 ‘칼빈주의의 근본정신’이라는 논고를 통해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처음으로 교단에 소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칼빈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이고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칼빈주의 5대교리라고 해석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신본주의를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다. 1963년 <신학지남> 권두언 “신학지남의 임무”에서 명신홍은 신학지남의 임무를 세 가지로 집약했다. 첫째, 올바른 신학의 수호 둘째, 올바른 신학의 보급, 셋째, 교회를 위한 봉사가 그것이다. 총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조직신학 위주로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교회는 이들 네 개의 신학을 다 필요로 하고 있고 이에 대한 올바른 신학을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분명 그는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에 충실한 전형적인 장로교인이었지만 그의 신학은 전혀 사변적이지 않았고 평생 교회를 위한 신학을 일관되게 펼쳐나갔다. 그는 말씀과 기도와 성령충만을 강조했고 세계사에 일어난 부흥운동을 소개하며 신학생들에게 부흥의 열기를 불어넣었고 미국 CRC의 지원을 이끌어 내 총신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미국 복음주의 칼빈주의 노선의 개혁교회 형제 교단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중요한 브리지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 안에 건강한 연합운동, 1960년 고려파와의 연합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서도 언제나 선두에 섰다. 그는 신본주의, 계시의 신학, 복음주의신학, 개혁주의신학을 총신이 지향(指向)할 이상적인 신학노선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1965년 2월 총신 학장직에 오른 명신홍이 1966년 6월 <신학지남>에 신학교가 “희망하고 힘써 연구해야 할 이상적인 신학”(理想的 神學) 4가지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상적인 신학(理想的 神學)

협의의 신학은 조직신학만을 의미하나 광의의 신학은 주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 전체의 신학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은 광의의 신학이다. 우리가 희망하고 힘써 연구해야 할 이상적인 신학은 어떠한 신학인가?

1. 신본주의 신학

신학은 ... 칼빈의 주장 그대로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창조하셨으니’ 우리가 그를 경외하며 순종하고 기쁘시게 하여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 신학의 근본정신이 되어야 한다.

 2. 계시의 신학

...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성령의 영감을 베풀어 특별계시를 하시고 직접 성자 예수 자신과 그의 교훈을 통하여 계시하셨으니 성경은 이상의 모든 특별계시의 기록으로 정확무오하여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의 법칙이다. 

3. 복음주의 신학

... 우리의 신학은 마땅히 이 복음의 진리를 밝혀 만민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전해야 한다. 바울이 전한 말씀 그대로 이 복음 외에 타 복음을 전하면 천래의 천사라도 저주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4. 개혁주의 신학

개혁주의란 칼빈주의의 이칭이다. 개혁주의신학은 가장 신본주의적이며 성서적이며 복음적이며 실천적인 신학이다. 개혁주의의 근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이다. ...

 

부설(附說): 우리[총신]의 신학은 이론적이면서 그만큼 실천적이어야 하고 교리적이면서 그만큼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신학은 영구불변의 진리를 보수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보수적이어서 그 진리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시대를 따라 변천되어가는 그 현실에 맞는 소금이며, 빛이 되도록 적응하고 활용해야 하는 의미에 있어서는 진보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신학은 모든 비성서적인 현대신학을 배제함에 있어서 파괴적(破壞的)이어야 하고 상한 갈대 하나라도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주의 정신으로 약자를 붙들어주며 서로 용서하고 관대하며 일치하고 단결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받들므로, 힘써 전도함으로, 만인이 같이 이 정통신학을 흠모하고 체득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의미에서 건설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명신홍의 글이 1966년 6월에 발행된 <신학지남> 33권 제 2집 “권두언”으로 실렸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명신홍이 제시한 네 가지 총신이 나아갈 이상적인 신앙 방향에 근본주의는 없다. 이는 그가 ICCC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명신홍 박사의 이와 같은 총신의 신학방향 제시는 매우 시의적절하다.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했고, 1959년 분열의 과정을 직접 일선에서 온 몸으로 체험했으며, 1954년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 2차 WCC 대회에 참석하여 WCC 에큐메니칼운동의 신앙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975년 10월 14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장로회신학교, 총회신학교, 총신대학교를 거치면서 무려 23년간 총신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한 “명신홍은 총신이 지향해야 할 신학으로 ‘신본주의신학,’ ‘계시의 신학,’ ‘복음주의신학,’ ‘개혁주의신학’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글 중에 “우리[총신]의 신학은 이론적이면서 그만큼 실천적이어야 하고 교리적이면서 그만큼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명신홍은 신앙과 삶, 신학과 실천이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출신으로 총신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신학교로 재건되기를 갈망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이 그의 전생애 동안 그의 목회, 신학, 신학교육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는 1967년 <신학지남> 34권 1집 권두언에서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성령충만이라며 이렇게 호소했다: 

 

…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성령충만이다. 성령의 충만하심이 없이는 어떤 교인이나 아무 교회라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행하거나 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일의 대소를 구별할 것 없이 언제나 무엇을 하던지 성령의 지배하심을 따라서 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바 가장 놀라운 축복이며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축복의 특권을 준비하시고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우리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것을 간구해야 한다. 성령충만을 받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자행자치하는 것과 이 세상과 우리의 죄악이다. 이런 장애물들은 그리스도께서 점령하셔야 할 지위를 찬탈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며 자기를 이기고 오직 주님의 인도하시는대로 복종하며 거리끼는 바 모든 죄악을 찾아내서 이것을 회개자복하고 끊어버려야 한다. 소와 비둘기를 팔고 있는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실 수 없고 죄가 주인노릇 하는 곳에 성령이 계실 수 없다. 이와 같이 갑진 진주를 소유하려면 버려야 할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쉬지말고 오순절 전에 120명이 간절히 기도하던 것과 같이 성심전력을 다 기우려 그날을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를 계속해야 겠다.

 

필자는 이 원고를 찬찬히 읽고 또 읽으면서 이 교훈이 당시만 아니라 현재 총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너무도 적절한 교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그의 신앙노선은 그냥 제기한 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에 담아둔 내용이었다. 그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평신 출신이라는 사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비블리칼신학교, 칼빈신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한 지성인 목회자요, 오랫동안 큰 교회 담임목사를 경험한 실천적인 목회자요, 총회를 이끌어 온 교단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4) 총신대학교 재건의 또 다른 주역, 박윤선

박형룡과 명신홍 이후 총신의 리더십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박윤선, 김희보. 간하배, 김의환, 차영배이다. 그 중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며 신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에게 감동을 주며 총신을 이끌었던 인물은 박윤선이었다. 박형룡이 조직신학자로서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명신홍이 실천신학자로서 총신의 신학형성에 중요한 리더십을 감당하였다면 박윤선은 성경신학자로서 총신 안에 아주 중요한 리더십을 감당했다. 1934-1936년 웨스트민스터에서 메이첸 밑에서 성경신학을 공부하고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뒤 다시 미국에 건너가 1938-1940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코넬리우스 반틸 문하에서 수학하고 화란에 가서도 유학을 한 박윤선은 성경신학자이면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역사적 칼빈주의 노선에서 자신의 신학을 펼치면서 총신을 이끌어갔다. 

박윤선은 신근본주의가 역사적 개혁주의와 다르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박형룡 박사가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거나 근본주의 신앙을 옹호하는 것에 대해 깊이 우려했던 박윤선은 1979년 <신학지남>에 한 논고를 통해 근본주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 박형룡 박사와 달리 그는 근본주의 약점이 무엇인지, 개혁주의와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는지를 논리적으로 기술하면서 근본주의와 개혁주의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1979년 봄호 <신학지남>에서 박윤선은 “개혁주의 소고”라는 제목으로 근본주의와 개혁주의를 상호비교하며 조목조목 근본주의운동의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개혁주의는 영원적인 것만을 고조하지 않고 시간적인 것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적당하게 존중시하여 불신자보다 더욱 과학적이어야 될 것을 역설한다. …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근본주의는 기독자로서 진출할 활동분야를 많이 제한시킨다. 이것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신자는 그 어디서든지 적극성 있게 일하며 정복해 나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인류의 모든 생활분야는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 아닌가? 우리는 죄악 이외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그것들을 성화시키는데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사상이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을 특수 은총에서(그리스도의 구원)만 발견하지 않고 보통은혜(자연계)에서도 발견한다.

 

고려신학교 시절 한 때 ICCC에 깊이 동정했던 박윤선이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근본주의 약점을 피부로 체험하고 개혁주의와 어떻게 다른지를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나용화가 지적한 대로 “한국장로교 안에 칼빈주의적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을 글과 가르침과 삶을 통해 확실하게 심어주신 분이 바로 정암 박윤선이다.” 김명혁에 따르면 박윤선은 역사적 칼빈주의 신앙을 한국교회 전반에 확장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것은 그가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복음주의운동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박윤선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보다는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선호했고, 헨리 미터의 ‘칼빈주의’를 번역하여 가르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복음주의자였다.”

 

2. ‘장로회총회신학대학’ 인가, 도약의 분기점(1970-1980)

 

1967년 5월 4일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원” 법인 설립인가를 받았고, 6월 12일에 대학령에 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69년 12월 17일 교육부로부터 4년제 정규대학으로 신학과 50명 정원을 허락 받아 “총회신학대학”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대학령에 준한 신학교 설립인가를 받은데 이어 장로회총회신학대학으로 정식 인가를 받으면서 총신은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맞았다. 대학 인가를 받고 박형룡 박사가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6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총신은 ‘개혁신학의 보수와 진리 증거란 중차대한 사명을 감당’하여 왔으며, 대학인가를 받음으로써 학적 수준을 높이고 새로운 차원의 교회 지도자 양성이라는 사명을 부여 받은 것이다. 1901년 4월 평양에서 설립되어 40년 동안 한국장로교회의 교역자를 양성해오다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는 수난을 당했다가 1951년 5월 28일 제 36회 총회시 평양신학교 후신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로 대구에서 개교하면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1958년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고 신학대학 인가를 추진 중에 1959년 분열로 재단법인이 통합에 넘어가는 어려움 속에서 얻은 너무도 값진 결실이었다. 

“자립운영의 모진 고통 속에서 백남조 장로(현 재단이사장)의 학교 대지 기증 860평의 신축교사를 건립, 김인득 장로(재단부이사장) 재단기증으로 1967년 5월 4일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 설립인가를 받았고 드디어 69년 12월 17일 문교부에 의해 신학대학인가를 받았다.” 그동안 총신은 1969년 12월 대학인가를 받을 당시를 기준으로 63회에 걸쳐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 1,032명(후평양포함), 총신 1531명, 대학원 29명, 기독교교육과 23명 합 261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70년 1월 현재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내려온 장로회 총회신학교 역대 교장은 다음과 같다. 

 

제 1대 마포삼열 박사

제 2대 라부열 박사

제 3대 감부열 박사

제 4대 박형룡 박사

제 5대 노진현 박사(교장서리)

제 6대 이상근 박사

제 7대 박윤선 박사

제 8대 명신홍 박사

제 9대 박형룡 박사(초대 학장)

 

대학인가를 받은 직후 1969년 12월 22일 재단이사장 백남조 장로, 실행이사장 노진현 목사, 학장 박형룡 박사는 감사의 인사를 신문지상을 통해 알렸다. 이날 오후 6시 이사회는 교수회가 건의한 대로 김득용 목사를 부교수로, 전임강사 김의환 박사를 부교수로, 박아론 목사를 조교수로 각각 승진시켰다. 

 

한국의 장로회 각 신학대학의 현황 (1970년 1월 현재) >      

 

고려신학교

대한신학교

장로회신대

장로회총회신대

한국신학대

설립

1945. 9. 20

1952

1901. 4. 27.

1901. 4.

1940. 9. 19

주소

부산시 서구 암남동 34

서울 용산 서계동 33-2

서울 성동 광장동 353

서울 영등포 사당동 31-3

서울 성북 수유동 129

소속

예장고신

성경장로회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장

대지

1만 8천 평

400평

1만 6천 평

1만 8천 평

3만평

학생

200명

180명

224명

300명

180명

학비

등록금

1만 5천원

 

등록금

3만 5천원

등록금

2만원

 

도서

1만 2천권

1만권

1만권

1만 2천권

1만 7천권

졸업

450명

504명

2,808명

2,570명

1,200명

교수

교수 9명

강사 10명

교수 5명

강사 20명

교직원 15명

(직원포함)

교수 10명

전임교수우대 3

교직원 30명

(직원포함)

* 출처: 장희근, 한국장로교회사, 624.

 

위 표는 당시 장로회총회신학대학의 현황을 다른 장로교 대학들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1970년 1월 현재 교수 6명, 부교수 3명, 조교수 1명, 전임교수우대 3명 합 13명이었다. 당시 총신을 섬기는 이들은 이사장 노진현, 재단이사장 백남조, 학장 박형룡, 대학원장 박윤선, 총무처장서리 안용준, 교무처장 안용준, 학생처장 이상근, 실천처장 최의원, 도서관장 간하배, 대학부장 김의환, 교수 명신홍, 교수 김득룡, 교수 박아론이다. 

 

3. 총신대학교 시대와 총신 재건의 또 한 명의 주역, 김희보

초대 학장 박형룡 박사의 뒤를 이어 1972년 2월에 김희보가 제 2대 총신대학 학장에 올랐다. 김희보는 대학인가를 받았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운 당시의 경제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만년 적자였던 학교 재정을 흑자로 전환시키고 1973년 410평의 기숙사와 1976년 1,800평의 총신대학 신관을 건축하고 여러 학과를 증설하였으며 깊이 있는 구약강의를 통해 탁월한 강해설교 중심의 목회자들을 배출하였고 총신대학교의 구약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가 재직하는 동안 학부와 신학원 교수진을 대폭 확충하였고, 1973년 12월 종교교육과 20명 종교음악과 20명의 학과신설을 교육부로부터 인가받았고 1975년에 12월 16일에 장로회총회신학대학에서 총신대학교로 학교명을 변경했다. 1977년 2년 4학기 과정의 목회신학원을 신설했고 그 이듬해 2월 Th.M.과 M.A. 학위과정 대학원 인가를 받았다.

총신대학교 출판부가 많은 양서 출간을 통해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총신대학교 신학과 학생들에게는 목회자만 아니라 세상에서 장로로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칼빈주의 문화변혁을 실천에 옮기도록 도전을 주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교육 받은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생 중 여러 명이 신대원에 진학하지 않고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이나 개인사업을 하면서 장로로 교회를 충성스럽게 잘 섬기고 있다.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드러나는 칼빈주의 세계관을 실천하도록 도전을 준 결과였다. 그러면서도 김희보의 영향으로 졸업 후에 구약을 전공하고 총신대학교에서 교수하는 학자들이 여러 명 배출되었다. 김정우, 유재원, 김지찬을 비롯한 유능한 구약학자들과 옥한흠, 홍정길, 김인중, 정필도를 비롯한 유능한 목회자들이 배출되었다. 오랜 목회 경험을 살려 교수로 학장으로 총신대학교를 섬긴 김희보 교수는 총신대학교에서 교회를 위한 신학을 실천에 옮기도록 학교를 이끌어갔다.

 

4. 총신의 신학정체성 천명: 1979년 총신대학교 교수회의 “총신의 신학적 입장”

총회가 주류와 비주류로 대별되어 대립되어 논쟁이 일고 있을 때 그 중심에는 총회신학교가 있었다. 비주류는 총회신학교 교수진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총신대학교 교수회는 총신대학교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총신의 신학적 입장”을 <신학지남>에 공개적으로 밝혔다. 교수회는 이 입장 선언서에서 “개혁주의 전통과 복음주의 유산을 물려받은 총신”이라고 밝히면서 총신이 추구하는 개혁주의 신앙노선이 무엇인가를 조목조목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 신학선언서가 발표될 당시 총신대학교 학장은 김희보, 대학원장이 박윤선이었고, 당시 교수진은 김명혁, 박형용, 신복윤, 차영배, 윤영탁을 비롯하여 총신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막강했다. 당시 합동신학교가 분열되어 나가기 전이었기 때문에 교수진이 상당히 탄탄했다. 그들 모두가 총신의 신학적 입장이라는 신학선언서에서 같은 목소리를 담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볼 때 총신의 신학적 입장은 너무도 훌륭한 선언서이고, 그 내용은 전반적으로 총신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밝혀주고 있다. 

1979년 총신의 신학적 입장 발표는 1959년 예장통합과 분립된 후 처음 있는 일이다. 총신의 신학 선언서는 장신의 신학성명서보다 6년이나 앞서 발표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총신의 신학적 입장

… 최근 총신이 좌경화되어 간다는 교계 일부의 오해를 해소시키며 한국교회의 올바른 진로를 제시하기 위하여, 우리 총신 교수 일동은 전국교회의 올바른 진로를 제시하기 위하여, 전국교회 앞에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과 복음주의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총신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가를 이제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되어, ‘총신의 신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의 근본적 특징인 성경의 권위를 높인다. 우리는 성경이 곧 신학의 객관적 원리이며 유기적으로 영감 되었고,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확신한다. 

성경은 신학의 유일한 객관적 원리이며 그 내용과 방법의 표준이다. … 성경은 유기적으로 영감되었다. … 그리고 성경영감의 범위에 대하여 우리는 사상만의 영감이나 부분적 영감을 거절하고 완전축자영감을 주장한다. 축자영감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기계적으로 받아쓰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고, 성경저자로 하여금 그들의 용어와 표현을 선택함에 있어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그들의 단어를 무시하든가 그들의 문체와 표현의 개성을 억제하든가 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셨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영감은 성경의 사상에만 아니라 성경저자들이 사용한 문자에도 확장된 결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신 것들이 정확무오한 언어로 전달된 것이다. …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진다. …

둘째,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본질적 특성인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

셋째, 우리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

넷째, 부르심을 입은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가 머리되심을 우리는 믿는다. …

다섯째,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실제적 특징인 적극적 문화관과 사회봉사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개인의 심성이나 종교적 활동의 영역에만 실현된다고 주장하여 사회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근본주의, 경건주의 및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우리는 생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실현되기 힘쓰는 개혁주의적 생활관을 강조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 나라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에게 사회적 해방을 가져오게 하는 계급투쟁 및 혁명운동을 통하여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사회주의적 해방신학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왕국의 영적 특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역사 가운데서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와 왕국의 궁극적 완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구원의 과업을 강조하는 동시에 사회봉사의 과업도 중시한다. 이웃에 대한 사회봉사의 과업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 관계의 회복, 즉 구원의 사건만이 신학 내용의 전체인 것처럼 주장하는 극단적이고 편협한 근본주의 사상에 반하여, 우리는 양자의 불가분리성을 인정한다.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 혹은 종척 관계의 회복, 즉 구원의 사건은 나와 이웃과의 수평적 혹은 횡적 관계의 회복 즉 사회봉사의 영역에 동시적이고 계속적으로 그 영향력을 침투시킨다고 믿으며,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삶은 또한 계속적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만든다고 믿는다(약 2: 22, 요일 4:20-21).

우리는 이상과 같은 우리의 ‘신학적 입장’을 밝혀, 현하 신학적 혼란에 처한 한국교회에 바른 방향을 제시하므로 이제 1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한 교회로 발전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시대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삼가 바란다.

 

1979. 8. 24.

 총신교수 일동

 

우리는 총신의 신학적 입장이 비주류가 총신대학교가 좌경화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가운데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총신의 교수들은 신학적으로 성경의 완전 영감과 무오 사상의 입장에 서서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재천명한 것이다. 적극적 문화관과 사회봉사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이라는 사실을 천명하면서 사회와 문화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근본주의를 배격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개인의 심성이나 종교적 활동의 영역에만 실현된다고 주장하여 사회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근본주의를 배격하고 … 이웃에 대한 사회봉사의 과업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 관계의 회복, 즉 구원의 사건만이 신학 내용의 전체인 것처럼 주장하는 극단적이고 편협한 근본주의 사상에 반하여, 우리는 양자의 불가분리성을 인정한다.” 

이는 총신이 외부로부터 사회와 문화를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적어도 신학교 공동체 안에는 교회에 맡겨진 문화적 사회적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려 했음을 증거한다. 총신의 신학적 입장이 교회의 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간과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근본주의나 신근본주의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총신이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사회 각 분야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칼빈주의 영역주권 사상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표명한 것이다. 이것은 1974년 로잔언약이 보여주듯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시키지 않았던 복음주의운동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이 강하게 일고 있는 당시, 총신의 교수 일동은 총신이 분리주의와 폐쇄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 점은 총신의 신학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박형룡 박사가 신근본주의 방향으로 신학교와 교단을 이끌고 나가려고 할 때 명신홍과 다른 교수들 그리고 총회가 신근본주의 분리주의로 나가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처럼 1979년 총신대학교 교수 일동은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1979년 총신의 신학적 입장에서 개혁주의 전통과 복음주의 유산을 물려받은 총신은 역사적 칼빈주의 노선에서 합리주의, 근본주의, 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필자가 볼 때 이것은 너무도 훌륭한 신학 선언서라고 판단된다. 이것은 성경의 완전 영감을 분명하게 천명하면서도 극단적인 근본주의 분리주의 노선을 경계하고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과거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신앙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신앙선언서였다. 그 이듬해 1980년 여기에 서명한 총신의 교수들 가운데 몇몇 분들이 합신으로 갈라져 나가 합동신학교를 설립함으로 총신 교수진이 상당히 타격을 입은 것이 사실이지만 1979년의 이와 같은 신앙노선은 1979-1980년 분열 이후 지금까지 총신의 신학적 입장으로 굳게 자리 잡았다. 

 

5. 신학대학원 인가와 용인 양지 캠퍼스 시대 개막(1980-2000)

1979년 비주류가 갈라져 나가고 1980년 합신의 설립이라는 아픔이 있었지만 총신대학교는 계속해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대학과 한국교회 목회자를 양성하는 대표적인 신학교로 발전해 나갔다. 1980년 2월 기존의 신학과 종교교육과 교회음악과에 이어 역사교육과, 영어교육과, 보육과 신설을 인가 받았고 그해 11월 교육부로부터 100명 정원의 신학대학원 설치를 인가받고 1981년부터 목회학 석사(M.Div) 학위 과정의 학생들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그해 경기도 용인에 225,329평의 교지를 확보하고 신학대학원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1984년 보육과를 유아교육과로 변경하고 총신대학교 부속 유치원을 설립했으며 1987년 박사과정(Th.D.) 인가를 받았다. 

1980년대 총신은 교단 개혁의 명분을 앞세운 교단 정치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았지만 평양장로회신학교로부터 내려온 신앙과 전통을 계승하는 점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1901년부터 1930년까지 역사적 복음주의 장로교 전통, 1930년대 이후 구 프린스톤장로교 전통에 1970년대 화란개혁주의 전통이 보강되어 총신은 풍요로운 역사적 칼빈주의 유산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간 것이다.

 

1) 차영배의 총신대 공헌(1979-1980년 분열 후)

우리는 이 과정에서 총신대 발전에 기여한 2명을 특별히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을 총신에 소개하고 정착하는 일에 앞장 선 차영배와 미국 복음주의운동의 신앙과 해외선교운동 흐름 전반을 총신에 소개하여 복음주의 세계관, 아시아와 세계의 신앙운동 이해, 해외선교에 대한 열정, 목회적 열정을 불어넣은 김의환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차영배는 신학자이면서도 학교 행정에도 밝아 교무처장과 학장을 지내며 총신대학교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가장 큰 기여는 우수한 젊은 인재들을 교수진으로 확보한 일이다. 그는 전세계 유수한 학교들을 돌면서 제자들을 독려하고 최홍석, 김정우, 권성수, 이한수, 정훈택, 김성태, 김지찬, 이관직, 박용규를 비롯한 젊은 학자들을 총신 교수진으로 확보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학문적으로 삼위일체론과 성령론에 대한 방대한 저술과 논고를 <신학지남>과 기타 신학저널에 기고하여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에서 성령론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결과 과거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내려온 칼빈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영성이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교단의 성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총신대학교에 목회학석사과정(M.Div.)을 교육부로부터 받아내고 신학박사 학위과정을 교육부로부터 단독으로 받아내는 일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스승이자 동료 교수였던 박윤선과 심도 있는 신학적 논의와 토론을 통해서 박윤선 목사가 ‘오순절의 단회성’ 이론을 수정하여 오순절의 단회성 성격만 아니라 연속성이 있다고 수정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해박한 성경지식을 동원한 그의 명석한 삼위일체 강의는 총신의 재학생들에게 분명한 삼위일체교리를 이해하도록 큰 도전을 주었다. 필자가 신대원 입학하던 1982년 2학기 그에게서 들은 신론 강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2) 김의환의 총신대 공헌(1979-1980년 분열 후)

김의환은 총신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아시아와 세계 복음주의운동과 세계선교운동의 신학 동향을 널리 소개하여 재학생들에게 WCC의 Missio Dei와 다른 차원의 본래의 교회 선교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해외선교운동에 대한 도전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홍정길 옥한흠을 비롯한 많은 신학생들이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훌륭한 총신 출신들이 오대양 육대주로 흩어져 선교사로 헌신한 이면에는 김의환이 있었다. 그는 빌리 그래함의 대중전도운동과 로잔대회에 대해서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ACTS, ITS 설립에도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오랜 선교 경험과 선교행정 선교훈련 경험이 풍부한 강승삼 선교사를 선교대학원 교수로 영입하여 신학생들에게 해외선교열을 불어넣은 것도 김의환 총장 재임 동안이었다. 예장합동이 한국에서 가장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교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김의환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1995년 초대 총장에 취임한 김의환은 양지캠퍼스와 사당동 캠퍼스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95년 사당동 종합관 건축, 1996년 선교대학원 인가, 제2 생활관 신축, 1995년 교육대학원 인가, 1998년 아동학과 신설 모두 그의 재임시절에 이루어졌다. 

김의환은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복음주의운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소개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의 신학은 칼빈주의적이면서 복음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면서 칼빈주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전형적인 개혁파 복음주의 신학자요, 지도자였다. 그가 고신의 오병세, 서울신대 조종남,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한철하와 함께 한국복음주의 신학위원회를 창설한 것과 한철하, 한경직, 마펫(Samuel H. Maffett)과 함께  ACTS 설립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보수적인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에 서서 한국의 당시 민중신학을 비판하고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며 총신의 영향력을 한국교회 전반에 널리 확장하는 역할을 했다. 특별히 제 1대 총장에 취임한 후 총신발전에 미친 그의 족적은 참으로 지대했다. 그가 총장 재임 중에 작성된 1995년 총신대학교 신앙고백이 보여주듯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선교적 문화적 사회적 책임을 매우 중시하는 전통을 총신에 심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995년 10월 27일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에서 열린 제 26차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논문 발표회에서 행한 기조연설(복음주의신학의 역사적 조명과 전망)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결코 문화적 폐쇄주의자도 아니요 사회적 도피주의자도 아니다.”고 밝힌 뒤 제임스 패커를 인용하여 근본주의자들은 “첫째,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고 둘째, 분리주의적 교회관을 가지며 셋째, 교회적 정통을 위한 전투적 보수주의운동을 전개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총신대학교가 한국복음주의신학의 발전에 기여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높이 평가했다. 

 

최근에 성령론의 새로운 이해는 오순절 사건의 신학적 재해석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이 논쟁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개핀과 총신대의 차영배 사이의 심도 있는 신학토론은 복음주의신학의 국제적 교류와 성장을 자극시켰다. 그밖에 총신대 교수들의 그 방대한 저작활동은 복음주의 신학의 성장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김의환은 과거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총신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이나 1990년대 중반 4년 동안의 총장 재직기간 동안 해외선교운동과 복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도전을 주었고, 총신대학교 종합관을 완공하고 총신대학교의 대외적인 위상을 한 차원 높여주었다. 

 

3) 1995년 총신대학교 신앙고백서와 총신의 정체성

1980년대 한국에서 민주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는 동안 민중신학과 토착화운동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한국교회 일각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총신 안에서도 그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김의환 박사가 총신대학교 제 1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이미 오랫동안 총신에서 교수사역을 감당하다 미국 LA에서 이민 목회를 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의환 박사가 총신의 교장에 오른 것은 매우 시의적절했다. 그는 총장에 취임한 후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총신대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첫째, 총신대학교를 안정 가운데 발전시켜 주었고 둘째, 저술활동을 독려하고 한국복음주의 신학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총신대학교의 신인도를 높이고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토대를 구형하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셋째, 외형적으로 사당동 종합관을 건축하는 등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가 총신대학교 총장에 취임한 후 했던 공헌 가운데 또 하나는 1995년에 나온 총신대학교 신앙고백이다. 그의 리더십 하에 신학대학원 교수회는 오랫동안 준비 작업을 거쳐 1995년 총신의 신앙고백서를 통과시켰다. 이것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총신대학교 신앙고백으로 정착되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앙고백

 

1.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오류 없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

2. 우리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는 참되시고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3.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역사적 재림을 믿는다.

4.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적 부패,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통한 구속, 그리고 성령에 의한 중생과 칭의를 믿는다.

5. 우리는 성령의 중생, 회심, 성화, 인도, 충만케하시는 사역을 믿는다.

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와 주가 되심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임을 믿는다.

7.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이 예배, 복음증거, 교육, 성도의 교제, 기도, 봉사, 그리고 선교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교회의 문화적 및 사회적 책임을 믿는다.

8. 우리는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며 역사적 재림, 공의로운 심판, 그리고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믿는다.

9.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소요리문답에 나타난 전통적인 개혁신앙이 성경에 충실하고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믿는다.

 

이 총신대학교 신앙고백의 중요한 특징은 첫째, 평양신학교부터 내려오는 신앙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사실이고 둘째,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이라는 사실과 성경의 완전영감과 무오성을 분명하게 개진하였다는 사실이고 셋째, 사회적 책임을 명문화하였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성경적으로 개혁신앙을 가장 잘 표현한 신앙고백이라고 밝혔다는 점이다. 

사회적 책임과 문화적 책임을 분명히 천명한 것도 평양장로회신학교 전통과 1979년 총신의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이는 총신대학교 신앙고백이 복음전도와 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등한시 하는 극단적인 신근본주의 분리주의를 경계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1995년 총신대학교 신앙고백은 놀랍게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신경과 매우 유사하고, 12신조, 1979년 총신의 신학적 입장을 계승 발전시킨 신앙고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6. 2001년 총신 개교 100주년: 기념세미나, 총신대학교 100년사, 100주년 채플

1990년대 총신대학교는 한국교회와 신학계 안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학교로 발전했다. 2002년 양지 캠퍼스에 총신 100주년 기념예배당이 건축되었고 우수한 교수진이 확보되어 양질의 신학교육이 추진되었고, 총신의 교수들은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비롯한 크고 작은 교단과 노회 산하 집회에 주강사로 초청을 받았다. 

총신대학교 출신들의 신대원 무시험 진학이 시행되면서 학부와 신대원의 유기적 연대가 강화되었고, 총신대학교 교수들은 왕성한 저술과 연구활동을 통해 한국 복음주의 신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수한 학생들의 총신진학으로 총신은 학문적 발전을 이룩했고, 우수한 학생들이 해외에 유학을 떠나 학위를 마치고 돌아왔다. 현재의 총신대학교 교수진 가운데 상당수는 1990년대 총신에서 교육 받은 이들이었다. 이 기간 해외선교를 지망하는 우수한 신학생들이 총신에 입학해 신학교육을 받고 해외선교사로 파송을 받았고, 목사로 임직을 받았다.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본 교단의 유능한 목회자들이 이 기간에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1) 총신 100주년(2001년) 당시 교수진 

 

1. 대학부 교수

성 명

직 위

담당과목

취임년월일

성 명

직 위

담당과목

취임년월일

홍치모

정정숙

신성자

박정순

이숙영

김인환

정희영

유준기

정갑순

김동춘

박희석

김희자

함영용

주성희

문석호

한춘기

김미경

이기선

김광열

 

명예교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역 사

기독교교육

구 약

음 악

음 악

신 학

보 육

역 사

보 육

보 육

신 학

종교교육

영 어

음 악

교 목

종교교육

음 악

음 악

신 학

 

1978. 3. 1

1977. 9. 1

1979. 3. 1

1981. 3. 1

1981. 3. 1

1983. 3. 1

1983. 3. 1

1984. 3. 1

1985. 3. 1

1986. 3. 1

1986. 3. 1

1986. 3. 1

1989. 3. 1

1993. 5. 1

1987. 9. 1

1988. 3. 1

1987. 9. 1

1990. 3. 1

1994. 5. 1

 

조훈

장영희

한상진

김봉수

신국원

이재서

장성민

김선희

주영흠

김수연

유상섭

주성준

김영숙

이성희

문용식

강은주

유상훈

정지강

Heide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교 수

 

역 사

음 악

종교교육

역 사

기독교철학

사회복지

철 학

언어학

교육학

바이올린

신 학

신 약

영어교육

영어교육

국문학

유아교육

성 악

피아노

영어교육

 

1995. 10. 1

1994. 6. 1

1996. 7. 1

1995. 3. 1

1996. 10. 1

1997. 3. 1

1997. 3. 1

1996. 3. 1

1997. 3. 1

1997. 9. 1

1997. 9. 1

1997. 9. 1

1998. 3. 1

1998. 3. 1

1999. 3. 1

1999. 3. 1

1999. 3. 1

1999. 3. 1

2000. 2. 23

 

 

 

2. 역대 신대원 교수 및 2001년 100주년 당시 현재 신대원 교수 

역대 신대원 교수

현재 신대원 교수

성 명

직 위

담당과목

봉직년대

성 명

직 위

담당과목

취임년월일

김희보

교수

구약

1981-1985 정년퇴임
(명예교수 1994년까지)

채은수

교수

선교신학

1981. 3. 1

김득용

교수

실천

1981-1988. 2. 28 정년퇴임
(명예교수 1995년까지)

유재원

교수

구약신학

1985. 4. 1

배제민

교수

구약

1981-1989. 2. 28
정년퇴임

김의원

교수

구약신학

1984. 9. 1

박아론

교수

교의

1981-2000. 2. 28
정년퇴임

최홍석

부교수

교의신학

1988. 4. 1

박장하

교수

사회

1981-1986

정성구

교수

실천신학

1977. 3. 1

차영배

교수

교의

1981-1992

정일웅

교수

실천신학

1985. 3. 1

신성종

부교수

신약

1981-1985(6)

박건택

부교수

역사신학

1991. 4. 1

손두환

조교수

역사

1981-1989. 2. 28
정년퇴임

심창섭

부교수

역사신학

1991. 4. 1

손영준

조교수

선교

1981-1986

이한수

부교수

신약신학

1981. 4. 1

박희천

조교수

헬라어

1981-1987

정훈택

부교수

신약신학

1991. 4. 1

오덕교

전임강

구약

1981

김정우

부교수

구약신학

1991. 4. 1

김영재

부교수

역사

1982-1986

서철원

교수

교의신학

1991. 4. 1

박영희

조교수

신약

1981-1985

박용규

부교수

역사신학

1992. 3. 1

이상근

교수

교의

1983. 3. 1-1985
(명예교수 1993년까지)

김성태

부교수

선교신학

1993. 4. 1

조해수

교수

실천

1984. 2- 1985

김길성

부교수

교의신학

1994. 4. 1

천정웅

교수

실천

1984. 2- 1993

황성철

부교수

실천시학

1994. 4. 1

권성수

교수

신약

1986-1999

김지찬

부교수

구약신학

1995. 3. 1

김세윤

교수

신약

1988- 1995. 2. 28 면직

이관직

조교수

실천신학

1995 12 1

 

 

 

 

이상원

조교수

교의신학

1999. 9. 1

 

 

2) 총신 100주년 기념세미나: 총신의 정체성의 역사적 신학적 평가

 

1901년 설립된 총신은 2001년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지난 100년의 총신의 신학적 전통은 화란의 개혁주의, 구학파장로교전통, 역사적 복음주의를 근간으로 삼았다고 판단하고 그런 방향에서 신학세미나를 개최하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회고해도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매우 바르고 훌륭한 방향 설정이었다. 총신대학교 교수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는 2001년, 지난 100년의 총신의 신학적 전통을 회고하는 100주년기념학술세미나를 가지면서 총신의 신학의 발전과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세 개의 신학 전통, 곧 ‘구프린스턴신학과 총신신학,’ ‘복음주의신학과 총신신학’ 그리고 ‘개혁신학과 총신신학’을 조명했다. 주제 발표자들과 논문 주제 및 논평자들은 다음과 같다.

 

 

 

 

 

 

 

 

 

 

 

 

 

 

주제 발표는 각자 관점이 달랐고 그 관점에서 총신의 역사를 조명하였지만 이들의 발표는 총신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세 번의 100주년 총신 개교 기념 세미나는 총신대학교는 구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 복음주의 신학, 그리고 화란개혁주의신학이 총신의 신학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3) 총신대학교 100년사와 총신의 신앙전통

개교 100주년을 맞아 3권으로 구성된 총신대학교 100년사와 화보집 1권 총 4권을 출간했다. 총신대학교 100년사 1권은 총신대학교 역사, 2권은 학술편과 자료편, 3권은 자료편으로 총신대학교의 지난 100년의 역사는 물론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과 중요한 문헌들을 집대성하여 3권에 담았고 화보집은 지난 100년의 역사의 중요한 사진자료들을 역사적으로 정리하였다. 비록 훗날 보완이 필요하겠지만 설립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 매우 의미 있는 일을 진행한 것이다. 2002년 6월 집필위원들(홍치모, 유준기, 김길성, 박용규)은 총신대학교 100년사에 지난 100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존중되어 온 신학적 전통이 개혁파복음주의(改革派 福音主義)라고 분명히 밝혔다.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뚜렷한 개혁파 복음주의(改革派 福音主義) 신앙을 가진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그들의 신앙은 자연스럽게 한국인들의 신학교육에 반영되어 평양신학교는 소위 정통주의 산실(産室)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 1960년대 이후의 신학적 변천과 교단을 초월한 신학적 움직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어 왔는가를 규명하고 그곳에서 총신의 위상(位相)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총신이 구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성을 계승하면서도 이 시대에 선교적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고 했던 일련의 노력들을 반영하려고 하였다. 총신이 WCC 에큐메니칼 도전 앞에서 개혁파 복음주의(改革派 福音主義)라는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신학교의 재건과 발전, 정통주의 정체성과 대사회적 책임, 선교적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시대에 걸 맞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일을 감당해왔던 것이다.

 

총신은 WCC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분명한 입장을 일관되게 취하여 왔고, 성경의 무오성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변호하였으며, 청교도 경건의 실천과 복음전파를 실천했으며, 구 프린스턴 신학과 복음주의신학, 그리고 개혁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왔다.

 

7. 변화의 시대: 총신대학교 개교 100주년부터 120주년까지(2001-2021) 

총신대학교가 100주년을 맞는 2001년 이후 120주년을 맞는 2021년까지 지난 20년의 총신의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필자가 볼 때 영광과 아픔을 동시에 경험한 기간이었다. 총신대학교가 총장 시대로 들어선 후 역대 총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총신대학교 역대 총장 >

1대 

김의환 총장
(1995. 3 ~ 1999. 3. 28.)

5대

길자연 총장
(2013. 12. 17. ~ 2015. 6. 25.)

2대

김의원 총장
(2000. 9. 26. ~ 2004. 9. 24)

6대

김영우 총장
(2015. 7. 10. ~ 2017. 12. 16.)

3대

김인환 총장
(2004. 11. 25. ~ 2008. 11. 24.) 

7대

이재서 총장
(2019. 5. 25. ~  )

4대

정일웅 총장
(2009. 9. 18. ~ 2013. 9. 17.)

 

 

                          

 

총신대학교 100주년 이후 20년의 역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중요한 사건이나 논의들을 간단하게 살펴 보려고 한다. 이 기간 사당동에 제 2종합관이 건축되었고, 양지에 개교 100주년 기념예배당이 들어섰으며, 사당동 캠퍼스나 양지캠퍼스에 학교 건물들이 외형적으로 한층 더 아름답게 단장되었다. 특히 양지 캠퍼스에 2,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총신대학교 100주년 기념예배당이 건립되어 신대원 재학생들과 교수들이 다함께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쾌적한 환경이 조성되어 100주년 기념예배당은 총신의 새로운 상징이자 영적훈련의 구심점이 되었다.

2000년에 접어 들어 총신대학교는 전국에서 신학대학으로는 우수한 학교로 평가를 받았고 신학대학원은 경쟁률이 5대 1을 넘거나 육박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는 2007년 총신대학교 안에는 부흥의 열기가 충천했고 소래교회에서는 기도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기간의 총신대학교의 역사적 의미를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총신대학교는 과거 평양장로회신학교 재학생들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의 영적각성과 부흥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런 영적 분위기가 총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 안에 강하게 일어났다. 

둘째, 이 기간 특별히 개혁측과 합동 이후 총회 일각에서 신앙의 순결을 강조하며 교단을 이전보다 더 보수적인 방향으로 교단을 이끌려는 움직임이 아주 강하게 등장했다. 1913년 WCC 부산총회를 반대하고, 동성애 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총회, 노회, 전국목사장로 기도회 등에서 개혁신앙의 기치를 높이 드는 일을 감당했다. 그 영향으로 총신대학교 안에서도 개혁신앙의 전통을 더 한층 강화시키려는 노력이 강하에 일어났다. 

셋째, 총신은 교단과 총회가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하는 과정이나 한기총의 일원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고 계승하는 일에 신학적 학문적 동력을 제공했다. 

넷째, 총회 일각에서 평강제일교회 박윤식과 류광수 다락방 영입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전체 교수들과 학생들이 이를 막는 일에 앞장섰다. 훗날 한기총이 박윤식, 변승우, 류광수 다락방을 비롯한 이단에 대해 이단해제를 단행하자 한기총을 탈퇴하고 교수들은 전국의 여러 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한기총의 이단해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다섯째, 총신대학교에 우수한 학생들이 신학과에 입학하면서 군목시험에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며 한국의 군복음화를 선도하는 일에 앞장섰다. 군목시험의 우수성과 군목활동은 총신대학교의 명예를 높이고 학교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여섯째, 총신대학교 신대원 출신들이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현상이 강하게 일어났다. 주관적인 평가인지 모르지만 전국에서 눈에 띠게 성장하는 교회들 가운데 총신 출신들이 목회하는 곳이 참으로 많았다.

일곱째, 총신대학교나 신대원을 비롯한 총신의 교수들이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며 우수한 논문들과 저술들을 출간하여 복음주의 한국신학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필자가 볼 때 총신대학교 교수들의 저술과 연구 활동은 국내외 어느 신학교와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다고 판단된다. 저술활동만 왕성할 뿐만 아니라 총신의 여러 교수들이 개혁신학회, 복음주의신학회, 장로교신학회, 칼빈학회 등 여러 학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총신의 교수들은 아마도 한국의 여러 신학교들 가운데서도 신학 분야의 양서들을 가장 많이 출간한 학자들이 아닌가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2005년 예장합동과 예장개혁이 역사적인 합동을 이룩한 것이다. 총신 공동체의 일원으로 교단의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필자는 이를 적극적으로 찬성한 사람이다. 분열된 아픔을 다시 회복하고 하나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2000년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고무적인 움직임과 결실이 있었지만 총신과 교단은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별히 2010년대에 접어들어 더욱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2010년에 접어들면서 신학대학원 지원자 수가 급속하게 감소하였고 총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에 대한 평판도 이전과 달랐다. 총회 안에 평강제일교회 박윤식과 류광수 다락방 영입 문제, 한기총의 이단해제문제, 신앙의 순결을 지나치게 강조한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움직임, 총신대학교 정관개정과 사유화문제가 불거지며 총신대학교는 전에 없는 진통을 경험해야 했다. 지난 20년 동안 총신은 어느 특정인에 의해 학교 행정이 파행적으로 운행되거나 정관을 개정하여 사유화하려는 현상으로 인해 심각한 진통과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단 정치로 인한 흔들림이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총신대학교 이사회 구성원들은 사심이 아닌 참으로 진정한 학교 발전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학교 개혁을 위해 수많은 재학생들이 졸업을 거부하거나 학점을 거부하는 너무도 큰 아픔을 경험했고, 교육부 감사가 나왔고 약 2년 반 동안 교육부 파송 임시이사회 체제를 경험해야 했다. 수년 동안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전국적인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기도, 총회와 운영이사회의 헌신적인 노력, 학생들의 희생과 헌신 속에 학교가 어느 정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2019년 이재서 교수가 총장에 취임한지 약 2년이 지나 2021년 개교 120주년을 앞두고 정이사회가 구성되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총신 공동체는 이 사건에서 깊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년간의 학내 문제를 성찰할 때 총신의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희생적인 헌신과 노력이 없었다면 총신의 회복은 참으로 요원했을 것이다. 총신의 공동체는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학교의 정상화와 발전을 위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총신은 학교와 교단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안내할 시대적 책임을 부여 받았다.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는 결코 총신이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며 역사적 장로교 전통과 종교개혁의 전통에 굳게 서서 개혁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신앙전통을 계승하여 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979년 총신의 신학적 입장에서 밝힌 대로 “개혁주의 전통과 복음주의 유산을 물려받은 총신”은 한편으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자유주이 합리주의를 경계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는 극단적인 근본주의 분리주의를 경계하였다. 그것은 한 마디로 총신은 역사적 장로교 신앙전통에 서서 화란개혁주의, 프린스턴구학파 장로교전통, 역사적 복음주의신앙을 존중하고 계승하는 것이었다. 

2005년 개혁측과의 합동은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여전히 둘 사이에는 너무도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다. 사실 많은 준비와 협력 속에 진행되지 못하고 몇몇 총회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진행한 나머지 충분한 논의와 합의를 도출하지 못해 총회가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1979년의 분열에 대한 분명한 청산 없이 합동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필자가 볼 때 이것은 앞으로 계속 서로 갈등의 요인으로,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를 이분화시키고 신앙의 순결을 앞세우며 분리주의를 강조하고 과거 ICCC 칼 매킨타이어가 신근본주의 분리주의로 나갔던 그런 양상으로 교단을 이끌려고 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감지된다. 안타까운 사실은 구 개혁측의 인사들 중에서 신근본주의 분리주의를 개혁주의로 포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를 분리시키고 이런 관점에서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을 WCC와 동일한 국제기구로 매도하고 있다. 오랜 연구와 논의 끝에 이미 2019년 총회가 교류단절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정한 상황에서 최근의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 교류 단절시도는 세계교회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며 총회가 다시 근본주의 분리주의 극단으로 나가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개혁주의로 포장된 신근본주의 분리주의는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가 보여주듯 총신의 전통은 아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의 교류 단절 주장은 과거 ICCC 칼 매킨타이어가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자들이 했던 전형적인 움직임이다. 1979년 정규오 목사가 중심이 된 비주류가 총신의 신학이 좌경화된 것처럼 비판하고 총신과 교단을 근본주의로 이끌려 했던 동일한 현상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979년 총신 교수들의 총신의 신학적 입장에서 천명한 것처럼 총신은 언제나 극단적인 근본주의를 경계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회적 책임과 문화적 책임을 중시하며 영역 주권을 강조하는 역사적 개혁주의나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120주년을 맞은 총신대학교는 너무도 많은 중요한 과제를 부여받았다. 한편으로 좌향화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흐름 속에서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내려오는 신학적 정체성을 흔들리지 않고 계승하여 역사적 기독교를 지켜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국교회의 심각한 침체와 쇠퇴를 극복해 나갈 목회자를 신학교에서 양성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국교회의 건강한 성장과 발전은 곧 신학교의 건강한 성장과 발전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를 위한 신학을 충실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다.

 

8. 총신대학교 향후 교육환경의 변화, 전망, 과제

마지막으로 본 논고의 중심 주제와는 약간 다를 수 있지만 총신대학교가 현재 교내외적으로 직면하고 있고 향후 피할 수 없는 과제들을 언급해야 할 듯하다. 필자가 볼 때 총신대학교는 현재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역사적 칼빈주의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정치 사회 전반에 반 기독교적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신학교육 환경이 더욱 어려워 질 것을 예견하는 것이다. 교단 안에서도 전에 없는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은 최근 진행되었거나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라고 예견된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면서 총신 공동체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지혜롭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사료된다. 

첫째, 일각에서 신앙의 순결을 앞세우며 특정인물을 우상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물론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자 마펫도, 한국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도, 또한 그 누구도 신학교 안에서 우상화하지 않았다.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삼는 총신은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성경의 권위를 최고의 권위로 삼는 신학교로 만들어가야 하고 그런 방향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내려온 120년의 총신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둘째,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교수진들과 교과과정,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 박형룡,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 명신홍과 박윤선, 평신의 기관지 <신학지남>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적 칼빈주의에 대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국장로교 전통 특별히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내려온 신앙전통은 역사적 복음주의 신앙 전통, 구 프린스턴 장로교 신학전통, 그리고 화란개혁주의 신학전통이 어우러져 온 아름다운 역사였다. 총신에서 이들 3가지 신학적 전통의 조화와 아름다운 균형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 개혁주의-칼빈주의는 신앙의 순결을 강조하지만 결코 분리주의는 아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육목적, 1979년 총신의 신학적 입장, 1995년 총신대학교 신앙고백에 분명하게 표현되었듯이 총신 120년의 역사는 결코 복음전도와 문화적 사회적 책임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총신은 3가지 전통 속에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전체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발전, 세계 신학계의 발전, 국내외 선교발전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박형룡은 남침례교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황성철, 이관직을 비롯한 그 학교 출신 여러 명이 오래 전부터 총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심지어 총신을 졸업하지 않은 고신 출신 여러 교수들도 총신대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총신이 교파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전체 한국교회 더 나아가 세계교회와 호흡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와 같은 전통을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총회와 신학교의 긴밀한 유대와 협력 속에 신학교와 교단을 동시에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어떤 중요 안건이라고 총회 석상에서 감정적으로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예장합동은 대교단으로 진중하고 심도 있는 연구를 거쳐 의연하게 하나 하나 결정해 나가도 결코 늦지 않다. 총회의 결정은 보통 총신대학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총회의 결정으로 학교의 의지와 상관없이 총신대학교가 교단 정치에 서거나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다. 갑작스런 총회의 결정이 총회 결정으로 끝나지 않고 총신의 정체성을 흔드는 그런 현상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총회와 교단은 총신 교수회의 입장과 결정을 존중해 나가야 할 것이다. 

넷째, 향후 대회제를 도입하거나 권역별 목회후보생 양성 차원에서 교단의 3개의 지방신학교와 총신을 하나로 묶어 신학교육을 권역별 목회자 후보생 양성기관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이런 현상은 2005년 구 개혁측과 합동 이후 더욱 피할 수 없는 과제로 점점 더 부상하고 있다. 향후 총신을 여러 지방신학교 가운데 하나로 끌고 가 교단 안에 총신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시도를 앞으로 지속할 것으로 예견된다. 이런 권역별 목회후보생 양성은 교단이 지방주의로 흐르고 자칫 신학교육을 하향 평준화만들 가능성이 높다. 목회후보생을 권역별로 실시할 경우 학생수 감소로 총신은 더욱 더 재정 압박의 위협을 받을 것이고, 그럴 경우 그렇지 않아도 들리고 있는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 매각설이 눈앞에 현실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각 신학교의 특징과 전통을 존중하고 각 학교의 장점을 살려 더욱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신학교의 발전은 물론 교단의 발전으로 나가는 길이다. 그것은 훌륭한 목사후보생이 배출되어야 교단의 목회자들의 수준이 향상될 것이고, 그것은 곧 교단의 리더십과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최근 총신대학교 운영이사회 폐지는 총신대학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한다. 운영이사회 제도는 장신에는 없고 총신에만 있는 제도이다. 운영이사회는 신학교가 총회의 직영신학교로 운영하는 차원에서 전국교회의 재정지원과 협력을 이끌어 내는 취지의 일환으로 총신이 장로회총회신학교로서 총회의 지도, 총회의 지원 속에서 운영하는 학교라는 사실에 걸맞게 도입한 제도였다. 이것은 장신대에서도 없고 심지어 과거 평신에서도 없었던 제도로, 미국 북장로교의 교단신학교인 구 프린스턴신학교에 있었던 제도이다. 이것이 총신대학교 발전이 될지 아니면 이로 인해 학교가 어려움을 만나게 될지 필자는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여섯째, 1959년 분열 이후 총신대학교는 교단정치의 영향을 너무도 강하게 받아왔다. 총신 안에서의 교권의 영향으로 총신은 많은 동요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1959년 분열 이후 총신대학교는 정치적인 입김이 너무도 강했고, 총회 안에 총신대학교를 장악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이 경우 총신이 교단정치에 휘말려 신학교가 생산적인 문제를 놓고 발전적인 방향에 에너지를 쏟지 못하고 정치적 논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신학교를 정치적인 장으로 만드는 데는 학교 리더십과 교수들도 일정부분 책임이 크다. 교수들은 본래의 신학교육에 충실하면서 총신의 신학과 교단의 신학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이단에 강하게 대처하며 총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소임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교단 정치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총신을 교권에서 지키는 일이다. 교단의 리더십을 누가 갖든지 총신의 목회자 후보생 양성은 조금도 차질이 없어야 하고 일관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일곱째, 그동안 훼손된 총신의 위상의 회복이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다. 총신은 지난 10여년이 넘게 교단과 깊은 갈등과 대립각을 세우며 긴장 관계 속에서 학교 안팎 교육환경이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었다. 총신대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들이 너무도 많이 노출되어 학교에 대한 위상과 명예가 참으로 많이 실추된 것이 사실이다. 총신대학교는 교단 소속 교회들로부터 위상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전체 한국교회로부터 위상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단 전체와 한국교회 전체에 총신대학교가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할 것이다. 총신 공동체 전체가 이를 위해 진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여덟째, 총신의 신학교육이 목회 현장과 괴리되어 신학교육이 실제 목회와 목양에 접목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120년의 총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볼 때 확실히 오늘의 총신의 신학교육은 과거 평양장로회신학교와 다르다. 과거 평신에서는 신학교육은 물론 학생선발부터 ‘교회를 위한 신학’을 철저하게 실천에 옮겼으나 오늘 총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목회 환경은 급속하게 변하고 있고 사회가 놀라운 속도로 변하는데 신학교육은 이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과거 <신학지남>은 한국교회를 신학적으로 바르게 이끄는 지남의 역할, 수많은 성경해석과 강해자료 제공을 통해 목회와 목양의 중요한 안내서가 되어 한국교회 안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신학교 지원자들이 사경회와 성경학교에서 성경에 대한 상당한 과목을 이수한 자들이었고 과거 평신의 교과과정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신학교 5년 과정, 3년 과정에서 깊이 있게 연구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그래서 신학교육과 목회 현장은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오늘날 총신이 그렇지 못한 원인이 커리큘럼의 문제인지, 교권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신학교의 리더십과 교수들의 문제였는지를 진지하게 살펴 해결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이다. 신학교는 한국교회의 미래의 모판이다. 미래의 한국교회를 준비하고 중단 없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총신은 우수한 인적 자원이 총신에 지원하고, 다음 세대를 이끌고 나갈 신학자 교수 요원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등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수한 목회 후보생의 양성은 곧 우수한 교단 지도자 양성과 향후 우수한 교수진 확보와 깊이 연계되었다. 이미 실시하고 있는 대학부와 신학대학원의 연계성의 발전, 차별화된 군복음화를 위한 군목후보생들의 양성, 교수 요원 후보생을 선발하여 외국 유학을 시키는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 그 외에도 여러 방향에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방법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맺는 말

.지금까지 총신 120년의 역사를 평양장로회신학교 기간(1901-1940), 장로회신학교: 평양장로회신학교 복구기간(1940-1960), 그리고 총신대학교: 평양장로회신학교 회복과 계승 기간(1960-2021)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조명하였다. 지난 총신의 120년의 역사는 한 마디로 영광과 질곡의 역사였다. 처음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의 토대 위에 한국장로교회가 설립되었고,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그 학교의 신앙적 유산과 전통이 오늘날 총신의 정신을 구형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내려온 120년의 총신의 역사는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 교회 중심의 전통적인 칼빈주의 장로교 목회자 양성 기관으로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신학교가 교리주의나 사변주의 신학으로 흐르지 않고 성령의 역동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성령충만한 목회자 양성을 언제나 강조하였다. 120년의 총신의 역사는 한편으로 자유주의를 경계하고 다른 한편으로 극단적인 근본주의 분리주의를 경계했다. 한 마디로 1979년 총신의 신학적 입장에서 밝힌 대로 “개혁주의 전통과 복음주의 유산을 물려받은 총신”의 신앙전통을 견고하게 계승하고 발전시켜 왔다. 2001년 9월 총신대학교 설립 100주년 때 당시 신대원장이었던 김정우가 언급한 것처럼 “박형룡과 박윤선은 총신에서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을 중심축으로 분명히 세웠고, 한편으로 보수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복음주의를 양 날개처럼 세우고 포용하였다.”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기를 원한다. 

첫째, 한국에 파송된 초기 개척 장로교 선교사들은 19세와 20세기 초 영미에서 일고 있던 학생자원운동과 복음주의 해외선교운동 영향을 받고 내한한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깊이 사랑하고 실천하고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성령의 사람이었다. 이들은 그런 신앙노선에서 한국장로교 선교를 진행했고 한국장로교를 이끌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평양장로회신학교로부터 흘러온 지난 120년의 총신은 다음과 같은 성향의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한국교회 안에 굳게 자리 잡았다. 

둘째,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선교사들은 출신국가와 출신학교가 어디이던지 네비우스선교정책에 근거한 성경중심적인 선교와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평양신학교 설립은 사경회의 연장선에서 시작하였고, 그 때문에 처음부터 평양장로회신학교는 교회를 위한 신학을 중요한 신학교육의 목적으로 삼았다. 

셋째,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실천적인 목회자를 양성하였고, 신학교육과 목회현장이 전혀 괴리되지 않아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졌다. <신학지남>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목회의 길잡이였고 안내서였다. 신학교를 중심으로 총회 노회 개교회가 운영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교 교장 마포삼열이 총회장이 되었고, 신학교 교수 남궁혁이 총회장이 된 것도 총회와 신학교가 긴밀한 유대관계를 잘 반영해준다.

넷째, 평신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발흥과 저변확대의 주역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되었고 그 성령의 불길은 곧 평양장로회신학교와 평양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길선주를 비롯한 평양신학교 재학생들은 그 불길을 전국으로 가지고 달려갔다. 그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7명이 그해 6월 평신을 졸업하고 9월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담임목사로 임직을 받거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선교사들에게 물려받은 이런 복음의 전도열정의 결과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 때 한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선교지로 발전했다. 

다섯째,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사회와 민족의 지도자로 양성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33명의 3.1운동 선언서 서명자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이었고 그 중 7명이 장로교인이었으며 이들 중 5명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거나 재학한 인물이었다. 

여섯째, 평양장로회신학교 출신들이 기독교민족운동만 아니라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사회계몽운동을 선도했다. 

일곱째, 한국장로교는 1907년과 1912년 첫 노회와 총회가 조직할 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출발했고 1959년 분열 이후 총신과 졸업생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복음전도와 해외선교의 기치를 강하게 내걸고 민족복음화와 복음주의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하였다. WCC 에큐메니칼 노선의 교단들이 하나님의 선교를 외치며 교회 중심의 미전도종족의 선교를 게을리 할 때 총신 출신의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해외선교운동을 견인했다. 그 결과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을 견인하고 1984년 한국선교 100주년대회 그리고 이후 진행된 놀라운 해외선교운동에 총신 출신들이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1959년 예장통합과 분열된 후 예장합동은 선교회의 도움 없이 세계교회와의 교류를 단절하고 독자적으로 자생의 길을 찾으며 교회를 성장시키고 한국교회 안에 세계선교운동을 견인하였다. 분리주의적 교회관은 신앙의 순결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분리주의적 세계관을 심어주어 총신 안에 역사적 칼빈주의 신앙의 유산을 폭넓게 계승하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전을 주는데 큰 장애물이 되었다. 신앙의 순결을 강조하고 정통 보수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사회 문화적 책임을 게을리하고 성속의 이원론적 시각이 강해 신앙과 삶이 괴리되고 윤리적 수준이 낮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신앙의 순결을 앞세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적 시각은 사회와 문화 변혁을 강조하는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그런 경향 때문에 개혁주의를 강조하고 표방하면서도 정작 비개혁주의적인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총신과 예장합동이 극복해 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20년의 총신의 역사는 주권적인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섭리의 역사였다. 구 프린스턴신학교와 몇몇 학교를 제외하고 총신처럼 120년 동안 처음 가졌던 본래의 신앙을 아름답게 계승해온 신학교의 역사도 현대에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총신 120년은 분명 자랑스런 역사요, 아름다운 신앙의 역사였다. 

이제 설립 120주년을 맞는 총신은 성경을 신앙과 신학의 정확무오한 표준으로 삼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가지 않고 역사적 칼빈주의 노선에서 화란개혁주의, 미국 구학파 장로교 전통, 역사적 복음주의 전통을 존중하고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다. 총신은 지난 120년의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신앙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120년의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미래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더욱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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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과정 주후 1926년 6월 6일.” 조선야소교장로회신학교학우회 신학보 제 3호 춘기 (1926년 6월):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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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과의 인터뷰. 2017년 9월 10일.

 

김의환. “복음주의운동의 역사적 조명과 선교적 전망.” 제 26차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논문 발표회 (한국복음주의신학회, 1995): 10-12.

 

 

초기 평양장로회신학교 본관
초기 평양장로회신학교 본관
단체체조 중인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들
단체체조 중인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들
미국 남장로회선교부에서 건립한 알렉산더 기숙사
미국 남장로회선교부에서 건립한 알렉산더 기숙사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들(앞줄 왼쪽부터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뒷줄 왼쪽부터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들(앞줄 왼쪽부터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뒷줄 왼쪽부터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평양장로회신학교 전경(1922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전경(1922년)
1950년 서울 장로회신학교 학생들
1950년 서울 장로회신학교 학생들
6.25 전쟁으로 대구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1952년)
6.25 전쟁으로 대구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1952년)
1913년경 평양 숭실학교(좌측)와 평양장로회신학교(우측) 모습이 담긴 엽서
1913년경 평양 숭실학교(좌측)와 평양장로회신학교(우측) 모습이 담긴 엽서
1913년경 평양 숭실학교(좌측)와 평양장로회신학교(우측) 모습이 담긴 엽서
1913년경 평양 숭실학교(좌측)와 평양장로회신학교(우측) 모습이 담긴 엽서
학장실에서 집무 중인 평양장로회신학교 초대학장 사무엘 A. 마펫(1923년)
학장실에서 집무 중인 평양장로회신학교 초대학장 사무엘 A. 마펫(1923년)
1927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초대학장 마펫의 모습
1927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초대학장 마펫의 모습
1923년 평양장로회신학교 본관
1923년 평양장로회신학교 본관

 

 

** 출 처: 미국연합장로교회 역사관(PHS)
https://digital.history.pcusa.org/islandora/search/Pyeong%20Theological%20Seminary?type=dismax

** 미국 Princeton 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https://commons.ptsem.edu/?scope=title&keywords=Presbyterian%20Theological%20seminary&qtext=Presbyterian%20Theological%20seminary%20collection%3amoffett%20sort%3arelevance&start=1



<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 >

Catalogue of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Korea  Volume 1916.

Catalogue of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Korea  Volume 1928.

Catalogue of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Korea  Volume 1931.

** 미국 Princeton 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https://commons.ptsem.edu/?keywords=Presbyterian+Theological+Seminary+of+Korea&submit=true&scope=title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1.06.29 12:37
  • 수정 2021.07.2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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