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CE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제

조선기독청년면려회: 창립, 발전, 해체 (1921-1945)

 

박용규 교수
(총신신대원 명예교수)

 

 

 들어가면서

1921년 1월 23일 창립된 청년면려회(the Christian Endeavor Society)가 2021년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라는 표어 아래 전세계 청년운동을 견인했던 면려회가 한국에 시작된 후 오기형이 말한대로 “한국장로교 청년운동의 정수가 되며 장로교회의 전통을 세운 수많은 지도자를 낳은 운동으로서 한국 기독교사에 빛나야 할 역사를 지은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본래 면려회는 1881년 2월 2일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 시 회중교회, 윌리스톤 교회(Williston Church) 담임 목사 프란시스 클락(Francis E. Clark, 1851-1927)에 의해 시작되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면려회는 국제기독청년면려회(International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라는 이름으로 초교파적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에서는 앤더슨(Wallace Jay Anderson, 1890-1960, 안대선)이 1921년 안동면려회를 결성한 후 총회, 노회, 각 교회 당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면서 감리교의 엡웻청년회(Epworth League)와 성결교의 신생청년회(新生靑年會)와 더불어 대표적인 장로교 청년운동으로 정착했다.  

국제기독청년면려회의 설립자 프란시스 E. 클락
국제기독청년면려회의 설립자 프란시스 E. 클락

창립 7년째 되던 1928년, 조선면려회 장로교청년수양회 때 전국에 조직된 청년면려회는 약 300여회로 1,250회의 중국보다는 작지만 150여회의 일본에 비해 두 배 규모였다. 이처럼 면려회가 아시아와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된 것은 초교파 청년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면려회와 엡웻청년회가 서로 협조를 하며 운영되었고, 일본에서는 공조회라는 이름으로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미국에서는 회중교회에서 가장 많이 면려회가 창설되었고, 연령도 “24-25세 혹은 대학생 정도의 청소년 특히 고등학생” 연령에서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본 논고는 1921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청년면려회의 태동, 발전, 폐회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려고 한다. 때때로 시대적 상황을 서술하겠지만 그것은 이 시대 청년면려회의 역사적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한 차원에서의 진행이지 그것이 본고의 목적은 아니다. 한 가지 사실은 면려회가 일제 강점기 한국청년운동에 차지하는 역할과 위상이 상당했음에도 여기에 대한 연구가 놀랄 정도로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본고는 이런 사료의 한계를 인정하고 <기독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KMF, 총회록, 「신학지남」, 「진생」,『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1934년)』를 비롯한 일차 자료에 의존하여 이 시대의 청년면려회의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I. 기독교청년면려회란 무엇인가?

 

1. 면려회의 정의

 

안대선은 1934년 9월 제 1회 조선면려회 4년차 대회 때 “기독교청년면려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면려회의 정의와 성격을 밝혔다. “면려회는 교회 안의 청년들이 연로한 그리스도인의 권도(勸導)를 받아서 조직하고 주관하는 종교적 기관이다. 다시 말하면 면려회는 그리스도를 신성하게 봉사하며 교회에 헌신하고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우호적태도(友誼的 態度)로 대하기를 목적한다. 그 주의는 민주적이요 정연한 목적이 있고 날로 진보하는 중이다. 그 목적이라 함은 다름 아니라 각 회원이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발육시키고 저들로 하야금 그리스도를 위하야 봉사하도록 교양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3가지 사실을 안대선이 목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면려회가 교회 안의 청년조직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면려회가 ‘연로한 그리스도인의 권도’를 받아서 조직하고 주관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힘으로 면려회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와 지도를 따라 조직⦁운영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한 봉사, 교회에 대한 헌신, 전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과의 우의적 관계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평적으로는 이 땅의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신앙단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가 각 사람의 성품 계발을 통해 진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숙한 인격과 성품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 같은 인격적 변화는 단순히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시다. 

셋째, 그 주의가 “민주적”이라고 밝힌 점이다.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가 발달된 나라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용어이겠지만 당시 ‘민주’라는 말은 동양 특히 한국에서 매우 낯선 용어였다. 민주적이라는 표현을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서구사회가 보여주듯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 그리고 신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실천하는 것을 중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개교회의 면려회, 지방연합회, 전국규모의 조선연합회를 통해 회원들은 면려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민주 사회의 질서와 시민의식을 배우고 개인주의를 넘어 사회와 국가의 일원으로 책임의식을 배웠다. 실제로 1934년 제 1회 조선청년면려회 4년차 대회의 강사진에는 금주운동의 전문가도 한글 맞춤법에 대한 전문가도 동시에 참여해 기독교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넘어 한국문화와 사회계몽운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했음을 보여준다.

 

2. 면려회 회칙

 

조선청년면려회 창립과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안대선은 1922년 안동을 떠나 직전 <신학지남>에 기고한 “만국기독청년 면려회”라는 제목의 글에서 만국기독청년면려회가 전세계적으로 조직되어 교회 발전에 많은 유익을 끼치고 있다고 밝힌 후 안동지방을 사례로 면려회가 교회에 큰 유익이 된다며 전국으로 면련운동을 확산해 나가자고 호소했다. 그는 장로교연합미션회에서 번역한 면려회의 창립 목적, 예배, 약조, 임원, 회원 등을 포함한 면려회칙을 <신학지남>에 소개했다. 

 

“작년초춘에 경안노회내 여려 교회 중에셔 면려회를 조직하야 처음에는 약하엿스나 현금 삼십여처의 회와 오육백여명의 회원이 되며 지방총회를 수차 개최하야 회원이 신령한 은혜를 무한히 맛앗나니라. 여차한 은혜를 경안지방에셔만 밧난 거시 불만족하며 全鮮 교회내 청년 제씨를 위하며 예수의 성혈(聖血)노 사신 전선교회(全鮮敎會)를 위하야 작추(昨秋)에 조선장로교회 총회에 면려회를 全鮮에 설립키로 청원하야 허가를 득하엿스며 평양신학교에서는 면려회규칙을 一과목으로 사용하며 又前年 장로회연합미슌회에셔는 赤是 면려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위원까지 선택하야 일반사업을 경영 중인대 해위원은 회측 약조서 예배순서를 번역출판하엿스며 會票도 구독하엿나니 고로 번역된 만국에셔 통용하는 會則을 여좌히 대략으로 기(記)하노라. 

 

一, 목적, 청년을 예수께로 인도하야 입교케 하며 신앙이 부족한 사람으로 야소를 견고히 밋게하며 예수의 역사(役事)를 연습함

 

二, 예배, 면려회에셔 첫재 할 일은 매주일에 예배시간을 정하야 예배하는 것신대 교회에셔 예배함과 여히 일개인이 장시간으로 강도함이 아니오 사회자는 기일 문제에대하야 오분간만 설명하고 각회원은 자기 좌석에셔 기립하야 이분간주의 은혜를 증거 혹 연설 혹 기도할 거신대 기일문제대로 할 거시며 일반순서에 찬송, 기도는 심령이 지시하는대로 할 거시며 문제는 면려회에셔 발생하는 예배순서를 사용할 것

 

三, 약조, 면려회의 특성은 각회원이 하나님과 직접으로 약조하여야 회원이 되나니 약배약하면 죄를 일우는 고로 회원은 주의치 아니치 못할 거시라. 본약조의 내용은 어려온 것이 아니오 신자 중에 누구라도 매일 당행하는 일이니 첫재 주의 능력을 의지하야 주의 깃버하시는 일을 행하기로 약조하며 그 외에는 매일 성경보고 기도하고 양심에 불득기한 일 외에는 예배회급기도회에 참석하고 회원의 일분자 책임을 담다아겟다함이니 간단하고 시행(施行)하기 편지한 거시라.

 

四, 임원, 회장, 부회장, 서기, 회계, 사찰, 고문 등이니 일반임원의 책임은 보통 타회와 여하나 그중 고문은 당회원 혹 제직회원 중에 택하는대 면려회를 원조하며 보호하는 책임을 가진 자니라. 

 

五, 위원, 계사(稽査), 기도, 임사, 계독, 음악, 심방(尋訪). 구제, 권서, 전도, 교제, 통보위원 등이니 개(皆) 자기의 책임을 열심히 봉행하여야 회가 완전히 진보할 거시라. 이상 모든 위원부를 다 두는 거시됴흐나 회원수를 따라 덜 둘 수도 잇스며 회가 전진하는대로 차차 둘 수도 잇스나 계사위원, 기도위원, 임사위원은 면려회 마다 업지 못할 위원이니라.

 

六, 회원, 삼종의 회원이 유하니 실행, 학습, 명예회원이라. 

  1. 실행회원은 연령은 만 십칠세 이상으로 삼십오세까지 되는 독신입(篤信入) 敎會人이라.

  2. 학습회원, 연령은 상과 동하고 미수세례인(未受洗禮人)이니라.

  3. 명예회원, 연령은 삼십오세 이상으로 세례 밧은 교인인대 본회를 방조(幇助)할만한 쟈라.

 

특별히 주의할 것슨 차회는 다른 사회상회와 여히 각기 자유하는 성질이 아니오 당회의 지배를 수하며 교회의 지체되는 고로 교회의 관리를 밧을 거시며 교회 외에는 설립할 수 업나니 고로 차회는 교회가 청년과 함께 청년을 위하야 배양하며 청년이 교회와 함끠 교회를 위하야 사역하나니 회원은 몬져 신령한 뜻을 생각할 거시라.”

 

이 글에는 면려회가 무엇인지, 면려회의 조직과 성격이 무엇인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회의 지배’를 받고 ‘교회의 지체’이므로 ‘교회의 관리’를 받아야 하며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하여 사역하고’ 따라서 면려회를 ‘교회 외에는 설립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3. <면려회지남>에 나타난 면려회 회장과 회원 자격

 

<면려회지남>에는 면려회 회장과 회원의 자격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회장-“회장은 누구보다도 먼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알며 정신생활에 무한한 취미를 붙이는 자가 되어 모든 사업이 다만 하나님(神)의 지배를 받도록 할 것이며 또 그는 무엇보다도 긍지의 사람이 되며 참된 긍지는 하나님(神)이 돕는다는 굳은 신앙심을 가진 자라야 될 것이다.” 

2)회원-“면려회원은 보통 3종으로 분하게 된다. 실행회원(實行會員) 학습회원(學習會員) 명예회원(名譽會員)이다. 실생회원은 적어도 17세 이상으로 40세 이하되는 세례를 받은 신사로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고 그의 생활을 체본하야 실행하겠다고 약속하고 서약서에 날인하는 자로 하되 만일 어떤 염에서 임원이나 위원을 선택할 때는 세례교인이 부족하면 아직 세례는 받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신앙이 돈독하고 부지런히 예배당에 출석하고 좋은 품성(品性)을 보지(保持)하였다고 인증될만한 사람으로 즐겨 실행회원 서약서에 서명 날인하는 자는 임원회의 결의에 의하야 정식회원과 같이 임원으로 피택될 수 있다.” 

 

 

4. 면려회원의 언약서약

 

면려회 입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언약서약이다. 1881년 2월 2일 처음 결성된 면려회는 면려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면려회원들의 언약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만국면려회가 실행회원들에게 요구한 언약서약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의 근원으로 믿고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기에 힘쓰기를 언약합니다. 기도하는 일, 성경 읽는 일,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며 그 사업을 받드는 일과 면려회의 집회와 활동에 참예하는 것을 규칙적으로 하기로 작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주께 인도하며 주님 나라 사업을 위하여 받치며 조국의 흥황과 주안에서 한 형제 됨이 땅 위에서 이루워지도록 하기에 힘쓰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정성을 다하여 실행하겠사오니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과 삶의 실천, 개인의 기도와 말씀 읽기와 공예배 참석, 면려회의 적극적인 참여,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 그리고 애국심과 인류애적 형제애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언약서약은 면려회가 어떤 단체인가를 그대로 말해준다. 

<면려회지남>에 기록된 대로 면려회 회원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입회원서를 내고 다음 다섯 가지에 서약해야 했다. 

 

1.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야 주의 일체 깃버하시는 일을 봉행하기로 힘쓸 것

2. 내가 정한 뜻으로 매일 기도하기와 성경 읽기를 끝까지 힘쓸 것

3. 내가 있는 교회의 진흥하는 일에 대하여는 힘을 다하야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의무를 지키기로 힘쓸 것

4. 내가 본회의 일체 의미를 다 실행하는대 매주일 본회 예배시간에 양심에 확실히 부득이한 사고 외에는 출석하야 찬송하며 기도하며 성경 읽고 증거하는 일분자(一分子)의 직책을 담임하기로 힘쓸 것

5. 내가 매삭 헌심회 때에 혹 출타하야 돌아오지 못하였든지 또는 부득이한 사고로 참회(參會)치 못할 경우에는 호명할 때에 대답으로 성경 말씀 외올 절 수를 기록하야 본회 회원에게 편지로나 전편으로나 신실하게 송부하야 대신 외와 정신적으로 참석함을 표하기로 힘쓸 것 

 

첫 번째 서약은 주님과의 서약, 두 번째 서약은 매일 정기적인 기도와 말씀의 서약, 세 번째 서약은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의무에 대한 서약, 네 번째 서약은 면려회의 회원으로서의 헌신의 서약 그리고 다섯 번째 서약은 특별한 사유로 참석하지 못할 경우 해야 할 의무에 대한 서약이다. 하나님, 나의 경언, 교회의무, 면려회 회원의 기본의무가 그대로 담겨 있다. 서약한 면려회원은 단순히 서약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II. 조선청년면려회 창립과 발전 역사적 배경

 

이제 우리는 면려회를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 면려회의 창립과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한국민족 특별히 청소년들 가운데 민족적 자각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1920년대 이후 젊은이 사역은 “수양동우회, 흥업구락부, YMCA, YWCA, 기독교농촌연구회, 기독신우회, 적극신앙단, 장로교 총회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사회계몽운동으로는 “물산장려운동, 소비절약운동, 농촌운동, 교육계몽운동, 절제운동, 생활갱신운동”과 같은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운동의 “하부 주체로 YMCA YWCA나 감리교 청년단체인 엡웻청년회, 기독청년면려회가 이용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921년 면려회 창립이 부흥운동 시기와 깊이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3.1운동이 끝난 후 김익두를 통해 놀라운 부흥이 한반도에 일어났다. 기독교에 소망이 있다는 민족적 의식이 일어났고 미래의 소망을 기독교에서 찾으려는 일련의 움직임과 더불어 특별히 젊은이들이 대거 주님께로 돌아왔고, 그 결과 교회마다 젊은이들로 넘쳤다. 

1900년대에 접어들어 대부흥운동이 일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청년조직들이 결성되어 청년운동이 일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아름다운 열매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였다. 그 중의 하나가 하령회였다. 1903년 창립된 YMCA는 이 같은 젊은이들 가운데 일어난 민족적 자각을 기독교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미국 YMCA가 하기 행사로 개최하던 썸머 컨퍼런스를 한국에 도입해 1920년부터 하령회를 시작했다. 윤치호, 이상재, 오화영, 정인보, 신흥우, 김창제 등이 강사로 나섰고 하령회는 젊은이들로부터 놀라운 반응을 얻었다. 1922년 YWCA도 6월 13일 하령회를 도입했고 김활란, 김필례, 유각경 등 여성 지도자들이 하령회 강사로 나섰다. 1925년 9월 한국 YMCA는 세계연맹에 가입했고, 3.1운동 이후 종교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사상 각 방면에서 한국 청년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YWCA는 금연금주운동, 물산장려운동, 공창폐지운동 등 사회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엡웻청년회는 1920년 북감리교 엡웻청년연합회로 확대되었고 1925년에는 남리교 엡웻청년연합회가 전국연합회로 결성되어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금연금주운동 청년수양회 토론회 농촌문제, 전도회 등 신앙 차원을 넘어 사회계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했다. 1920년 6월 8일 동아일보는 “전국에 널려 있는 각교회의 엡웻청년회를 연합하여 서울에 전국 엡웻청년회”가 결성된 것이라며 엡웻청년연합회에 대해 의미 있게 보도했다. 이처럼 3.1독립운동이후 YMCA, YWCA, 엡웻청년회는 새롭게 개편되거나 재조직되어 중요한 청년운동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특히 감리교 안에 청년운동이 엡웻청년회라는 이름으로 널리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장로교 안에는 특별한 명칭과 조직 없이 ‘청년회’라는 이름으로 개교회 안에 젊은이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때문에 감리교의 엡웻청년회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은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깊은 도전을 주었다. 본래 감리교의 엡웻청년회는 미국 면려회에서 분립되어 나온 것이다.  수많은 감리교회가 미국청년면려회에 적극 참여하다 교단적인 차원에서 독립적으로 이를 분립하여 엡웻청년회를 조직한 것이다. 안대선은 장로교 안에서도 새로운 이름의 청년운동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1921년 1월 23일 조직된 면려회는 YMCA, YWCA, 감리교의 엡웻청년회, 조선청년회연합회에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1920년 12월 2일 전국 각지역의 116개 단체가 연합하여 조직된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안대선의 청년면려회의 중요한 배경을 형성한다. 당시 조선청년연합회는 조선노동공제회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의 청년운동 단체로 1922년 4월 민족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가 이탈하여 나감으로 향후 조선청년연합회는 사회주의 성격의 청년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1. 1921년 1월 23일 면려회 창립과 확산, 그 역사적 신앙적 배경

 

당시 청년운동이 사회주의로 흐르는 현실을 깊이 우려한 안대선은 청년들의 신앙확립과 교회 안에서의 청년활동의 필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1921년 1월 23일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를 결성하였다. YMCA, YWCA, 엡웻청년회처럼 청년면려회도 국내에서 순수  하게 시작된 신앙운동이 아니라 미국에서 출발한 범세계적인 청소년 조직이었다. 

조선청년면려회는 젊은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처음 출발했지만 당시 시대적 부름 앞에서 기독교 신앙운동을 넘어 사회적 ․ 민족적 책임의식을 고취하는 사회계몽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각성이 사회각성으로 이어진 당시 부흥운동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지만 안대선이 면려회를 결성하기에 앞서 먼저 안동지역의 부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필자는 이 점이 청년면려운동, 특별히 안동지역 청년면려운동의 태동 역사 이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3.1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젊은이들 가운데 전에 없이 강하게 일고 있을 때 마침 일제가 한국민을 회유하기 위해 채택한 일제의 문화정치는 청년단체의 결성과 활동에 숨통을 터주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일간지가 이때 창간되었고 민족 자본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물산장려운동이 평양을 배경으로 강하게 일어났으며 박형룡, 남궁혁, 이성휘, 백낙준, 한경직, 채필근, 송창근, 김재준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해외유학을 떠났다. 무엇보다 1920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강력한 김익두 부흥운동이 일어나 젊은이들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교회로 몰려들었다. 3.1운동 이후 1920년부터 강하게 일기 시작한 부흥운동은 젊은이 부흥이라고 할만큼 젊은이들이 놀랍게 복음에 반응했다. 

안대선은 면려회가 창립되던 그 해 1921년 3월 Korea Mission Field(KMF)에 “안동에서의 부흥운동”이라는 논고를 기고했다. 1920년 겨울 KMF에 실린 “기도 요청”에 대한 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불(William Ford Bull, 1876-1941)의 글에 강한 도전을 받은 안대선은 안동지역의 부흥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안대선은 1920년 봄과 초여름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셨다는 많은 증거들을 목도했다. 안동읍교회에서만 350명이 새로 믿기로 결심했고 예천에서도 300명이 결신했으며 영주와 풍기에서도 유사한 영적각성의 역사가 임했다. 그 결과 그 지역에 전도대가 결성되었고 절제회가 조직되었으며 성서학원에도 1920년 가을학기 130명이 등록하였다. 안대선은 이렇게 감격했다.

 

오! 복음전파 측면에서 안동에 놀라운 시대가 임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쁘고 기도를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오직 우리의 과업에 충실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역사’를 우리 역시 목도할 것이다. 

 

안대선이 이와 같은 감격의 글을 KMF에 기고한 것이 1921년 3월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바로 그 시기는 면려회가 안동교회에서 처음 결성된 직후였다. 부흥의 기운이 안동에 불어오면서 1920년 4월 8일 ‘경북안동기독청년회’가 발기회를 가졌고 그해 9월 28일 안동교회에서 남자 60여명과 여자 20여명 합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권찬영, 인노절, 안대선, 의료 선교사 심의도 등 안동 주재 선교사들이 거의 다 참석한 가운데 안동청년회가 조직된 것이다. 회장 김원진을 비롯한 이 조직에 앞장선 대부분이 3.1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기독청년운동이 민족운동과 모종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안대선은 안동지방 더 나아가 한국의 기독청년운동을 미국 면려회처럼 자기의 신앙훈련에 초점을 두되 교회 봉사와 지역복음화로 이어지는 교회 지도하의 청년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를 갈망했다. 이런 일련의 시대적 배경이 안대선의 면려회 조직에 직간접의 영향을 미쳤다. 그런 면에서 당시 민족의식, 부흥운동,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전반의 젊은이운동, YMCA와 YWCA의 활발한 하령회 활동, 기독교청년회 확산은 조선면려청년회 창립과 급속한 저변확대의 중요한 시대적 배경을 제공했다. 

안대선은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921년 1월 23일 기독청년면려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면려회 창립 장소는 안동교회였다. 권중윤은 1921년 12월 7일 <기독신보>에 이렇게 기고했다. 

 

안대선 목사는 본래 청년을 사랑하고 죠흔 길노 인도하고져 하여 힘쓰고 애쓰던 결과 금년일월 하슌에 안동읍교회 청년 몃 사람과 의론하고 면려회를 죠직키로 작뎡하야 당회의 허락을 밧고 일월 二十三일 안동읍교회에서 면려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임원과 위원을 션뎡한 후 …

 

권중윤의 글에는 청년을 깊이 사랑하는 안대선 선교사가 청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면려회를 창립했다는 창립취지가 잘 드러나 있다. 안대선은 면려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회장과 임원과 위원까지 선임했다. 안대선 선교사는 면려회 규칙과 강령을 준비하고 권중윤은 실무를 담당했다. 권중윤은 <기독신보>에 기고한 글에서 면려회 창립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백주에 눈을 뜨고 깁히 자는 우리 흰옷 닙은 쳥년의게도 잠을 깨우고 니러나게 하는 긔회가 되어 각 교회에셔 물끌 듯 니러나는 긔독쳥년면려회는 참으로 우리 샤회를 개량식혀 문명세계로 젼진하게 하엿스나 그러나 우리 안동디방을 따로 들어 말하면 다 그럿타는 것은 아니나 한 갓 유감됨은 처음 엇엇던 열심은 어데셔 일허바렷는지 차차 쇠악한 회가 만흐며 경영하든바 여러 가지 사업도 즁도에 패하고 유명무실한 회도 만으며 혹은 신령상 방해되는 덤도 잇고 혹은 자미업게 생각하고 퇴회원을 제츌한 회원도 잇서 랑패 디경에 니른회가 만흐니 엇지 개탄할 일이 아니리오. 그런고로 교회의 직원들과 쳥년즁 유지쟈는 이일에 대하야 조흔 방면을 구하든바에 안동에 쥬거하는 선교사 안대선 목사는 본래 청년을 사랑하고 죠흔 길노 인도하고져 하여 힘쓰고 애쓰던 결과 금년 일월 하슌에 안동읍교회 청년 몃 사람과 의론하고 면려회를 죠직키로 작뎡하야 당회의 허락을 밧고 일월 二十三일을 안동읍교회에서 면려회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임원과 위원을 션뎡한 후 쥬일마다 면려회에셔 오후 본교회 례배회를 맛친 후에 모든 회원이 모혀 례배하는대 셩경말슴을 외오기도 하며 셩경말슴으로 이분동안 증거도 하며 열심히 긔도함으로 지금은 교회 목뎍을 일루워하며 회가 완젼 할뿐만 아니라 쳥년으로 하여곰 새인물을 작졍하엿스니 신령샹 방면으로 증거하면 젼에는 긔도를 잘못하던이가 긔도의 방법도 알엇으며 또한 날마다 셩경을 연구하야 쥬의 도리를 알게 되엿스며 열심히 젼도하고 벙어리갓던 이들이 본회 례배 시간에 쥬의 은혜를 증거도 잘 하게 되얏스며 강도까지 잘하게 된이도 잇스며 토론회 강연회도 개최하야 지식을 교환하고 구번도 연습하며 친목회도 개최하야 친목하는 것과 체육부에서는 운동긔구를 쥰비한 후 운동하는 것이며 권셔부에서는 여러셔책을 쥰비하고 회원에게 분급하야 보게 하며 계독부에서는 열심히 회원과 교인에게 권면하야 쥬초를 아직 끈치못한이를 끈케하며 음악부에서는 열심히 찬미를 가라치며 례배때에 별찬숑도하며 죵죵 음악회도 개최하며 그 외에 특별히 은혜 밧은 것은 심일됴 위언부에셔 회원에게 열심권면하야 십언됴연보드리는이도 만히 잇스며.

 

권중윤의 글은 당시 안동교회에서 창립된 면려회의 창립일과 기본 활동에 대한 매우 중요한 1차 정보를 제공한다. 1월 23일 안대선이 당회의 허락을 받고 그날 면려회를 조직하고 회장(권중윤)과 임원과 회원을 선정하였다. 면려회는 조직 후 주일날 예배 후에 별도의 모임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토론회, 강연회, 강습회를 개최하고 친목을 도모하고 금주운동과 음악회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추진했다. 면려회는 여러 부서를 두어 다양한 활동을 독려하고 상호유기적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다양한 활동은 면려회만의 독자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당시 YMCA YWCA 엡웻청년회가 하던 활동과 거의 유사하다.

당시 금기시되던 교회 안에 남자 청년들과 여자 청년들의 대화가 가능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준 것도 면려회였다. 권중윤은 교회 안에서의 면려회의 많은 활동을 열거한 후 “우리 청년과 우리 교회의 면려회가 얼마나 큰 유익을 깃쳐 줌은 명확한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2. 1921년 2월 5일 안동교회 당회의 면려회 인준 

 

안대선은 면려회를 창립한 후 당회에 면려회를 인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21년 2월 5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에 안동교회 기독청년회 사무실에서 제 58회 당회가 개최되었다. 당회록에는 五十七이라고 기록되었다가 七자 옆에 八을 병기해 오십칠회가 아니라 오십팔회 당회라고 정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당회 서기는 김정모 장로였고 당회장은 안동교회 동사 목사였던 권찬영(John Young Crothers) 선교사였다. 권찬영은 1909년 9월 16일 북장로교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여 1910년 1월 경북 안동지역 선교목사로 파견을 받고 활동하였고, 1921년 경북노회에서 분립되어 경안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초대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안동교회는 경북노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권찬영이 안동교회 당회장을 맡아 수고하고 있을 때 안대선이 면려회를 조직하고 당회의 인준을 요청한 것이다. 당회는 면려회에 대해 논의하고 청원을 허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1년 2월 5일 안동교회 당회록은 다음과 같이 이를 밝혀주고 있다. 

 

주후 1921년 2월 5일 오후 3시 30분에 본 당회가 기독청년회 사무실에 모여서 회장이 성경 신명기 6장 2절로 9절까지 봉독한 후 기도로 개회하니 참석회원은 목사 권찬영 장로 김병우 김정모 조학규 신임 목사 이대영 제씨더라. 이대영 목사를 언권 허락하기로 회중이 동의 가결하다. 안대선 목사 권연호 권중윤 김재성 홍범순 서순이 장경연 제씨가 청년면려회 조직하기를 청원하매 허락하기로 회중이 동의 가결하다.

 

권찬영 선교사와 당회원들은 청년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열심을 다하고 있는 안대선의 청원을 그대로 받아 면려회 창립을 인준해 주었다. 처음 면려회가 집중한 것은 예배와 말씀공부와 기도의 신앙훈련, 회원들 간의 친교, 절제운동이었다. 안대선은 청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믿고 세례를 받도록 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굳게 세워주고 주의 사역에 적극 참여하게 함으로 신령한 사회를 이루는 것을 면려회의 창립 목적으로 삼았다. 교양보급, 인격향상, 계몽에 초점을 둔 당시 여타 청년운동과는 달리 면려회는 말씀과 기도와 예배참석과 교회봉사의 실천에 집중하면서 교회의 지도를 받는 청년운동, 교회를 위한 청년운동, 신앙훈련을 통한 성숙한 젊은 신앙인 양성운동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그러다 점차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훈련은 그대로 유지하되 지평을 넓혀 금연금주, 폐창운동 등 사회계몽운동을 면려운동의 중요한 방향으로 나갔다. 

 

3. 1921년 6월 7-9일 경북연합대회, 안동읍교회당 (26 지회, 600명)

 

1921년 1월 23일 면려회가 창립되고 이어 안동교회 당회에서 2월 5일 인준을 받음으로 안대선은 면려회의 활동 기반과 법적기반을 동시에 마련한 셈이다. 안대선은 면려회 조직을 안동지방의 여러 교회로 확산시켜 나가기 위해 경북노회 산하 안동지역의 여러 교회를 방문하여 면려회 규칙과 취지를 설명하고 저녁마다 강연회도 열었다. 안대선은 안동을 거점으로 하여 영주, 의성, 풍기, 예천, 청송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청년면려회를 조직하였다. 이런 노력 결과 불과 4개월 만인 1921년 6월 7-9일 안동지역의 교회들 가운데 10개 교회에 면려회가 결성되어 이들 10개 교회 면려회가 안동읍교회에서 함께 모여 ‘안동지방면려총회’를 개최하였다. 그해 12월에 이르러서는 25개 교회에 면려회가 조직되었고 회원도 600명에 달했다. 권중윤은 이렇게 <기독신보> 1921년 12월 14일자에 보고했다. 

 

안대션 씨가 안동디방에 여러 곳에 면려회를 세우고 금년 유월 칠일브터 구일까지 안동디방면려회총회를 안동읍교회에서 개최하고 십여회가 회집하여 삼일동안 면려회 규측과 요지를 강습하며 저녁마다 강연회도 열어 특별한 은혜를 밧은 결과에 현금 안동디방 내 이십오개의 회와 육백여명의 회원이 잇스니 다만 이 갓치 왕셩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열심히 힘쓰는 씨의 열심은 가히 칭숑하겟스며 또한 감샤함은 면려회를 세우는 교회마다 청년을 쥬의 사역자로 양성하고 따라서 교회가 날노 흥왕할 거시라.

 

면려회는 조직되던 그해 1921년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25개 청년면려회로 발전했고 회원도 600명으로 증가했다. 권중윤은 면려회의 놀라운 저변확대가 먼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지만 안대선 선교사의 노고가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안대선은 한편으로 면려운동의 창시자 클락 박사와 서신을 교환하고 면려회 관련 자료를 입수하여 이를 번역하는 등 준비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안동교회뿐 아니라 그 주변의 여려 교회에 면려회와 지방면려연합회를 조직하고 규칙을 만들고 대회를 개최하여 취지를 설명하고 저녁에는 강연회를 열어 잠자는 젊은이들의 영혼을 깨우는 일을 감당했다. 권중윤은 “안대션 씨가 안동디방에 여러 곳에 면려회를 세우고 … 개최하고 … 강습하며”라고 분명하게 밝힘으로 안대선이 면려회 창립과 확산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을 알 수 있다. 

1922년에 접어들어 전국의 여러 교회에서 청년면려회를 조직했다. 1922년 2월 12일에는 대구남산정야소교회에서 청년면려회를 조직하고 2월 26일 ‘기독청년면려회발회식’을 가졌다. 1922년 8월 6일 경북 경주읍내 ‘로동교회’에서도 청년면려회 창립총회가 있었다. 1923년 3월 25일에는 의주군 용산동교회에서도 “상당한 신력과 자격이 유한 청년을 선발하야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하고 역원을 선거”로 선출했다. 청년면려회가 점차 저변 확대되면서 활력을 잃어버린 기성의 ‘기독청년회’를 일신하기 위해 기독청년 면려회로 청년회 명칭을 바꾼 교회들도 있다. 동래읍교회가 그 한 예이다. 1923년 7월 15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동래읍야소교회에서 종래 기독청년회가 잇섯스나 미약부진(微弱不振)하든바 금번에 復興을 期圖코자 新히 男女靑年을 網羅하야 東萊基督靑年勉勵會로 組織을 改하고 任員을 選擧”하였다. 동래읍교회는 면려회를 결성한 후 1923년 7월 30일 저녁 8시반부터 수백명의 청중들이 모인 가운데 ‘동래남녀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기성의 청년회 조직과 달리 면려회는 조직되는 곳마다 역동적으로 교회 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4. 1924년 12월 2일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결성

 

1921년 장로교선교공의회에서 면려회를 조선의 각 교회에 조직하도록 결정하였고, 면려회는 1923년 황해노회, 전주지방, 평양지방, 안주지방, 해삼위에서도 결성되었다. 1923년 8월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1924년 12월 2-5일 경성 피어선성경학원에서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 및 제 2회 면려회 친선대회가 조직 개최되었다. <기독신보>에 실린 대회 순서는 다음과 같다. 

 

萬國基督敎靑年勉勵會 第 一會 全鮮大會順序

 

시일, 一九二四년 十二월 二일노 동 五일까지

뎨 一일 화요 오후 7시브터

     쟝소, 안동례배당

   강연 긔독교와 청년에 관한 문뎨  김챵제

 

뎨 二일 슈요 오전 九시 반브터

     쟝소, 피어슨학원

     면려회의 목뎍            안대선

     긔도회                   김영구

      쥬계셔 주신 직분        챠재명

      련합회의 취지           임쥬슌

      오후 7시 승동례배당에셔 

      강연                    김챵제

 

뎨 三일 목요 오젼 9시 반브터

     쟝소, 피어슨학원

     면려회의 약죠            김필슈

    긔도회                    배진셩

    금주                      오련경

    면려회의 사업             김즁윤

    오후 7시 청년회에서 음악회

 

뎨四일 금요 오젼 구시 반브터

    쟝소, 피어슨학원

    면려회 례배                안대선

모범례배 

표쥰뎍 청년                   긔일 박사

의론회

오후 7시 련동례배당에서

강연                           김창제

 

聯合創立總會順序

시일 三일하오 三시

   1. 련합긔셩회보고

   2. 규측채용

   3. 임원션거

   4. 신사항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의 중요 인물과 연합회의 성격이 순서에 어느 정도 나타난다. 단순히 면려 총회만 아니라 3박 4일 대회 기간중 세 번의 저녁 집회를 가졌고 하루 저녁은 음악회를 가졌다. 기도회가 2차례, 금주운동에 대한 특강, 2번에 걸친 크리스천 청년에 대한 특강도 포함되었다. 예정대로 둘째 날 12월 3일 오전 순서를 마치고 오후 3시 피어선성서학원 강당에서 조선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려 규칙을 채택하고 조선연합회 임원 선거에 들어갔다. 박현식이 초대회장에 선출되었고 김창덕이 부회장, 안대선이 총무, 권중윤이 부총무에 피선되었다. 

“만국기독교청년면려회 제 1회 조선연합대회”는 이름 자체부터 한국의 면려회가 면려회의 전국적인 조직망의 결성이자 세계면려운동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다. 그것은 조선기독청년면려회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고 ‘만국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대회’라고 명칭한 것에서 알 수 있다. 1924년 전국적인 조직망이 결성되던 그해 전국에 178개 면려회가 조직되었고 회원은 3,057명이었다. 조선연합회가 결성된 후 한국의 면려회는 개교회의 지회, 지방연합회, 전국연합회 조직으로 구성되어 운영되었다. 1924년 전선대회 표어, 주장, 작정은 다음과 같다. 

 

1. 표어-1)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자 2) 정직한 ‘나’가 되자 3)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자.

2. 주장-1) 쉬지 않고 나를 교양하자 2) 나의 교회를 돕자 3) 방방곡곡에 전도하자 

        4) 외지 전도에 힘내자 

3. 작정-1) 매 회원 매년 1인 전도주의자가 되자 2) 회원마다 십일조를 바치자 3) 내 동리에서 신앙운동을 일으키자 4) 외지의 한국동포를 구하자.

 

표어와 주장과 작정에 나타난 대로 면려회는 철저하게 신앙함양과 복음전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 신앙운동은 개인을 중시하지만 ‘나의 교회,’ ‘내 동리,’ ‘방방곡곡’ ‘외지의 한국동포’라는 확장된 개념으로 개인-교회-지역-민족-세계로 확장되는 사도행전적 선교 개념 즉 개인의 각성에서 지역복음화와 민족복음화의 책임으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 확장의 원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조선청년면려회는 1924년 전국적인 조직망 조선연합회를 결성함으로 세계면려회와 교류를 하면서 지속적인 유대관계 속에서 한국적 상황에서 청년면려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조직적 틀을 마련한 셈이다. 따라서 기독청년면려회 전선대회 조직은 면려회 조직의 저변확대로 인한 전국을 대표할 수 있는 중앙조직의 필요성과 한국 면려회의 세계면려운동의 참여라는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는 전국의 지회 조사와 확장을 위해 1924년 조사부를 설치하고, 회원들의 영적 지적 함양을 위해 1925년 지육부를 개설하고, 금주 단연 폐창운동 등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6년 계독부를 설치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청년운동이 사회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청년면려회의 전국적인 조직망 결성은 시의적절했다. 반 기독교적 사상과 정서가 팽배한 그 시대 젊은이들을 잘못된 사조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고 개교회의 지도하에 교단 내의 청년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다. 

 

5. 1925년 <진생> 창간

 

1925년 조선연합회가 청년면려회 전선연합회 기관지 <진생>을 간행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시의 적절했다. <진생>은 1925년 9월부터 1930년 10월 6권 8호까지 출간되었다. 창간호부터 기고자들과 편집 방향이 당시 전통적인 장로교 분위기와는 성격이 달랐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여러 인물들이 창간호 기고자로 참여했다. 장로교 전통을 중시한 총회 지도자들과 신학교 교수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의심이 가는 인물들도 <진생>에 기고했다. 예를 들어 창간호 기고자 가운데 게노시스 기독론을 주창하여 한국장로교회를 사상적으로 혼란시켰고 훗날 조선복음교회 창립한 최태용도 포함되었다.

 <진생>은 면려회의 기관지이면서 지방연합회와 전국의 각교회의 면려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동시에 기독교 지성과 정보를 회원들에게 제공하고 국내 면려운동의 동향과 움직임을 소개하는 너무도 중요한 창(窓)이었다. <진생>은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조선면려회가 하나의 청년운동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6. 1929년 만국면려회 가입과 베르린 만국기독청년면려회 대표파송

 

이런 노력과 움직임에 힘입어 기독청년면려회 전선연합회는 1929년 만국면려연합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였고 1930년 8월 5일에는 독일 베를린 세계면려회대회에 안대선과 조희염을 한국대표로 파송하였다. “그리스도가 현대 청년들에게 요청함-예수께서 우리 청년에게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라는 요구”라는 표어 속에 1930년 8월 5-11일까지 열린 세계면려회대회에는 전세계 42개국 1만 2천명의 면려회원들이 참석했다. 당시 면려회는 전세계에 80,113개회가 결성되었고, 4백만의 회원이 있었다. 우리의 국권을 상실한 그 시대 조선이 일본과 나란히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송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크다. 만국면려대회에서 조희염이 부회장에 피선되었고, 이대위는 이사에 선임되었다. 

 

“만국연합회부회장 조희염 이사 이대위

아세아임시연합회 서기 이대위”

 

캐나다 토론토대학과 미국 시카고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조희염이 한국대표로 만국청년면려회에 참석하여 그곳에서의 활동을 통해 리더십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면려회가 설립된지 10년도 채되지 않고 조선연합회가 결성된지 불과 6년 만에 조희염이 만국연합회 부회장을 맡았고 이대위가 만국연합회 이사와 아세아임시연합회 서기를 맡았다는 것은 한국면려회의 위상을 그대로 말해준다.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임원들이 아시아와 만국연합회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비약인지 모르지만 이것은 단순히 면려회의 위상을 넘어 한국인의 우수성을 보여준 것이다.

안대선은 세계대회를 다녀온 후 받은 인상을 <진생>에 “백림세계대회의 인상”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30년 9월 19일부터 20일까지 평양장로회신학교 강당에서 13개 단체와 45명의 대표들과 고문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 4회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대위가 회장에 선임되었고, 총무는 안대선이 맡았다. 그 외 지육부장 최석주, 계독부장 장애경, 서기 이양섭과 황국주, 농촌부장 조희염, 조사부장 정태희였다. 실행이사는 변배지, 안대선, 아담스, 윤산온, 컴잉, 김석창, 박용의(?), 김우석, 황상호, 조희염이다. 총회가 끝나고 <진생>에 실린 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제3회 총회록에는 조선연합회 각 부서의 회원 명단 전체가 나와 있고, 조선연합회가 만국기독청년연합회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도 수록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황국주’가 조선연합회 서기, 조사부원, 공천위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여기 황국주가 만약 이단으로 정죄 받은  황국주와 동일인물이라면 황국주는 자신을 위장하고 조선연합회에 참여하고 있었고, 조선연합회가 이를 미쳐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는 1931년 2월 1일 전조선적으로 면려회창립 50주년 기념식을 일제히 거행하였다. 이에 앞서 1931년 1월 21일 <동아일보>는 “면려회창립 오십주년기념 전 조선적으로 일제 거행, 2월 1일에 기념식”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긔독청년면려회 조선련합회(基督靑年勉勵會 朝鮮聯合會)에서는 금년이동면려회의 창시자 오십주년에 해당함으로 오는 이월 1일로써 전조선의 소속단체를 동원시켜 면려회창시 오십주년 긔념식을 일제히 거행하리라한다. 동면려회의 운동이 조선에 시작된지는 불과 十유년 년이나 현재 면려회 조선련합회가 포용한 지방련합회와 각세포 단체는 무려 육백에 달하야 총회원은 一만五천여명에 달함으로 당일의 성항은 물론 예긔하고 잇는 터이라 한다.” 

 

조선면려청년연합회가 해마다 만국창립일에 맞추어 창립기념식을 가졌다는 위 기록을 통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연합회는 철저하게 만국면려회 창립일을 자신들의 기념일로 지켰다는 사실이다. 조선연합회가 이처럼 해마다 만국기독청년 면려회 창립일에 맞추어 기념식을 거행하고, 세계면려회대회에 한국대표를 파송한 것은 한국의 면려회가 세계면려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III. 한국기독면려회와 총회의 적극적 지원

이처럼 1921년 창립된 청년면려회가 짧은 기간에 전국적인 청년운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장로교 총회와 전국의 장로교회에 출석하는 청년들을 회원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면려회가 교회를 위한 모임이어야 하고, 교회의 젊은이들을 효과적으로 훈련시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의 유익과 발전을 위한 청년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안대선은 면려회가 장로교회 개교회, 지역노회, 그리고 총회를 배경으로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 기회는 1921년 9월 제 10회 총회 때 찾아왔다. 안대선은 면려회를 개교회, 노회, 총회와 별도의 조직으로 독립적으로 운영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안대선 선교사는 이를 위해서는 면려회가 개교회 당회 소속 노회 총회와 깊은 유대관계 속에서 조직되고 움직여 나가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 제 10회 총회의 면려회 명칭 통일

 

1921년 9월 10일 오후 8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10회 총회가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회집되었다. 목사 89명, 장로 89명 선교사 45명 총 223명의 총대 중 219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총대 중에 4명만 결석하고 그 외는 다 참석한 것이다. 경북노회에서는 선교사 위철치, 인노절, 권찬영, 오월번, 안대선이 참석했고 목사로는 김영옥, 이문주, 염봉남, 박문찬, 박영화, 박덕일, 이대영, 권영해가 참석하였고 장로는 백석주, 이규완, 구성서, 신탁희, 김정모, 송문수, 김홍주, 소명영이 참석했다. 

제 10회 총회에서는 청년면려회와 관련하여 중요한 논의가 있었다. 먼저 경북노회는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조직되고 있는 청년면려회에 대해 경북노회 차원에서 총회에 감사의 조건을 명시하여 보고하였다. 

 

“안동디방에셔는 김영옥시로 슌회 목ᄉᆞ를 세워 교회를 진흥케ᄒᆞ오며 면려쳥년회를 수십여 교회에셔 세워 셩경연구와 젼도ᄉᆞ업에 면려케 ᄒᆞ오며”

 

비록 여기는 안대선의 이름은 생략되었지만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청년면려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북노회가 인지하고 있고 이것을 총회에 노회의 감사조건 중 하나로 보고한 것이다. 제 10회 총회에는 또한 전남노회가 청년면려회 규칙을 채용하여 통일을 기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 청원에서 대해 헌의부에서는 “젼남로회에셔 우리 죠션총회 안에 면려쳥년회의 규측을 ᄎᆡ용ᄒᆞ야 일치ᄒᆞ도록 ᄒᆞ여 달나 ᄒᆞᆫ거슨 졍치부로 보낼 일”로 결정을 내렸다. 청치부에서는 이 안을 논의한 결과 다음과 같이 총회에 보고하여 채용했다. 

 

“8. 젼남로회에셔 헌의한 면려쳥년회 명칭을 젼션교회 내에셔 일치하게 하자는 일에 대하야난 죠흔줄노 아오나 각 당회가 쥬쟝할 일노 아오며.”

 

총회는 면려청년회 명칭을 일치하게 하자는 안에 대해서는 좋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총회가 주장할 사항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총회는 원론적인 찬성만 하고 각 교회 당회가 그 일을 주관하도록 개 교회 당회에 그 권한과 책임을 위임한 것이다. 개교회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시행하라는 의미이다. 개 교회에서 조직되는 면려회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스리는 권한을 각 교회 당회에 두어 당회 지도하에 면려회가 조직되고 운영되도록 배려한 것이다. 

 

2. 면려회운동의 확산과 총회의 면려회 보고 내용

 

면려회가 총회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었고 명칭을 전 조선교회에 일치시키는 일이 좋다는 10회 총회의 결정은 청년면려회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불러 일으켰다. 1922년 총회에 황해노회 노회장 임택권이 노회 형편을 보고하면서 “재령읍면려 쳥년회에셔ᄂᆞᆫ 젼도대를 조직하야 각 디방에 슌회젼도를 하얏ᄉᆞ오며”라고 보고한 것을 보면 면려회라는 조직이 안동지역을 넘어 황해도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임택권이 남녀전도회와 면려청년회를 나란히 언급하면서 노회 상황을 보고한 것을 보면 각 교회에서 남녀 전도회는 명칭을 그대로 두고 청년부 명칭을 면려청년회로 개칭한 것이다. 이미 전국적으로 청년회가 조직되었기 때문에 청년회 명칭을 면려청년회로 통일시키는 일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으로 파단된다. 

안대선은 1922년 안동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진 전 “만국기독청년면려회”라는 제목의 글을「신학지남」그해 첫 호에 기고했다. 이 글에는 만국기독청년면려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 규칙을 일목요연하게 번역하여 소개했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었다면 당시 전국의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 모두 면려회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안대선은 만국기독청년면려회를 소개한 후 이런 내용을 말미에 추가했다. “이상과 여히 규칙과 취지를 약술하엿스니 일반청년과 교역자 제씨는 사고하샤 주일학교와 갓치 교회마다 면려회를 설치하샤 신령적 은혜를 무한히 향수(享受)키 축원이오며 문의하실 사항이 유하오면 경북안동교제 안대선의게 하문하쇼셔.” 안동교제 안대선이라고 소개한 것을 볼 때 그가 안동에서 사역을 하고 있을 때 이 글을 「신학지남」에 기고한 것을 알 수 있다.  

 

1) 1923년 제 12회 총회의 각 노회 면려청년회 보고

 

1923년 제 12회 총회에서는 면려회에 대한 많은 논의와 결정을 내렸다. 이제 총회 안에 면려회가 하나의 청년운동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22년 6월 1일부터 1923년 5월 말까지 보고된 제 12회 총회의 통계표에는 “35. 면려쳥년회 36. 면려쳥년회실행회원 37. 면려회학습회원 38. 면려회명예회원”이 별도의 항목에서 다루어졌고 각 항목에 따른 통계도 기록되었다. 이것은 총회 안에 면려회가 놀랍게 하나의 조직으로 정착하고 저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총계표 68항에는 “쥬일학교 면려회용비”라는 항목이 별도로 있는 것으로 볼 때 면려회가 청년회를 넘어 청소년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면려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12회 총회록에 기록된 각 노회의 형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동전도상황을 보고 중 그곳 강격장로교회 형편을 보고하면서 면려회를 조직하여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밝혔고, 12회 총회에 여러 노회들이 면려회 조직이나 활성화 혹은 기대감을 피력하는 보고를 총회에 올렸다.

 

 

 

 각노회보고

          면려회 관련 보고 내용

1

산동전도상황

“강격쟝교회ᄂᆞᆫ 수년ᄅᆡ ᄉᆡ로히 부흥되ᄂᆞᆫ 교회로 쳥년남녀 입교쟈가 만흔바 특별히 쳥년면려회를 조직ᄒᆞ여 만흔 유익을 엇ᄉᆞ오며.”

(“산동전도상황보고,” 1923년 제 12회 총회록, 88)

2

평북노회보고      쟝ᄅᆡ경영

“교회요직과 신학ᄉᆡᆼ과 즁등교원과 쥬일션ᄉᆡᆼ을 양셩ᄒᆞ야 죵교ᄉᆞ업과 교휵발젼을 향상케ᄒᆞ며 면려회를 죠직ᄒᆞ야 령덕 ᄉᆞ업을 확쟝ᄒᆞ려ᄒᆞᄂᆞ이다.”

(“평북노회 보고,” 1923년 제 12회 총회록, 97)

3

함북노회보고

“4 각쳐교회에셔 면려쳥년회를 죠직ᄒᆞ야 교안 쳥년을 양셩ᄒᆞ오며 셩진 웅긔 량교회에ᄂᆞᆫ 음악ᄃᆡ를 죠직ᄒᆞ야 교회일을 도으며 ....면려쳥년회에셔 400(四百사백)여원 연보로 음악긔를 사셔 교회를 도으며 밋지안ᄂᆞᆫ 사회죠긔회에셔 유치원에 ᄇᆡᆨ원을 긔부ᄒᆞᆫ 일이오며 로령포세트 디방 젼도를 계속키 위ᄒᆞ야 로회당셕에셔3(三 삼) ᄇᆡᆨ팍원을 연보ᄒᆞᆫ 일이오며”

(“함북노회 보고,” 1923년 제 12회 총회록, 101-102)

4

서백리아노회 보고

“3 남녀젼도인89(八九 팔구)인이 열심히 복음을 젼파ᄒᆞᆷ과 ᄒᆡ삼위교회 부인면려회에셔 6(六 육) ᄀᆡ월동안 젼도ᄒᆞᆫ 결과로 지금은 구원의 큰눈이 열니엿ᄂᆞ이다. 이외에게 ᄀᆡ인젼도와 부흥젼도가 잇셧ᄉᆞ오며 ...손영보 쟝로ᄂᆞᆫ ᄒᆡ삼위 부인면려회에셔 월봉 60(六十 육십)원식 드리고 젼도ᄒᆞ다가 지금은 ᄌᆡ졍곤란에 인ᄒᆞ야 월급을 주지못ᄒᆞ나 젼도를 열심히 ᄒᆞ오며”

(“서백리아노회 보고,” 1923년 제 12회 총회록, 105, 107)

5

안주노회보고

“3)셩경공부 쥬일마다 쥬일공과대로 공부ᄒᆞᄂᆞᆫ 이가 만ᄉᆞ오며 ᄀᆡ인호와 통신과로 공부ᄒᆞᄂᆞᆫ 이도 만ᄉᆞ온 즁 특별히 쳥년들이 면려회로 모히여 셩경을 연구ᄒᆞᄂᆞᆫ 일도 잇ᄉᆞ오며”

(“안주노회 보고,” 1923년 제 12회 총회록, 121)

6

경충노회보고

“로회젼도로 평택과 안셩에서 젼도하ᄂᆞᆫ 일을 졈졈 발젼되오며 각지교회의 남녀 쳥년면려회와 부인회에셔 젼도대를 조직ᄒᆞ야 젼도ᄒᆞ옵고 ᄀᆡ인으로도 젼도에 힘쓰ᄂᆞᆫ 이가 만ᄉᆞ오며 ... 교역쟈 양셩과 쥬일학교와 면려회를 확쟝ᄒᆞ려 ᄒᆞᄂᆞ이다.”

(“경충노회 보고,” 1923년 제 12회 총회록, 132-133)

              1923년 제 12회 총회의 면려회 관련 각 노회 보고 내용 /                                                  

                                                 출처: 1923년 제 12회 총회록

 

 

1923년 제 12회 총회에 면려회 관련 각 노회의 보고를 통해 총회 산하 여러 노회에서 면려청년회 조직이 활성화되고 있고, 면려회가 복음전도를 위해 경제적인 지원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23년에 접어들어 면려회가 전국교회의 청년회 명칭을 대치하기 시작했고, 아직 청년회가 조직되지 않았던 교회들 가운데 면려청년회 조직을 장래 희망 사항으로 각 노회가 총회 보고 때 언급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만큼 면려회가 중요한 장로교단의 청년운동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러 노회가 총회 보고 때 면려회를 확장하는 일에 향후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면려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향후 면려회가 총회 안에 더욱 발전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부인면려회’라는 명칭이다. 이것이 부인전도회를 지칭하는 것인지 교회 안에 여자 청년들을 구성된 여자청년면려회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면려회라는 명칭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후에 소년면려회도 결성되어 면려회가 청년에서 부녀회와 소년소녀들에게로 확대되었다. 

 

2) 안대선이 떠난 뒤 1923년 경안노회 면려회운동

 

1917년에 안동지방에 선교 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활동하던 안대선이 1922년 안동을 떠났다. 그렇지만 경안노회(1921년 9월 경북노회에서 분립) 안에는 면려회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1923년 노회장 정재순이 총회에 경안노회 보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 영쥬 막현동 은ᄂᆡᄆᆡ교회ᄂᆞᆫ 부인젼도회에셔 전도ᄒᆞᆫ 결과로 20 여명이 회집ᄒᆞ고 장ᄎᆞ하강도 경영이오며 면려대회에셔 젼도인을 파송ᄒᆞ와 ᄌᆞ미가 만ᄉᆞ오며 영쥬교회와 안동읍교회와 풍긔교회에셔 남녀교인들이 ᄆᆡ샥에 복음 6ᄇᆡᆨ권식 팔기로 작졍ᄒᆞ고 권셔인을 젼도인으로 밧고 외젼도한 결과에 수ᄉᆞᆷ 쳐에 새로 교회를 세웟ᄉᆞ오며 영덕디방 각교회가 남녀젼도회를 조직ᄒᆞ야 젼도한 결과로 교회를 세웟ᄉᆞ오며.

 

“면려대회에셔 젼도인을 파송ᄒᆞ와 ᄌᆞ미가 만ᄉᆞ오며”라는 말은 안동지방에 지방면려연합회가 연례 지방면려대회를 개최하였고 그 모임에서 전도인을 파송하여 결실을 많이 맺고 있다는 의미이다. 전도인을 독자적으로 파송할 만큼 노회 산하 각교회 면려회가 지방연합회를 결성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추진한 것이다. 경안노회 안에 결성된 면려연합회가 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전도인을 파송했다는 것은 여전히 이 지역 면려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3. 1928년 7월 장로회 하기 수양회와 9월 제 17회 총회 면려주일 제정

 

안대선은 1922년 안동을 떠나 서울로 사역지를 옮긴 후 총회적인 차원에서 면려회의 저변확대를 위해 힘썼다. 실제로 그가 서울로 임지를 옮김으로 면려회는 중앙을 무대로 활발하게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23년 8월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1924년 12월 2일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 및 제 2회 면려회 친선대회가 피어선성경학원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조선연합회 조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면려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조선연합회와 총회 종교교육부가 공동으로 1928년 7월 24-30일까지 서울 연희전문학교에서 제1차 장로교 청년하기수양회를 개최했다. 처음 열리는 한국장로교 청년수양회라 회원 지방연합회, 조선연합회, 그리고 총회 모두가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단순히 하기수양회로만 열린 것이 아니라 면려회 총회도 그 기간에 열렸다.

 

1928년 7월 당시 전국의 면려회는 350여개에 1만1천여 명의 회원이 참여했다. 사설은 전국의 장로교회 수 2천3백23개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이므로 “압흐로는 젼쟝로교회청년회를 전부면려회로 개칭하고 쳥년회가 업는 곳에도 젼부 면려회를 조직” 할 것을 촉구했다.

청년하기 수양회 셋째 날, 7월 26일 연희전문학교에서 총무 안대선 사회로 ‘면려회련합회 총회’가 열렸다. 회장에 이대위, 부회장 오근육, 총무 안대선 부총무 홍병덕 회계 최석주 부회계 임성록, 서기 이양섭 부서기 김경호가 피선되었다. 지육부장에 전필순 계독부장에 김가전 그리고 농촌부장에 조희염이 선출되었다. 고문은 김우석 외 19인이었다. 조선연합회 총회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의를 했다. 

 

“결의

一, 본회경비에 대하야

 1. 각 지회는 매회원 십전식 슈합하야 련합횡 납입할 것

 2. 쟝로회 총회종교교육부의 슈임반액을 청구하기로

二, 긔관지 <진생>을 확쟝키로

三, 각 지회에 계독부를 두어 금쥬 금연을 철뎌히 실행키로

四, 명년 본 총대표는 각 지회에서 二인식 디방련합회에셔 一인식 파송할 것”

 

1주일간의 장로교청년하기 수양회는 ‘성황리’에 마쳤고, 교단 지도자들과 참석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면려회는 500개 회에 1만 2천명의 회원으로 발전했고, 면려회에 대한 기대감도 더 커진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 즈음 안대선이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한 “면려회연합회”(the Christian Endeavor Union)에서 그대로 읽을 수 있2다. 

 

7년 전 면려회가 한국장로교 안에 결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진전이 느렸으나 지난 2년 동안 급속하게 진전이 되어 그 결과 지금 500개 면려회에 12,000명이 넘는 회원이 있다. 한국에 거의 2천개의 장로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것은 여섯[네] 교회들 중 한 곳에 면려회가 조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는 해에는 면려회 결성이 적어도 25% 증가할 수 있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주지하듯이 면려회는 개교회 면려회, 지방면려연합회, 전국면려회연합회 세 개의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지방면려연합회는 개교회 면려회를 지원하고, 전국면려연합회는 각 지방의 면려연합회를 통해 전국의 면려회를 통괄하는 구조를 가졌다.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가 기관지 <진생>을 발행한 것은 전국의 지방면려연합회와 전국 면려회의 결속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조선연합회가 하기수양회를 개최하고 절제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안대선은 면려회 조직, 모임, <진생> 창간, 그리고 하계 컨퍼런스 그 모두가 면려회의 창립과 존재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직, 회합, 잡지와 컨퍼런스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은 아니다. 이것들은 단지 수단들이다. 우리의 목적은 젊은이들이 훗날 교회 예배[봉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게 만들고, 그들이 말씀을 공부한 후 그것을 활용하고, 기도와 기도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그들 자신들을 훈련하도록 하는데 있다.”    

 

면려회의 기본 창립 목적은 면려회 회원 개개인들이 자신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 무장하여 이 땅의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는데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처음부터 면려회 창립 목적이 회원 개개인의 신앙훈련을 통한 하나님 나라와 교회 봉사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분명한 안대선의 철학에 기초하여 면려회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처음부터 면려운동을 개인의 신앙함양과 복음전도에 초점을 두고 전개하려고 한 것은 총독부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개교회와 노회 더 나아가 총회를 배경으로 젊은이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는 1928년 9월 7일 대구신정교회 예배당에서 회집된 제 17회 총회에 면려청년회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청원을 올렸다. 

 

5. 각 교회가 가급적 청년 면려회를 조직케 하는 일에 힘쓰게 하여주시오며

6. 노회마다 청년면려회 연합회를 조직케 하시오며

7. 2월 첫 주일은 청년면려회의 창립기념일인즉 그 주일을 면려주일로 지키게 하고 그 날에 출연한 금액 중에서 절반은 면려회 총무 안대선씨의게로 보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안대선은 개교회, 각노회와 지방회, 총회적인 차원에서 면려회를 해야 할 과제를 분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각 교회에서는 아직 결성되지 않은 경우 면려회를 속히 조직할 것이고 노회에는 지방청년면려회연합회를 결성하여 면려회를 활성화하도록 지원을 해줄 것이며 총회는 면려회 창립 일에 맞추어 총회 산하 교회들이 2월 첫 주를 면려주일로 정해 지키고 그날 모아진 헌금 중 절반을 청년면려회운동에 사용하도록 자신에게 보내줄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안대선과 면려청년회는 총회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면려회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계속 확대해 나갔다. 1929년 9월 제 18회 총회 때 종교교육부 부장 김우석은 종교교육부 상황보고를 하면서 “긔독쳥년면려회샹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긔독쳥년면려회샹황

1. 본회가 일 년간 평안히 유지하여 나가는 것과 발젼된 것과 매쥬일 긔도회에셔 령덕 은혜를 만이 밧는거슬 감샤하오며

2. 본회사업에 진휘는 청년을 위하야 널나 슌행 하오며 갇 디방연합회를 죠직하오며 디방뎍으로 와젼 션덕으로 수양회를 개최하야 청년의 활긔를 쥬엇고 긔관잡지 [진생]을 3년간 계쇽 발행하오며 

3. 젼션[全朝鮮] 셜립된 면련회는 오백여쳐이오며 

4. 젼션에 회원수는 1만 2백 명이오며 

5. 쟝내 경영은 젼졍에 다대한 희망을 가지고 쳥년사업에 더욱 발뎐을 긔도하고 잇나이다.

 

1929년 9월 현재 면려청년회는 전국에 500개가 결성되었고, 회원이 1만 200명이고 각 지방에 지방면려연합회가 결성되었고 <진생>이라는 기관지를 간행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1921년 12월 25개였던 면려회가 1929년에는 500여개로 증가했고 면려회원도 600명에서 1만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다. 창립 8년 만에 이와 같은 놀라운 결실을 맺은 것은 면려회가 총회적인 차원에서 청년회 조직으로 인준하고 각 노회 차원에서 각 지방연합회가 활발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 전국면려회의 사회계몽운동의 적극적 참여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면려회가 1920년대 후반에 사회계몽운동을 중요한 정책 방향으로 설정하고 추진한 일이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변화라기 보다 면려회가 창립되고 처음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추진한 사역이었다. 면려회가 주최가 되어 기독교 문화사업을 진행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1925년 7월 28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경남고성 기독청년면려회는 1925년 7월 21일 오후 9시부터 동회관내에서 제 3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금반에 경성을 중심으로 남북에 이러난 대재앙으로 인하야 주리는 동포를 구제할 목적으로 음악연주회를 시대조선본보 3지국과 기독청년면려회와 연합주최로 개최하기로 가결”하였다. 면려회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 그 아픔에 동참한 것이다. 성경공부와 전도, 기도, 예배를 처음부터 중시했지만 면려회가 문화사업과 구제사업 등 사회계몽운동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독청년면려회는 학생청년연합운동회를 개최하여 지역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926년 11월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주최 동아일보 후원으로 종로 청년회관에서 11월 27일 오후 7시 30분 일류 음악가들이 총 출동한 가운데 ‘음악대연주회’를 개최하였다. 1926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는 음악회 개최 이틀 전 “사계일류악사총출, 음악대연주회, 장소 종로청년회관, 일시 래 27일, 주최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후원 동아일보사”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무게 있게 보도했다.

이 같은 몇몇 사례들이 보여주듯 면려회는 개교회 차원이던 지방연합회나 전조선연합회 차원이던 청년운동을 사회계몽운동과 문화운동과 분리시키지 않았다. 면려회가 처음부터 신앙훈련을 본질적인 것으로 삼고 실천했지만 사회 문화적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

사회와 문화 농촌문제에 대한 면려회의 적극적인 참여는 당시 면려회를 이끈 지도자들의 성향과도 모종의 연관성을 지닌다. 1927년 총회가 총회 본부 종교교육부에서 면려회를 관할하기로 결정한 후 정인과와 강병주가 면려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평북 출신인 정인과(1888–1972)는 숭실전문학교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와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1926년부터 1937년까지 총회종교교육부의 중요 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흥사단 단원으로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미주대의사, 외부부 차장을 역임했다. 

경북 영주 출신인 강병주는 대구사범과 평신을 졸업하고 1925년부터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이사로 참여하였고 영주 내명학교를 설립하고 안동 경안중학교 교장, 한글학회 명예회원,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구속된 인물로 총회 종교교육부 농촌부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농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장로교 총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과는 성향이 다른 이들이 <진생>, 조선연합회 지육부, 경기면려연합회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런 가운데 1927년부터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임원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 중심인물은 이대위의 등장이었다. 그는 1927년 안대선과 함께 총무를 맡았고 이듬해 1928년 회장에 올랐다. 1928년 면려회와 공동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청년수양회를 개최할 때도 이대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통 회장은 1년 임기로 해마다 바뀌었는데 1928년 회장을 맡은 이대위가 1934년 9월 조희염이 회장을 맡을 때까지 거의 6년을 회장으로 재직했고, 조희염이 회장이 된 후에는 안대선과 함께 유급 총무를 맡아 조선청년면려연합회를 이끌었다.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주요 임원(1924-1938)

회기

회장

총무

회기

회장

총무

1924. 12. 5

박현식

김창덕

안대선

권중윤

1931

이대위 

김건

안대선

김경호

1925 10. 24

김창덕 

신장균

안대선

윤치병

1932

이대위

조희염

안대선

김경호

1926 10. 22

김창덕

방합신

안대선

김병원

1933

이대위

조희염

안대선

1927

 

안대선

이대위

1934 9.1

조희염

김건

이대위

안대선

1928

 

이대위

오근육

안대선

홍병덕

1935

조희염

김건

이대위

안대선

1929

이대위

홍병덕

안대선

김교영

1936

조희염

김건

이대위

안대선

1930

이대위

최성곤

고언(임시)

김경호

1937

조희염

김건

이대위

안대선

 

 

 

1938 5월

해소

조희염

김건

이대위

안대선

                        출처: 김덕, “1920-1930년 기독청년면려회 연구,” 221.

 

1928년 이후 전필순, 최석주, 이대위, 이용설, 김교영, 이영섭, 유각경, 최성곤 등이 <진생>의 중요한 기고자로 활동하거나 조선연합회 지육부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오근목, 이양섭, 김건, 박용희 등이 경기면려연합회를 통해 활동하였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수양동우회, 기독신우회, 적극신앙단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다. 정인과, 이대위, 최성곤, 이용설, 김윤경, 송창근, 전영택, 한치진, 이윤재, 이만규 등은 수양동우회 회원이면서 조선면려연합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면려회와 수양동우회의 연결성은 자연히 면려회와 기독신우회와의 연결로 이어진다. 그것은 정인과와 조병옥을 비롯한 수양동우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기독신우회를 결성할 때 면려회 운동에서 활동하던 이대위, 유각경, 최석주, 전필순, 최성곤, 홍병덕, 정상인, 박용희, 이용설, 정인과, 채필근, 김우현, 방인근, 오화영, 이만규, 한치진, 홍병선, 황인식, 전영택을 비롯한 면려회의 중요 인물들이 동참했기 때문이다. 기독신우회에 참여한 이들 숫자는 기독신우회의 전체 회원의 10%에 불과하지만 지도력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면려회와 기독신우회와의 모종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기독신우회는 수양동우회 회원들 중에서 기독교 안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신앙혁신운동을 일으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특별히 수양동우회 핵심 인물이었던 이대위와 정인과가 면려회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현 조선의 경베문제와 교육문제 지식과과 도덕문제”를 애써 외면하지 않았다. 제 2회 조선연합회 총회의 의의를 이대위는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는 조선연합회 총회는 조선기독교회 청년운동이 되는 동시에 그 운동의 최고 입법기관이 되어 조직을 구성하고 그 조직체들의 총 역량의 능률을 발휘하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단체원의 훈련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인데, 그에 대한 훈련은 충실을 기조로 하고 그 위에 적의(適宜)의 법을 세워 뭇사람이 공동으로 세운 법규아래서 정한 약속과 실행을 기도하는 것이다. 둘째는 정신적 단결이다. 우리 청년운동이 운동다운 운동이 되려면 그 회원된 각자가 회에 대한 의무적 사업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으로 회원 각자의 훈련이 되게 하려 함에는 조직단체를 견고하고 회원 다수가 지각과 이론위에 정한 공론을 세우고 그 공론 하에서 私利心을 버리고 정의에는 절대로 복종하는 정신을 철저히 실행함에 정신적 단결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셋째는 구체적인 의안을 검토하는 것이 현 조선의 경제문제와 교육문제, 지식과 도덕문제에 대하여 우리 면려회는 이상과 계획 책임을 가지고 교회와 사회에 공헌하기 위하여 연구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대위가 밝힌 3가지 중에서 세 번째 항이다. 면려회가 개인의 신앙에 머물지 말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평을 확대할 것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이대위가 1929년 1월 <진생>에 기고한 “면려청년의 사업과 조선교회”에서 밝힌 내용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는 개인신앙과 사회적 책임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둘 모두를 면려회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면려회가 기도와 성경읽기, 경견회와 개인전도를 감당하면서도 지역복음화를 위해 전도대를 파송하고 시골 주일학교 사업과 부흥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을 밝혔다. 개개인 회원들의 독서함양을 위해 독서구락부를 결성하고 강습회와 농촌야학을 개설하고 다른 지역을 시찰할 것을 독려했다. 그러면서도 농촌강습회, 생산조합, 소비조합, 판매조합 등 각종 조합과 부업과 직업의 문제를 면려회의 중요 논제로 삼았다. 면려회가 단순히 개인의 신앙 차원을 넘어 농촌운동, 금연금주운동 등 사회계몽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면려회가 금주문제를 단순히 사회문제 중 하나의 이슈가 아니라 심각한 전민족의 경제적 도덕적 문제로 인식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면려회는 매년 음력 단오절에 1-2일 동안 조선전역만 아니라 만주 일본에 조직된 면려회를 포함하여 아시아의 한인 면려회 네트워크를 통해 대대적으로 금주 단연운동을 전개하였고, 각 지역에 금주단연동맹회(禁酒斷煙同盟會)를 결성하고 각 회원들에게 금주 단연 서약서를 작성하게 하여 이를 실천에 옮기도록 지도하였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면려회가 강조한 사회계몽운동이 단순히 금주 금연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농촌문제해결, 공창제 폐지와 절제운동, 위생청결에 이르기까지 지평을 넓혀 여러 분야에서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예루살렘국제선교대회에서 농촌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제기된 것도 조선면려회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1932년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는 농촌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는 학생들이 탈선하지 않도록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지방학생안내 면려청년사업

시내 긔독천년면려회(基督靑年勉勵會) 조선련합회(朝鮮聯合會)에서는 해마다 三월이 되면 지방으로부터 사고무친한 서울로 류학의 길을 떠나 올라오는 학생들의 뜻하지 안흔 불의의 길과 타락에 빠지기 쉬움으로 이것을 안내하여 지도하고저 작년부터 안내의 일을 행하든바 금년에도 시골서 올라와 외롭게 잇는 학생들을 순례심방(巡廻尋訪), 교회인도, 환고위문(患故慰問), 여관지시(旅館指示), 학교선발, 신입학 안내 기타 일체의 일을 독려한다는데 누구든지 학부형된이는 학생의 원적씨명, 지원학교와 지원숙소(신입생에 한하야)와 또는 재학교명과 학년급, 숙소의 번지 등을 통지하면 그 부형의뢰에 응하야 안내와 지도를 행할터이라는데 다수히 리용하야 주기를 바란다 한다.

 

안대선과 조선연합회는 청소년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개교회 차원에서 지도하는 면려회의 신앙지도는 물론 순진한 시골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도회지의 타락한 문화에 물들지 않도록 바르게 지도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실천한 것이다. 농촌문제는 면려회의 중앙본부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개교회 면려회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실천했다. 그 한 예로 전북금산읍 기독청년면려회는 1933년 7월 17일 제 5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1) 농촌사업확장에 관한 건 2) 절제운동에 관한 건 3) 전도사업에 관한 건 4) 하기학교와 문자보급의 건 등 4가지를 결의했다.

특별히 농촌문제해결을 면려회의 중요 정책으로 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조희염이었다. 그는 1929년부터 1931년까지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산하 부서인 농촌부장을 3년 연속 맡았다. 조희염이 농촌부 부장을 맡기 바로 1년 전인 1928년 장로교 총회는 농촌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사업전문자 초빙, 기관지 발행, 모범농촌의 설치, 농학교 설립 등의 사업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듬해 1929년 총회 농촌부는 농촌의 전도, 위생, 교육, 조합을 농촌부의 사업으로 결정하였다. 농촌복음화와 농촌문제해결이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농촌부와 총회의 농촌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면려회가 1920년대 말부터 사회계몽운동과 더불어 농촌문제를 중요한 현안으로 인식하고 추진했다는 점에서 면려회의 농촌문제 참여는 면려회의 사회계몽운동의 확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면려회와 수양동우회, 기독신우회와의 연계성만 아니라 면려회와 적극신앙단과의 관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흥우를 중심으로 1932년 적극신앙단이 조직될 때 청년면려운동에 앞장섰던 최석주, 전필순, 홍병덕, 박용희 등이 적극신앙단에 참여하였다. 이들의 적극신앙단 참여는 적극신앙단이 총회에서 큰 문제가 되기 바로 직전이었기 때문에 면려회에 득이 될 것이 없었다. 면려회를 통해 당시 장로교 안에 일고 있던 사상적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조선연합회는 당시의 사회적 책임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28년 7월 6일 전국의 10개 연합회, 270여 개의 지회, 5,300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연희전문학교에서 열린 장로교청년수양회 때 금주 단연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농촌부를 설치하여 농촌운동을 면려회의 중요 사업으로 결의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실제로 면려회는 1920년대 후반에는 조선기독여자절제회나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함께 금주 단연운동을 전개하였고 1930년대에는 <조선일보>나 <기독신보>의 후원 하에 독자적으로 전국 규모의 행사로 전개했다. 본래의 클락의 만국청년면려회의 전통을 한국적 상황에서 받아들이면서 당시 중요 이슈였던 금연금주운동과 농촌운동의 참여를 통해 실천적 지평을 확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청년면려회를 단순히 교회 안의 청년운동으로만 규정하지 말고 사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 이 같은 해석은 1927년부터 1937년까지 10년 동안 면려회가 실천한 다양한 사회계몽운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면려회의 사회계몽 문화운동 활동내역(1927-1937) 

주제

기사제목 내용

개최 일

동아∙조선

주최/주관

연합강연회

강계각단체 연합강연회 

1927.11.17-18

1927.11.10

강계여자면려회외

웅변회

강서현상웅변회

1927.8.23.

1927.8.9.

평북용천기독청년면려회,동아일보분국

웅변회

관서현상웅변회

1927.8.24.

1927.8.18.

<조선>

평북용천군기독청년면려회

야학

부산목도 농촌부녀야학

1927.8.30.

1927.8.30.

긔독청년면려회

징토연설금지

징토연설금지

1927.5.6.

1927.4.9.

고성긔독청년면려회

수양회

신천서열린하계수양회

1928.9.2.

1928.9.7.

황해도기독교청년면려회

하기수양회

장로회청년하기수양회

1928.7.24-30

1928.7.3.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운동회

“중화”-유년주일학교 대운동회

 

1928.4.18.<조선>

기독청년면려회

창립기념식

오수기독청년면려회 창립기념식거행

1929.2.11.

1929.2.17.<조선>

전북오수청년면려회

하기음악회

청년면려회 음악회

1929.8.24.

1929.8.20

신의주뎨이교회긔독청년면려회

49주년 

창립기념식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1930.2.2.

1930.2.2.

긔독청년면려회경긔련합회

부인야학

운향부인야학이십일부터

1930.11.20

1930.11.20

용천군 운향 긔독청년면려회

수해구제회

수해구제회조직

1930.7.27.

1930.7.30

긔독청년면려회 외

금주금연

금주연웅변회대구긔독회

1931.2.14

1931.2.16.

긔독청년면려회 경북연합회

창립 50주년

면려회창립50주년기념

 

 

 

乞人宴開催

장연기면청서걸인연개최

1932.12.24

1932.12.30

황해도장연읍긔독청년면려회

지방학생안내

지방학생안내면려청년사업

해마다 3월

1932.3.24.

긔독청년면려회 조선련합회

오개사항결의

금산기독오개사항결의

1933.7.17

1933.7.20.

<조선>

전북금산읍긔독청년면려회

금주단연

금주단연운동-악대를 선두로 금주가를 고창

1933.2.9.

1933.2.12.

긔독청년성진면려연합회

보건체조강습

보건체조강습 래 14일부터 4일간

1933. 8. 14-17.

1933. 8. 9. <조선>

남원긔독청년면려회와 조선일보 남원지국

농촌진흥운동

농촌진흥운동-충북 괴산

1933.2.12

1933.2.15

괴산긔독청년면려회

농촌진흥운동

농촌진흥운동-경남 통영

1933.2.11

1933.2.15

통영긔독청년면려회

금주운동

단오의 계절에 제 5회 전조선 금주선전운동

1933.5.4.-5.

1933.5.24.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주최, 조선일보사 후원

토론회

무순면려회서 토론대회성황

1932.12.31

1933.1.9.

무순긔독청년면려회

음악회

밀성유치원후원음악회

1933.12.1.

1933.11.30

밀양기독청년면려회외

수양회

야소교장로회수양강좌개최

1933.7.27.

1933.7.7.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음악회

이리유치원동정음악대회

1933.10.6.

1933.10.1.

이리기독청년면려회

연합운동

전조선기독청년총동맹창립을 준비-장로교하기수양회에서 결정

1933. 7. 하순

1933. 9.2.

장로회하기수양회

웅변대회

현상웅변대회

1933.3.25

1933.3.25

평양동면연합기독청년면려회

금주운동

단오의 계절에 제 5회 전조선 금주선전운동

1933.5.4.-5.

1933.5.24.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주최, 조선일보사 후원

토론회

무순면려회서 토론대회성황

1932.12.31

1933.1.9.

무순긔독청년면려회

음악회

밀성유치원후원음악회

1933.12.1.

1933.11.30

밀양기독청년면려회외

수양회

야소교장로회수양강좌개최

1933.7.27.

1933.7.7.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음악회

이리유치원동정음악대회

1933.10.6.

1933.10.1.

이리기독청년면려회

연합운동

전조선기독청년총동맹창립을 준비-장로교하기수양회에서 결정

1933. 7. 하순

1933. 9.2.

장로회하기수양회

웅변대회

현상웅변대회

1933.3.25

1933.3.25

평양동면연합기독청년면려회

금주운동

단오의 계절에 제 5회 전조선 금주선전운동

1933.5.4.-5.

1933.5.24.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주최, 조선일보사 후원

토론회

무순면려회서 토론대회성황

1932.12.31

1933.1.9.

무순긔독청년면려회

음악회

밀성유치원후원음악회

1933.12.1.

1933.11.30

밀양기독청년면려회외

수양회

야소교장로회수양강좌개최

1933.7.27.

1933.7.7.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음악회

이리유치원동정음악대회

1933.10.6.

1933.10.1.

이리기독청년면려회

연합운동

전조선기독청년총동맹창립을 준비-장로교하기수양회에서 결정

1933. 7. 하순

1933. 9.2.

장로회하기수양회

웅변대회

현상웅변대회

1933.3.25

1933.3.25

평양동면연합기독청년면려회

구걸산모구제

가가에 구걸 산모를 구체

1933.12.29.(음력)

1934. 2.16

경주 양북 어일리 기독청년변려회종교부장 외

금주운동

기독교면려회서 금주선전강연

1934.5.4.-5(음력)

1934.6.17.

<조선>

후창군 칠평면 중흥시 칠평 긔독교청년면려회

금주운동

남녀학생 각단체망라 연합금주시위행렬

1934.6.2

1934.6.14.

조선기독면려회와 기독면려회 평양연합회

정기총회

대련기독면청 제삼회정기총회

1934. 1. 14.

1934. 1.10

<조선>

대련조선인긔독청년면려회

         하기성경학교

삼등하기성경학교

 1934.7.23-8.6

1934.8.11

평남강동삼동명 고봉리 기독청년면려회

금주운동

오친여군중의 금주선전행렬

1934. 6. 9.

1934.6.11.

조선기독교절제회와 기독교청년면려회 평양연합회 공동

구제

재횡빈면청에서 이십여원수합기탁

1934.8.

1934.8.28.

재일본조선예수교횡빈교회 긔독청년면려회

4년차대회

전조선기청면려회 사연대회 개최

1934.9.1.-6.

1934.8.10.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금주운동

겸이포에서 금주선전

1935.6.7.

1935. 6.10.

황해도 겸이포읍 기독청년면려회

학생지도

기독면려회에서 학생지도사업

1935.3.

1935.2.15.

기독청년면려회조선연합회

폴링 내한

만국면려청년회장 폴링박사 입격

폴링박사 대강연-기독청년면려회세계연합회장

1935.12.21.

1935.12.22.

1935.12.24.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설교대회

순천지방기청 현상설교대회

1935.11.21.

1935.11.16.

순천군 풍전교회 긔독청년면려회

면려대회

전남남녀기독청년제일회면려대회 개최

1935.7.30.

1935.7.30.

기독청년면려회 전남연합회

면려대회

기청면려회

1936. 6. 27.

1936.6.29.

기독청년면려회경성연합회

금주운동

“삐라 포스타 무료배부등 대대적 금주운동”

1936.5.4.-5..

1936.6.7.

<조선>

긔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구제운동

양평정교회도 현금의복연출

1936.9.

1936.9.10.

양평정교회 기독청년면려회

구제운동

지게지고 호별방문 의복과 금품수집-450점을 본보 지국에 기탁 영등포 청년회

1936.9.10.

1936.9.10.

영등포 기독청년면려회 외

웅변대회

현상절제웅변대회

1936.7.6.

1936.7.7.

기독청년면려회 경성연합회

금주운동

천오백단체궐기 가두금주선전

1937.5.12.-13

1937.5.18.

기독면려회연합회

    출처: 1927-1937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면려회 관련 기사들

 

우리는 위 일간지의 보도를 통해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면려회가 개교회 면려회 차원이던, 지방연합회 차원이든, 아니면 조선연합회 차원이던 너무도 많은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위에서 보듯이 분야도 매우 다양하다. 당시의 움직임을 하나의 면려회의 사회계몽운동이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별히 금주운동은 조선연합회가 심혈을 기울였던 분야였다. 둘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면려회의 활동에 대해 매우 지속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도를 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동아일보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면려회 활동을 보도했다. 사회계몽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일간지의 보도는 사실, 면려회의 면려총회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 중에서도 일간지가 면려회의 사회적 책임 구현에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셋째, 조선연합회가 사회계몽운동 중에서도 단오절에 맞추어 해마다 대대적인 금연금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한 것은 매우 특별하고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넷째, 이와 같은 면려회의 활동은 면려회가 처음부터 신앙문제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분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해왔음을 보여준다. 

 

 

5. 1932년 9월 제 21회 총회 총회면려부 설치와 발전상황

 

한국의 기독청년면려회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기독청년면려회 역사상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1932년 9월 제 21회 총회에서 일어났다. 경기노회장과 기독청년면려회연합회장이 총회에 면려회부를 설치해 달라고 청원한 것을 총회가 받아준 것이다. 1932년 9월 제 21회 총회록은 면려회부 청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기노회장과 기독청년면려회연합회장의 면려회부 설치청원은 종교교육부에 보낼 일이오며”

 

보통 한 부서를 설치하는 것은 청치부에서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총회 헌의부에서는 이 청원을 종교교육부에 보내 논의하도록 하였다. 종교교육부에서는 이 문제를 논의하고 총회종교교육부 산하 한 부서로 면려회부 설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제 21회 총회는 종교교육부의 결정을 받아 총회에 상비부서로 면려회부를 설치하기로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청원건

2. 면려청년회 연합회에서 면려회부 설치 청원은 그대로 허락함이 가한 줄로 아오며(규칙은 규칙부에 보내기로 함)

 

이렇게 해서 면려회가 창립되고 11년이 지난 1932년 총회에 면려회부가 상설부서로 설치된 것이다. 총회가 면려부를 총회 상비부로 설치하기로 결정하던 바로 그해 1932년 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는 회장은 이대위였고, 부회장은 조희염이었으며 총무는 안대선과 김경호였다. 여전히 이대위 조희염 안대선의 중심 체제로 운영되었다. 당시 임원들과 이사들은 다음과 같다. 

 

1-3. 청년면려회 연합회 상황은 여좌하오며

 1. 임원

  (1) 회장 이대위, 부회장 조희염, 총무 안대선, 김경호, 서기 이양섭, 김건, 회계 노연풍, 최약실, 조사부장 최선주, 지육부장 김명신, 농촌부장 김두칠, 게독부장 장애경, 소년부장 이권찬

  (2) 이사 윤산온, 박용희, 조희염, 안도화, 김석창, 보이열, 변배지, 안다손, 황상ㅎ, 김우석, 강병주, 장흥범, 이대위, 안대선, 김경호, 이양섭, 김건, 노연풍, 최약실, 최석주, 김명신, 김두칠, 장애경, 이권찬.

 

안대선이 숭실학교 교장으로 젊은이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윤산온과 함께 이대위와 조희염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면려연합회를 이끌고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이사 명단에 윤산온이 맨 먼저 기록된 것은 그만큼 이사회 안에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는 당시 숭실학교 교장으로 그로부터 몇 년 후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다. 선천신성학교 교장 시절에는 일제의 데라우치총독 살해음모미수 사건으로 알려진 소위 105인 사건에 용기 있게 맞섰고 숭실학교 교장 시절에는 신사참배운동에 앞장서며 총독부의 종교탄압에 용기 있게 맞섰던 인물이다. 안대선은 서울을 거점으로 윤산온은 평양을 거점으로 면려회운동의 저변 확대에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한 것을 암시해준다. 

1932년 총회록에 의하면 당시 전국청년면려회연합회에 가입한 지방연합회는 21개였고 미가입단체는 5개였다. 이것은 전국의 총회 산하 26개 노회 중에 21개 노회에서 지방면려청년연합회가 결성되었고 5개 노회에서는 지방연합회가 결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전국의 각 지회수는 813개였고, 전체 면려회원 수는 1만 8천 5백명이었다. 1929년 500개에서 813개로 성장했고 회원 수도 1만 명에서 1만 8천명으로 증가했다. 놀라운 증가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면려회가 총회와 노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음은 전국청년면려회가 1932년 제 21회 총회에 보고한 사업 내용이다. 

 

 3. 본회사업

  (1) 금년[1932년] 2월 첫 주일 면려회 51주년 기념식을 전 조선면려회원이 총동원하여 성대히 거행하였사오며

  (2) <면려회보>는 5차 발행하여 전선 각 면려회에 무료 배부하였사오며,

  (3) 면려회 예배순서를 편집 간행하였사오며,

  (4) 안대선 총무가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조선면려회를 많이 소개하였사오며,

  (5) 최석주, 김경호 양 씨를 대구 마산에 파송하여 수양회를 개최하고 강사로 참석케 하였사오며,

  (6) 회집은 매월 실행부 모이는 일 외에 이사회 2차와 협의회 1차를 회집하였나이다.

 

우리는 여기 간단한 보고에서 면려회에 대한 매우 중요한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의 면려회는 세계면려회의 한 조직으로 인식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2월 첫 주일 즉 세계면려회 창립일 1881년 2월 2일을 기준으로 면려회 51주년 기념식을 거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둘째, <면려회보>를 발간하여 조선의 각 면려회 회원들에게 무료 배부를 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체계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면려연합회 산하에 ‘실행부’ ‘협의회’가 조직되어 회집되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셋째, 면려연합회에서는 지방에 강사를 파송하여 각 지방면려연합회가 수양회를 개최하도록 돕는 일을 추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는 1932년 장로교 총회에 면려부가 설치된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 1회 수양강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1933년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금강산 외금강 온정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수양관에서 제 2회 수양강좌를 실시했다. 다음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 2회 수양강좌의 강사진과 강의 주제이다.

 

 

            193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 2회 수양강좌의 강사진및 강의주제

 

             강의 주제

담당 강사

1

조선교계사상의 경향

박형룡(평양신학교 교수)

2

종교교육진흥운동

강병주(종교교육부양성과장)

3

조선기독교문화운동

백낙준(연희전문학교 교수)

4

세계사조와 우리 청년사상통일의 필요

백낙준(연희전문학교 교수)

5

조선기독교여성운동

김마리아(마르다여신학교교수)

6

생활개조와 절제운동

조만식(조선일보사사장)

7

한글강화

김윤경(배화여고보 敎諭)

8

조선역사강화

이윤재(중앙고보 敎諭)

9

[주일설교] 세계안목에 나타난 조선기독교

박형룡(평양신학교 교수)

10

[주일설교] 평신도전도운동

조희염(가나다미슌주교총무)

11

[토론급주강] 조선양촌교육문제

최윤호(황해도농사학원장)

12

[토론급주강] 청년지도자양성문제

장홍범(종교교육부장)

13

[토론급주강] 기독청년운동의 통일책

張利郁(신성학교장)

14

[토론급주강] 현하조선주일학교운동방침의 시비

교섭중

15

[교수] 종교교육반 주일학교사업 

정인과(종교교육총무)

16

[교수] 청년반 청소년지도

이대위(청년면려회총무)

17

[교수] 교직반 국상적 교회

李容卨(세브란스 의전 교수)

18

[深勝講話] 세계명승강화

정인과(종교교육부총무)

19

[深勝講話] 조선명승강화

교섭중

20

[深勝講話] 보건강좌

고명수(세브란스의전 교수)

21

[특별집회] 음악간친회, 관화좌담회, 체조급유희회, 서적열람비판회, 대표사업보고회

 

                   (출처: “야소교장로회 수양강좌개최” 동아일보 1933년 7월 7일, 2면)

 

면려회가 총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수양강좌를 개설한 것이다. 위에서 눈에 띠는 것은 강의 주제가 다양하고 강사진도 당시로서는 매우 화려하고, 수준 높은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강사진이 전문성을 인정받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IV. 조선기독청년면려회의 각종 대회와 1934년 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 

 

면려회를 이끈 핵심 지도부는 총무 이대위와 협동 총무 안대선, 지육부장 최석주, 면려부장 윤산온, 이대위에 이어 전국면려연합회 회장을 맡은 조희염이었다. 총회 면려부가 조직된 후 윤산온(1932, 1934-1935), 안대선(1933), 조희염(1936-1938)이 부장을 맡았고, 총무는 안대선(1932, 1937-1938)과 이대위(1933-1936)가 맡았고, 협동총무직은 안대선(1933-1934, 1937)이 맡았다. 총회 면려회 사무국 국장은 윤산온이 1932, 1934-1935년 회기에 맡았다. 그 외 라시산, 조희염, 안대선, 이대위가 연속적으로 면려회 전국조직의 중요 직책을 맡았다. 따라서 이들은 1932년부터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가 해소되던 1938년까지 총회 안에서 조선면려회를 이끈 중요 인물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면려회가 가장 눈부신 활동을 한 것은 1930년대이다. 특별히 ‘새로워지자’라는 표어를 가지고 1934년 9월 1-6일 숭실전문학교에서 개최된 ‘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는 면려회가 한국에서 가장 꽃피웠던 시기로 면려회의 발전 성격 영향력 전반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중요하다. 이 대회 기간 매일 5-6천명이 모일 정도로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1. 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 임원진들과 강사, 축사 담당자들

 

1934년 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 대회장은 당시 안대선과 함께 공동 총무로 섬겼던 이대위였고, 부대회장은 안대선과 함께 세계대회에 참석한 한국대표 조희염이었다. 강사로는 미국 북장로교해외선교부 총무 맥캐피 박사, 조선면려청년회 설립자 겸 총무 안대선, 채필근,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 암스트롱 박사, 마포삼열, 정인과, 곽안련, 이용설, 백낙준, 이훈구, 김마리아, 김창길, 이윤재, 이권찬, 유소(柳昭) 부인, 말스베리, 황재경, 송상석, 김응순, 고언, 라시산, 김건, 라지화, 김경호, 노연풍, 이영태, 박정근, 배흥권, 김표엽(金彯燁)등이다. 조선장로교총회장 장홍범, 평양연합당회장 김종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도변풍일자(渡邊豊日子), 평양부윤(平壤府尹) 아부천일(阿部千一),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여운형, 동아일보지국장 김성업, 화신백화점 주 박흥식이 축사를 했다. 총회장 장홍범의 축사는 면려회의 역사와 규모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기독청년면려회 4년대회가 창설됨에 조선오십년 종교사상에 영예로운 성사라하겠나이다. 면려회운동의 기원과 유래를 소구(溯究)하건대 그 어찌 우연타 하리오 거금 이십오육년 전에 경성 신문내교회에서 면려회를 설립함을 비롯하야 점차 널리 선전되고 진행하다가 십유여년전에 지하야는 경북안동교회에서 안대선 선교사의 지도로 완전한 면려회가 규칙적으로 조직되야 십수성상(十數星霜)을 끈침없이 면력(勉力)한 결과에 현재 일천이백(一千二百) 세포단체(細胞團體)와 2만 8천여(二萬八千餘) 회원(會員)이 되었으며 회원이 청년이니만치 힘이 많고 기운이 왕성햐야 열심구투(熱心舊鬪)하는 바에 직접 간접으로 우리 교회에 다대한 공헌이 있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며 상찬(賞讚)하는 바인 동시에 이와 같이 성대한 회합이 있게 된 것은 과연 제군의 성심의 결정이요 노력의 결과라 하겠나이다. 기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전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는가 하신 것은 주님의 보훈(寶訓)이로다!

 

1934년 면려회의 기원이 25, 26년 전이라고 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에도 1904, 1905년에 조지 매큔에 의해 선천읍교회에서 그리고 찰스 알렌 클락에 의해 서울 승동교회에서 면려회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다 그러다 1921년 안대선에 의해서 규칙과 체계를 가지고 하나의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1934년 당시 면려회는 1200개 조직, 2만 8천 여 회원으로 급속하게 증가했다. 총회장은 면려회가 장로교회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직접 밝혔다. 총회장의 축사 가운데 주목할 한 가지는 면려회가 1921년 이전에 존재한 사실이다. 따라서 면려회가 1921년 1월 23일 공식적으로 창립되었지만 그것이 곧 한국에서 면려회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몇몇 교회에서 시작되었지만 하나의 규칙과 조직구조를 가지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된 것이 안대선에 의해서이기 때문에 1921년을 창립일로 정해 지켜진 것이다. 

조선총독부학무국장 도변풍일자(渡邊豊日子)도 분위기에 압도를 당했는지 “청년은 실로 일국의 기초이며 국가 활동의 원동력이다”고 격려했고, 평양부윤(平壤府尹) 아부천일 (阿部千一)도 “금일 전조선기독청년면려회 제 1회 4년차 대회가 개최하는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은 나로서 가장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총독부를 대표하여 참석한 이들 일본 고위 관리들이 자의든 타의든, 진심으로 했던 아니면 예의상 했던 면려회가 나라 잃은 조선에 희망이고 미래의 비전이었다는 사실을 선포한 셈이다. 방응모 조선일보사 사장도 이렇게 축하 메시지를 했다. 

 

명일의 세계는 청년의 것이라는 격언이 있지만 과연 명일의 조선은 청년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되겠읍니다. 이제 기독교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가진 청년여러분이 혹은 남에서 혹은 북에서 또는 해외에서까지 참석하야 기독의 박애정신의 기빨 밑에서 조선의 명일을 염려하고 계획하는 것은 만공의 성숙로써 축복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과거 오십년간 조선에 끼친 문화적 공적은 일일이 여기서 말슴하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곳에서 장차로 기독교가 얼마나 조선에 할 일이 많은가를 지적하랴 함니다. 보십시오. 조선은 현하 세계적 공통현상인 경제계의 부진으로 실업, 생활난, 취업난은 점점 심해가고 사상계는 동요하야 개인, 가정, 사회의 생활, 교육, 신앙은 거의 혼돈상태에 빠젓다 할만 하외다. 이 때에 민중을 가장 합리적으로 선도하야 아름답고 완전한 사회를 만들며 생활을 안정케 하랴면 여러분의 기독교정신을 발휘하야 의를 위하야는 생명이라도 홍모(鴻毛)같이 녀기고 공중을 위하야는 사사(私事)를 희생한다는 결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방응모의 축사는 일제의 한국지배가 결코 조선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다. 한국인 지도자들이 조국의 미래를 책임질 전국의 기독청년들 대회에 참석해서 축사하고 격려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특별한 일이다. 조선중앙일보사장 여운형도 “청년은 미래 사회의 주인이다. 청년은 미구(未久)의 사회를 인계 받아서 능히 존속하고 번영케할 책무를 가졌으니 그 사명이 중대하다”고 격려했다.

강사진과 축사 담당자들을 봐도 이 대회가 얼마나 전국적인 규모의 대회였는가를 보여준다. 1934년 제 1회 면려회 4년차 대회에 전국 대표로 참석한 회원들만 2,100명이 넘고 전체 참석자는 7천명이 넘었으니 정말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1934년 면려회대회는 실제로 장로교 총회의 규모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규모이다. 아마도 한국장로교 역사상 몇 번째 손꼽을 수 있는 전국적인 규모의 대회로 여겨진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장과 평양부윤은 그 규모에 놀랐을 것이 확실하다. 불과 이 대회 4년 후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조선면려청년연합회가 해체된 것도 일제가 무섭게 발흥하는 면려회를 체제의 위협세력으로 간주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4년 후 1938년 제 2회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가 해체되면서도 2차 대회를 개최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1934년 대회는 면려회 역사상  가장 큰 전국적인 규모의 면려대회라고 할 수 있다. 

 

2. 대회 개회사(대회장 이대위)

 

면려회 창설 불과 13년만인 1934년 조선청년면려회는 전국에 1,200개 지회가 결성되었고 회원이 2만 8천명을 넘어섰다. 조선에서만 2만 8천명의 청년면려회원이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 얼마나 면려회가 활성화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공동 총무이자 대회장 이대위는 이와 같은 사실을 자신의 대회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1934년 9월 1일에 모인 이 제 1회 전조선면려회 4년 대회는 금후 조선기독교운동에 신출발을 기약하고 매진(邁進)하려는 것을 고함니다. 一八八一년 二월 첫 주일에 미국 동북방 메인주 포틀랜드 월리스톤교회에서 비로소 고고(呱呱)의 성(聲)을 발하던 이 會가 오늘은 세계 어대던지 퍼지게 되여 조선에까지도 이와 같은 일대운동(一大運動)이 되었습니다. 

근년에 우리교회 안에서 대회회집이 실로 一二가 아니였지마는 그러나 그리스도의 청년을 중심삼고 청년으로 청년을 위하야 청년들이 멀리는 남북만주(南北滿洲), 횡빈(横濱), 신호(神戶), 대판(大阪), 해삼위(海參威), 조선 각 지방에서 구름 같이 모이게 된 것은 그야말로 조선그리스도 교회사상에 처음이요 청년운동 선상(線上)에 있어서 오직의 발기점이요 조선교회부흥운동의 원동력이되며 따라서 세계와 악수(握手)하는 한 모멘트임니다.

이 세계에서 면려회를 조직하고 운동하는 나라가 모다 일백이십여국(一百二十餘國)이오 회(會數)가 팔만(八萬)이 넘슴니다. 그 중의 조선면려회 일천이백(一千二百)과 이만팔천(二萬八千)명의 회원들은 질로나 양으로나 타국에 비하야 조금도 손색(遜色)될 것이 없슴니다.

 

세계면려회가 120국에 8만이라는 것은 회원 수가 아니라 조직된 면려회 수를 말한다. 안대선이 밝힌 것처럼 1923년 세계면려회원은 5백만 명이었고 10여만 면려회가 전 세계에 존재했다. 따라서 이대위가 8만이라고 말한 것은 전세계 조직된 면려회 회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대위는 대회장으로 개회사에서 면려회의 기원과 규모와 대회의 의의를 너무도 잘 담아냈다. 그는 하나님이 조선의 청년들을 이 시대에 특별히 택하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은 그가 이 대회가 갖는 신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이 특별히 조선청년들을 빼시사 세계무대에서 복음의 진리로써 능히 세계 사람들을 인도하게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의 신비하신 계획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음니다. 더구나 조선선교 오십년 희년을 마지하는 이해에 우리 4년대회가 시작되게 된 것은 특별하다고 하는 것보다도 자연적 법칙이요 인생생활로 보아 면치 못할 공도(公道)이오 신(神)이 섭리하시는 진리로 보지 안으면 아니되겠음니다. 오십년이라하면 물건도 낡어지기 쉽고 사람도 늙기를 시작함니다. 그러나 지공무사(至公無事)하신 신은 알파와 오메가임니다. 그의 법칙은 사람의 연령이야 어떠하던지 청청(靑靑)하고도 생기 있는 기혈(氣血)를 가진 청년들을 사용해서 인류의 부도덕과 사회(不道德及社會) 일절(一切)의 죄악을 타파하고 이 세계에 신의 왕국을 건설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이시죠. 아모 맥도 없고 죽어가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이 대회는 무엇보다도 ‘새로워지자’라는 표어를 걸고 몇 날을 지낼 때에 개인, 가정, 교회, 사회가 새로워지자는 목표를 삼고 금후 세기에 보다 더 찬란(燦爛)한 기독교 문화을[를] 이 강산 안에 건설하자고 굳게 맹약하고 도라가시기를 바라나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회장 이대위는 제 1회 4년차 면려대회를 통해 하나님이 조선 청년들을 세계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시기 위해 택하셨다고 선언했다. 세계청년선교에 대한 책임의식을 고취시킨 것이다. 한국선교 50주년을 맞는 그해 대회가 열린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요, 다시 말해 “청청(靑靑)하고도 생기 있는 기혈(氣血)를 가진 청년들을 사용해서 인류의 부도덕급 사회(不道德及社會) 일절(一切)의 죄악을 타파하고 이 세계에 신의 왕국을 건설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확신했다.

 

3. 대회 결의문

 

1934년 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는 청년운동, 소년운동, 농촌운동 세 분야에 대한 결의문을 발표했다. 청년운동은 4년간 배가운동, 청년데, 독서주간제정, 청년지도자양성, 금주운동 다섯 가지를 골자로 하는 결의문이었고, 소년운동은 소년면려회운동 정신을 보급시킬 것, 소년지도자양성, 각면려회 내 소년면려회조직이 그 핵심이었으며, 농촌운동의 경우 각회원이 매년 1인 이상 문맹 타파에 실행, 식목주간을 제정하야 식목에 진력, 농촌보존, 면려회 보건운동, 공동경작이 결의문의 핵심 주제였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여기 대회 결의문 ‘청년운동’ 전문을 소개한다. 

 

“대회 결의문

一, 청년운동

 

1. 4년 배가운동

이 문제는 사년 후 제2회전조선면려회대회시에는 현재면려회 회세[회수, 회원수]를 배가하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 있어서 위선급선무로 각개회급연합회로써 정시부흥운동과 천막전도대를 조직하야 운동하자는 것이다.

2. 청년데-

매년 2월 첫주일로 면려회탄생일로 전세계가 다 이날을 지키는대 특히 우리 조선에서는 총회에서 청년주일로 작정하고 지켜오든바 이후부터는 더 의미잇게 하기 위하야 전조선회원이 이월 첫주일 아침일즉 일어나 특히 청년을 위하야 기도하기로 한 것이다.

3. 독서주간제정

면려회교양운동으로 매년 일월일일로 주간을 독서주간으로 정하고 일반회원에게 독서에관한 정신을 장려하며 좋은 양서로 구입하며 혹은 소계등 이 주간을 순전히 독서에 주중(注重)하자는 운동이다. 

4. 청년지도자양성

이 운동은 현재조선면려회를 어거(御擧)하고 지도하며 운전해 나갈 지도자 즉 일꾼을 기르자는 운동이다. 지방연합회는 수양회급강습회등을 개최하야 면려회에 관한 인식을 철저하게 하며 기타 각처에서 열리는 사경회급 성경학교에 만이 참석하되 개인이 의무적으로 가든지 혹은 각교회와 면려회에서 유망한 자를 선정파송할 것이다.  

5. 금주운동

계독운동으로 이 금주운동은 이미 四五년재 전조선적으로 시행해 온 것이지만 차후 금주운동은 좀더 규모와 적극적방침을 세워 종래의 이백내외의 동원단체를 가급적 일천이백여 단체가 다-동원케 하야 실행하자는 것이다. ‘단 매년 이 운동에 사요할 금주삐라 제작은 매년 음력 삼월말일 전으로 본회에 예약신입(豫約申込)할 것.’

 

면려회가 향후 4년 동안 중점적으로 추진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잘 담아내고 있다. 향후 4년간 회원과 각 지회를 배가시키는 운동을 전개하고, 2월 첫 주 면려회 주일로 전국의 교회들이 지키고 있는데 모든 회원들은 2월 첫 주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청년을 위해 기도하고, 매년 첫 1주일간을 독서주간으로 정해 독서에 전념하는 기간을 가지며 면려회 일꾼을 양성하고 금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자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미 세력적으로 2만 8천명이라는 대단한 회원수를 가진 면려회가 향후 4년 동안 배가 된다면 5만 6천명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대위가 ‘청년운동’ ‘배가운동’ ‘면려회교양운동’ ‘금주운동’을 비롯하여 ‘운동’이라는 표현을 10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면려회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대선과 지도부는 총회적인 차원에서 협력을 배경으로 전국적인 조직망 구축으로 끝나지 않고 실질적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이 한국교회와 사회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면려회로 발전시킬 비전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대회결의문에 그대로 나타난다. 대회 결의문에는 ‘소년운동’과 ‘농촌운동’을 청년운동과 나란히 면려회의 중요 정책 목표로 언급되어 있다. 

 

4. 주요 강사와 주제

 

20명의 주요 강사들 중에서 선교사 4명 외국인 초청 강사 2명 합 6명이고 나머지 14명은 모두 한국인 강사들이다. 안대선과 함께 면려회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윤산온(George S. McCune, 1872-1941)은 ‘새로워지자’는 강의로 참석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곽안련(Charles A. Clark)이 성찬식 설교를 맡았고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선교사는 자신의 45년 선교사역을 회고하는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맥카피(Cleland Boyd McAfee, 1866-1944)는 ‘변하는 시대와 그리스도 청년’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고, 안대선은 “기독교청년면려회 원칙에 대하야”를 강의했다. 초청강사 암스트롱은 2번의 강의를 했는데 하나는 영국 옥스퍼드운동을 소개하는 강의였고 다른 하나는 “변천기에 처한 기독교청년”이라는 주제강의였다. 둘 모두 대회 성격에 맞는 적절한 강의였다. 강사와 강의주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4년 제 1회 전조선면려회 4년대회 강의와 발표주제

 

대회 강사

              발표 주제

 

1

윤산온

새로워지자

 

2

곽안련

성찬식 강설

 

3

마포삼열

나의 선교 사십오년 회고담

 

4

채필근

신비주의와 지식주의의 비판

 

5

배은희

신흥기독교와 천국운동

 

6

이용설

조선기독교 청년운동에대한 관견(管見)

 

7

이권찬

소년사업의 지도원리

 

8

안대선

기독청년면려회 원칙에 대하야

 

9

임종순

조선이 요구하는 청년

 

10

맥캐피

변천하는 시대와 그리스도 청년

 

11

조희염

청년기의 심리와 지도자의 책임

 

12

정두현

금후 소년운동의 통일과 진행

 

13

이대위

금후 청년운동의 발전책

 

14

김길창

누가 가겠느냐

 

15

이훈구

조선 농촌의 당면문제와 그 해결책

 

16

주운성

절제운동의 재음미 ...(현상절제웅변)

 

17

배민수

교회농촌사업[의 현재와]과 장래

 

18

암스토롱

악쓰포-드운동에 대하야

 

19

암스토롱

청년과 오락[변천기에 처한 기독교 청년]

 

20

이윤재

한글운동

 

21

백낙준

미래 오십년 조선기독교

 

22

백낙준

조선이 요구하는 기독교

 

23

정인과

조선청년십자군의 총동원

 

24

김마리아

금후 조선여잔운동의 동향

 

25

송창근

뱐화산의 최후 일각

 

26

김관식

조선에 대한 세계적 기대

 

27

이순석

최근 구미경제시찰담

 

28

안대선

청년운동의 지도원리

 

                                                                     1934. 9. 1-6.  

출처:『제1회전조선면려회 4년대회록』;“전조선기청면려회사년대회개최,” <동아일보> 1934. 8. 10.

 

이들 6명의 외국인 외에도 음악부위원으로 유소 부인, 말스베리 선생, 중앙위원으로 고언 등 3명의 외국인이 대회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또 위에서 언급된 14명의 한국인 강사 외에도 정인과, 백낙준, 김마리아, 송상석 등이 강사로 참석했다. 송상석 목사는 절제웅변담임으로 절제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필자가 볼 때 1934년 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는 한국면려운동사에서 최절정의 시기였다.

조선면려회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1935년 12월에는 만국면려회 회장 폴링(Daniel A. Poling) 박사가 내한하여 ‘세계청년운동의 대세’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폴링은 면려회 창설자 클락의 뒤를 이어 국제기독청년면려회(International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 2대 회장(1925-1949, 1954-1955)과 만국기독청년면려회(the World’s Union of Christian Endeavor) 회장(1927-1962)을 맡아 전세계 면려운동을 견인한 인물이다. 주요 언론은 그가 존 모트와 구세군의 부츠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V. 1938년 5월 청년면려회 해체와 9월 19일 제 27회 총회

면려회의 절정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4년 후 1938년에 열리기로 되어 있는 제 2회 전조선면려회 4년대회는 “일본 정부의 간섭으로” 열리지 못했다. 전국적인 망을 가지고 활발하게 청년운동을 전개하는 면려회를 총독부가 좋게 볼 리 없었다. 일제는 특히 1935년부터 신사참배 강요가 눈에 띠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외국인이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그것도 조선 전지역을 넘어 하얼빈 일본 만주 등 아시아 여러 지역과 더 나아가 전세계 네트웍을 가진 조선청년면려회를 주의 깊에 관찰하며 기회를 엿보다 1938년 5월 총회의 신사참배강요를 앞두고 강제 해산시켰다. 1938년 5월은 일제가 전국의 각 노회를 동원하여 신사참배를 용의주도하게 결정해 나가며 한국장로교를 배도의 길로 몰아넣고 있을 때였다. 

많은 영향을 미치며 최절정에 달했던 1934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열린 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는 전국적인 규모의 집회로는 처음이자 마지막 대회가 되었다.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1938년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9월 19일 해체된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5월에 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가 해체를 당했고, 이를 9월 총회에 보고한 것이다. 9월 19일 해체되었다고 알려진 것은 면려회 해체 보고 시점을 해체 일로 김남식이 잘못 기록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38년 5월 조선연합회가 해체되었다는 사실은 총회록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1938년 9월 19일 제 27회 총회 때 총회는 다음과 같은 면려부장 조희염 목사의 보고를 받기로 가결했다. 

 

면려부장 조희염씨의 여좌한 보고는 받기로 가결하다.

일(一). 조직 부장 조희염, 서기 길인섭, 회계 유동희, 총무 안대선.

이(二). 사무국원 국장 조희염, 서기 길인섭, 회계 유동희, 국원 이보식, 신후식, 박순석, 허봉낙, 주형옥, 차희선.

삼(三). 상황 보고

 1. 금년 3월 22일로 30일까지 총무 안대선씨가 충남면려회연합회 수양대회에 강사로 출석한일이오며,

 2. 면려회 예배순서 오(五)천부를 출간 배부한 일이오며, 

 3. 기타 면려회에 관한 서적을 계속 판매한 일이오며,

 4. 소화 13년(1938) 5월에 면려회 연합회는 사정에 의하여 해소하였사오며,

 5. 면려회 연합회 해소후 잔무 처리위원 김건 안대선 양씨의 보고를 받아 길인섭 유동희 양씨가 검사하였습니다.

 

면려회는 한국에서 급성장하는 중요한 시점인 1938년 5월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총회록은 대체 왜 면려회를 해체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그저 ‘사정에 의하여 해소하였사오며’라고만 밝히고 있다. 대체 사정이란 무엇인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분명 면려회 해체는 자의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안대선이 의욕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총회 역시 총회 교회 기관의 하나로 완전히 정착한 청년회와 다름없는 면려회를 자진 해체할리 없다. 일제는 조선청년운동, 특별히 수만 명의 회원을 가진 전국규모의 면려회를 잠재적 체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면려회의 활동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도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앞장선 북장로교선교회 그것도 평양의 윤산온을 비롯한 중요한 선교사들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면려회를 색안경을 끼고 보았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제는 한국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는 흐름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 면려회를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볼 때 면려회가 비록 강제 해체되었지만 해방 후 면려회가 다시 회복하고 재건되고 활성화될 수 있는 정신적 틀을 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다.

면려회가 총독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 정황에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면려회 안에 노선을 두고 대립과 갈등이 있었지만 면려회를 해체할 만큼의 위기는 아니었다. 정말 큰 해체 위기는 밖에서 왔다. 총독부는 전국의 장로교회 청년들을 대상으로 놀랍게 세력을 확장하는 면려회를 예의주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진생>의 기사를 면밀하게 검열하던 총독부는 1926년 7월호 <진생>을 배포 전에 전격 압수했다. 1926년 7월 6일 <동아일보>는 “진생압수”라는 제목의 간단한 기사를 실었다. 

 

진생압수-시내련지동(蓮池洞) 일백사십륙번디 긔독청년면려회(基督靑年勉勵會)에서 발행하는 잡지 진생(眞生) 칠월 호는 당국의 긔휘에 뎌촉되여 압수되엿슴으로 그 회에서는 목하 호외를 발행코저 준비 중이라더라.

 

매우 짧은 단편 기사이다. <동아일보>는 왜 당국이 압수를 했는지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 단지 ‘당국의 긔휘에 뎌촉되여 압수되엿슴’이라고만 기록했다. 여기 당국은 물론 총독부를 지칭하는 것이다. 총독부가 무엇 때문에 <진생>의 기사를 문제 삼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1926년 7월호는 급히 호외로 대치하고 사실상 인쇄 후 강제 폐기되었다. 보통 일부 삭제를 하거나 주기철의 사례가 보여주듯 관련 기사만을 자르고 배포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당국은 아예 1926년 7월호 <진생>을 배포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 사건은 향후 총독부가 <진생>과 지도자들, 그리고 면려회 중앙본부인 ‘조선연합회’를 면밀하게 감찰할 것을 예견한 사건이다. 

면려회에 대해 총독부가 매우 심기가 불편했을 것은 당연하다. 외국 유학파들이 상당히 참여하는 면려회, 특별히 농촌청년운동을 주도하는 면려회를 총독부는 면밀하게 살피며 탄압의 명분을 축적해 나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이것은 교회 탄압에 대한 명분 축적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진생은 1930년 10월 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간행되지 못했다. 폐간은 전혀 예기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지막 호인 1930년 10월 호 <진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디에도 폐간을 예고하는 문구는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마지막 호는 ‘본지는 선금이 아니면 발송치 안슴니다.’라고 밝히고 만약 주소가 변경되었을 경우는 전주소와 현주소를 명기해서 보내달라고 독자들에게 요청했다. 이 같은 광고는 <진생>을 계속 발행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실기 힘들다. 어느 곳에도 폐간이 예고된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폐간되었는지, 일제가 폐간의 명문으로 삼은 내용이 혹 <진생>에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총독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내용이 눈에 띤다. 그 중의 하나가 혁명을 선동하는 듯한 <진생> 표지와 주간 최석주의 ‘권두언’이다. 마지막 <진생> 6권 8호 “권두언” 제목이 “아 불만이다. 시대에 대한 불만이다. 어찌 이다지 불완전하고 부자유한 시대이냐?”로 시작된 “아! 不平”이었다. 

 

“아! 불만이다. 시대에 대한 불만이다. 어찌 이다지 불완전하고 부자유한 시대이냐? 우리는 부자유와 불신과 불철저와 무지와 불경건한 이 시대에 대하여 불만이다. 불평이다. 우리의 불평은 한 형제 한 자매의 잘못의 잘못이나 불철저의 끝이지 않고 이 시대 전체에 속속드리 배여 잇는 온갖 죄악에 대한 불평이다. 불만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의 불만은 전 세계를 둘러쌓고도 남을 만치 크고 넓엇다. 불완전한 인간의 발자국 난 곧마다 우리의 불만한 불으지즘은 울니어 들니지 안으면 안될 것이다. 아! 시대에 대한 불만이다. 이 죄악시대에 대한 불평이다. 

이에 우리 一만五천에 동지는 불완전한 시대를 새로 지어보리라고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아 죄악의 이 시대를 정복하여 새하눌과 새 땅을 지어보려고 뭉치이며 하나가 되려는 것이엇다.  이 시대를 새로짓기 위하여 단결하려는 것이엇다. 이일을 위하여 조선민족 중에 새단결이 생기고 아세아대륙에 새 모임이 생기고 세계 만국이 하나이 되려는 것이다. 이에서 우리의 불평은 한층 더 속 피어지고 한 층더 높아진다.

만천하 동지들아! 기억하라. 우리의 불평! 우리의 불만은 지금 우리의 속힘이 부족한 곧에 끝이려한다. 아! 불평이다. 세상이 악하고 시대가 죄중에 잇음을 보고 이것을 새로지어야 할 우리의 역량(역량)을 헤아려볼 때에 불만치안을 수 없는 것이다. 시대의 불신보다 우리의 불신 시대의 불철저보다 우리의 불철저 시대의 무지보다 우리의 무지는 우리의 불평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우리의 불평은 전세계 온 시대를 돌고지나 우리 자체에게 돌아온 것이다. 불평없이 살아잇느자 성자(성자)라할지나 불평없을 수 없는 범인동지들아! 그 불평에 철저하라. 아! 불평.”

 

지금 읽어도 최석주의 저항적 톤은 매우 강렬하다. “시대에 대한 불만이다. ... 시대에 대한 불만이다. 우리 一만五천에 동지는 ...이 시대를 정복하여 새하눌과 새 땅을 지어보려고 뭉치이며 하나가 되려는 것이엇다.  이 시대를 새로짓기 위하여 단결하려는 것이엇다.” ‘시대에 대한 불만’이 다 각도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권두언 외에도 일제의 의심을 살만한 내용이 최석주의 “세계대회와 오인의 사명,” 김화식(金化湜)의 “인격수양과 종교교육,” 한유진의 “천국관의 발달,” 김준성의 “唯物이냐? 唯心이냐!?” 최계철의 “맑스류에 대한 비판적 태도,” 이영섭의 “착취론,” 一기자의 “위인 깐듸‘의 생애와 그 사적”을 비롯하여 여러 기고자들에게서 발견된다. 

1930년 <진생>은 강제 폐간되었지만 조선연합회 임원진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정책 기조 역시 일관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일제가 면려회 활동을 예의주시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회를 찾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1935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기독교 민족운동이나 사회계몽운동의 지도자들을 탄압하거나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전형적인 사건이 1937년 6월에 발생한 동우회사건이다. 1937년 6월 12-13일 제 8회 전조선면려회 금주운동 개최 전에 각 회원들에게 보낼 전단에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할 기독인의 역할’이라는 문구가 담긴 전단이 발단이 되어 일제가 조선연합회 서기 이양섭을 구속시켜 ‘보안법 위반 피의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면려운동의 주요 지도부인 이대위, 정인과, 이용설 등이 흥사단 단원임과 동시에 동우회 간부임을 파악하고 이사장 주요한 등 동우회의 주요 간부를 검거”하였다. 일제는 기독청년면려회를 농촌운동을 위한 동우회의 하부조직으로 이해하고 이대위, 정인과를 구속하였다. 

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구속되면서 면려회는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물론 일제가 청년면려회를 동우회의 하부조직으로 이해하고 구속한 것은 일종의 명분이고 총회를 배경으로 한 청년면려운동이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대위와 정인과가 구속되면서 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는 1938년 5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체를 맞은 것이다. 우리는 조선연합회의 해체가 자의적인 결정이 아니었다고 판단할 역사적 증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을 대신할 인물들은 얼마든지 전국에 있었다. 또한 18년의 역사를 지닌 면려회는 이 두 사람이 구속되었다고 해체될 만큼 허약한 조직은 아니었다. 

총회종교교육부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던 1938년 9월 제 27회 총회에 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가 5월에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총회 안에 면려부는 존속시켰지만 면려회가 개교회 지회, 지방연합회, 전국적인 조선연합회로 구성된 상황에서 조선연합회의 해체는 면려운동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다. 이후 총회 산하 면려운동은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년도

개교회 면려회 수

전체 면려회원 수

1938 년

1,425 회

36,743 명

1939 년

1,379 회

30,697 명

1940 년

663 회

16,738 명

1941 년

645 회

13,811 명

                      조선연합회 해체 후 면려회 쇠퇴 현황

                                 (출처: 1938-1941년 총회록에서 면려회 통계 발췌)

 

위 통계가 보여주듯 면려회의 하락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연합회가 해체되던 1938년 1,425개였던 개교회 면려회수는 1939년 1,379개로 줄어들었고 전체 면려회원 수도 1938년 36,743명에서 1939년 30,697명으로 줄었다. 해체 2년 후인 1940년에는 면려회가 663개 회에 16,738명 회원으로 면려회 규모가 2년 전에 비해 50% 이하로 줄어 들었다. 해방 전 마지막 총회인 1941년에는 645개 회에 13,811명으로 더 줄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1938년 조선연합회가 해체된 후에도 여전히 총회 안에는 면려회가 마지막 총회까지 존속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놀랍다. 이들 모두가 평신도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으로 목회자와 장로가 배도의 길을 걸었지만 총대원들이 아닌 면려청년회는 그런 가운데서도 1941년 총회의 마지막 순간까지 총회 산하 교회에 남아 면려회의 신앙을 모질게 이어갔다. 해방을 맞을 때까지 교회의 일원인 면려회도 존립할 수 없는 영적 어두움의 시대를 지나야 했다.

 

맺는 말

1921년 조선기독청년면려회 창립부터 1945년까지 한국에서의 면려회의 창립 발전 해체까지를 집중적으로 고찰하였다. 김인서는 과연 한국의 면려회가 당시 청년들의 신앙을 굳게 세우고 그들의 심령에 민족적 사회적 책임의식을 불어넣어주는 일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필자가 1차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면려운동은 한국교회 특별히 장로교회 그 중에서도 청년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1921년 조선면려청년회 창립은 3.1독립운동 이후 당시 젊은이들 가운데 일고 있던 민족의식의 열기와 부흥에 대한 열기에 힘입어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할 수 있었다.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김익두 부흥이 일어나 젊은이들이 대거 주님께로 돌아왔다. 김익두 집회를 통해 주기철, 김재준, 박형룡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로 영입되었고, 삼일운동 당시 교회가 겨레와 함께하는 교회, 민족의 아픔에 뛰어드는 교회상을 통해 기독교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을 때 면려회가 창립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민족의식, 부흥, 사회계몽, 젊은이운동으로 특징되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면려회 창립과 저변확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돌이켜 볼 때 찰스 알렌 클락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서 면려청년회 조직은 당시 “활동시대”에 처한 젊은이들을 바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둘째, YMCA, YWCA, 감리교 엡웻청년회가 그렇듯이 면려회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단체가 아니라 1881년 뉴잉글런드 메인주에서 시작된 세계면려회운동의 일환이었고, 1921년 1월 23일 처음 창립된 것이지만 그 때 처음 국내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선천읍교회, 새문안교회면려청년회, 신문내교회면려청년회, 승동교회면려청년회, 사리원면려청년회, 북청기독면려청년회, 안국동예배당면려청년회, 함흥면려청년회 등이 조직되었다. 하나의 조직을 가지고 한국의 청년운동을 발전할 수 있도록 안대선 선교사가 면려회의 규칙과 틀을 만들고 노회와 총회 안에 하나의 청년회 조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장로교만 아니라 감리교 침례교를 비롯하여 각 교파의 청년회 조직이 미국 면려회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만국면려회는 한국 젊은이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셋째, 면려회가 전국적인 청년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의 각 지교회 당회, 노회와 총회의 지도와 재가 하에 진행하였고, 이미 기성의 청년회 조직을 면려회 조직으로 명칭을 통일시켜 나갔고, 무엇보다 안대선의 노력으로 교회를 위한 단체와 조직으로 굳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1921년 1월 23일 창설된 면려회가 그해 12월 25개회, 600명의 회원으로 발전했고, 다시 8년 후 1929년 800개 회 1만 명으로 급증하고, 다시 1932년 814개 회 1만 8천명으로 성장하고, 다시 2년 후 1934년에는 1,200개회 2만 8천명으로 급증할 수 있었던 것도 총회와 노회와 각 교회 당회를 중심으로 교회 안에 하나의 청년운동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넷째, 면려회는 처음부터 전세계 면려회의 일원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활동하고 교육을 시켰다. YMCA YWCA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면려회 역시 그런 세계적 배경 속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세계를 호흡하고, 농촌문제나 금주운동 등 사회계몽에 깊은 관심을 갖도록 도전을 주었다. 일제의 탄압과 자유가 억압된 상황에서 민주적 절차를 거치며 임원을 선출하고 지방연합회와 전국연합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서구 민주사회의 의식과 민주의식을 자연스럽게 호흡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국의 면려회원들은 안대선과 조선면려회 지도부의 리더십에 의한 사회계몽운동과 금주금연운동 그리고 사회문화운동의 적극적인 동참을 통해 사회적 책임과 민족의식에 많은 눈을 떴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섯째, 필자는 안대선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다. 안대선은 조직이나 대회 구성에 있어서 자신이 회장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부회장도 맡지 않았다. 그가 맡은 것은 대회와 전국연합회 부서 총무였다. 총무는 실무책임자이다. 그는 초지일관 총무로서 면려회 발전을 위해 일선에서 자료를 준비하고 면려회 정신을 고취하고 지도자를 양성하고 교회 발전을 위해 면려회가 변함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동력을 제공하였다. 안대선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변함없이 면려회를 섬겼다. 안대선의 헌신과 희생과 실천은 조선면려회의 역사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져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 안대선의 섬김의 리더십에 기초한 면려회의 아름다운 정신과 역사와 전통을 이 시대에도 살려간다면 면려회는 복잡하고 다원화된 오늘의 시대에도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제공할 것이라고 본다. 

여섯째, 면려회는 한국장로교의 청년운동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1929년 만국면려총회에 가입한 후 그 이듬해 조희염이 만국청년면려회 부회장에 피선되고 이대위가 이사에 선임된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이런 국내외 위상에 힘입어 면려회는 감리교의 엡웻청년회와 성결교의 신생청년회와 더불어 대표적인 청년운동으로 자리잡았다. 면려회는 총회와 노회 그리고 개교회 당회를 배경으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과거 청년회는 노회 총회 지방연합회로 연결되는 연결고리가 강하지 않았다. 그런 약점을 청년회가 면려회로 명칭 통일이 되면서 단숨에 극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청년면려회는 전국적인 네트워크이자 아시아 네트워크로 그리고 전세계 만국청년면려회 일원으로 세계와 호흡할 수 있었다.  

일곱째, 면려회는 1차적으로 신앙운동에서 출발했지만 사회계몽운동을 통해 금주운동, 한글운동을 통한 문맹퇴치, 청소년운동으로의 확산, 농촌운동 등을 통해 교회의 발전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한국사회와 민족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주지하듯이 한국에서 면려운동의 사회계몽운동은 철저하게 신앙의 바탕 위에 토대를 둔 것으로 “먼저 개인의 신앙확립과 수양을 통한 인격의 개조가 이루어지고 교회를 도와 부흥케하며 진정한 기독교회가 되게 하여 사회로 나아가 악과 싸워 기독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개인의 신앙에서 출발해 금연금주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개인구원이 사회적 책임과 분리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면려운동을 전개한 안대선, 윤산온, 총회교육부, 이대위, 정인과, 조희염을 비롯한 면려회 ‘운동을 주도한 지도부가 기독교계 내에서 근본주의적 성향을 지닌 보수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면려회 발전을 위해서는 역사적인 평가와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정확한 연구는 면려회의 성격과 특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고 또 미래적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창립일과 관련된 문제를 비롯한 그동안 잘못 알려진 부분에 대한 바른 교정이 필요하다. 안대선과 면려회는 1921년 2월 5일 안동교회 당회가 면려회를 인준한 것을 기점으로 창립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1881년 2월 2일 만국청년면려회 창립일을 기준으로 2월 첫 주로 지켜 행한 것이다. 2월 첫 주를 면려회 창립일로 지키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한국면려회 창립 100주년을 맞는 이 중요한 시점이 면려회의 향후 100년의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모멘텀이 되기를 소망한다.(*)

 

C.E. Convention. (1934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 사진으로 추정)(출처- 미국 PHS)
C.E. Convention. (1934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 1회 전국면려회 4년 대회' 사진으로 추정)(출처- 미국 PHS)

 

젊은 시절의 프란시스 E. 클락(출처- Brian C. Hull. A Brief Overview of the Christian Endeavor, (Amazon Digital Services LLC - Kdp Print Us, 2019), 1.)
젊은 시절의 프란시스 E. 클락(출처- Brian C. Hull. A Brief Overview of the Christian Endeavor, (Amazon Digital Services LLC - Kdp Print Us, 2019), 1.)
노년의 프란시스 E. 클락과 아내 해리엇(출처- Brian C. Hull. A Brief Overview of the Christian Endeavor, (Amazon Digital Services LLC - Kdp Print Us, 2019), 16.)
노년의 프란시스 E. 클락과 아내 해리엇(출처- Brian C. Hull. A Brief Overview of the Christian Endeavor, (Amazon Digital Services LLC - Kdp Print Us, 2019), 16.)
기독면려회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데 공헌한 아모스 R. 웰스 박사(출처- Brian C. Hull. A Brief Overview of the Christian Endeavor, (Amazon Digital Services LLC - Kdp Print Us, 2019), 22.)
기독면려회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데 공헌한 아모스 R. 웰스 박사(출처- Brian C. Hull. A Brief Overview of the Christian Endeavor, (Amazon Digital Services LLC - Kdp Print Us, 2019), 22.)

 

한국 면려회 운동의 선구자 Wallace J. Anderson 선교사와 Lillian Elizabeth Anderson 선교사 부부
한국 면려회 운동의 선구자 Wallace J. Anderson 선교사와 Lillian Elizabeth Anderson 선교사 부부

Find Grave “Wallce J. Anderson” 검색.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207413045/wallace-jay-anderson

 

1930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8회 기독청년면려회 세계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안대선 선교사(2번째 줄 좌측에서 4번째 안경 쓴 사람)와 조희염 목사(첫째줄 앉아있는 좌측에서 두 번째 사람)
1930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8회 기독청년면려회 세계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안대선 선교사(2번째 줄 좌측에서 4번째 안경 쓴 사람)와 조희염 목사(첫째줄 앉아있는 좌측에서 두 번째 사람)
면려회의 창시자 F. E. Clark 부인과 함께 한 안대선 선교사
면려회의 창시자 F. E. Clark 부인과 함께 한 안대선 선교사

『조선예수교장로회 오십주년 기념화보』, (경성: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1935), 190.

https://digital.history.pcusa.org/islandora/object/islandora%3A15352?solr_nav%5Bid%5D=13252c22e99cc2bf4aff&solr_nav%5Bpage%5D=0&solr_nav%5Boffset%5D=3#page/19/mode/1up

 

1930년 8월 5일부터 11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독청년면려회 세계대회 조선대표로 참석한 조희염 목사와 안대선 선교사(아래)의 소식을 다룬 조선일보 기사
1930년 8월 5일부터 11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독청년면려회 세계대회 조선대표로 참석한 조희염 목사와 안대선 선교사(아래)의 소식을 다룬 조선일보 기사

“세계기청대회에 조선대표도 출석,” <조선일보> 1930년 7월 3일자, 2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007030023920202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0-07-03&officeId=00023&pageNo=2&printNo=3410&publishType=00020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1.06.29 14:04
  • 수정 2021.08.0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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