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한국교회사학회 공동학술대회 기조강연

일 시: 2022년 3월 26일(토)
장 소: 한국성서대학교 일립관

주일학교운동과 조선주일학교연합회

 

                                                                                                                                                                                  박용규
                                                                                                                                              (총신신대원 역사신학 명예교수)

                                                  

서  론

1922년 결성된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선교가 시작된 이후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주일학교를 선교사역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중요한 책무로 생각했다. 그들은 주일학교를 중시하는 미국의 신앙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19세기 인디애나주 개척민들이 설립한 하노버대학 신학부로 출발한 맥코믹신학교는 교수와 학생이 하나 되어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로 매일 수업을 시작했으며 주일 오전에는 교수들이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주일 오후에는 학장이 예배를 인도할 정도로 학문과 경건을 조화시켰다. 신학교교육이 주일학교와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진행된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전통은 맥코믹신학교만의 전통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신학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선교사들은 그런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고 파송되었고 그런 방향에서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때문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일찍이 주일학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1886년 6월 제2회 미감리교선교회 보고서에서 감리사 아펜젤러는 지난 1년 동안의 감리교 선교사역을 보고하면서 세례교인 1명, 원입교인 100명, 주일학교 학생 12명, 매일학교 학생 30명과 병원 1개라고 밝혔다. 1883년 3월 11일 아펜젤러는 자신의 일기에 “어제는 14명이 참석”했고 “이제부터 영어로 말하는 주일학교를 내집에서 시작”했으며 시간은 30분으로 제한했다고 적었다. 스크랜톤 여사는 1888년 1월에 “이화학당에서 12명의 소녀와 3명의 부인, 3명의 선교사, 그리고 선교본부의 한명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곽안련에 따르면 1890년에 주일학교가 시작되었고, 1897년에는 평양에만 주일학교가 다섯 개가 되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주일학교를 처음부터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무로 받아들였다. 한국에 파송된 북장로교선교회와 남장로교선교회는 선교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부가 개설된 후에는 개척예배와 주일학교를 거의 동시에 가장 먼저 착수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남장로교선교회의 전주선교부 출범의 경우이다. 레이놀즈와 테이트 두 선교사는 1897년 3월 6일, 토요일 정식으로 전주 선교부 출범예배를 드리고 바로 그 다음날, 3월 7일 주일 8명이 참석한 가운데 주일예배를 드렸고 그 다음주 3월 14일에는 2명이 더 참석하여 10명이 두 번째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2주가 지난 1897년 3월 28일 주일날 4명의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주일학교를 착수했다. 초기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접한 이들은 백홍준과 이성하가 증거하듯 선교사들과 함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했다. 

주일학교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선교보고를 할 때도 ‘교회와 주일학교’ 현황을 동시에 보고하였다. 아펜젤러는 세상을 떠나기 전 1902년 5월 그의 마지막 보고서에도 자신이 47개의 교회와 주일학교를 맡고 있다고 기록했다. “우리는 현재 세 장로사와 세 지방회가 있고 입교인이 1,296명, 학습인이 4,559명이 있으며, 14명의 본처 전도사와 47개의 교회와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1907년 한국선교를 착수한 동양선교회 역시 처음부터 주일학교를 중시했다.

본고에서는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입국하고 나서 현재까지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조선주일학교연합회(1948년 3월 23일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개칭)를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가 연구를 통해서 판단할 때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은 한국교회사적으로 1884년부터 1905년까지, 1905년부터 1938년까지, 그리고 1945년부터 1960년까지, 그리고 1960년부터 현재까지로 크게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I.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주일학교

 

1890년 처음 네비우스의 방한을 통해서 기초가 놓인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주일학교와 깊이 맞물려 진행되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주일학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고, 주일학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가장 큰 실천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채택되던 1890년에 시작된 주일학교 사업은 곧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보완하는 질적 성장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아갔고, 그 수도 놀랍게 신장했다.” “1897년 평양에만 5개의 주일학교가 운영되었고, 교재를 인쇄하여 공동으로 사용했다.”

1934년 한국선교 희년 기념식에서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장 로버츠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훈련을 위해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교사훈련,” “성경통신과정,” “여름성경학교” 등을 실시하여 네비우스 원리를 주일학교와 교회 전체에 적용하도록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한국 주일학교연합회(The Korea Sunday School Association)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면서 한국교회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해 왔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시작된 성경중심의 주일학교는 장로교뿐만 아니라 감리교 안에도 견고하게 자리 잡아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복음에 기초한 교회로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주었다. 한국감리교선교회는 선교 초부터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감리교는 1893년 평양, 제물포, 서울 등 여러 교회의 주일학교를 망라해서 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하고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趙元時)가 위원장을 맡으면서 주일학교가 상당히 발전했다. 미 감리교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1893년에 5개의 주일학교가, 1895년에는 정동과 이화에 각 1개씩 2개, 상동교회 1개, 동대문교회 1개, 제물포교회 1개 합 6개로 발전했고, 1896년에는 7개, 1897년에는 15개, 그리고 1898년에는 무려 28개로 늘어났다. 학생 수도 1893년에 133명, 1895년에 385명, 1896년에 512명, 1897년에 967명, 그리고 1898년에는 1,402명으로 증가했다. 

1900년 주일학교를 처음 시작한 남감리교선교회도 설립 당시 서울과 송도에 각 1개씩 전체 2개로 시작한 것이 1903년에는 11개, 1905년에는 34개, 1918년에는 138개, 그리고 1930년에는 359개로 급신장했다. 학생 수도 1900년 80명에서 1903년에 440명, 1905년에 1,770명, 1918년에 5,911명, 그리고 1930년에 13,303명으로 급증했다. 

감리교 중 가장 주일학교가 잘된 곳은 평양 남산현교회였다. 1896년 남산현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노블 선교사 부부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등급별 유년주일학교를 교회 내에 운영하기 시작했다. 공과는 미국교회에서 사용한 만국통일공과를 번역 등사해서 사용하고 매주 금요일 저녁에 한국인 교사들을 모아 놓고 예습을 시켜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1903년 1백 75명이 모이는 주일학교가 얼마 후에는 평균 500명이 모이는 주일학교로 발전했다. 1911년 100명으로 처음 조직된 남산현교회 영아부도 이듬해엔 500명이 모이는 영아부로 성장했다. 1910년대에 이르러 남산현교회 주일학교는 영아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청년부, 장년부로 세분화되어 운영했다. 

감리교선교회가 이렇게 주일학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어느 교회나 주일학교를 잘 육성하면 “아이들이 심히 많아 한 학교”로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일학교는 곧 “장래 교회”라고 확신했다. 주일학교에서 훈련 받은 이들이 장차 중요한 교회 일꾼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감리교회는 이와 같은 안목을 갖고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1888년 주일학교가 조직된 후에는 바로 배재학당 안에 설치된 인쇄소를 통해 여러 종류의 주일학교 교재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평양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면서 이 지역 주일학교는 서울의 주일학교 교세를 넘어섰다. 1897년 연례 모임에서 그래함 리는 주일오후에 판동교회 (장대현교회 전신)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전에는 다섯 번의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매 주일 각 예배 처소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쥬일학당”의 경우도 평양이 압도적으로 많아 121개 중 평양은 89곳으로 31개인 서울에 비해 무려 세 배 이상이나 많았다. 주일학교 수만 뚜렷이 차이 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일학교에 재학하는 학생들의 수에서도 평양과 서울이 차이가 분명했다. 1901년을 기준으로 당시 북장로교의 전체 8,668명의 주일학생 중 서울이 1,450명이고, 부산이 52명인 반면 평양은 7,166명으로 주일학교 학생 수가 서울이나 기타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II. 평양대부흥운동과 주일학교운동

 

  한국에서 주일학교운동이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연합운동 성격으로 발전한 것은 한국교회가 놀라운 대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였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부흥운동이 한반도 전역으로 점차 확산되면서 주일학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05년 9월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함께 모여 한국복음주의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Protestant Missions in Korea)를 결성하고, 공의회 안에 주일학교위원회(a Sunday School Committee)를 두었다. 블레어(W. N. Blair), 크로스터(J. Y. Crosthers), 스윈하트(M. L. Swinhart), 푸트(L. H. Foote), 맥래(Duncan Murdoch McRae), 빌링스(B. W. Billings), 노블 부인(Mrs. W. A. Noble), 컬리어(C. T. Collyer) 등 여덟 명이 주일학교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위원회의 주된 노력은 주일학교 통일공과(uniform lessons)를 마련하는 일”이었고, 위원회는 주일학교 교재 출간과 기독교 교육을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主日學校工夫”이다. 주일학교위원회는 만국주일공과와 성경강론월보 등 성경교재를 출간했다.

 알렌 클락(Allen D. Clark)이 지적한 대로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1905년부터 1911년까지 주일학교가 급속히 성장했다.” 1907년 4월 전체 주일학교는 북장로교가 596개 49,545명, 북감리교 153개 12,333명, 남장로교 55개 1,784명, 남감리교 33개 1,770명, 캐나다장로교 58개 3,366명, 호주장로교 5개 204명으로 주일학교는 900개이고 전체 주일학생 수는 69,002명이었다. 이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에 힘입어 1907년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에 한국 주일학교 발전을 위해 사역할 사람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고, 1908년 세계주일학교연합회 한국지부(the Korean brach of the World’s Sunday School Association)가 결성되었다. 또한 전국 주일학교 공과를 통일하고,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공과를 출판할 기금 확보에 들어가는 한편 전국 주일학교 사업을 총괄할 총무를 세웠다. 1910년에 처음으로 세계통일공과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1911년에는 주일학교 사업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 산하에 13인으로 구성된 종교교육위원회를 설치했다. 노블 여사는 1911년 12월 코리아 미션 필드에  주일날 어린이 주일학교 순서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장로교는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한 후 독노회에 주일학당(주일학교)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위원회 산하에 주일학교 공과위원회, 주일학교 공과부, 주일학교부, 주일학교 진흥부를 병설하여 주일학교 교육을 교단적인 차원에서 추진했다. 

 

 

III. 한국주일학교의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 교류

 

1905년 복음주의연합공의회가 조직되고 주일학교 교재 통일공과가 보급되면서 주일학교 교육은 이전에 비해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주일학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윤치호가 1907년 5월 18일부터 23일까지 이탈리아 제 5회 로마 세계주일학교대회에 개인 자격으로 참석하여 연설하는 기회를 가졌고 또 실행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 주일학교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점차 높아지면서 1908년 4월에 문동환이 “세계주일학교연합회 특파원”이라고 부른 브라운(Frank L. Brown)과 해밀(H. M. Hamill)이 한국 주일학교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으로 내한했다. 2년 후 1910년 5월 19-24일 제 6차 세계주일학교대회가 미국 워싱톤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가 다시 실행부 위원에,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이 명예부회장에 피선되었고, 존스(George Heber Jones, 趙時元, 1867-1919)는 대회 연사(演士) 중 한 사람이었으며, 이승만도 이 때 참석했다. 

 

1. 한국주일학교협회 실행위원회 결성 

 

그러다 1911년 4월 세계주일학교협의회를 대표하여 특별위원(Special Commissioner) 브라운(F. L. Brown)이 다시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주일학교협회 실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 for The Korea Sunday School Association)를 조직하면서 한국의 주일학교는 세계주일학교협의회와의 협력과 지원 속에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주일학교협회 실행위원회는 1911년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에 의해 인준을 받았다. 이전에 선교사들로만 구성되었던 주일학교위원회에 한국인들이 위원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일학교위원회 위원으로는 남장로교 선교회의 스윈하트(M. L. Swinhart, 徐路得, 1874-1957), 북장로교 선교회의 블레어(W. N. Blair, 邦衛良), 북장로교의 크로터스(J. Y. Crothers, 權讚英),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의 푸트(L. H. Foote), 호주장로교 선교회의 맥래(Ducan M. McRae, 孟浩恩, 1868-1949), 남감리교 선교회의 콜리어(C. T. Collyer, 高永福), 북감리교 선교회의 빌링스(B. W. Billings, 邊永瑞, 1881-1969), 북감리교 선교회의 노블 여사(Mrs. W. A. Noble), 현순(玄楯), 윤치호, 한석원, 남궁혁, 홍병선 등이다. 위원회 회장은 스윈하트가 맡았고 총무는 홀드크로프트가 맡았으며 이 위원회는 1922년 11월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결성할 때까지는 한국복음주의선교공의회 관할 하에 이 사역을 추진했다. 1911년에는 남감리교 선교사 크램(W. A. Cram)이 세계주일학교협의회장 하인즈(H. T. Heinz)의 주일학교교사 양성공과를 번역 출간해 주일학교 교사 양성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주일학교위원회는 1911년에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의 2천 달러의 원조를 받아 세계주일학교 통일공과(International Graded lessons)를 번역 출판했다. 

1912년 2월 1일과 2일 서울에서 열린 실행위원회에서는 12명 중에서 11명이 참석했는데 한국인이 6명이고 선교사가 5명이었고, 1명은 아직 선출되지 않았다. 북감리교를 대표하여 최병헌과 노블이, 남감리교를 대표하여서는 신공석, C. H. Deal, 장로교를 대표하여서는 김규식, 김선두, 정덕생, 임종선, 남장로교선교회를 대표하여서는 스윈하트, 호주장로교선교회를 대표하여서는 맥래(J. F. L. MacRae), 캐나다장로교선교회를 대표하여서는 맥래(D. M. MacRae), 그리고 북장로교선교회를 대표하여서는 홀드크로프트가 참석했다. 스윈하트가 회장, 김규식이 부회장, 정덕생이 회의록 서기, C. H. Deal이 회계, 홀드크로프트가 총무를 맡았다. 초등공과는 한국 나이로 7-9살 연령, 유년공과는 10-13살 어린이들, 중등공과는 14-17살 중등학생을 위한 것으로 1913년 1월 1일까지 준비하기로 했다. 중등공과는 어른들을 위한 주일학교 공과로도 사용할 것을 권장하기로 했다. 

 

2. 1913년 최초의 주일학교대회 개최 

 

한국주일학교협회 실행위원회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 조정하여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브라운(F. L. Brown), 엑셀(E. O. Excell), 하인즈(H. J. Heinz)를 포함하여 약 20명 혹은 25명의 주일학교사역자들이 2013년 봄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이들은 넷 혹은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 부산, 대구, 목포, 군산, 공주, 송도, 평양, 선천, 서울 그리고 한 개 혹은 두 곳 다른 선교회를 방문하도록 할 계획도 세웠다. 1913년 4월 11일에서 24일까지 세계주일학교연합회의 실행부 회장인 하인즈를 비롯하여 17명이 스위스 취리히(Zurich)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참석한 것이 아니라 언더우드 부인이 표현한대로 “미국주일학교 대표단”(American Sunday School delegation)이었다. 이들 일행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부산-부산진, 목포-광주, 대구, 송도, 제물포, 평양, 공주, 군산, 청주, 재령, 해주, 선천을 순회했다. 이들은 4월 23일은 한국주일학교협회 실행위원회에 참석했고 24일 일본으로 출발했다. 하인즈 일행은 한국주일학교를 위해 기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그들이 한국에 체류하던 4월 19일에는 서울 경복궁에서 세계주일학교대회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에서 14,700명이 모여 처음으로 조선주일학교대회를 열었다. 언더우드 부인이 지적한 것처럼 “정부 요인들과 불신자들은 놀랐다. 그들은 도시 안과 주변에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1913년 4월 19일 교파를 초월하여 서울의 거의 모든 주일학교 학생 교사 14,700명이 참석했다는 사실은 당시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것은 한국주일학교를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사적으로 너무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모든 것보다 가장 큰 선물은 한일병탄으로 민족적 슬픔 가운데 있는 이민족 가운데 그것도 수도 서울에서 언더우드의 증언대로 교파를 초월한 일체감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대규모집회를 통해 성취되었거나 성취되지 못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든 다른 교회들의 일체감, 팀 단결심, 형제애,  최고의 “팀 단결의식,” 모든 나라와 인종과 계급과 시대를 넘어 하나의 거룩한 공회의 한 몸 정신을 증가시키는 데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목적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확실히 이런 종류의 회집은 성경 말씀의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리고 우리는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와 같이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그런 모임을 갖는 것은 너무 자주 갖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확실히 그분의 왕국은 저항할 수 없는 능력과 영광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우리는 열국의 움직임과 북, 남, 동, 서의 국가 지도자들의 정신에서 통치할 권리가 있는 그의 권능의 급속한 성장에서 새로운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런즉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1913년 7월 8일부터 15일까지 세계 각국에서 2,000명의 주일학교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취리히(Zurich)에서 열린 제 7회 세계주일학교대회에서는 감리교의 신흥우(申興雨)가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세계주일학교협의회의 실행부 위원에 피선되었다. 비록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한국주일학교가 세계주일학교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8년에는 서울에서 ‘연합주일학교’(Union Sunday School Institute)가 열렸고, 노블 여사가 훈련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일에 중요한 몫을 감당했으며, 모든 프로그램들이 탁월하게 진행되었다. 한국의 주일학교가 전문성을 지니며 짧은 동안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3. 삼일운동 이후 주일학교운동의 도약 

 

3․1운동은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아동들의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 후 한국교회는 “비로소 아동교육의 중대성과 사명감을 절실히 느껴서 기독교 교육에 힘을 기울인 결과 유년주일학교, 하기아동성경학교, 아동성경구락부 등 유년을 위한 종교교육이 크게 발전되었다.” 당시 성경구락부의 90%, 하기아동성경학교의 30%, 그리고 주일학교의 20%가 믿지 않는 아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 세 가지 기독교 사업은 불신자들과의 접촉점을 제공해 주는 좋은 통로였다. 그러나 이들 사업은 단순히 복음전파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린 심령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심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이상을 삶 속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주일학교 수가 급증했고, 주일학교는 곧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블레어 선교사의 노력에 힘입어 1920년 한 해에만 주일학교는 1만 개에서 1만 4천 개로 증가했다. 그 해 일본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는 한국의 주일학교 사업의 발전을 위해 향후 3년 동안 세계주일학교 지도자를 파견하여 해마다 6개월 동안 전국의 주일학교를 방문 지도하고 전국 각처에서 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을 기점으로 한국 주일학교는 세계주일학교협의회 임원까지 배출할 만큼 양과 질적인 면에서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1919년부터 홍병선 주간으로 主日學界 잡지가 야소교서회에서 4년간 출간되었고, 1921년에는 홍병선 목사의 兒童 心理學과 近代 主日學校 敎授法이 출판되었고, 이듬해에는 한석원의 主日學校 組織과 設備가 출판되었고, 같은 해 그가 번역한 아턴(W. A. Athearn)의 最近 主日學校論이 출간되었다. 이들 저서들은 전국주일학교운동의 이론적 근거와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IV.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결성과 활동

 

1922년 11월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결성을 전후하여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을 촉진시킨 3개의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장로교의 전진운동과 감리교의 세기운동이었고, 둘째는 1920년 동경에서 열린 제 8회 주일학교대회였으며, 셋째는 1921년에 있었던 전국주일학교대회이다. 

 

1. 장로교의 진흥운동

 

미국의 “새시대운동”(New Era Movement)과 유사한 1919년 9월 총회 때 교단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추진한 한국장로교의 ‘진흥운동’(Presbyterian Forward Movement in Korea)과 감리교의 ‘세기운동’(the Century Movement)은 삼일운동 이후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을 저변 확대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장로교 총회는 3개년 진흥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각 노회에서 3명씩 36명의 위원들을 진흥운동을 위해 임명했다. 1919년 조직을 하고 1920년 준비를 거쳐 1921년 3차 년도에 놀라운 결실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주일학교운동에만 초점을 둔 것은 아니지만 교회 주일예배와 주일학교 출석을 급속하게 증가시킨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삼일운동 이후 주일학교의 폭발적인 성장은 진흥운동과 세기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3․1운동 이후 진흥운동(the Forward movement)은 주일학교운동과 부흥운동과 깊이 연계되어 장로교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진흥운동은 1919년부터 1926년까지 그리고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두 기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진흥운동의 직접적인 가장 큰 결실은 교회 내의 젊은이를 위한 주일학교였다. 

John V. Lacy는 1921년 코리아미션필드에 “주일학교 해의 필요성”에서 “왜 주일학교 해가 한국의 교회의 안녕에 필수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주일학교의 필요성은 세상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고, 또한 “한국교회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더욱 깨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만약 전진운동이 실시되지 않는다면 반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20년 11월 블레어의 진흥운동의 보고에 의하면 9개 항목에서 25%에서 100% 증가했으며, 교회 출석은 25%, 기도회 참석은 50%, 주일학교 출석은 25%, 사경회 참석은 25%, 해외선교헌금은 100% 증가했다. 남장로교 스윈하트는 1년 후 “주일학교 활동”에서 8,487명의 세례 입교인을 가진 남장로교선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 등록자가 입교인의 3배가 넘는 27,168명이라고 보고했다. 

위 표가 증거하듯 1921년과 1922년에 주일학교가 급속하게 증가한 것을 보여준다. 남장로교선교회만 아니라 한국에 파송된 6개 선교회의 주일학교도 거의 유사한 증가 현상이 나타났다. 삼일운동 이후 주일학교가 놀랍게 발전한 사실은 방위량이 1922년 가을에 열린 총회에 한 “쥬일학교 사업을 대규모로 하게 하신 거슬 감사”한다는 주일학교보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922년 가을 장로교 총회는 전국교회를 함경남북도 북간도, 경상남북 경안, 전라남북, 경충 황해, 평양 평서 안주, 평북 서간도 등 6지방으로 나뉘고 그 지방 주일학교 부장들로 지방주일학교부를 조직하게 하였다. 1922년 12월 장로교진흥운동을 주도한 윌리엄 블레어(방위량)은 3개년의 한국장로교 전진운동의 결과를 코리아미션필드에 기고했다. 

1920년부터 3년 동안 진행된 전진운동은 1919년 한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특별히 이 기간 한국의 장로교 주일학교 학생 수와 교사 모두 상당한 증가를 이룩했다. 한국의 주일학교는 1919년 3․1운동 이후 놀랍게 성장해 1921년 당시 주일학교가 3,899개, 학생 223,732명이었다. 주일학교 교육을 통해서 백성들을 개혁하여 교회를 확장하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력한 희망이 주일학교운동가들 가운데 일어났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주일학교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기독교 가치관을 심어주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와 같은 주일학교의 놀라운 신장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혹은 퇴폐문화에 물들기 쉬운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이들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교회 내의 새로운 일감을 제공하여 교회에 새로운 갱생운동을 일으키는 동력을 제공했다. 그 시대 주일학교에서 훈련받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20년 후 한국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신자를 얻는 것이 힘들어지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주일학교만 잘되면 교회는 자연히 왕성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양주삼은 제 4회 전국주일학교대회에서 신자의 85%가 주일학교를 통해서 교회에 영입되었다고 말했다. 특별히 주일학교의 활성화는 복음전파와 오는 세대들에 대한 바른 교육을 위해서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대적 요청이었다. 

 

 

2. 제 8회 동경 세계주일학교대회와 제 1회 전국주일학교대회

 

1920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 8회 세계주일학교대회는 한국교회 주일학교운동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대회였다. 본래 이 대회는 1916년에 열리기로 예정되었으나 제 1차 대전으로 연기되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바로 그 이듬해 1920년 일본 동경에서 10월 5일부터 14일까지 10일 동안 열렸다. 제 8회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한 각국의 대표 300여명이 7회에 걸쳐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을 순회하고 지원하기 위해 “대거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서울과 평양을 비롯하여 개성과 대구 등 주일학교가 왕성한 지역을 순회 시찰하고 강연을 하면서 한국주일학교운동을 독려했다. 

주일학교가 한국에서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에 6개월 간 체류하며 주일학교 발전을 위해 노력한 주일학교 전문가 북장로교의 애멘트로우트(J. S. Aementrout), 남장로교의 톰슨(W. T. Thompson), 미국 감리교의 톰슨(J. V. Thompson)은 한국주일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 주일학교 전문가들은 전국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주일학교대회를 열고 주일학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톰슨은 전국 12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강습회를 개최했는데 이 기간 동안 1만 명의 불신 아동들이 주일학교에 새로 입학했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1921년 전국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1921년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전국에서 960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승동교회와 YMCA 대강당에서 제 1회 조선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 전역은 물론 서간도와 북간도에서도 참석했다. 제 1회 주일학교대회에는 세계주일학교협의회에서 파송한 세계주일학교 총무 톰슨(J. V. Thompson)도 참석했다. 남궁혁, 홍병선, 변성옥(邊成玉), 한석원, 래시(John V. Lacy, 禮是, 1896-1965), 홀드크로프트(James Gordon Holdcroft, 허대전), 클락(Charles A. Clark, 곽안련)이 국내 강사로 수고했으며, 대회장 남궁혁과 감리교 변성옥이 통역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일본의 세계주일학교 대표 콜맨(H. E. Coleman)이 강의와 저녁 집회에서 탁월한 역할을 감당했다. 대회는 낮에 세 개의 주요회합을 가졌는데 초등반 교사들로 구성된 첫 번째 회합은 수표교교회에서, 장년부 사역자들로 구성된 두 번째 회합은 승동교회에서, 영어로 진행된 세 번째 회합은 서울전도관에서 모였다. 여기서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3.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창립과 활동

 

1922년 11월 1일에는 10개 단체의 대표 27명이 성서공회 회의실에 모여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결성했다. 1911년부터 존속해온 주일학교위원회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창립에 중요한 산파역할을 했으며, 1920년 제 8회 세계주일학교대회와 1921년 제 1회 전국주일학교대회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결성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창립총회에 참석한 27명의 대표는 예수교장로회와 북감리회 각각 8명, 북장로교 선교회 2명, 미감리회 선교회 2명, 남감리회 선교회 2명, 남장로교선교회 1명, 캐나다 선교회 1명, 호주장로교 선교회 1명, 주일학교 연합회 1명, 조선예수교서회 1명 등 합 27명이었다. 회장에 오천경(장로교), 부회장에 홍병선(감리교), 서기 변성옥(감리교), 회계 래시 요한(감리교) 그리고 총무에 방위량(장로교)이 선출되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목적은 협력에 의해서 선교구역과 각 지방 지역 주일학교연합회들을 자문하고 협력하며 여러 교회에 그러한 모든 일에 대한 보고서를 제공하기 위해 가능한 최상의 주일학교 공과와 주일학교 관련 자료집들을 준비하는데 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효과적인 운영을 위하여 산하에 실행부위원회, 교육부위원회, 편집부위원회, 재정부위원회, 검열위원회, 통계위원회 등을 두었다. 최효섭의 말대로 1922년 창설부터 1938년까지를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황금시대”였다. 1926년 10월 21일 서울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관에서 24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 5회 조선주일학교대회에서는
감리교 변성옥이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총무는 허대전, 부총무는 정인과가 선임되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1930년 9월에는 “만국연합회”(세계주일학교협의회)에도 가입했다. 1928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거행된 세계주일학교대회에 김관식, 이성휘, 곽안련을 파송하여 조선주일학교연합회와 세계주일학교협의회와의 유대관계를 더욱 견고히 했다. 래시는 1929년 1월 다음과 같이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높이 평가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성장하는 기구였다. 직원들도 증가하고 있다. 예산도 증가하고 있다. 약 9천의 예산에서 올해는 1만 2천이 넘는 예산으로 증가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을 요청하고 있다.” 다음은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섬긴 임원들이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역은 방대하다. 필자가 판단할 때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해방 전에 한 가장 중요한 사역 3가지는 첫째, 주일학교교육 관련 문헌들을 출판한 일이고, 둘째, 세계주일학교대회에 대표들을 파송하여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 지속적으로 호흡을 같이한 일이며, 셋째, 한국에서 전국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한 일이다. 

 

4. 주일공과를 비롯한 주일학교 관련 문헌의 출간 

 

세가지 사역 중에서 가장 중점을 둔 사역은 주일학교교육 관련 문헌들을 출간하는 일이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만국통일공과를 도입하여 전국의 교회에 보급했다. “만국통일공과는 시대에 떨어지는 내용의 교재 같이 생각하기도 쉬우나 세계적으로 같은 주일에 같은 성경말씀을 공부하여 같은 제목으로 세계의 신도들이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이러한 신앙적인 세계적 연결이라는 의미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1927년부터 통일공과 외에도 구성서, 허봉락, 정태희, 홍병선, 스톡스 등이 집필한 부별계단공과도 출판하기 시작했다.  1926년 10월 곽안련 선교사의 주일학교조직을 비롯한 수많은 주일학교 관련 저술들이 출판되어 한국주일학교는 1920년대 말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했다. 주일학교연합회에서 출간한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위 서적들이 보여주듯 당시 한국의 주일학교 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다양한 교재 출간을 통해 양질의 주일학교 교육을 실시했다.

1933년까지 한국주일학교 공과는 미국에서 사용한 만국통일공과 전년도 판을 토대로 그 이듬해에 번역판 만국통일공과를 만들어 사용했으나 1934년부터는 1년 전에 성경본문과 요절을 가져와 공과를 만들어 “새로 제정한 만국통일공과”를 사용했다. 그 결과 각국이 동일한 성경구절에 기초한 공과를 공부하게 되었다. 1934년부터 사용된 만국통일공과는 6년 순회 주기를 가졌던 이전 통일공과와 달리 5년 주기를 가졌다. 

1934년 새로 재편된 만국통일공과는 4복음서에 주력하여 요한복음만 3주를 공부하고, 이전에는 바울만 공부하였으나 베드로와 바울의 생활과 편지를 3주 동안 공부하도록 구성되었다. 통일공과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는 (1) 경건한 예수교인의 생활공부 (2) 예수교의 중요교리 (3) 사회문제에 대한 성경교훈, 성경의 중요 인물공부 (4) 창세기공부와 모세시대공부이다. 5년 순환의 통일공과는 “만국종교교육협회 즉 미국과 캐나다주일학교협회 교육위원부에서 한 것”으로 이 세계에서 “거진 다” 사용하고 있다. 

.통일공과 외에도 주일학교 관련 많은 서적들과 잡지들이 출판 보급되었다. 곽안련의 주일학교조직(1926)과 예수교종교교육심리학(1933),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성경문답교안, 동화연구법을 간행했다. 1923년부터 주일학교통신, 1925년 봄에 창간된 계간지 주일학교잡지, 1926년 3월 1일 창간한 어린이 전문 잡지 아희생활, 1929년 1월 창간한 주간지 주일학교신보, 1930년 1월 창간한 종교교육, 1931년 4월 창간한 교육국통신, 1933년 7월 창간한  S.S.연합회보를 발간, 주일학교 문서선교도 병행했다. 한석원, 전영택, 최봉칙, 이윤재(李允宰) 등을 주간으로 1925년 3월 1일에 주일학교연합회에서 간행하기 시작한 아희생활은 한석원, 전영택, 최봉칙, 이윤재 등이 주간으로 편집 책임을 맡아 발행했으며 발행부수가 무려 4,000부에 달해 1938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기까지 한국주일학교운동의 중요한 보급창구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아희생활은 단순한 신앙교육의 차원을 넘어 “朝鮮史 槪觀,” “世界의 有名한 사람들”과 같은 글을 통해 소년소녀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과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무엇보다 이들 잡지들은 주일학교 교육, 운영, 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제공해 건강한 주일학교 운영을 도왔다. 

 

5. 세계주일학교대회 참석

 

세계주일학교연합회에 회원으로 가입한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1938년 강제 해체되기까지 4년마다 열리는 세계주일학교대회에 대표를 파송했다. 1924년 영국 글라스고에서 열린 대회에 남궁혁과 정인과, 1928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는 김관식, 김준옥, 한석원, 변성옥, 1932년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에서 열린 대회에는 정인과, 그리고 1936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대회에는 유형기를 파송했다. 정인과는 1932년 7월 25일부터 8월 1일까지 남아메리카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도’에서 열리는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대표로 파송을 받아 대회에 참석하고 미국을 경위하여 9월 중순에 귀국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비교적 소상하게 보도했다. 조선감리교회 총리원 교육국 총무 유형기 목사는 1936년 5월 1일부터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열리는 미 감리교 4년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후 같은 해 7월 6일부터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조선교회 사정을 널리 알렸다.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대표로 파송받은 이들은 당시 한국교회 안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었고, 실제로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특별히 1928년 미국에서 열린 제 10회 세계주일학교대회 대표 파송의 경우 “도미하는 주일학교대표, 24명 금일 출발, 미국가는 주일학교대표 일동 금 십오일 오전에 경성역 출발”이라는 제목 하에 《동아일보》가 무게 있게 보도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졌다. 

 

사년 만에 한번식 세계뎍으로 열리는 뎨십회 세계주일학교대회(第十回世界主日學校大會)는 오는 칠월십일일부터 십팔일까지 팔일동안 미국가주 ‘노샌젤스’시에서 열릴 터임으로 조선에서 파견될 대표 이십사명은 십오일 오전열시 남행렬차로 경성역을 떠나 오는 이십일일 일본 횡빈(橫濱)을 출발하는 텬양환(天洋丸)으로 발정할 예뎡이라는데 동대회의 대표들은 다음과 갓다더라. 대표명단 허대전(조선주일학교연합회대표), 김O식, 장로회총회대표, 변성옥(미감리교대표), 김준옥(남감리교대표), 김내석, 이병선, 장태환, 이원하, 홍승한, 김O수, 김선양, 허근, 위명호, 김규행, 金呂七, 김강(?), 김재성, 박병곤, 신순석, 갈홍기, 임봉춘, 이재백, 한석원, 허마리아.

 

선교사들과 한국인들로 구성된 이들 24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192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서는 김관식이 명예부회장에 피선되었고, 김준옥은 실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대회 장소에는 전세계 참가국 각 나라 국기와 함께 우리나라 태극기도 함께 달렸다. 이것은 LA에 거주하는 한인 그리스도인들이 대회위원들에게 부탁해서 된 일로 일인대표들이 항의했지만 미국교회 준비위원들은 대회가 마칠 때까지 태극기를 그대로 걸어두었다.《동아일보》는 1928년 8월 29일 “주교회 부의장 김관식씨 귀환 함흥서 환영회”라는 제목으로 세계주일학교 대표 명예부회장으로 피선된 사실을 알렸다.

 

6. 전국주일학교대회

 

1921년부터 4년마다 개최한 전국주일학교 대회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중요한 사역이었다. 1921년 제 1회에 이어 1925년 10월 21일부터 28일까지 제 2회 전국주일학교대회가 1947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구세주, 교사, 그리고 리더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라는 주제로 승동교회, 피어선성경학교, YMCA에서 열렸다.  1924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F. M. Eversole을 위원장으로 한 프로그램 강화 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준비 속에 진행된 제 2회 전국주일학교대회에는 전국 전역에서 대표들이 참석했고, 심지어 만주에서도 왔다. 10월 21일 저녁 7시 30분 승동교회에서 저녁집회와 함께 시작된 대회는 오전, 오후, 저녁 세 번 모였다. 오전과 오후는 피어선성경학교나 승동교회에서 모였고 저녁집회는 승동교회에서 모였다. 오전대회는 영아부, 유치부, 초등부, 유년부, 중등부, 고등부, 청년부, 장년부, 목사와 조사를 위한 특별반 등 9개 모임이 있었으며, 첫 다섯 모임은 승동교회에서 가졌고 나머지는 피어선성경학교에서 열렸다. 매일 예배가 승동교회와 피어선성경학교 두 곳에서 열렸다. 저녁 프로그램은 다양하고 흥미진진했다. 저녁집회에 남궁혁이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글라스고를 다녀온 설명을 했고, 일본과 중국 담당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총무 콜만(Horace E. Coleman)과 턱스베리(Elwood G. Tewksbury), 남장로교교육위원회 Henry Sweets가 말씀을 전했다. 대회 기간 동안 Crane 여사, 레이놀즈 여사, 캠벨(Edwin L. Campbell)의 지도하에 준비한 종교교육전시회가 YMCA 채플에서 열렸다. 

홀드크로프트는 이 대회가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영감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제 2회 전국주일학교대회의 특별 강사는 콜만과 턱스베리 외에도 윌리엄 클락(William M. Clark, 康雲林, 1881-1940), 하디, 스톡스, 왓슨, 클라크, 홀드크로프트가 맡았고, 한국인 강사는 길선주, 한석원, 남궁혁, 이철호, 이순기, 홍병선, 변성옥, 김준옥 등이었다. 이중 이순기와 홍병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었다.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총무 W. G. Lands는 “대회의 끝이 노력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하십시오”라는 인사의 편지를 제 2회 전국주일학교대회에 보냈다. 

이런 노력 속에 1920년대 한국의 주일학교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1928년 11월 당시 한국에는 5,252개 주일학교에 255,309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26,106명의 교사들이 매주일 주일학교에서 이들을 가르쳤다. 래시는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의 발전과 성숙을 위해서는 훌륭한 교사 양성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이고 이어 중요한 것은 주일공과로 “높은 질”과 “높은 표준”으로 제작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제 3회 주일학교대회는 1929년 10월 9일부터 16일까지 평양 남산현교회, 서문밖교회, 숭전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서울에서 두 차례 대회가 열렸기 때문에 이제는 평양에서 전국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연초부터 제기되어 자연스럽게 평양대회가 성사되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관계자들은 제 3회 전국주일학교대회에는 세계주일학교연합회 대표 로버트 홉킨스(Robert M. Hopkins)가 참석할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4년 전 1925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주일학교대회에 1,925명이 참석한 것보다 약 200명이 더 증가한 2,210명이 등록했고 등록하지 않고 약 1,000명이 더 참석해 전체 3천명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것은 동양에서 열린 가장 큰 규모의 대회였다. 평양의 한 학교의 운동에서 주일 오후 모인 집회에는 약 1만명이 참석했고 기를 들고 시내 거리를 행진했다. 시내 어떤 사업가가 재정을 지원하여 대회 기간에 일간 신문이 무료로 배포되었다. 약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뮤지컬도 공연되었고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들려 주일학교 사역을 위한 출판물 전시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온 대표자들이 전시회를 둘러보았고 대영성서공회에서도 다양한 제본의 성경을 전시했다. 제 3회 대회의 최고의 격려와 선물은 세계주일학교대회 총무 로버트 홉킨스가 참석한 것이다. 오랫동안 고대했던 것이 현실로 실현된 것이다. 세계주일학교협의회를 대표한 그의 한국방문과 격려는 대회 성공을 가져다 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3회 대회 강사진은 어느 해보다 화려했고 수준 높은 강의가 진행되었다. 다음 표가 보여주듯 제 3회 주일학교대회 강사진의 출신 학력만 봐도 매우 수준 높은 대회가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전국주일학교대회는 전국의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다양한 과목들을 배울 수 있는 교육적 재충전의 기회였다. 초등, 중등, 청년, 장년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였고 주제도 매우 다양했다. 제 4회 전국주일학교대회는 1933년 대구에서 열렸다. 

1933년 4회 전국주일학교대회는 참석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와 분과별 강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제 4회 대회의 경우 대회장 조희염이 “우리는 누구의 마음을 배울까”라는 제목으로 대회설교를 했고, 총무 정인과 목사가 “예수를 배우자”라는 제목으로 개회강연을 했다. 그 외에 조선감리회총리사 양주삼이 “기독교회의 교양문제,” 장로회총회장 장홍범 목사가 “종교교육의 현재와 장래,” 평양신학교 교수 곽안련 선교사가 “교회와 선교운동,” 조선절제운동회 총무 송상석 목사가 “기독교와 절제운동,” 조선주일학교여자절제회 총무 이효덕 여사가 “주일학교와 절제운동” 전주읍교회 배은회 목사가 “종교교육과 천국운동” 미국 뚝대회종교과장 라셀 박사가 특별강연, 그리고 경기중앙기독청년회 간사 홍병옥 목사가 “종교교육과 농촌교회”를 강의했다. 전국적인 영향력 있는 강사들이 전체 강의를 맡았고, 외국 강사를 초빙하였으며, 주일학교운동만 아니라 당시 중요한 절제운동이나 선교운동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다는 사실이다. 1933년 제 4회 대회에서 다루어진 분과강연과 토의 주제는 매우 체계적이고 구체적이고 다양하였다. 유년부, 청년부, 장년부, 하기주간부로 나누어 강연이 진행되었다. 

전국주일학교대회 외에도 1925년 7월 25일부터 8월 7일까지 14일간 금강산 온정리 수양관에서 남감리교 주일학교부의 주일학교 교사수양회가 개최되었고, 당시로서는 지명도 있는 강사들이 강의를 맡았다. 2년 후 1927년 7월 22일부터 8월 1일까지 11일간 제 3회 교사 수양회가 금강산 온정리에서 개최되었고, 1929년 2월부터 교육월간지도 발간했다. 윤치호는 일찍이 자신의 미션스쿨에서 깊은 신앙적 인격적 감화를 받은 경험이 있어 미션스쿨과 주일학교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남감리교 선교사 크램(W. G. Cram), 홍병선, 한석원, 김형식, 김준옥 등 남감리회 교사들이 당시 감리교주일학교 운동에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주일학교는 해마다 급성장해 1930년에는 전국에 5천 개의 주일학교가 있었고, 학생 수도 25만 명이었다. 학생, 교사, 지도자의 6분의 5가 장로교였고, 그 중 반 이상이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이었다. 이 시대 주일학교를 조금 더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1930년 한국장로교회 주일학교 수는 4,360개였고 감리교는 609개였다. 1934년에는 장로교 주일학교가 3,198명으로 상당히 줄었고 감리교 역시 561개로 약간 줄었다. 주일학교 교사 수는 장로교의 경우 1930년 20,613명에서 1934년 26,810명으로 증가했고, 감리교 주일학교 교사도 1930년 3,664명에서 1934년 3,800명으로 약간 증가했다. 반면 학생 수는 장로교가 1930년 232,185명에서 1934년 293,810명으로 증가했고, 감리교도 16,644명에서 1934년 50,046명으로 거의 3배가 증가했다. 교사 수는 1930년 20,613명이었던 장로교주일학교 교사 수는 1934년에는 26,810명으로 증가했고 감리교 역시 1930년 3,664명에서 3,800명으로 증가했다. 

 

 

  7. 하기아동성경학교

 

아동하기성경학교가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22년이다. 구성서는 1932년 5월 18일자《기독신보》“하기아동성경학교 조선의 유래”에서 마포삼열 목사 부인이 처음 하기아동성경학교를 실시했다고 말한다. 반면 해리 로즈에 따르면 하기아동성경학교의 효시는 1922년 서울정동교회에서 다섯 명의 교사와 100명의 학생들로 시작한 하기아동성경학교였다. 그러다 1924년 10월 서울에서 조선주일학교연합회 모임을 가진 후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실행위원회는 하기아동성경학교운동(The Korea Daily Vacation Bible School Movement)을 정식으로 조직하고 하기아동성경학교 사역을 주일학교연합회 한 부서의 사역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1925년에 사용할 교재를 준비하고 이 사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를 전담할 한국인 간사를 구하기로 했다. 1924년에 94개 하기아동성경학교가 열렸고 11,000명이 등록해 이미 상당한 요구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1924년 3월 31일 주일학교연합회 안에 하기아동성경학교 위원회를 조직하고 도마련, 홍병선, 김창준, 구자옥, 김기연, 윤치호, 래시 요한, 이석낙 등으로 하기아동성경학교 실행위원회도 결성하였으며, 세계하기아동성경학교 창설자이자 총무인 보빌(R. C. Boville) 박사를 초청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했다. 당시 하기아동성경학교의 교과과정에는 성경뿐 아니라 체육, 음악, 세계위인전, 수공, 사회봉사 등이 포함되어 있어 하기아동성경학교가 단순히 직접선교만이 아니라 복음의 접촉점과 더불어 교회와 신앙을 세상과 사회에 연결하려는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해 감리교 연회와 장로교 총회는 하기아동성경학교를 전국 교회가 실시할 것을 결의하고 김기연 목사, 이보식 장로를 영입해 교단적인 차원에서 이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 후 1926년 감리교 한석원 목사가 전담간사로, 1928년에 감리교 김형식 목사가 총무로 영입되면서 하기아동성경학교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24년 학교 96개, 교사 790명, 학생 11,000명이던 것이 1929년에는 학교 459개, 교사 3,130명, 학생 38,763명으로 거의 4배나 성장했다. 그 후에도 발전을 거듭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4년 동안 하기아동성경학교는 꾸준하게 성장을 지속했다. 1930년 장로교의 경우 397개였던 하기아동성경학교가 1934년에는 1,021개로 증가했고, 학생 수도 1930년 26,096명에서 1934년 112,875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으며, 교사 수는 1930년 2,145명에서 1934년 7,837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감리교의 경우 1930년 하기아동성경학교가 128개에서 1934년 151개로 증가했고, 학생 수도 10,143명에서 16,051명으로 증가했고, 교사도 1930년 2,145명에서 1934년 1,039명으로 증가했다. 

 1922년 11월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결성되고 주일학교와 하기아동성경학교가 꾸준하게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주일학교는 변화하는 사회 속의 어린 생명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하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 있는 이들에게 기독교 정신과 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918년부터는 주일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위해 잡지와 참고서가 출판되어 보급되었고, 1925년부터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간행한 主日學校雜誌는 단순히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활동을 담은 뉴스레터 차원을 넘어 한국의 주일학교 교육을 한 차원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일학교연합운동은 1928년에 전환점을 맞았다. 이것은 감리교의 신학적 변천과 맞물려서 진행되었다. 그 해 감리교는 레이시(John Lacy) 선교사와 변성옥의 지도하에 “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전신인 “감리회종교교육협회”를 별도로 조직 장로교와는 별개로 주일학교운동을 교단 차원에서 추진했다. 이렇게 되자 1933년 장로교도 독자적인 종교교육부를 조직해  전국주일학교운동을 계속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출판하던 주일학교 공과도 1937년도부터 예수교서회와 예수교장로회 종교교육부로 나뉘어 출판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이유의 하나로서는 당시 감리회 신학교 교수 정경옥 목사가 쓴 공과에 장로회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해석이 있다고 해서 문제가 생겨 이에 대한 해명서를 정경옥 교수가 발표하는 등 말썽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주일학교 공과는 [감리교와 장로교] 둘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필자의 선행연구와 여러 자료들을 종합할 때 1930년대 접어들어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차이가 표면화되면서 더 이상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사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써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추진해 오던 주일학교운동의 협력 시대는 종식을 고했다.

 

 

V.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강제해산

 

이런 장로교와 감리교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한국교회 주일학교는 꾸준하게 성장했다.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서도 한국에서 주일학교 사역이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이 기간에 주일학교 공과책의 판매 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1938년 4월 “한국주일학교연합회 노트”라는 간단한 메모 형식의 글을 통해서 C. A. Sauer는 다음 세계주일학교대회가 1940년 7월 22-28일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후 1935년에 63,000권이 판매되었고 1936년에는 68,000권이 그리고 1937년에는 72,000권이 인쇄되었으며, 1938년에는 75,000권 혹은 그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1930년대 후반에 접어 들어서도 한국의 주일학교사역은 지속적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1938년에 접어들어 나타났다.

1938년 6월 21일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일본 군국주의 압력으로” 세계연합회에서 탈퇴하고 일본연합회에 강제 가입한 것이다. 6월 16일자《동아일보》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오는 6월 21일 총회를 열고 세계주일학교협의회를 탈퇴하고 일본주일학교연합회에 가입할 것이라는 소식을 매우 무게 있게 보도했다. 이미 엡윗청년회와 조선면려청년회가 1938년 일제의 압력으로 해체되었고,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YMCA)도 일본기독교청년 연합회에 귀속되어 해체된데 이어 조선주일학교연합회도 일본주일학교연합회에 강제 가입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일제가 국내연합기구를 해산시키거나 일본연합회에 강제 가입시킨 것은 쉽게 정부통제 산하기관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6월 16일자《동아일보》는 “朝鮮主日學校聯合會 世界聯合會에서 離脫”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무게 있게 보도했다. 

 

조선내의 기독교(基督敎) 방게 단체는 전번 면려청년회연합회(勉勵靑年會聯合會)의 해소, 조선기독청년회연합회(朝鮮基督敎靑年會聯合會)의 일본기독청년연맹에의 귀속등으로 오랫동안 자주적(自主的) 입장에서 활동하는 기독교방게단체는 전면적으로 통제의 권내에 들고 잇으므로 이것은 비단 청년층집단에만 그치지안코 기독교적 어린이교화운동의 최고집단인 조선주일학교연합회(朝鮮主日學校聯合會)도 통제의 권내에 들게 되엇다. 부내종로(宗老) 二정목 구십일(九十一)번지에 사무소를 둔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十四일 오전十시경에 긴급히 위원회(委員會)를 열고 신중히 협의를 한 결과 미국에 잇는 세게주일학교연합회(世界主日學校聯合會)에서 이탈(離脫)하야 일본연합회에 가맹하기로 대체의 원안(原案)을 결정 오는 二十 一일 총회(總會)를 소집하고 이를 정식으로 결정하기로 결의하엿다한다. 동안(同案)이 오는 二十 一일에 열릴총회에서 정식결정을 보면 미국(米國)소재의 세게 주일학교연합회를 비롯하야 조선장노회총회(朝鮮長老會總會) 급조선감리교연회(朝鮮監理敎年會)에 이를 통접 정식 수속을 마칠터인바 조선주일하교 연합회에 속한유년주일학교 아동은 약五十萬명에 달하고 장로교(長老敎) 급감리교(監理敎)양파 연합의 어린이 교화단체이라 한다.

 

예정에 따라 1938년 6월 21일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오전 10시부터 종로 조선야소교서회 2층에서 이동욱의 사회로 임시 총회를 긴급히 개최하였다. 경과보고 등을 가진 후 조선주일학교 연합회는 “현하 국가총동원이라는 시국에 순응하기 위하야” 미국세계주일학교 연합회에서 탈퇴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 뜻을 미국연합회 본부와 조선장노회 총회와 조선감리회에 통지”하기로 결정하였다. 1938년 6월 22일자 석간《조선일보》는 “朝鮮主一學校聯合會 對外的連帶를 斷絶”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朝鮮主一學校聯合會)는 이십일일 오전십시 시내종로 이정목 예수교서회(耶蘇敎書會) 안에서 임시총회를 소집하고 세게주일학교연합회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하엿다. 이연합회는 지금부터 십칠년전에 조직되어 조선안에 잇는 장 감양파(長,監兩派) 각교회안의 장년(壯年)유년(幼年)주일학교의 총본영으로써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잇는 세게주일학교연합회에 가맹, 사년에 한번씩 세게연합주일학교대회에 대표를 파송하며 또 조선안에서도 사년에 한번씩 대회를 열어 박그로는 세게적으로 유기적 관계를 맷고 안으로는 조선안 각주일학교의 지도연락에 당하던것이엇다. 이제 시국이 이러틋 중대하여지자 여기순응하야 부즈럽시 외국기관에 매여잇슬 필요를 인정치 아니하고 탈퇴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야 아프로는 상무(常務)를 페지하고 이뜻을 미국장, 감양파의 상회(上會)에 통달, 이로써 이연합회는 해소상태(解消狀態)에 드러가고 잔무정리(殘務整理)는 역원회에일임하엿다 이날 출석햇던 대표와 결의문은 다음과 갓다.

現下國家總動員의 時局에 順應하기 위하야 本聯合會는 在米國世界主日學校聯合會에서 탈퇴(脫退)하야 本會常務를 中止하고 此旨를 米國聯合會本部와 長老敎會上會及監理敎會上會에 通達하기로함.

 

이날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해체하는 안건을 결의하는 총회에 북장로교선교회 소속 서울의 안대선과 평양의 방위량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대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밝힌 대로 1938년 6월 21일 이후  전국적인 영향력 있는 조직인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세계주일학교운동에 간여하든 관계는 금후 중지하게 되엇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일본주일학교연합회에 가입시킨 것은 곧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해소’ 곧 연합회의 해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1938년 제 27차 장로교총회 때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 대한 종교교육부의 보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주일학교연합회는 지난 6월 21일에 임시총회로 모여서 시국정세에 감하여 해소결의를 하온바 잔무는 위원에게 맡겨셔 처리하게 한바 그 내용은 

1. 기구 집물과 재정 약간은 장감 각 종교교육부에 반분 사용하게 하였사오며 

2. 연합회로서 출간하던 서적은 양교파의 각기 소용대로 판권을 차지하였사오며

3. 주일학교 세계협회에서 기부한 약 1만원의 기본금은 경성종로 예수교서회 四제 一우를

사무실로 차용 이면계약 조건에 의하여 해 서회에 맡겼다가 연합으로 종교교육 사업을 하게될

때에 사용하게 될 때에 사용하기로 하였나이다.

 

해산된 사유가 “시국정세에 감하여”였다. 이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자신해서 해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해체 이후 주일학교운동은 면려청년회나 조선기독교청년회처럼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일제의 압박으로” 조선주일학교 연합회가 해산됨으로 말미암아 각 지방의 주일학교연합회도 존속이 위협받기 시작해 주일학교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다. 

 

 

VI. 해방 후 “한국기독교교육협회”와 한국기독교교육운동

 

긴 터널이 지나고 해방과 더불어 주일학교운동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1947년 1월 14일 오전 11시 새문안교회에서 김관식 목사의 사회로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재건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장로교 대표 15명 감리교 대표 10명, 성결교 대표 5명, 북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선교회, 캐나다선교회, 호주선교회 각 1인과 감리교선교회 2명으로 조직되었다. 이렇게 대표수가 교단별로 달리한 것은 교세에 따라 대표수를 달리하자는 의견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양교단이 주일학교연합회를 구성했으나 이번에는 성결교가 합류하여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함께하는 연합회로 재편된 것이다. 

1947년 1월 14일 31명의 회원 중에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의장 김관식 목사 사회로 열린 해방 후 첫 총회에서는 1938년 해체되었던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다시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한경직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1947년 2월 25일 세계주일학교연합회에서 사진판으로 인쇄하여 보내준 주일 공과책 6만권이 도착했다. 전국주일학교연합회를 이 공과책을 종로 성서공회,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통해 보급하였고, 그해 8월 15일부터 한 주간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황재경 목사를 대표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11월 1948년도 주일통일공과 원고가 완성되었다. 김유연, 이규용, 박연서가 장년부 공과집필을, 박창해, 임영빈이 유년부 주일공과를 집필했다. 1947년에 전국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하려고 했으나 재정과 기타사정으로 무기 연기하고 말았다. 1948년에 사용될 주일공과를 장년부 2만부, 유년부 8천부를 출판했고 판매는 기독교서회에 위탁했다.  

해방 후 두 번째로 열리는 제 2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총회가 1948년 3월 23일 서울 덕수교회 예배당에서 제 2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총회가 개최되었고, 회장에 김춘배가 선출되었다. 총회를 앞두고 3월 15일 세계기독교교육협회 총무 냅 박사가 한국을 방문하고 그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개최되었다. 제 2회 총회에서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명칭을 바꾸었고, 세계기독교교육협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명칭을 바꾼 이유는 1947년 영국 버밍험에서 개최된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총회에서
세계주일학교협의회(The World Sunday School Association)를 세계기독교교육협회(The World Council of Christian Education)로 명칭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해방 후, 특별히 1950년대에 접어들어 한 일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KNCC에 가입한 일이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KCCE)는 1952년 1월 부산중앙교회에서
열린 제 4회 총회 때 NCC에 가입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NCC가입은 향후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NCC와 상호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만의 독자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세계주일학교연합회가 세계기독교교육협의회(WCCE)로 명칭이 바뀐 뒤 WCCE가 WCC와 긴밀한 유대를 가졌고, 결국 둘이 하나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둘째, 과거 주일학교에만  집중했던 것에서 기독교학교(중고등학교 및 대학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일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기독교학교에서 성경 컬리큘럼을 만들어 중 1부터 고 3까지 성경교과서를 만들었다. 1956년 11월 16일 교목회의를 연희대학교에서 개최하고 1957년 1월 29일에는 시내 기독교학교 교장회의를 개최하여 입학시험 일자가 주일이 끼지 않게 협의하기도 하였다.

  셋째, 발전된 형태의 계단공과를 편찬한 일이다. 이 일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54부터 1955년이다. 1954년 일본주재 캐나다선교회 노안리와 1955년 미국 기독교의 기독교교육전문가 하비(G. B. Harvey)의 내한과 협력에 힘입어 <부별계단공과>(Group Graded Lesson)를 만들었다. <부별계단공과>는 유치부 1, 2권, 유년부 1, 2, 3권, 초등부 1, 2, 3권, 중등부 1, 2, 3권 등 총 11권이다. 

넷째, 수많은 기독교 관련 도서의 출판이다. 1952년 11월 4일 대한기독교교육협회 사무실에서 열린 제 6회 정기총회에 보고한 사업보고에 따르면 1952년 10월 1일부터 1953년 10월 31일까지 상당히 많은 사역을 감당했지만 가장 활발한 사업은 출판이었다. 8권으로 구성된 기독교교본은 재판 혹은 3판이 인쇄되며 많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56년에 접어들어 커리큘럼, 지도자양성규정, 여름성경학교교본(하기아동성경학교에서 여름성경학교로 명칭변화)이 체계화되었다. 학생들의 신앙을 돕기 위해 대표적인 대광, 경신, 계성, 금성, 영화, 숭실, 수피아, 신흥, 세광, 신명, 삼일, 정신, 신광, 숭의, 배화를 비롯한 각급 기독교 학교 교목들의 설교를 모아 출간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WCC)외 세계기독교교육협회에서 청년부 청년성경지침서로 간행한 <청년성경연구>와 C. H. Dodd의 <성경과 현대>를 출판하였다. 청년들의 교양을 위해 한경직, 유형기, 이명직, 백낙준, 김활란, 김명선의 “한국청년에게 고함”과 안광국, 마경일, 송흥국, 엄요섭, 강신명, 김종휘, 홍현설, 송정률, 김성목, 이원철, 이환신, 김영선의 청년관련 글들을 교양서로 출간하였다. 한국기독교교육사를 정리하기 위해 문헌을 수집하는 일도 병행했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중등부교육>, <현대기독교교육론>, C. H. Dodd의 <Bible Today>, <대한기독교교육협회사>를 간행하였다. 

다섯째, 국제기구, 특별히 세계기독교교육협회와의 교류를 지속한 일이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WCCE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으며 WCCE의 알선으로 기독교교육에 관한 서적 수십권을 발행처로부터 기증 받아” 협회에 비치하였다. 미국기독연합회 외국선교부 극동위원회 협동총무 “멀원” 박사가 1953년 3월 9일부터 4월 16일까지 내한하여 각 연합기관 시찰 때 사무보고를 하고 사업관계를 의논하였다. 1953년 협회는 “비 기독교학교에서 봉직하는 기독교인 교육자와의 공동사업의 추진을 위해 일차 준비회의를 모이고 첫 사업으로 부산대학에서 백낙준 박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UNESCO와 기독교학교 교육’에 관한 강연 및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1955년 7월 송흥국 총무가 7월 6일부터 9일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세계기독교교육협회 제 2회 4년 대회에 참석하였고, 7월 10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유럽지역 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57년 Gerald B. Harvey 박사가 인도 방문을 마치고 재내한했으며, 미국 NCC 외국선교부 한국위원회 총무 Wallace C. Merwin 박사가 9월 30일 내한하여 1주일간 체류하는 동안 10월 4일 머윈 박사와 회동하고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고 밝혔다.

여섯째, 학생들의 종교인구 실태 조사를 실시하였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전국의 각급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들의 종교인 실태 조사를 실시하였다. 1952년 5월 1일 현재 서울 경기도 경상북도 전라북도 등의 각급학원내의 종교인 조사 통계에 따르면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하는 학생 중 기독교인은 83,281명으로 천주교 17,427명, 불교 56,455명, 대종교 3,499명보다 많았고, 유교 138,471명보다는 작았다. 기독교 중에 초등학교는 69,824명(남 36,555명, 여 33,269명)이었고 중고등학교는 11,581명(남 7,200명, 여 4,281명) 그리고 대학생은 1,776명(남 1,158명, 여 618명)이었다. 협회는 실태조사 외에도 1957년 협회 주관으로 가정예배실시여부, 신학생이 헌신하게 된 연령, 불량소년의 범행과 불량화의 원인을 조사하는 한편 일반 신도에 대한 신앙조사를 실시하여 신자의 평균 연령, 가족적인 교인 여부, 주일학교 때부터 믿음, 입신연령, 그리고 예수 믿은 동기에 이르는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일곱째, 방송을 통한 기독교교육의 저변확대를 위해 기독교교육관련 방송을 내보냈다. 1957년 1월 29일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 6시 HLKY를 통해 1957년 5월말까지 엄요섭이 “커리큘럼에 관하여” 3회, 이봉구 엄요섭이 “성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2회, 엄요섭이 “청년부 지도에 대하여” 1회, 송흥국이 “신년멧세이지” 1회, HLKY 회원이 “로니와 십계명” 연극으로 10회, 이봉구 전기주 정석은 엄요섭이 “주교좌담회” 4회, 엄요섭이 “명년도 세계기독교교육대회에 관하여” 1회를 방송하였다.

마지막으로 1957년 3월 28일-4월 2일까지 대한기독교서회 회의실에서 주일학교 용품 전시회를 가졌다. 이것은 1947년 서울시 주교연합회에서 주교전시회를 가진 이후 10년 만에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다. 489점이 출품되었고 23개 교회와 단체가 참여했으며 연인원 820명이 참관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주일학교를 처음부터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삼았고, 교회 개척과 주일학교를 동시에 발전시켜 나갔다. 이런 전통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였고,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도 동일한 전통을 따라 해외선교지에서 주일학교를 처음부터 매우 중요하게 실천에 옮겼다.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은 선교를 착수하면서 교회설립, 학교설립, 주일학교 설립을 중시했다. 

 

 

VII. 1960년대 이후 대한기독교교육협회와 주일학교운동

 

1960년 이후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1959년 WCC 에큐메니칼운동이
교단분열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함에 따라 한국교회는 WCC에 대한 입장과 견해로 둘로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기성은 WCC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교단 안에 일어나면서 교단의 “자체의 화목을 위하여 WCC와 관계 있는 연합기관”에 대표를 파송하지 않기로 하였다. 1962년부터 기성은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 대표를 파송하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대한기독교육협회는 1959년부터 기장에도 예장통합과 나란히 회원 자격을 부여했다. 

1971년 7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세계기독교교육협회(WCCE)가 통합된 것도 변화를 가져다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사실 이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오래전 둘의 통합을 위한 연구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수없이 모임을 가지며 서로 의견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WCC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정체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한기독교교육협회도 그런 방향으로 기독교교육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각 교단의 종교교육부가 각교단의 신학과 형편에 맞추어 커리큘럼 사업, 교육도서 출판, 교사양성에 이르기까지 대한기독교교육협회 사업과 중첩되는 경우가 많이 전체 한국기독교교육과 주일학교운동에서 과거와 다른 양상이 전개되고 말았다. 

이런 복잡한 변천 때문에 1960년대 이후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활동과 주일학교운동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지면관계상 쉽지 않다. 그러나 1960년대 대한기독교교육협회와 주일학교운동과 관련하여 적어도 다섯 가지 사실은 언급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기독교교육전공의 전문 인력의 강화

 

첫째,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전문 학자들이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전과 달리 기독교교육이 전문성을 지니며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김하태, 문동환, 김득렬, 주선애, 은준관, 김득룡이 각 교단의 기독교교육에 적극 참여하면서 기독교교육이 이전에 비해 체계적으로 실시되었다. 1962년 문동환 박사를 중심으로 한국신학대학에 “기독교교육문제연구소”가 개설되어 “교회와 주일학교의 실황은 물론 한국교인들의 신앙형태와 신학교육의 실효 등에 관한 연구 결과”도 발표했고, 감리교신학대학에도 1968년 은준관 박사를 중심으로 기독교교육연구소를 설치하였다. 1971년 기독교장로회, 1972년 감리교신학대학 기독교교육연구소, 1973년 예장통합이 각기 교회교육지침서를 발표했다. 문동환 박사를 중심으로 한 기장의 교회교육지침서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을 한국의 정황에 맞춘 것이고, 감신의 은준관 박사의 글은 세속화되고 과학화되어 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교회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힌 것이고, 주선애 교수의 ‘교육과정지침’은 성서와 생활이라는 부제에 암시하듯 어떻게 성경적인 가치관을 삶 속에 실천할 것인가를 제시한 것이다.

신학자들의 기독교교육에 대한 관심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 관련 학과나 연구소가 신설되는 것은 물론 관련 저널들이 다양하게 출간되었고, 기독교 관련 논고들이 그만큼 많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기독교교육이 단순히 교회에서만 아니라 가정과 학교에서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일어나 관련논고들도 상당히 발표되었다. 신학적 문제와 기독교교육의 상관성은 물론 당시 청소년의 문제를 중심으로 세속화문제와 기독교교육 관계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김관석의 “세속화문제와 기독교교육”은 그 대표적인 논고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이 주제를 “세속화와 대중사회” “대중사회란 무엇인가?” “이유 없는 반항” “아이덴티티의 문제,” “도시와 섹스”라는 부제를 통해 현실적으로 다루었다.  붸붸 앤더슨의 “위기의 직면한 어린이들”은 오늘날의 교사들이 현대 위기에 직면한 어린이들의 문제점과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할 것인지를 다루었다.

 

2. 각 교단의 기독교교육 강화와 단독 공과발행

 

둘째, 1960년 이전에는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구심점이 되어 기독교교육을 주도했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조직들이 형성되어 기독교교육의 방향이 다원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교단 내의 기구가 새로 조직되어 교단 중심의 교회 교육이 강화되면서, 1970년대 이후 어린이전도협회나 파이디온 같은 새로운 주일학교훈련기관이 등장하면서 그런 변화는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1972년 9월에 수원에서 ‘기독교교육의 평가 및 정책협의회’가 4개 교파 대표 50여명이 참석하여 ‘인간해방과 기독교교유의 과제’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였고, 1973년 6월에는 한국기독교협의회 주최로 ‘선교와 교육협의회’가 열렸다. 1972년 9월 모임에서는 선교지 “오늘의 한국에 대하여 좀 더 명확하고도 비판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고 이에 따르는 교회이 선교정책 및 교육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고, 1973년 6월 모임에서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교회교육의 중요성과 의미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주일학교 교육이 신학적 변천에 따라 방향과 교육목적을 재설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3.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변화 노력과 한계

 

셋째, 이런 변화는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1971년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은준관 박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한국에 있는 기독교교육 학자들을 총 망라해서 “오늘의 한국의 정황에 맞는 한국학자들의 손으로 설계된 새 교재” “새계단공과” 작성에 착수했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33년 제 4회 대회 이후로 중단되었던 전국주일학교대회를 명칭을 변경해 1964년 제 5회 전국기독교교육대회를 개최하였고, 1968년에 제 6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기관지 <기독교교육>은 수준 높은 기독교교육관련 논고들을 목회자들과 교사들에게 전달했고, 변화하는 시대에 교사의 역할을 무엇인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통일된 네트워크를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갖지 못했다. 그것은 WCC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한국교회가 양분된데다 각 교단의 교육부가 주일학교공과를 별도로 간행하고 자신들의 신학적 노선에서 주일학교 교육을 실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기 때문이다. 1968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독자적으로 주일학교 교재를 출간하고 3년 후 장로교 역시 통일공과와 계단공과를 간행하고 교사양성교재 역시 별도로 간행하여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게다가 국제적인 변화가 일어나 1971년 세계기독교육협회(WCCE)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합동한 것이다. “신학과 기독교교육의 관계”는 상호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세계주일학교연합회에서 출발한 세계기독교교육협회가 WCC와 합동함으로 예장합동을 비롯한 신앙적으로 복음주의 노선을 따르는 교파들과 교단들은 점차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서 발간하는 통일공과나 계단공과를 사용하지 않고 별도의 주일공과와 교재를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파와 WCC 문제로 통합과 분열된 예장합동, 성결교, 침례교를 비롯한 상당히 많은 복음주의 교단들은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 참여하지 않고 교단적인 차원에서 주일학교교육을 실시했다. 필자가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서 간행한 저널 <기독교교육>을 검토한 결과 필진들은 통합과 같이 중도적인 입장의 학자들도 포함되었지만 대부분이 기장과 기감을 비롯한 진보적인 노선의 교단 학자들로 구성되었고, 복음주의 노선의 교단의 학자들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이것은 1960년 이후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전국적인 조직이기보다 진보주의 교단을 대표하는 연합기관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복음주의 노선의 교단들은 독자적으로 기독교교육을 교단적인 차원에서 진행했다.

 

4.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기관지, <기독교교육> 창간과 보급 

 

넷째,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기독교교육>을 발간하며 전국의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사지로 자리잡기 시작한 일이다. 1961년부터 발간된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뉴스-레터’가 ‘기독교교육’잡지로 발전하여 정기간행물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교육>은 1961년 1월 처음 1호(1월-4월)를 간행하였고, 이어 2호(1961년 5월-8월), 제 3호(1961년 9월-12월), 4호(1962년 1-4월)가 간행된 후 2년 6개월 동안 발간되지 못하다 제 5호(1964년 11월-12월)부터 격월간으로 정기적으로 간행하기 시작했다. 뉴스형태로 간행된 제 1호와 정기간행 격월간으로 간행하기 시작한 제 5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기독교교육>을 1969년부터는 월간지로 변경해 발간했다. 첫 월간지 <기독교교육>을 발간하면서 “국내 유일의 교사지: 전국교사들의 열열한 성원 아래 드디어 1969년 1월부터 월간으로 발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예장통합 총회 교육부 총무 성갑식은 월간발행에 대해 “교사들의 친절한 벗”, 기장 총회 교육부 총무 이창식은 “교사들은 누구나 이 한권을,” 그리고 감리교 총리원 교육국 유영희 장로는 “기독교교육의 대 혁명”이라고 예찬했다. 발행인 한영선은 기독교교육이 계간지에서 격월간지로 이제는 월간지로 바뀐 것에 대해 “격월간으로는 도저히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어 좀더 신속한 보도와 재료 공급을 목적으로 여러 가지 애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9년 1월부터 월간으로 간행키로 결정한 것이다”고 밝혔다. 월간지로 변경된 뒤 신학적인 논고나 학술적인 논고는 줄어들었고, 주일학교와 관련된 실천적인 내용들이 더 강화되었다. ‘기독교교육’을 소개하면서 ‘국내 유일의 교사지’라고 표방한대로 주일학교 교사들을 잡지로 성격전환을 한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교육> 주간 황광은은 1969년 6월호 권두언에서 이렇게 밝혔다. 

 

[1969년] 6월호부터 ‘기독교교육’지는 교사 중심지로 경향을 바꾸었다.… 높은 수준의 교양면에 치중하면 자료제공이 소홀해지고 자료공급에만 신경을 쓰면 수준이 얕다고 깔보게 되는 이런 틈바구니에서 6년을 애태우던 편집위원회는 이번에 단연 교사 중심의 <교사>지로 성격을 굳히기로 했던 것이다. 즉 교사가 사랑하고 교사가 참여하고 교사가 비판하는 교사지로 만들자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자료가 많이 제공될 것이다. 동시에 딱딱한 논문이 덜 실려질 것이다.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거쳐 이제는 생명과 생명이 맞부딪쳐서 불꽃이 튀겨야 할 하나님의 선교의 결론을 기다리는 때여야 한다”고 단언함으로 기독교교육이 추구하는 노선이 당시 WCC가 표방하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방향은 변함없이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지면도 80면 전후로 대폭 줄어들었다.

 

4. 연합정신의 퇴색과 교파주의 강화

 

마지막으로 연합정신이 현저하게 퇴색되었고 전체 한국교회를 하나로 엮을 수 있는 교육철학이나 목적도 찾기 힘들었다. 교파주의가 강하게 발흥했고, 기독교교육이 신학적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신학과 이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도 1960년대 이후 통일된 기독교교육을 실시하지 못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시대적 요청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따라서 다음세대를 양성하여 한국의 미래를 밝게 하자는 사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주일학교가 활성화되었지만 1960년대 이후는 그런 강력한 동력을 찾을 수 없었다. 전문 기독교교육 학자들이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그들 역시 이 시대에 교회가 해야 할 특수한 선교사명을 명확히 제시하면서 이를 위한 확실한 교육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각 교단의 교육지도자들도 “그 교단의 교육활동의 발전에만 급급했지 거국적인 교육문제 타개를 위해서 일치단결하는 정신이 부족”했고, 연합기관도 “과제 중심으로 일을 추진시키기보다도 교파의 이권, 혹은 인사의 교단 안배 등이 더 관심의 초점이 된 경향이 적지 않았다.” 

 

6.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재정압박과 해체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69년 <기독교교육>을 월간지로 전환한 후 40년이 지난 2009년에도 <기독교교육>을 계속 발행하였고, 통일공과와 계단공과를 만들고 전국대회와 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기독교교육 도서를 출판하고 기독교학교 성경교재를 만들어 보급했다. 그 외에도 통신으로 지도자를 양성하고 한일, 한미기독교교육협의도 개최하였다. 2009년 현재 11개 교단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고, 각 교단에서 파송된 총대들이 사업계획을 심의하고 확정하였다. 기독교방송, 대한기독교서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YWCA연합회 등이 회원단체로 있고, 예장통합, 기장, 예장개혁, 기감, 기성, 성공회, 나사렛, 루터교, 구세군, 복음교회, 기하성 등 11개 교단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이들 11개 교단에서 파송한 대표 총대들은 산하 출판사업부, 교회교육부, 재정부, 그리고 교육정책부에 위원으로 참여하여 협회 활동과 사역에 참여한다. 

1922년 11월 창립된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2002년 11월 창립 80주년을 맞았고, 그해 9월 <기독교교육> 지령 400호를 발간했고, 11월 1일에는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창립 8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창립 8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11월 5∼7일 ‘평화교육을 위한 기독교교육’을 주제로 제12회 한·일기독교교육협의회를, 11월 18∼19일까지 경기도 일영에서 교단연합 기독교교육 정책협의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2014년에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2014년 1월 부도를 당했고, “늘어나는 부채 규모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재정 건전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본 기관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가” 봉착해 있음이 발견됐다. 2015년 1월 19일 기독교방송은 “93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교육협회 임원회는 최근 7억 여원의 빚을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협회 해산을 전격 결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협회 총무를 지낸 A 목사가 2012년 당좌수표를 받고 빌려준 5억 5천여만 원을 갚으라고 협회에 요청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여기에 예전부터 누적돼온 직원 인건비와 월간지 인쇄비 등 미지급금 1억 2천 7백여만 원도 변제할 여력이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1년 전 부임한 배 모 총무도 협회를 살리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역부족으로 지난달 사임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협회측은 다음달 3일 열릴 실행위원회와 이어 26일에 열리는 총회에서 채무변제 문제를 다룰 계획이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교육협회의 쇠락은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다. 예장통합과 기독교장로회, 감리회 등 10개 주요 교단의 연합기관이지만, 각 교단 교육부가 성장하고 자체 교육공과 등을 발행하면서 관심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인사의 전횡으로 빚은 쌓여갔고 일부 회원교단들은 협회를 살리려는 노력보다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탈퇴를 통보하기도 했다. 변변한 교재가 없던 시절, '통일 주일공과'와 '계단식 공과' 등을 펴내 교사들을 교육했고 50년이 넘도록 교육전문 월간지 ‘기독교교육’도 발간해온 대한기독교교육협회. 이대로 그냥 문을 닫기보다는 90여년을 역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회원교단들의 지혜가 아쉽다는 목소리가 높다.

 

각 교단이 독자적인 기독교교육을 실시하고 급격하게 주일학교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 누적된 재정적자로 늘어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도가 났고, 한국기독교육협회는 급기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토록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기독교육 연합기관이 너무도 쉽게 문을 닫은 것은 아닌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크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사례는 주일학교와 기독교교육에 대한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WCC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한국교회가 분열하고 대립된 상태에서, 한국교회 전체를 회원으로 혹은 협약을 통해 한국교회 주일학교 전체를 아우르는 연합기관으로 존속하면서 1961년 발간을 시작한 <기독교교육>을 50년이 넘게 계속해서 발간해 온 것만으로도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깊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오랫동안 연합기관으로 존속해오면서도 전체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와 기독교교육을 통합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데는 여러 요인들로 인해 많은 한계를 노정했다. 1960년대 기독교교육의 전문가들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기독교교육을 풍요로운 결실로 이어지지 못하게 한 원인 중의 하나는 그들이 제시한 기독교교육 목적과 방향이 일선 교회가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방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 젊은이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기독교교육은 양극단을 달려온 것이다. 연합기관인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WCC 에큐메니칼운동으로 분열되고, 그나마 각교단이 기독교교육국을 별도로 설치하여 계단공과와 교사훈련을 독자적으로 진행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교육을 통합하는 연합기관으로 활동과 사역반경이 상당히 축소되고 말았다. 

교단의 기독교교육 역시 1960년 이후 진보주의 교단의 기독교교육전문가들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한국의 상황에서 기독교교육의 방법과 방향을 설정하려고 한 나머지 정착 중요한 전통적인 성경적 가치관을 상실함으로 본질적인 성경적 신앙교육에 한계를 노정했다. 반면 보수적인 교단의 기독교교육은 급변하는 시대의 변천을 읽어내지 못하고 시대와 동떨어진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진보적인 교단에서는 기독교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성경적 가치 정립을 강화할 필요가 있고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성경을 중시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읽어내며 그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를 끊임없이 제시할 필요가 있다. 지난 한국의 기독교교육의 역사는 교파주의 벽을 넘어서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는 성경관의 토대 위에 성경적 가치 정립과 그것의 적용과 실천을 통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성장이라는 두 가지 책무 중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훈해준다.

 

 맺는 말

우리는 1884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교회 주일학교운동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한국교회 주일학교운동이 단계적 발전과정을 거쳐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84년 알렌이 입국하여 한국선교가 진행되었고 이어 입국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스크랜톤 여사는 주일학교를 착수하여 실시했지만 주일학교가 하나의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전한 것은 1905년 장로교 4개의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를 결성하고 그 안에 주일학교위원회를 설치하면서였다.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은 주일학교 발전의 기폭제가 되어 주일학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또 한번의 주일학교 발전의 도약은 1919년 삼일운동 이후에 진행되었다. 사회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장로교가 진흥운동을 감리교가 세기운동을 전개하면서 주일학교운동이 사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국교회와 선교회 차원에서 연합으로 추진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일학교연합운동은 한국교회사에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이것은 주일학교 발전의 도약을 가져다 준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래서 기독신보는 1924년 한국교회 발전은 주일학교 발전에 있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1921년 제 1회 전국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그 이듬해 1922년 11월 1일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결성되면서 주일학교운동은 더욱더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주일학교
협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던 한국의 주일학교 지도자들은 도움과 협력을 요청했고 1920년, 1924년, 1928년, 1932년 세계주일학교대회에 대표를 파송하고 세계주일학교
협회에서 간행하는 만국통일공과를 주일학교 교재로 채택하고, 수많은 주일학교 관련 서적들과 잡지들을 간행하여 한국의 주일학교를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국내에서 1921년 제 1회 전국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한 후 1925년 제 2회 대회, 1929년 제 3회 대회, 그리고 1933년 제 4회 대회를 개최하여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하기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여 수많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가졌다. 아희생활을 비롯한 수많은 주일학교 저널들이 복음에 목마르고 교육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청소년들의 갈증을 채워주었다. 성경구락부 역시 주일학교, 하기아동성경학교와 더불어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채널이 되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주일학교운동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식민정책의 강화 속에서 큰 시련을 맞게 되었고, 급기야 감리교의 엡웻청년회, 장로교의 조선면려청년회(CE)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와 더불어 1938년 6월 21일 강제 해체를 당하고 말았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47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재건되면서 한국교회 주일학교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영향력 있는 한경직 목사가 해방 후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한국의 주일학교 운동은 다시 재건되기 시작했다. 1948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개칭되어 단순히 주일학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아니라 기독교학교를 포함한 기독교교육 전반으로 지평을 넓혀간 것은 세계적인 흐름과 국내의 시대적 요청의 흐름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연합운동으로 진행된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59년 예장합동과 통합의 분열, 이어 감리교와 성결교가 분열되면서 연합운동으로서의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위기와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 결과 1960년 이후 한국주일학교운동과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았다. WCC 에큐메니칼운동과 이를 반대하는 NAE측의 분열이 주일학교운동 특별히 전국적인 주일학교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육협회가 여전히 연합운동의 기구로 존속했지만 WCC-WCCE 노선에 따라 ‘하나님의 선교’ 방향에서 기독교학교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이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60년대 변화되는 상황에 맞추어 <기독교교육>을 창간해 처음 계간지로 출발해 격월간지로 다시 월간지로 발전하면서 <기독교교육>이 국내유일의 교사지로 전국의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교육협회는 WCC 에큐메니칼운동의 찬반으로 한국교회가 분열됨으로 말미암아 반쪽만의 연합체로 변화되었고, 그나마 1968년 성결교가 독자적인 주일학교 공과를 출간하고 1972년 예장통합이 그 전철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입지는 상당히 축소되고 말았다. 그 결과 과거 1930년대 한국교회가 가졌던 강력한 ‘조선주일학교연합회’와 같은 위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69년 기관지 <기독교교육>을 국내 유일한 교사지로 탈바꿈시키고 주일학교교사 중심의 연합기관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2015년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는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 관련 사진자료 >

전주지역 최초의 주일학교 학생들(1897년)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평양 주일학교 소녀반 (연도미상)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평양 주일학교 기혼여성반 (연도미상)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1910년 대구 서부교회 주일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1913년 4월 서울에서 열린 조선주일학교대회 모습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1913년 4월 서울에서 열린 조선주일학교대회 모습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1913년 4월 서울에서 열린 조선주일학교대회 모습

*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Digital Galleries

 

1913년 4월 서울에서 열린 조선주일학교대회 모습

*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Digital Galleries

 

1913년 4월 서울에서 열린 조선주일학교대회 모습

*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Digital Galleries

 

1920년 강계 주일학교 학생들과 교사 단체사진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1923년 평양에서 열린 주일학교교사 강습회에 참석한 교사들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1923년 곡산의 주일학교 학생들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1929년 평양에서 열린 제 3회 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한 여자성경학교 졸업생들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성경공부 중인 동대문감리교회 주일학교반 모습(연도미상)

*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Digital Galleries

 

동대문감리교회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모습

*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Digital Galleries

 

1930년 야외 주일학교 모습

*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Digital Galleries

 

강릉의 한 교회의 주일학교 예배 모습

*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Digital Galleries

 

1932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임원 및 직원들
앞줄 좌측부터 총무 정인과 목사, 총무 J. G. 홀드크로프트(허대전) 선교사, 간사 구성서 목사
뒷줄 좌측부터 회계간사 허봉락 장로, 김건호 목사, 박은혜, 박길래, 아희생활 편집 최봉측, 서무 최인화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1933년 제2회 경안노회 주일학교 대회 모습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1933년 제2회 경안노회 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한 여성들과 강사진들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1933년 대구에서 열린 제4회 조선주일학교대회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안동 내성교회 주일학교 야외예배 교사 단체사진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Moffett Korea Collection

 

1936년 평양 서문교회 어머니 주일학교반 모습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주일학교에서 배운 찬양을 통해 전도하는 소녀들(감부열 선교사 작)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1955년 대구 대동교회의 주일학교 오전 성경공부 모습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1958년경 어느 교회의 주일학교 예배 모습

* 미국 Presbyterian History Society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2.03.31 16:51
  • 수정 2022.04.0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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